지중해의 카이사리아 유적지(CAESAREA)
카이사리아는 하이파에서 남쪽으로 약37km 정도 떨어진곳에 위치한 해변가에 세워진 도시
이다. 헤로데가 B.C22-10년경 만든도시이며 당대 건축가들과 조각가들을 동원 12년가에 걸쳐 완공된 계획도시이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 주기 위해 가이사의 이름을 따서 카이사리아
라고 이름을 지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최후 변론을 한 곳으로 수감된 장소이기도 하고, 백부장 고넬료에게 세례를 준 장소로도 유명하다.
헤로데왕이 B.C 20년수중에 시멘트를 방파제로 사용 인공부두를 설치하여 만든도시로, 원형극장, 십자군 성곽, 성곽주변의 해자, 상수도시설, 대중 목욕탕, 해수탕, 빌라도총독 궁전,
헤로데왕 궁전, 궁전 목욕탕, 전차경기장, 주택등, 시내의 모자이크 많은 유적들이 아랍 침공
으로 크게 파손 되었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본디오 빌라도도 이곳에 살았다.
화려한 궁전들과, 공공건물, 시장, 신전, 원형경기장등, 카이사리아는 638년부터 이스람교의
지배에 들어 갔다가 1102년 십자군에이해 탈환, 1252년 프랑스 루이9세는 이도시에 성벽을
싸았으며 뚝을 쌓아 올리고 해자를 둘렀다. 1291년 이집트에 바이네르스에 의해 완전 파괴
되어 이것이 카이사리아의 종말 이었다.
이 도시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해변의 모래 언덕에 파묻혔다. 195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고고학자들은 이 곳 카이사리아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화려했던 이 도시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중 중요한 유물로는 로마시대때 만든 반원형 극장, 루이 9세에 의해 만들어진 성벽은 폭이 9m 되는 해자와 이 해자로 부터9-14m높이 까지 올라가는 경사진 뚝으로 이루어졌다.
날씨도 화창하고 지중해의 서늘한 바람을 쏘이며 즐겁게 카이사리아 유적지를 순례하였다.
필립보의 카이사리아(CAESAREA PHILIPP)(BANIAS)
카이사리아의 필립보는 이스라엘 북동쪽 끝, 요르단에인접하였고,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2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성읍을 파네아스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숭배된 판(PAN)의 이름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로마황제 가이사와 자기이름인" 필립" 을 합하여 " 가이사리아 필립보" 라 불렀으며 베드로가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한(마태 16,13-19) 곳으로도 알려졌다.
지금의 이름 바니아스는 희랍의 신인 판의 신전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희랍어 "파네아스"
라고 하는 말이 변음 된 것이다.
이곳은 헤로데왕의 의해 아름다운 도시로 꾸며졌으며 그의 아들 필립에 의해 카이사리아로
명명되었다.
바니아스는 웅대한 암벽과 펑펑 쏫아지는 동굴안에 지하수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텔단(TEL DAN) 에서 동쪽으로 10km 위치한 바니아스는 요르단 강의 3대 수원인, 단, 바니아스, 스닐중 의 하나이다. 이 곳은 "나호르 헤르몬" 또는 헬르몬강이라고 불리는데 요르단강으로 흐르는 원천 가운데 두번째로 큰 원천이다.맑고 깨끗한 물이 넘쳐 흐르는 폭포수는 이 곳을 찾아오는 이들의 더위를 말끔히 씻어주어 시원 스럽게 맞이 해준다.
이근처 지방에서 여러 기적을 행하시고 제자들에게 사랑을 쏟으셨던 예수님을 떠 올릴수 있는 이곳은 성경에서 필립보의 카이사리아로 표현된다.
기원전 2150-1200년 사이 가나안 시대에는 이곳의 자연 동굴에 신전을 꾸미고 자기들의
자연신인 바알신을 섬겼다. 자연신을 예배하는 성소의 역활을 했기에 이곳에는 여러개의
동굴과 암벽에그려진 여러가지 상징 들이 남아 있다.
기원전 332-63년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인은 들은 바알신 대신에 자신들의 목양신인 판
(PAN)신을 이곳에서 섬겼다. 그래서 이 곳을 판신의 이름을 본따서 "파네아스" 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는 이 곳을 "바니아스" 라고 부른다.
그후 기원전 20년경에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를 헤르몬산 남쪽에 있는 이 일대를 헤로데왕에게 선사하였고 헤로데왕은 감사의 뜻으로 동굴 옆에 신전을 세워 로마에게 바쳤다.
기원전 4년에 헤로데왕이 죽고 왕국이 아들에게 분배될때 지금의 바니아스 지역은 필립보의영토에 속하게 되었다.
헤로데와 클레오파트라사이에 태어난 필립보는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4년까지 갈릴레아 북쪽지방의 영주였다. 기원전2년 필립보는 이 도시를 확장하여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황제
에게 기증한다는 뜻으로 "카이사리아" 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중해변에 헤로데왕이 건설한 로마 총독 주둔도시 카이사리아와 구분하여 자신의 이름을 덧 붙여 "필립보의 카이사리아"라고 했다.
허물어진 신전에는 아직도 신전을 세울 당시의 흔적을 보여주는 돌들이 흩어져 있으며 유적을
통해 카이사리아도시와 아크리빠2세가 이곳을 지배할 당시 궁전의 모습도 조금 엿볼 수 있다. 아그리빠 2세(기원후 53-94)는 이 도시를 더욱 넓혀 네로황제에게 충성하는 뜻으로 " 필립보의 카이사리아 네로"라고 개명하기도 했다. 유다인들에 대한 로마인들의 박해가 심할 무렵 유대교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북부 갈리레아지방으로 피신하였기 때문이다.
텔 단(TEL DAN)
단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북쪽 경계도시로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국가 경계에 있으며 단 지파가 정착한 이후 단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단 지파는 원래 아얄론 평야를 중심으로 한 쉐펠라와 지중해 연안지역을 분배 받았지만(여호 19, 40-46) 이미 그곳에 정착해 있던 불레셋민족
에 밀려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가나안 전통도시였던 라이스를 정복한
도시 이름을 자신들의 지파 의 이름을 따 "단" 이라고 개명하였다.
성경에서 단은 남북왕국이 분열된후 여로보암에 의해 금송아지를 숭배하던 장소로 부각되어
있다. 또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왕시대에는 시리아의 베하닷왕이 단을 침공하여 파괴 시키기
도 하였다.(1 열왕 15,12) 현재 겉으로 들어난 단의 유적 대부분은 여로보암이후 이스라엘 시대에 건설딘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웅장한 규모의 성문과 성벽그리고 제단터 장소를 들수 있다.
헬몬산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강을 이루며 텔단까지 흘러오고 있다.여기서 흐르는 물은
이스라엘의 대부분도시로 공급되며 요단강으로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