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돋보기 - 드라마와 한국사회] 텔레비전 드라마의 폐해
이영아
‘어릴 적’ 내 꿈은 텔레비전 드라마 작가였다. 국문과 대학원을 진학한 뒤에도 드라마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열정이 쉽사리 식지 않아서 방송작가 교육원에서 2년 동안 드라마 작가 교육을 받았다. 교육원 첫 수업에서 담당 선생님은 이런 얘기를 하셨다. 이곳 연수생의 대부분은 드라마 작가가 되지 못하고 그저 ‘고급 시청자’로 남게 될 거라고. 그렇다. 나 역시 결국 ‘고급 시청자’로 남은, ‘재능 부족한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었다.
‘드라마 마니아’의 드라마 딴지 걸기
나 자신에 대한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부터 꺼내는 이유는 이 ‘텔레비전 드라마의 폐해’에 대한 글이 문학연구자로서 드라마를 폄하한다거나 방외인적 태도를 견지하며 쓴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드라마를 좋아한다. 드라마 보기를 즐겨 하고, 좋은 드라마를 보면 흥분하고, 개인 블로그에 드라마에 대한 평문을 끼적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요즘의 드라마를 보면서 느끼는 안타까움이나 답답함이 적지 않다. 번번이 반복되는 권선징악의 스토리나 고부간의 갈등 플롯, 사건의 개연성 부족, 불륜 코드의 남발, 재벌과의 사랑 이야기라는 비현실성 등은 사실 기존의 드라마 비판론들에서 이미 거론된 것들이라 재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처럼 겉으로도 분명히 드러난 드라마의 취약점은 생각보다 위험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청자들도 그러한 사실을 쉽게 인지할 수 있으며, 무엇이 ‘정답’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보다 좀 더 내밀한 차원의 드라마의 문제점들을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곧 드라마에서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문제없는’ 요소들로 여기는 것에도 그 심층에는 부적절한 이데올로기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시청자들의 공정한 비판력을 흐려 장기적으로는 한국사회에 더 많은 해악을 끼칠 수 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
첫 번째는 모든 갈등의 원인을 여성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고부간의 문제, 삼각관계의 남녀, 계모와 자녀 등 여성들 사이에 반목과 갈등을 다룬 드라마들에서 대립과 경쟁의 책임은 늘 여성들에게 주어진다. 그런데 사실 그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된 데에는 그 중간에 끼어있는 아버지, 아들, 남편, 남자친구들의 책임도 막대하다. 이들 남성의 판단력, 정보력, 도덕성의 부족으로 그의 주변에 있는 여성들이 고통과 상처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내의 유혹’(2008년)에서 아내(장서희 분)와 어머니(금보라 분) 사이에서 남편(변우민 분)은 공정한 태도를 취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불합리한 며느리 구박에 남편은 방관하거나 오히려 어머니와 한패가 되어 아내를 핍박한다. ‘옥탑방 왕세자’(2012년)에서 왕세자(박유천 분)는 세자빈의 환생인 홍세나(정유미 분)의 말은 쉽게 믿는 반면 그녀의 동생이자 연적인 박하(한지민 분)에 대해서는 자주 오해한다.
물론 드라마의 권선징악의 구조상 이러한 갈등과 오해는 종국에 가서는 착한 주인공이 억울한 누명을 벗고 행복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대부분의 드라마 내용을 채우는 것은 그러한 결말보다는 악한 여성이 착한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과정이다.
찬찬히 살펴보자. 착한 여성을 괴롭히는 존재가 악한 여성 ‘만’인가? 오히려 여성 주인공의 앤태거니스트(대립인물)는 그저 자신의 역할을 다했을 뿐이다. 경쟁관계에서 승리하려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본능적 행동이다. 그런데 이 경쟁에 대해 심판할 수 있는 주체는 여성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끼어있는 남성들로 그려진다. 악한 여성들이 직접 착한 여성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여성이 남성들로 하여금 착한 여성을 오해해서 그녀를 처벌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남성들이 선과 악에 대한 판단력이 정확하고, 음모와 술수에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면 여성 주인공들이 억울할 일은 별로 없다. 그런데 남성들이 잘못된 판단을 내려 착한 여성 쪽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리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곧 이들 사이의 경쟁에서 ‘진실’을 파악하는 눈이 흐린 남성들 때문에 여성 주인공은 번번이 억울하게 경쟁에서 패배하고 고통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모자란’ 남성들에게는 그다지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지 않는다. 나쁜 것은 오로지 음해하려 한 악한 여성들뿐인 듯 그려진다. 그래서 결국 진실이 밝혀져 누명을 벗더라도 처벌받는 것은 악한 여성들뿐이고, 둘 사이에서 공정하게 행동하지 못한 남성들은, 오히려 뒤늦게나마 제대로 된 판정을 내렸다는 것만으로 착한 여주인공과 함께 ‘해피한 엔딩’의 주인공으로 남는다.
이러한 구조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잘못된 신화를 끊임없이 재생산해 낸다. 정말 여자의 적이 여자여서 일어나는 일인가? 누구에게나 경쟁자와 적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물론 그 경쟁관계에서 비열한 수법으로 자신의 승리를 도모하는 자들 역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경쟁과 대립을 공정한 기준에 의해 조절해 줄 수 있는 질서와 원칙이 마련되어 있느냐이다. 그게 사회 아닌가. 그 질서와 원칙이 있어야 사회에서 악행, 부도덕, 무질서가 사라질 수 있다. 사회에서 입법, 사법, 행정이 중요한 이유도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드라마들은 사실 악한 여성들이 계속해서 악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방조한 것, 둘 사이의 경쟁을 극단적인 지점으로까지 몰고 간 것에 대한 남성 측의 책임도 엄중하게 물었어야 한다. 결국 이러한 드라마들은 여성들 사이의 반목을 조장하고, 막상 그러한 경쟁과 갈등의 근본원인이 되는(남성이 심판자인) 불평등한 사회구조, 공정하지 못한 사회체제 등에 대한 문제제기는 원천봉쇄해 버린다는 점에서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폭력이 사랑일 수 있는가?
두 번째로 ‘(성)폭력’을 미화하는 점이다. 남녀 간의 사랑을 주로 다루는 트렌디 드라마들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 ‘나쁜 남자’ 캐릭터이다. 주인공 남성들은 멋진 외모와 화려한 ‘스펙’을 가졌지만 차갑고 거칠고 오만하다.
그런데 이러한 남성들에게 여성 주인공은 차츰 사랑을 느낀다. 분명 둘 사이에 감정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남성 주인공이 여성 주인공에게 강제적인 성적 행동이나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또한 사랑을 확인했다 하더라도 감정의 확신과 성적, 폭력적 행동의 허용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이 두 가지를 자주 혼동한다.
예를 들어 이른바 여성 대중들의 ‘현빈앓이’를 불러일으킨 ‘시크릿 가든’(2010년)과 같은 드라마에서 김주원(현빈 분)은 자신의 감정을 받아주지 않는 길라임(하지원 분)에게 무작정 ‘들이댄다.’ 날마다 그녀가 일하는 곳에 찾아오고, 그녀가 다른 남성들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 불같이 화를 내고, 그녀의 거부하는 태도에 화를 내다 급기야 그녀에게 강제로 키스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남성들의 폭력적 행동은 그들을 사랑하는 여성 주인공의 관용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오히려 처음에는 거칠게 거부하는 듯하다 결국에는 그들에 호응하는 모습을 통해 ‘폭력적이어도 사랑이면 된다.’ 또는 ‘나쁜 남자여도 잘생기고 잘났으면 용서한다.’는 매우 위험한 발상을 사회에 유포한다.
사랑에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이 개입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치정 폭력 사건들이 늘어날 뿐 아니라 살해, 방화 등 점점 강력 범죄화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연인관계의 성폭력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한국여성의전화’ 상담 건수에서 데이트나 치정 폭력이 차지하는 비중도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나쁜 남자’ 캐릭터에 익숙해진 대중들로서는 사랑과 폭력의 구분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혼란은 남성 쪽에서도 여성 쪽에서도 발생한다. “널 너무 사랑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속아 폭력을 사랑으로 착각한다거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여자 없다.’와 같은 미신도 존속하는 것이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다?
마지막으로 ‘계급의 세습’을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드라마에서 재벌 2세가 등장하는 경우는 너무도 많아 일일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재벌 2세와 ‘재투성이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는 것은 비현실적이기는 하나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보인다. 이미 ‘춘향전’이 그랬듯 인간의 상승욕망, 상류층에 대한 동경은 그런 드라마들이 아니더라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한국인들은 그와 같이 결혼이나 사랑에 의해 자신이 갑자기 계급상승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개천에서 용난다.’ 식의 스스로의 노력에 따른 계급상승도 불가능해지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이다. 상류층의 철저한 ‘그들만의 리그’, 재력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해진 사회구조는 현재의 계급 분화를 고착화시키고 있다. 그런 만큼 결혼으로 가난한 집의 평범한 딸이 재벌 2세의 아내가 될 가능성은 희박해졌고, 대중들은 드라마와 현실을 혼동하지도 않는다.
요즘 드라마에서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계급을 세습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데 있다. ‘신들의 만찬’(2012년)이나 ‘제빵왕 김탁구’(2010년), ‘웃어라 동해야’(2010년)와 같은 드라마들은 주인공이 재벌이거나 명장의 자녀들인데, 어릴 적 사고로 부모와 헤어지게 된다. 드라마 내용은 이들이 다시 부모를 만나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다.
그런데 이러한 드라마들에는 부모와 주인공들이 헤어져있던 시간 동안 부모들의 곁을 지켰던 인물들이 존재한다. ‘신들의 만찬’에서는 진짜 인주(성유리 분)를 대신한 가짜 인주(서현진 분)가, ‘제빵왕 김탁구’에서는 구일중(전광렬 분)이 아내 아닌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윤시윤 분) 대신에 아내와 다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의붓아들(주원 분)이 있었다. 그들은 잃어버린 자식들 몫 이상으로 주인공의 부모들에게 헌신해 왔으며 그런 만큼 재벌 또는 명장의 후계자로서의 자격도 충분히 갖췄다.
하지만 어느 날 잃어버렸던 자식들이 나타나고, 부모들보다 먼저 이들의 정체를 알아본 이 ‘대리 자식’들이 이들의 존재를 감추려고 온갖 공작과 악행을 꾸민다. 그럼에도 부모 자식 간의 상봉은 마침내 이루어지고 그동안 악행을 일삼은 인물들은 처벌받는다.
이러한 드라마들을 보며 대중들은 어서 부모 자식 간의 상봉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악역들에 의해 받는 핍박과 고통을 안타까워한다. 그런 만큼 악역들에 대한 대중들의 미움은 커져가고, 못된 그들이 몰락하기만을 바란다. 따라서 되찾은 착한 친자녀에게 자신의 재산과 지위를 물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스토리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은근 불쾌하다. 결국 이러한 드라마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자기 노력으로 어떤 지위에 오르려 해봤자 타고난 신분의 벽을 뛰어넘을 수는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평생을 ‘주인님(재벌, 명장)’의 눈에 들어보려 아등바등 살아봐야 별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은 ‘천박함’, ‘나쁜 심성’을 타고난 존재들이기 때문에 몰락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버려졌어도 언제나 밝고 착하게 자라난 ‘좋은 핏줄’의 주인공은 원래의 자리를 되찾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곧 드라마들은 ‘유전’과 ‘환경’ 가운데 언제나 전자가 훨씬 중요하며, 좋은 유전자를 가진 인물이 결국 옳다고 말한다. 따라서 핏줄로 이어진 계급의 세습은 정당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를 현 사회에 대입한다고 생각해 보자. 재벌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재산을 불법 증여하는 일도 정당한 것인가? 재벌의 자녀들은 늘 착하고 바른가? 그럴 리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드라마들의 구조에 익숙해진 대중에게는 계급의 세습에서 별 문제의식을 발견하지 못한다. 실제 재벌 2세들의 일상이나 패션이 신문이나 방송에까지 나오며 ‘유명인사’로서의 입지를 굳혀갈 때, 대중들이 그러한 기사를 보며 그들을 선망할 때, 신분 세습에 대한 사회의 비판력은 감퇴되어 가는 것이다.
나오며
이 밖에도 드라마들의 문제점은 많지만, 현재의 한국사회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요소들이 아닌가 한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들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고, 사회정의에 대한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러한 면면들은 드라마들에서 하루빨리 사라졌으면 한다.
아니 그보다 더 바라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들을 예리하게 통찰하게 만들고, 사회의 정의에 대해 정확한 기준을 마련해 줄 수 있는 드라마들이 더 많이 양산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점에서 간혹 ‘좋은 드라마’들도 있다. 예전 ‘가문의 영광’(2008년)이라는 드라마는 핏줄로 얽힌 가족이 아님에도 더 진한 가족애로 서로를 보듬어주고, 재벌이 자신들의 재산을 개인의 것이 아니라 기업의 모든 사원과 이 기업이 성장할 수 있게 해준 사회의 것으로 되돌리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네 멋대로 해라’(2002년)는 삼각관계의 여성들이 한 남성을 두고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심지어 점점 좋아하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세상에는 그처럼 ‘다른’ 발상, 더 좋은 가치관을 보여주는 드라마들도 가능하다. 앞으로의 드라마들에서도 이러한 것들을 좀 더 자주 발견할 수 있기를, ‘드라마 마니아’로서 간절히 바란다.
이영아 -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 연구원 등을 지냈다. 지금은 명지대학교 인문교양학부 조교수로 있다. 근대의 몸, 여성, 인종, 죽음 등에 관한 담론과 문화 연구에 대한 관심으로 「육체의 탄생」(2008년), 「예쁜 여자 만들기」(2011년) 등의 책과 논문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