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계천 다리 밟기 : 3월 7일 답사 안내문(1)
◈ 청계천 다리 밟기
전통사회에서 다리는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서울사람들의 생활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땅한 공공장소가 없었던 시절, 다리는 약속과 모임의 장소였고, 길 가던 사람들이 쉬어 가는 쉼터이기도 하였다.
다리가 있음으로 인하여 동네 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부근 동네 이름을 따서 다리에 붙이기도 하였다. 다리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놀이가 생겨났으며, 웃음과 지혜가 담겨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도성의 다른 곳에 놓여 있던 다리보다 비교적 크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며, 청계천의 중요한 문화유산이었다.
현재 청계천에는 서울시가 2005년에 청계천을 복원할 때 가설한 22개의 다리가 놓여있다.
❶ 모전교(毛廛橋) : 종로구 서린동 11번지〜중구 무교동 14번지
- 과일가게인 모전 근처의 다리라고 하여 붙인 명칭
모전(毛廛)은 각종 과일을 파는 가게를 말하는데, 큰 길 모퉁이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조선시대에 이 다리 근처에 모전이 있었으므로 모전교가 되었다. 이외에도 ‘모교(毛橋)’로도 불렸고, 가게가 길 모퉁이에 있다 하여 모퉁이 가게다리, 또는 한자식으로 우교(隅廛)라고도 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에 조선총독부에서 태평로~무교동 사거리까지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이 다리를 없애버렸다. 2005년에 서울시가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현재 자리에 새 교량을 세우고, 옛 다리의 이름을 따서 모전교라고 정했다.
➋ 광통교(廣通橋) : 종로구 청계천로 35(서린동)〜중구 청계천로 30 (다동)
- 청계천 다리 중 가장 규모가 큰 다리로 '광통방(廣通坊)의 다리(橋)'란 뜻.
광교 아래로 지나가다 보면 광통교 돌다리나 벽돌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돌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정동 정릉에 있던 석물들이다. 그나마도 제대로 놓은 게 아니라 아예 뒤집어서 쌓았다.
신덕왕후 신씨에 대한 태종의 반감을 조선왕조가 멸망한 오늘날까지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다. 건원릉 석물에서와 같은 구름에 휩싸인 도사나 스님이 들고 다니는 금강저, 태극 문양 등이 새겨져 있어서 성리학이 집대성되기 이전에 조선 초까지 신봉했던 도교, 불교 문화의 잔재를 느낄 수 있다.
이 다리는 복원한 청계천 너비와 광통교 길이가 맞지 않아서, 원래 자리에서 상류쪽에 복원하고, 광통교 남쪽에 다리를 덧대었다. 이 덧댄 교량 밑으로 청계천 물이 흘러가므로, 원래 광통교 밑바닥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돌이 깔려 있다.
※ 1994년 초에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에서 옛 광통교 자리(현재 광교 자리)의 본사 사옥 옆에 1/4로 축소한 광통교 모형을 만들어 설치한 것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도성 사람들은 답교놀이를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에 광통교가 소광통교․수표교와 함께 답교(踏橋)놀이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였다. 특히 광통교는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도성의 양반, 중인, 상민, 부녀자 등의 많은 남녀가 이곳에 모여 답교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보름날 밤 답교놀이는 고려조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되어있다. 태평할 때에는 답교놀이가 매우 성하여 남녀들이 줄을 이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으므로 법관들이 금해서 체포까지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풍속에는 부녀자들이 다시 다리를 밟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유득공(柳得恭)이 기술한 『경도잡지(京都雜誌)』를 보면 고려 때에도 있었던 답교놀이는 서울지방, 특히 광통교와 수표교에서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경지략』에는 답교놀이는 한국의 대표적인 집단놀이로 원래 중국 연경(燕京)의 풍속이며, 우리나라는 조선 초 중종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정월 대보름날 밤 종루의 통행금지를 알리는 보신각 인경소리에 맞추어 열두 다리를 지나다니면 그 해 열두 달 내내 다리가 아프지 않고 액(厄)도 면한다는 유감주술(類感呪術)을 믿었다. 이 날 밤에는 여인들도 답교놀이를 하기 위해 청계천 다리로 몰려들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남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조선 말에 씌어진 『동국여지비고』에 보면 서울 8곳의 뛰어난 경치인 국도팔영(國都八詠) 중 ‘통교제월(通橋霽月)’ 즉 ‘광통교에서 보는 비 개인 후의 맑은 달’을 꼽았으므로 광통교가 그만큼 유명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광통교에 관한 속담으로 ‘광통교 선사(禪師)의 점(占)’이 있다. 조선 초에 점쟁이로 유명한 늙은 소경[선사] 김을부(金乙富)가 광통교 다릿목에 살았는데 그의 점이 잘 맞지 않았으므로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점괘를 반대로 해석하였다는 것이다.
이 날 도성 안의 처녀들은 자기 저고리의 옷고름을 몰래 떼어서 청계천에 내버렸다. 이는 자기 몸에 있는 액(厄)을 옷고름에 담아 없애겠다는 액막이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날 12개 다리를 건넌다는 것은 ‘주백병(走百病)’이라는 말과 같이 100가지 병을 물리치고 건강하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정월 대보름에 답교놀이가 사람들로 붐비자 양반들은 14일 밤에, 부녀자들은 16일 밤에 다리 밟기를 하였다. 최남선(崔南善)의 『조선상식』풍속편 답교조(踏橋條)에 보면
「정월 대보름날 밤의 놀이 중 성행되었던 것은 연등놀이다. 그러나 조선왕조, 특히 태종 이후에는 연등놀이 대신 다리 밟기가 이 날 밤에 성행하였는데 특히 서울에서 더 했다.
장안의 남녀들이 종가로 모여들어 보신각의 저녁 종소리를 듣고 나서 각 곳에 있는 다리로 흩어져 가서 밤새도록 다리 위를 왔다 갔다 하였다. 서로들 어깨와 허리가 부딪힐 정도로 붐비면서 날라리와 장구를 울리고 시를 읊기도 하며 물에 비친 달을 보며 1년 동안에 좋은 일이 있길 빌었다.
상류층 사람들은 서민들이 붐비는 15일 밤을 피하여 그 전 날인 14일 밤에 다리 밟기를 하였다. 이를 가리켜 ‘양반답교’라 하였다. 부녀자들은 14 · 15일을 피하여 16일 밤에 행하였다. 조선 중엽 이후에는 부녀자의 문 밖 출입을 심하게 단속했으므로 부녀자들의 다리 밟기는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라고 소개하였다.
➌ 광교(廣橋) : 중구 남대문로 1가 (광통교 터)
- 광통교의 준말인 광교
청계천 복원 공사 때 교통 문제로 인해 원래 광통교 자리에 새로 지은 다리이다. 광교는 광통교의 준말이다.
이 다리의 공사는 대림산업과 삼성건설이 맡았으며, 2005년 9월 30일에 준공되었다. 북쪽으로 우정국로, 남쪽으로 남대문로와 이어진다
➍ 장통교(長通橋) : 종로구 종로 12길 (관철동)~ 중구 남대문로 10길 (삼각동)
- 장통교(廣通橋)는 장통방(長通坊)의 다리라는 의미.
‘장통(長通)’의 뜻은 ‘길게(長) 통한다(通)’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청계천 본류와 남산 기슭에서 흘러오는 물줄기와 합쳐졌던 곳이 장통방 언저리였다. 여기서 큰 물줄기가 되어 길게 이어진다는 뜻의 ‘장통’이 동명과 다리 이름에 붙은 것이다.
장통교는 ‘장교(長橋)’를 비롯하여 ‘장창교(長倉橋)’, ‘장찻골다리’, ‘장추교(長楸橋)’, ‘장추골다리’란 이름으로도 불렸다. 장창교와 장찻골다리는 장통교 주변에 재래시장의 창고들이 길게 늘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은 주로 장교라고 많이 불렀다.
또한 『동국여지비고』에는 청계천의 너비가 “상류 송기교~장통교에선 10여 보(약 12.5m)에 불과하지만 장통교~태평교 사이에선 20여 보(약 24.9m)로 넓어진다”고 하였으니, 장통교를 지나면서 청계천이 비로소
하천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이에 따라 옆에 있던 광통교보다 긴 이 다리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장교’ 또는 ‘장통교’로 굳혀진 것이다.
조선시대의 장통교 남쪽의 장교동 일대와 북쪽의 관철동 일대는 지금도 많은 상가들이 즐비하게 있다. 이 일대는 일찍부터 한양도성 안의 상업 중심지가 되어 갓전 · 관자전(貫子廛) · 소금전 · 신전을 비롯해서 모자 · 양털 · 베를 파는 청포전(靑布廛) · 모시전 등이 있어서 시전상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그리고 역관・의관・천문관 외에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사무를 맡아 보던 경주인(京主人)들의 본거지여서 사람들의 왕래로 바쁜 지역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노론 세도가들이 몰려 살던 ‘북촌’이나 퇴락한 딸깍발이들이 몰려 살던 ‘남촌’과 구별하여 ‘중촌’이라고 불렀다.
➎ 삼일교(三一橋) : 종로구 삼일대로(관철동)~중구 삼일대로(장교동)
- 1966년에 탑골공원의 서쪽 도로 이름이 삼일로이므로, 다리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
1919년 탑골공원에서 3.1 운동이 시작되었기에 이를 기념하는 뜻으로 1966년에 탑골공원의 서쪽 도로 이름을 삼일로라 하였으므로 다리 이름도 이를 따서 정해졌다. 삼일로는 2010년 4월 22일 현재의 이름인 삼일대로로 바뀌었다
➏ 수표교(水標橋) : 종로구 관수동 (수표교지)
- 청계천의 수량을 측정하던 수표가 위치하여 서울의 홍수에 대비하던 다리.
조선 초 1406년(태종 6년)에 처음 세워졌다. 이 때 청계천을 파고, 그 위에 세운 7개의 다리 중의 하나로 그 중 현재는 수표교만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보신각 종소리를 듣고, 백성들이
광통교와 수표교 등의 다리를 밟는 '답교놀이'를 했다. 그러면 1년 내내 다리가 건강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수표교 창건 당시에는 나무로 만들었으며, 이름은 근처에 있는 마전(馬廛)을 딴 ‘마전교(馬廛橋)’였으나 1441년(세종 23년)에 청계천의 수위 측정을 위한 기둥인 수표(水標)를 다리 서쪽에 세운 이후부터 ‘수표교(水標橋)’로 불렸다.
이 다리가 언제 돌다리로 바뀌었는지는 모르나 《성종실록》의 기사를 보아 1493년(성종 24년) 9월 이전에는 이미 돌로 개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개축하여, 수표교의 서쪽 귀틀석 일부에 ‘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 ‘丁亥改築(정해개축)’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는 ‘무자년에 금영에서 고쳐 지었다.’ ‘정해년에 고쳐세웠다는 뜻’이다. 조선말 고종 때 이 다리를 개축하면서 난간을 새로 세웠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이 다리는 북악산 밑의 신영동으로 이전되었다가 1965년에 장충단공원 안의 남소문동천으로 다시 옮겨져 현재에 이른다. 다리와 같이 수표도 옮겼으나 1973년에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수표가 이전되어 지금에 이른다.
2005년 청계천 복원 공사 때 서울시에서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를 원 위치에 옮겨 지으려 했으나 새 청계천의 폭과 맞지 않아 무산되었다. 현재 청게천 본래 자리에는 수표교를 본 딴 임시 목제 다리를 놓고 수표교로 칭한다. 임시로 설치한 수표교 위치는 수표로와 연결되지 않아 이용하는 데에 불편하다.
광통교와 수표교에 얽힌 민속놀이로 정월 대보름날 밤 서울사람들이 밤을 새워 즐긴 놀이로 답교놀이가 있다. 정월 대보름 전의 2~3일은 이 수표교를 중심으로 청계천 아래 위에서 연날리기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이 때 어린아이는 연을 바람 부는 방향으로 날리면서 ‘고고매(苦苦妹)’라고 불렀다. 고고매는 몽골말로 봉황이라는 뜻이다.
수표교를 중심으로 한 청계천 위쪽과 아래쪽에서는 연싸움이 벌어져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연싸움하는 날이면 서울 시전상인들도 가게 문을 닫고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이 다리는 저동2가에 조선 역대 국왕의 영정을 모셨던 영희전(永禧殿 : 현 중부경찰서 자리)이 위치하였으므로 국왕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거둥행렬이 잦았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수표교 밑에서는 여름 장마철에 벌거숭이 소년들이 횃불을 들고, 물놀이를 겸한 송사리 잡기로 유명하였다. 일제 때인 1941년에 최인규 감독이 제작한 「집 없는 천사」는 이 다리 밑에 사는 걸인 아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 ◈ 청계천 다리 밟기 : 3월 7일 답사 안내문(2)는 다음 날에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