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 다시스로 도망함 - 사명을 피해 도망갈 수 없는 하나님의 추격
본문: 요나서 1장 3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우리 삶의 다시스와 도망치는 마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믿음의 동역자 여러분,
오늘 우리는 참으로 무겁지만 우리 영혼 등을 깨우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참 하기 싫은 일들을 마주할 때가 많습니다.
꼭 해야 하는 전화인데 자꾸만 미루게 되고, 먼저 사과해야 마땅한데 슬며시 자리를 피하기도 합니다.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면서도, 몸은 자꾸만 다른 길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당면한 문제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피하고 싶어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가기 싫은 아이가 아침마다 배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직장 생활에 지친 이들이 출근길을 회피할 구실을 찾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내 삶에 부담으로 다가올 때 교묘하게 다른 길을 탐색하곤 합니다.
고대 로마 시대의 지도 제작자들은, 자신들이 아직 탐험하지 못해서 잘 알지 못하는 바다의 바깥쪽 끝에다가 이렇게 적어두었다고 합니다.
“이곳 너머에는 괴물이 산다.” 인간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
즉 내 생각과 계획을 벗어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영역을 마주할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는 자기만의 성벽 안으로 숨어버립니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 요나가 정확히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원수의 땅,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자마자 일어났지만,
그 발걸음은 니느웨가 아니라 정확히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에서 동쪽으로 가야 하는 곳이었고, 다시스는 서쪽 끝, 즉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세상의 끝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선지의 변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거부한, 아주 의도적이고 계산된 도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짜 놀라운 영적 진실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도망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도망치는 종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추격해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요나의 모습을 거울삼아, 우리 삶의 도망을 멈추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고와 그 속에 담긴 절절한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사명을 거부하는 것은 내 뜻을 앞세운 불순종입니다
성경 본문: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기서 성경은 요나가 "피하려고 도망하려 하여"라고 기록합니다.
'도망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는 '바라흐'(בָּרַח)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길을 잃었다거나 어쩌다 보니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추격자가 있는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상대방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행위를 뜻합니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온 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왜 그토록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도망치려 했을까요?
당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니느웨는 북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침략하고 잔인하게 고문하며 괴롭히던 원수 중의 원수,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역사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앗수르 사람들은 포로들의 살가죽을 벗겨 성벽에 붙일 정도로 잔혹한 민족이었습니다.
요나의 민족주의적 시각과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니느웨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동네였습니다.
오히려 불을 맞아 당장 멸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나서 4장 2절을 보면 요나가 직접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자신이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했다가,
그 악독한 원수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될까 봐 그 꼴이 보기 싫어서 도망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넘어지는 지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계획, 나의 감정, 나의 편견을 더 앞세웁니다.
최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내가 저 사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내 커리어와 내 비즈니스에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지금은 따를 수 없어"라며 교묘하게 내 생각에 맞는 사역과 내 마음에 드는 순종만을 골라서 선택합니다.
겉으로는 예배를 드리고 사역을 하는 것 같지만,
내 깊은 내면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 판단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내 생각에 맞는 것만 골라서 따르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종의 모양을 한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이자 불순종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명의 자리, 내 자존심을 꺾어야 하는 순종의 명령 앞에서 요나처럼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편견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의 대상을 제한했던 죄를 이 시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중, 내 감정과 이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라흐(도망)'하고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대면하고,
내 판단을 내려놓기로 결단하십시오.
요약: 사명을 거부하는 것은 내 생각과 편견을 하나님의 주권보다 위에 두는 명백한 불순종입니다.
2. 공간을 바꾸어도 하나님의 시선은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성경 본문: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욥바로 내려갔더니" (요나서 1장 3절 중반부)
본문은 요나가 도망친 목적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바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입니다. 여
기서 '얼굴'을 뜻하는 히브리어 원어는 '파님'(פָּנִים)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파님'은 단순한 신체 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 하나님의 불꽃 같은 시선, 그리고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치를 의미합니다.
즉,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리겠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예루살렘과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착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영토를 벗어나 저 멀리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면,
하나님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편 139편 8절).
요나는 배를 타고 안전하게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타고 있는 그 바다를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요나는 배 밑창 깊은 곳에 들어가 눈을 감고 잠을 청하며 숨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어둠 속에서도 요나의 숨소리 하나까지 다 보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현대적인 '배 밑창'에 숨어 들어갑니다.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성도의 옷을 입고 있지만,
교회의 문을 나서서 세상의 한복판으로 나아가거나,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익명성의 공간,
혹은 모니터 화면 뒤의 디지털 공간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시선인 '파님'이 나를 보지 못할 것처럼 행동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으니까 괜찮겠지", "이 정도는 세상 사람들도 다 하는 일이니까 하나님도 눈감아 주시겠지"
하면서 영적인 익명성 뒤로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죄를 짓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도,
가인이 아우를 죽이고 멀리 도망쳤을 때도,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착각의 역사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의 삶에서 시선을 거두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공간을 바꿀 수는 있어도,
나를 창조하시고 내 머리털까지 세신 하나님의 불꽃 같은 시선을 피할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교회에서의 삶과 세상에서의 삶을 철저히 분리한 채,
세상의 익명성 뒤에 숨어 하나님의 시선을 무시하며 살았던 우리의 영적 이중성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일터에서나, 가정에서나, 아무도 보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지금 내 앞에 계신다"라는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을 회복하고, 은밀한 죄의 자리를 과감히 떠나십시오.
요약: 인간이 구축한 그 어떤 익명성의 배 밑창도 하나님의 불꽃 같은 시선인 '파님'을 가릴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추격은 심판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는 은혜의 폭풍입니다
성경 본문: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중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요나서 1장 4절)
요나가 타고 갈 배가 마침 준비되어 있었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듯했을 때,
갑자기 바다에 대격변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던지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배가 거의 깨지게 될 정도의 무서운 대폭풍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런 폭풍을 만날 때,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셔서 벌을 주시거나 나를 파멸시키려고 하신다고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의 주권적 징계는 결코 파멸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 폭풍은 요나를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도망가는 종을 끝까지 추격하여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의 손길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요나를 그냥 내버려 두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나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시스에 무사히 도착해서,
하나님의 사명과는 상관없는 영적 죽음의 상태로 평생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포기하셨다면 폭풍을 보내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와 같은 폭풍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준비했던 계획이 한순간에 좌절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물질의 실패나 건강의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가장 믿었던 인간관계가 깨어지는 아픔을 겪으며 배가 깨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낍니다.
물론 우리 삶의 모든 고난이 다 불순종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폭풍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던지신 영적 추격의 신호일 수 있습니다.
부모가 길을 가다가 아이가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 때 어떻게 합니까?
"얘야, 위험하단다" 하고 부드럽게 말할 시간이 없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아이의 팔을 거칠게 낚아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의 팔에 멍이 들고 상처가 날지라도,
그것은 아이를 다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부모의 필사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추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은 우리에게 분명히 선포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내 뜻대로 만사형통하여 다시스로 가던 배가 멈추고 폭풍을 만났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정황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강력한 은혜의 증거입니다.
내 삶에 찾아온 고난과 폭풍 앞에서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기보다,
그저 환경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며 불평만 일삼았던 영적 무지와 완악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 내 삶을 뒤흔들고 있는 실패나 고난의 폭풍이 있다면,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골방으로 들어가
"하나님, 이 폭풍을 통해 내가 돌이켜야 할 다시스의 발걸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요약: 인생의 불순종 뒤에 찾아오는 폭풍은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심판이 아니라, 사명의 자리로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추격입니다.
4. 참된 사명의 완성은 더 큰 요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에 있습니다
성경 본문: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마태복음 12장 40절)
이제 우리는 이 요나서의 말씀을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흐름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요나는 사명을 피해 도망쳤던 실패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했고,
그들을 미워하여 도망치다가 결국 폭풍 가운데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냈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은 철저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친히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바로 '요나보다 더 큰 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요나는 사명을 피해 도망쳤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살리시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 가장 낮은 곳으로 걸어 내려오셨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라는 원수들을 미워하여 도망쳤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저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친히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불순종 때문에 일어난 폭풍 속에서 바다에 던져졌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의 불순종이 만들어낸 무서운 죄악의 진노와 폭풍을 홀로 온몸으로 받아내시며 십자가라는 거친 바다에 자신을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갇혀 있었던 것처럼,
우리 예수님께서도 무덤 속에서 사흘 동안 머무시며 인간의 모든 사망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여기에 우리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본질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삶은 요나처럼 날마다 넘어지고 도망치는 '나의 어설픈 순종'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완전하게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 19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가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너는 왜 또 도망치느냐, 너는 왜 그 모양이냐"라고 정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다시스로 도망치는 그 순간에도,
십자가의 보혈을 들고 우리를 끝까지 추격하여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Sola Gratia)입니다.
그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도망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 행위와 내 열심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영적 교만을 내려놓고,
날마다 넘어지면서도 하나님의 사명을 내 힘으로 감당하려 했던 율법주의적 태도를 회개해야 합니다.
내 의지와 노력을 의지하지 말고,
날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나를 위해 끝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믿음으로 바라보며,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공급하심으로 사명을 감당하십시오.
요약: 실패한 선지자 요나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심으로 도망치던 우리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결론: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은혜의 길로 돌아오십시오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신앙의 엄중한 본질을 다시금 마주하게 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시선과 임재를 피해 저 멀리 바다 건너 다시스로 도망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보다 먼저 그 바다에 가 계셨습니다.
요나는 배 밑창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 숨었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그 어둠 속까지 추격하셨습니다.
요나가 결국 폭풍 속에 바다에 던져져 깊은 물고기 뱃속까지 내려갔을 때도,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신실하신 사랑은 그곳까지 도달하여 요나를 붙들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미련하여서 하나님의 사명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명령을 피해 나만의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탈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빠른 배를 타고 도망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추격보다 빠를 수는 없습니다.
도망치는 우리 인간의 걸음보다,
우리를 찾아내어 살려내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은혜의 속도가 훨씬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피해 도망하는 인간의 발걸음은,
결국 우리를 멈추어 세우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추격 앞에 마침내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징계의 폭풍이든, 삶의 좌절이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멈추어 세우시고 돌이키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무의미한 도망을 계속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피하려는 헛된 노력을 이 시간 멈추십시오.
도망의 길, 불순종의 길에서 과감히 돌아서서, 나를 부르시는 은혜의 자리, 사명의 자리로 다시 복귀하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도망쳤을지라도,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를 다시 시작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길로 걸어가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해 도망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추격을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