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둘리틀 중령이 이끄는 B-25미첼 폭격기가 도쿄를 공습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 거의 2년동안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은 없었죠. 하지만 둘리틀 공습때 일본 국민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맨날 방공훈련을 했지만 실제로 미국
폭격기를 본건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죠. 그 당시 일본은 미국이 던진소이탄을 모래양동이로 조기 진화에 성공하여
낙관적인 생각을 가진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도쿄에 그나마 깨어있는 지식인들(?) 공포에 떨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유럽지방과
다르게 일본의 건축물은 전부 나무와 종이로 되어있는 데다가, 장판은 짚으로 짠 다다미로 덮여있고, 부엌에서는 숯을 쓰거나
얕게 매설한 가스관에서 가스를 끌어다쓰는 500평방km의 거대한 평야에 자리잡은 도쿄였기때문이었죠. 게다가 도쿄는 여러번
거대한 화재에 당했던 적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관동대지진때에도 더 내려가면 에도막부시기에도 도쿄는 큰 화재에 여러번
희생된 역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도쿄의 일반적인 풍경-
그래서 도쿄에서는 소방대를 조직해 놨었지만 전쟁이 중반으로 치달은 이 무렵에는 평시 소방인력의 20%만 남기고 대부분은
최전선으로 끌려갔었기 때문에 일본의 소방능력은 최악이었습니다. 한편 일본 군부는 둘리틀 폭격이후에 일본 본토가
공격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간단했습니다. '적 폭격기가 뜰 땅을 주지 말자'
이 전략에 따라 일본은 남쪽으로 인도네시아를 넘어 호주근방까지 전선을 확대하고, 동쪽으로는 미드웨이 서쪽으로는 중국내륙
깊숙히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도쿄에 살고있는 주민들을 10~12세대씩 묶어 반상회를 조직하여서 미리 화재 진압
연습을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후방에 남은 아줌마들을 주축으로 맹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통제를 잘따르는 일본인답게 그들은 군말없이 훈련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1943년 말 전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점차 일본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내무성에서는 방공 총본부를 설치해서 도쿄에 바둑판같은 방화대를 짰습니다. 즉 공간을 어느정도 확보해
놓아서 화재가 쉽게 옮겨붙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이 착착 준비하는 동안 미국은 뭘하고 있었을까요?
미국은 이미 B-17을 통해 독일폭격을 실시하면서 전략폭격에 관한 노하우를 쌓아가고 있었고, 이를 일본에서도 써먹기 위해
작전을 계획합니다만 B-17의 항속거리가 너무 짧았죠. 그래서 B-29의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개발은 1939년에 끝났지만-
양산체계가 뒤늦게 갖춰진 B-29는 독일전선으로 보내기에는 B-17이 너무 잘하고 있어서 5600km나 되는 항속거리를 이용하여
일본이나 공격하자란 모토로 중국에 배치되기 시작합니다.
-태평양을 담당했던 미 제 20공군-
그중에서 일본 본토 폭격을 담당했던건 21폭격사령부였습니다. 21폭격사령부는 처음에는 중국에 기지를 두고 큐슈지방의
산업시설을 공습합니다. 1944년 6월 16일 처음으로 일본하늘에 B-29기들이 등장했습니다만 B-29를 모는 승무원도 조작이
익숙치 않았고, 고고도에서 떨어뜨린 폭탄은 빚맞기 일수였습니다. 그러던중에 미군이 드디어 사이판섬에 상륙합니다.
-도쿄에서 2000km 떨어진 사이판 B-29의 항속거리 5600km-
미군은 바로 이 섬에다가 B-29 수백대가 드나들수 있을정도 크기의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부는
드디어 올것이 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944년 7월 18일 이 모든 책임을 지고 도죠 히데키는 수상직을 내놓습니다만
과연 그것만이 최선이었을까요??
첫댓글 사이판이 함락된 순간
일찍 GG를 쳤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후후.
아.. 올것이 왔다
Firework!!
드디어 미국의 힘을 보여주겠군요.
드디어 일본도 본격적으로 공습을 당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