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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
‘법등명 자등명’의 세계에서 숨을 부지하다
윤대녕
어려서 나는 덕숭산 수덕사에 자주 다녔다. 고향이 그쪽이기도 하려니와, 집안 사람들과 봄마다 그쪽으로 소풍을 가서 이응노 화백의 혼이 서려 있는 수덕여관에서 지내곤 했던 것이다. 내가 대여섯 살 때의 일이겠다. 지금도 선연하게 떠오르는 것은‘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그곳에 갔는데, 밤이 되자 연등燃燈의 행렬이 산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있음을 보게 되었다. 나는 산에 불이라도 난 줄 알고 혼겁을 하였느니, 그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이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기를, 그때 나는‘법등명法燈明 자등명自燈明’의 세계로 일찌감치 귀의하게 된 게 아니었나 싶다. 삼촌에게‘저 빛’을 따라가 보자고 조른 기억이 새삼 감개하게 다가온다. 나는 삼촌의 등에 업혀 초파일을 맞아 수많은 불자들이 운집해 있는 수덕사 경내로 들어섰다. 당시 대학생이던 삼촌도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줄곧 침묵하고 있었다. 이윽고 조금 더 가보자며 삼촌은 나를 업은 채 돌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조차 몰랐으니, 훗날에야 그 무수한 돌계단이 바로 덕숭산 꼭대기에 있는 정혜사에 이르는 길임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나는 문학동인회에 가입했는데, 그 이름이‘보리수’였다. 지난 봄호에 시인 양문규 선생이 같은 글(「불교와 나의 문학」)에서 언급했듯이 대전시 성남동 사거리에 있는‘불교병원’2층 공간을 주말마다 무료로 빌려 사용했고 시인 김대현 법사께서 지도를 해주셨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불교를 내 문학의 자장으로까지 받아들일 기회는 얻지 못했다. 그 누구도 그것을 강요한다거나 조금치의 부담도 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자체가 고마울 따름이다. 베풀되 행여 바라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과연 연기緣起의 삶을 살아가게 마련인 것인가.
내가 불교와 다시 인연을 맺은 것은 군대에서 제대한 직후였다. 1986년 4월 초에 제대를 하고 나서 나는 곧바로 공주에 있는 암자로 짐을 싸들고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일 년 가까이를 지내는 동안 비로소 조금씩 불교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요사채 마루에 앉아 매주 배달돼 오는 <불교신문>을 훑어보면서 달마와 육조혜능과‘선의 황금시대’라는 말을 알게 되었고 조주와 임제와 남전도 찾아 읽게 되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나라는 존재의 진면목眞面目을 참구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과거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현재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미래의 마음도 얻지 못하(『금강경』)고 있는 내가 사무치게 괴로워 밤마다 몸부림을 치고 낮이면 짐승처럼 산을 헤매고 다녔다. ‘머뭇거리지 말고 문득 네 마음을 내어라’(『금강경』) 할 때의 그 마음이란 게 내게는 없었다.
여름이 되어 나는 운수납자 흉내를 내어 만행하듯 부여(무량사, 대조사), 논산(관촉사, 개태사)을 거쳐 삼보사찰인 송광사, 통도사, 해인사를 기웃거리고 다니는 사찰 순례길에 나섰다. 근 한 달 간의 떠돎 끝에 비렁뱅이 꼴로 다시 공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한 소식’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불교를 이미 내 삶의 철학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돌아온 뒤에도 나는 한국 현대 불교사에 영원히 남을 효봉, 고암, 청허, 만암, 만공, 수월, 성철, 서옹 큰스님들의 행적을 따라 읽으며 존재의 거친 숨을 달래곤 했다. 끝내 출가자가 되지 못하고 속세로 내려왔으나, 대신 문학을 얻었고 이후 나는 그 법륜法輪의 거대의 숲속을 몽매에도 그리워하며 여태까지 안타깝게 숨을 부지하고 있다.
세속에 살다 보니 참으로 괴로운 일들도 많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을 하고 그리움에 지쳐 숨이 놓여날 지경이 되었을 때, 나는 우연히 서옹스님의 문답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누군가 장성 백양사로 서옹스님을 찾아가 물었다. 스님이 입적하기 몇 해 전의 일이었다.
“먼저 가신 도반 성철 큰스님은 지금 어디 계신 건가요?”
그러자 서옹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방바닥을 두어 번 치고 즉시 되받았다.
“어디 가다니, 여기 있잖어.”
이 활연한 세계의 깊이와 매혹은 어디서 오는가. 다음과 같은 원효와 설총의 일화를 접하게 되면 다만 침묵할 수밖에 없고 그 순간 가슴은 가마솥처럼 뜨겁게 타오른다.
만년에 원효가 경기도 소요산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을 데리고 와 산 아래에 은거하였다. 가을이 되자 요석공주는 누비옷을 지어 설총의 손에 들려 원효에게 보냈다. 설총이 찾아갔으되, 원효는 문을 열어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거듭 찾아가자 원효는 방 안에 앉아 설총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마당 청소나 하고 가거라.”
설총은 기쁜 마음으로 마당을 깨끗이 쓸고 방문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아버님, 마당 청소 다 끝냈습니다.”
뒤미처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원효가 맨발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마당에 한 주 서 있는 은행나무로 올라가 가지를 흔들었다. 그러자 마당에 노란 은행잎에 가득 쏟아져내렸다. 나무에서 내려온 원효는 아들 설총에게 아래와 같이 일갈하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마당 청소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순간 설총은 활연대오했다. 이후 설총은 더 이상 아비인 원효를 찾아가지 않았다.
내가 늘 곁에 두고 읽는 책 중의 하나가 『벽암록』이다. 거기 나오는 덕산德山과 용담龍潭 일화를 읽으며 나는 한사코 무명無明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용담이라고 해서 찾아왔더니 용도 없고 못도 없구먼.”
그러자 용담은‘그대가 용이고 못일세’라며 슬쩍 비켰다.
한참 얘기를 나눈 덕산이 처소로 돌아가려 하는데, 밖이 몹시 캄캄했다. 용담은 친절하게 불을 붙여 주었다. 덕산이 이를 받아드는 순간, 용담은 훅 불어서 이를 꺼버렸다. 이때서야 덕산은 활연대오했다.
나는 지금껏 이십여 년 작가로 살아오면서 세 가지 꼭지점을 두고 그 자장 안에서 사유를 되풀이하고 있다. 샤머니즘, 신화, 불교가 그것이다. 그러한데 나로서는 불교의 교리(法)와 가르침만큼 인간과 세계와 우주에 대해 깊이 있게 사유하는 철학이나 종교는 아직까지 접하지 못했다. 나는 불교를 생의 의지처인 철학으로 삼고 살아왔는데, 그것을 종교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불교는 우상을 섬기지 않으며 또한 우상을 강요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스스로 빛을 밝히도록自燈明’하는 것이다. 자연과학이 뒤늦게 생태학을 빌려 말하고 있지만 불교는 일체만물이 하나임萬物一如을 이미 수 천 년 전에 사유로써 완성했던 것이다.
수많은 날들을 나는 절에 머물며 글을 썼고 속세에 있을 때도 마음은 늘 절로 향하곤 했다. 젊어서는 어디까지나 이런 마음이고자 했음이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떠돌아 다닐 수 있는 저 위대한 독립을 탁발 정신!”
그렇게 살다보니 많은 이야기들이 절집 근처에서 만들어지고 씌어졌다.
첫소설집에 실린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은 청평사 아래 머물며 썼는데, 이 소설 안에는 딸을 등에 업고 출가하기 위해 찾아온 아비가 등장한다. 이때 주지스님은 아비의 등에 업힌 어린딸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하처래何處來 하처거何處去라 했으니 그저 하룻밤만 머물고 떠나도록 하세요.”
당시의 나는 여전히 마음이 어디 있는지를 모른 채 떠돌아다니며 살고 있었고 그러한 심정을 주지스님의 말을 빌려 토로하고 있었다. 「불귀不歸」라는 소설에서는 출가한 여동생을 찾아 절집을 기웃거리고 다니는 사내가 등장하는데, 이 역시 그 즈음의 내 심정이 반영된 이야기라고 할 수밖에 없으리라. 삼십대 중반의 몇 년은 봄이 되면 하동 쌍계사 경내에 있는 청운산장으로 내려가 있으며 글을 쓰곤 했다. 그 무렵에 쓴 「3월의 전설」이란 소설 역시 마음을 잃어버리고 마음을 찾지 못해 떠도는 두 사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불교에서는 마음이란 게 본시 없다고 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그런가. 더군다나 소설은 대체로 마음을 찾아다니는 속세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저녁예불 시간이 되면 쌍계사로 올라가 대웅전 옆에 서서 예불 소리를 들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창 선운사 아래 동백여관에서 머물며 쓴 「상춘곡」에 이르러서야 나는 가까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내 마음이 거기 있음을 알게 된다. 비교적 최근에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쓴 「대설주의보」에서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 해묵은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대산 하늘 구경」은 재작년에 오대산 월정사에 두 달 간 여름 방부를 들였을 때 쓴 소설이다. 이때의 일은 너무나 선연하여 두고두고 잊을 길이 없다.
어느 날 요사채 안에 앉아 있다 밖으로 나가 보니 경내에 있는 사람들(여름 휴가철이었으므로 관광객들이 몰려와 있었다)이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솥뚜껑이 열린 것처럼 하늘이 드높이 푸르고 무섭도록 맑았다.
공양간에서 나와 팔각구층석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경내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사방에서 쑤군거리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여기저기 하늘에 카메라를 겨누고 서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지상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인 듯 하늘이 푸르른 미궁으로 열려 있었다. 서쪽에서 길게 뻗어온 새털구름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그것을 감히 하늘이라 부를 수 없을 터이었다. 어느 날 세상의 모든 지붕이 사라지고 신혼의 밤에 누군가 난데없이 이불을 걷어가버린 느낌이었다. 곧 전쟁이라도 터질 듯한 분위기였다. 하늘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고 한낮의 유령 같은 얼굴로 피신하듯 적광전과 수광전으로 슬슬 몰려 들어갔다. 나는 연미의 손을 잡아끌며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상원사로 올라갔다.
그런 날은 이삼 일 더 계속됐는데, 나는 아침저녁으로 상원사를 경유해 적멸보궁에 이르러 삼배를 올리고 내려오곤 했다. 이는 내게 귀의歸依의 날들처럼 다가왔다. 『한암 일발록』을 옆구리에 끼고 상원사 주변을 어슬렁거렸던 것도 다 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때의 일은 나는 계속 이렇게 쓰고 있었다.
적멸보궁은 현판 글자 그대로 적멸寂滅의 빛에 감싸여 있었다. 보궁 안에는 참배객 들이 찾아와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불단에 왜 불상이 없는 거죠?”
안을 기웃거리던 연미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은 불상을 따로 안치하지 않는다고 들었어.”
그녀는 운동화를 벗고 보궁 안으로 들어가 다른 참배객들과 섞여 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거대한 미궁처럼 텅 비어 있는 하늘을.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맥들이 솟구치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절로 숨이 막혀다. 보궁 둘레를 돌아 아까 서 있던 자리로 오자 연미 옆에 웬 노비구니 스님이 서 있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연미는 노비구니 옆에서 소매로 눈가를 닦아내고 있었다.
“참으로 하늘이 공활한 날이구나.”
“......”
“내 여태껏 이런 하늘은 처음 보는구나. 나무아미타불.”
보궁 처마 끝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노비구니가 염불하듯 중얼거렸다. 이어 노비구니가 마당으로 내려서더니 돌을 집어 하늘을 향해 냅다 집어던졌다. 돌은 중대 사자암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에 떨어져 아래로 또르르 굴러내려갔다.
“이제 가자꾸나.”
연미는 노비구니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연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왔던 길을 되짚어 사자암을 거쳐 상원사로 내려왔을 때 노비구니가 말했다.
“가는 길에 한암스님 부도에 절이라도 올려야겠다.”
연미는 서너 걸음 남짓 사이를 두고 노비구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한암스님의 부도는 상원사 바로 아래에 있었다. 웬일인지 나는 연미를 불러세울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노비구니와 일행이 돼 있었다. 나는 주차장에서 차를 끌고와 부도밭 입구에 세워놓았다. 그네들이 돌아내려오는 것을 보고 나는 연미에게 다가갔다.
“이제 서울로 가야지. 차에 타.”
“그래, 남대 지장암 입구까지 빌려 타고 가자.”
노비구니가 대신 말하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지장암은 비구니 수행처였다. 연미는 주저없이 노비구니 옆에 붙어 앉았다. 월정사까지는 약 7km였고 지장암은 월정사와 오대천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비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나는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연미는 돌처럼 아무 표정이 없었다.
지장암으로 건너가는 다리에서 나는 차를 세웠다. 시동은 끄지 않았다. 이어 뒷좌석에서 내린 두 사람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다리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더는 안되겠다 싶어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연미를 불러세웠다. 우뚝 걸음을 멈췄으나, 그녀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계속 뒤따르려는 터에 노비구니가 돌아서 말했다.
“얘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니, 그대는 가던 길로 내처 가게.”
내가 다가가려 하자 연미의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나는 노비구니의 등에 대고 외쳤다. 다리를 건너간 노비구니가 땅에서 돌을 주워 내 얼굴을 향해 집어던졌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이 아이는 오늘 죽었다 겨우 살아난 거야. 산문에 가서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보게.”
연미는 이미 지장암으로 구부러지는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그제야 나는 연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틀어 적멸보궁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그녀는 보궁 안에서 또다른 하늘을 본 게 아니었을까.
예불소리와 함께 지장암 쪽에서 저녁 내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텅 비어 있는 푸르스름한 하늘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말을 늘어놓다 보니 이십대 중반에 제발로 절집에 찾아간 이후, 나는 지금도 변함없이 내 집 드나들듯 절에 머물며 무엄하게도 밥이나 축내며 더부살이를 해온 것 같다. 차생에는 출가 귀의하여 말로써 삶을 부지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고요한 명상의 세계에서‘법法으로 등을 밝히고 스스로 등을 밝히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윤대녕/ 1990년 《문학사상》 등단. 소설집 『은어낚시통신』 『남쪽 계단을 보라』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누가 걸어간다』 『제비를 기르다』 『대설주의보』.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