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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장
낙양(洛陽).
하남성(河南省) 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황화 중류에 위치한 역사와 문화의 도시,
중원의 사대 도읍중의 서경(西京)이자 역대구조(歷代九朝)의 수도였던 고도(古都),
앞으로 낙수(洛水)를 끼고 북으로는 공동묘지로 말미암아 죽음의 대명사가 된 망산(邙山)이 있는 천험의 요새지이다.
중원 최고(最古)의 사찰인 백마사와 북위 효문제가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후 건축하기 시작하여
팔 대 왕조 사백 년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불심의 보고인 용문석굴(龍門石屈)등 수많은 명승고적이 산적해 있는 곳이다.
그 많은 문화유산이 과거에 낙양을 도읍으로 가졌던 수많은 왕조들의 영광의 산물이라면 현세에서 낙양 하면 바로 떠오르는 말이 있다.
낙양(洛陽) 제일(第一) 설가장.
평범한 무가(武家)가 삼십 년이란 짧은 세월 속에 낙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 되었고,
중원 각처에 있는 수백 수천의 무가(武家) 중 가장 위에 있는 독보적인 문중으로 성장했다.
정파 최고 집단인 천무맹, 그 천무맹의 부맹주인 뇌음천자 설검후가 설가장의 장주이기 때문이다.
수천 평 의 대지 위에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수십 채의 건물들,
설가장 오 할의 전력이 장주인 설검후를 따라서 천무맹으로 파견 나가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전력만 해도 웬만한 군소방파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끝없이 세워져있는 삼 장 높이의 담을 따라서 걷다 보면
담 높이와 똑같은 크기의 거대한 대문이 있고 그 대문의 가장 높은 곳에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로 쓰여진 현판이 하나 있다.
낙양제일 설가장.
그 아래로 검을 차고있는 위사 두 명이 전면을 쳐다보며 오연한 자세로 서있었다. 새하얀 백의와 가슴에 검은 색으로 설자를 새기고 있는 자들.
대문 밖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위사임에도 불구하고 툭 튀어나온 태양혈(太陽穴)은 설가장에 속한 인물들의 무공수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설가장에 있는 최하위 무사라 할지라도 강호 무림에 나서면 고수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소문이 호사가들이 지어낸 헛소리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설가장의 얼굴이 되고 있는 자들은 환영검(幻影劒) 장유열(張有列)이란 자와 그의 부하였다.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설가장이었기에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방문자들이 찾아온다.
그들 중에는 설가장에서 한자리를 해보고자 오는 자들도 있었고
낙양을 지나던 무림의 명숙들도 포함되어있기에 설가장 내에서 조금 지위가 있는 자와 하급무사 한 명이 일개 조로 해서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이다.
'저놈은 뭐지?'
흑의인 한 명의 이상한 행동을 쳐다보며 장유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의 한 시진 전부터 설가장 앞에서 오락가락하여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거리에 도를 차고 있는 것을 보니 무림인이 분명하기는 한데 차림새가 이곳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온 시골 촌놈은 아닌 것 같았다.
이윽고 도를 찬 흑의인이 무슨 결심을 했는지 성큼성큼 장유열 앞으로 다가왔다.
"저기… 말 좀 물읍시다."
장유열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이곳은 대 설가장이다. 자신의 소개도 없이 대뜸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한 자는 여태껏 없었다. 자연히 대답이 고울 리가 없다.
"무슨 일인가?"
도를 차고 있기는 하지만 혹시 명사의 제자일지도 모르는 일이라 그래도 조금은 정중하게 대하고 있었다.
"내 친구 녀석의 동생이 낙양 설가장의 큰며느리가 되었다 해서… 연락을 받고 낙양까지 왔는데 설가장이라고는 이곳밖에 없고 너무 엄청난 가문이라…."
흑의인의 말을 듣고 있던 장유열의 표정이 흠칫 변했다.
얼마 전 총관으로부터 내려진 지시사항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친구의 이름이 뭔가? 동생의 이름은 뭐고?"
"아 예, 친구는 낙천수사 표운이라 하고 그놈의 동생은 표령이라 하오. 아무래도 녀석이 장난친 것 같군요. 이런 곳에 어울리는 놈이 아닌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확답을 들어야겠다는 듯이 장유열을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표령이란 말에 급속하게 굳어졌던 장유열이 얼굴 표정이 이내 다시 펴지며 약간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놈이다. 총관이 이야기했던, 천하조(天下組)의 조장을 일수에 베어버렸다는 놈.'
그런데 이상했다. 천하조의 조장을 베었다는 놈의 무공수위가 별 것 아니었다.
설가장에는 네 개의 조가 있고 각 조 조장의 무공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고수다.
자신의 일검도 받아낼 수 없을 것 같은 저런 변변치 않은 무공을 가진 자가 그들을 헤쳤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럼 다른 친구인가? 빌어먹을 년 놈들, 웬 친구는 이렇게 많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소이다.
이곳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십니다. 성함이라도 남겨주시면 우리가 한번 알아봐 드리겠소. 낙양이라면 우리 이목 안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상하네? 녀석의 서신에는 매부 되는 놈이 좀 개차반이라며 설가치룡이라 불린다 했는데….'
표령을 찾아준다는 장유열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있었으나 장유열이 못 들었을 리가 없다.
뭐라고 한마디를 더 하려는 장유열을 향해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며 몸을 돌렸다.
"나 백산이요."
옷이 날개라더니 백산의 모습이 달라 보였다.
생긴 것 없는 얼굴과 흉터야 그대로겠지만 언제나 늘어뜨리고 있던 머리를 정리하고 수염까지 깍은 백산의 모습은
입고 있는 흑의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촌놈 티를 어느 정도 벗은 것 같았다. 촌스러운 행동을 제외하고….
"너는 저자를 은밀히 미행해라."
같이 있던 수하에게 미행을 지시하고 장유열이 급한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낙천수사 그놈을 찾는 자가 나타났단 말이냐?"
장유열의 보고를 받고 있는 오십대의 인물, 설가장의 총관인 제천권(除天拳) 수지상(洙志霜)이란 자였다.
제천삼권(除天三拳)이란 장법을 익힌 자로 설가장 창업공신 중의 한 사람이다.
세간에서는 그가 익힌 제천삼권이 과거에 멸망한 황보세가의 독문장법인 천왕삼권이란 소문도 있었으나
본인이 극구 부인하고 감히 설가장의 총관에게 확인하려 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소문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제일조 조장이 말했던 그자 같지는 않고?"
제일조의 조장인 패검(佩劍) 구자인(具玆仁), 소장주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만상투인루로 갔던 그가 사색이 되어서 돌아왔었다.
낙천수사의 친구라는 놈. 그와 천하조의 조장이 일초도 감당하지 못했던 자가 복수하러 오겠다 했다는 것이다.
"도를 차고 있었는데 무공은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자인의 말에 의하며 비도에 당했다고 했다. 도를 차고 있다면 놈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러나 놈이 친구를 찾는다며 낙양을 헤집고 다니면 일이 커진다. 그나마 잠잠해졌던 소장주에 대한 소문이 다시 드러날 수 있음이다.
"알았다. 그놈이 머물고 있는 곳을 확인하면 나에게 보고하고."
'이럴 땐 소장주는 또 어디가신 겐가. 그렇게 자중하라고 말씀 드렸건만… 휴우!'
구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낙양성주의 딸을 겁탈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
성주의 딸을 호위하던 열 명의 군관들을 죽이고 간신히 도망을 쳤지만 목격자가 너무 많았다.
더구나 성주의 딸이라는 게 이제 겨우 열 다섯 밖에 안 되는 어린애였기에 진노한 성주는 물론이고 낙양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지탄하는 흉악무도한 놈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부랴부랴 내놓은 대안이 사람을 사서 만상투인루로 보내는 것이었다.
때마침 이미 건드려 놓았던 다른 계집이 있어서 그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부모와 일가 친척하나도 없는 고아들이었기에 자신이 나서서 그 계집을 설득했고 그 애의 오빠를 설태만으로 변장시켜 만상투인루로 보내는데 성공했다.
느닷없이 생겨난 설가장의 둘째 아들 때문에 이런 저런 소문도 많았지만 설가장에서 둘째 아들이라 하는데 누가 뭐랄 것인가.
설가장을 적으로 두고 싶지 않으면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때 살인멸구 해버릴 것을 잘못했나?'
몸에 지병이 있어 이미 죽어가고 있었고 계집의 오라버니 실종과 설가장을 연관시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에 죽이지를 못했다.
계집마저 죽으면 그녀의 오라버니를 만상투인루에 보내서 죽게 하고는 증인을 없애기 위해서 여동생마저 죽였다는 소문이 날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청루(靑樓)로 넘겨버렸다. 아마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그 약한 몸으로 하루에도 수십 명의 남자가 드나드는 그곳에서 견디지 못했을 테니까.
"좌일 있느냐?"
"부르셨습니까, 총관."
"소장주를 찾아와라. 급한 일이라 전해라."
"인피구를 쓰고 나가셔서 저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너도 모른단 말이냐? 빌어먹을."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근신 기간 중이던 설태만은 어디서 구했는지 인피구를 착용하고 낙양을 활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귀찮다는 구실로 부하들에게까지도 인피구상의 얼굴을 알려주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 * *
"여어! 장형 그동안 어디 있었소?"
화려한 금의를 입고 있는 평범한 얼굴의 삼십대 인물이 반가운 얼굴로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흑의인을 불러 세웠다.
"어? 낙형 아니오. 잠 좀 자러가오. 간밤에 한숨도 못 잤더니…."
장형이라 불린 인물이 반가운 표정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누구인가. 한때는 잘생긴 얼굴과 아랫도리 기술을 가지고 밥을 먹고살았던 장대근이란 인물, 섯다였다.
"혹시… 어젯밤에 혼자만 재미 본 것 아니오?"
섯다의 핏발선 눈동자며 부스스한 얼굴 그리고 힘없는 동작을 보며 낙씨 성을 가진 인물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과 너무나 죽이 잘 맞는 사람이었다.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약간의 무공에 여자를 밝히고 도박을 좋아하는 취미생활이 자신과 너무나 흡사했다.
또 여자를 휘어잡는 능력이란, 자신과 수준이 달랐다.
자신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으슥한 곳으로 유인하여 힘으로 해결했었는데 이 친구는 몇 마디의 말이면 아무리 요조숙녀라 할지라도 스스로 치마끈을 풀어버린다.
한 차원 높은 경지의 고수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지금과 같은 행색이었다.
"이거 또 낙형을 만났으니 그냥 갈 수도 없게 되었네? 갑시다, 내가 한턱 거하게 쓰지요."
금의인의 얼굴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이 친구가 한턱 쓸 때는 그 씀씀이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낙양 최대 집안인 자신도 몇 번 가보지 못한 그런 곳에서 은자를 물 쓰듯 하는 것이다.
"오늘도 제일루요?"
낙양에서 가장 비싸고 고급인 곳, 술 한 병 값이 일반 양민 한 가족이 일년 이상을 먹고 놀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중원제일루(中原第一樓).
그들이 가고 있는 기루의 이름이다.
모든 것이 중원에서 제일이라 하지만 특히 세 가지는 진정으로 중원제일이라 알려져있다.
그 첫째가 음식 맛이요, 둘째가 기생들의 미색이고 세 번째가 그들을 즐길 수 있는 돈이다.
수없이 많은 부호들이 이곳에 와서 기생들에게 혼을 빼앗기고 가산을 탕진했다고 하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곳이 아니겠는가.
"장형!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나에게까지 비밀로 하는 거요?"
옆에서 술을 따르고 있는 기녀의 얼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을 때 궁금해 하던 것을 슬쩍 물었다.
이곳에 와서 술을 먹을 수 있는 비밀, 아무리 부모가 중원의 갑부라 해도 하룻밤에 수만 냥씩 주고 술을 먹지 못한다.
그런데 이 장대근이란 사람은 자신을 만날 때마다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와 잠자리 한 것도 아닌데 저 피곤한 표정과 핏발선 눈동자. 자신도 수없이 겪었던 증상.
몰두하다 보면 세상사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이겼을 때 그 느낌이란, 온몸에 흐르는 전율과 성취감은 결코 여자와 잠자리에서 느끼는 쾌감이 따르지 못한다.
수없이 많은 공을 들여서 원했던 여자와 잠자리를 하고 나면 느끼는 감정이 허탈하다는 것에 비하면 이놈이 주는 마력은 무섭다.
성취했을 때 그 흥분된 느낌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도박.
장대근의 표정이 몸짓이, 밤새도록 도박에 몰두했을 때 나올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도박을 하는 장소가 문제였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이곳 낙양에 있는 도박장에서 아무리 돈을 많이 따도 중원제일루에 와서 기생을 끼고 술 먹을 수 있는 수준이 안 된다.
자신이 근신하고 있는 사이에 엄청난 곳이 생긴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물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말끝을 흐리고 마는 장대근이었다.
"이게 다 낙형을 생각해서 이러는 거요. 그곳은 보통사람이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요."
금의인의 계속되는 채근에 드디어 비밀을 털어놓기로 했는지 기녀들을 물린 장대근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무슨 소리요, 이 설… 낙설민을 생각해서 하는 소리라니."
자존심이 상했다. 잘못했으면 본명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무리 인피구를 쓰고 있지만 낙양제일가인 설가장의 소장주가 아닌가. 그런 자신에게 보통사람이라 하고 있다.
"말해보시오.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장형이 그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인지. 정녕 장형의 말대로 그런 곳이 아니면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요."
감히 자신을 놀라게 할 곳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성주의 딸까지 겁탈하려 했던 자신이 아닌가.
"좋소, 이야기하리다. 대신 지금부터 내가 한 이야기는 무덤까지 가져간다고 약속하시오."
얼굴에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으나 비밀을 발설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불안한 듯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이어서 실토되는 장대근의 비밀은 낙설민, 아니 설태만의 온몸에 전율이 일게 만들었다.
그곳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회원제로만 운영되고 있었고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은 회원이 될 수 없다한다.
회원이 되기 위한 절차도 까다로웠다. 일단 확실한 신분이어야 하고 가입비만도 십만 냥이나 되는, 진정 엄청난 곳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도박을 즐길 때 전부 복면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신분에 대해서는 도박장의 운영자만 알고 있을 뿐 내부에서는 그 누구도 서로를 모른다는 소리다.
그런 다음 이어지는 장대근의 한마디는 설태만의 눈동자에 붉은 핏발을 세우게 하고 말았다.
"투자요."
투자, 주사위 두 개를 가지고 하는 가장 단순한 도박. 가장 낮은 수나 높은 수가 나온 사람이 이기는 도박이다.
설태만이 가장 좋아하는 것. 도박장에 가면 다른 것은 쳐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투자만 한다.
주사위 소리만 들어도 숫자가 얼마인지 알아맞힐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어젯밤에 십만 냥 정도를 땄소. 별로 운이 따라주지 않더구먼…."
십만 냥을 땄다는 말을 하면서도 별로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나, 나도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겠소?
다급했다. 그곳은 완전히 황금시장이 아닌가. 벌써 십여 년 간 투자에만 매달려온 자신이다.
투자만으로는 낙양에서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은 없다. 도귀니 도제니 하는 놈들과도 붙어본 적이 있었으나 가소로웠다.
"신분은 나의 친구라 하면 그럭저럭 될 것은 같은데… 자금이 문제요. 회원으로 가입하는데 만 최소 십만 냥이 필요하고 입장하는데 수중에 오십만 냥이 있어야 하는 지라…."
오십만 냥이면 설가장의 두 달 운영비가 되는 막대한 금액이다.
그러나 이미 투자에 눈이 돌아버린 설태만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주사위가 굴러가며 자신이 이겼을 때의 쾌감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좋소, 장형. 오늘 저녁, 아니오, 지금 바로 돈을 가져오리다."
설태만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다시 삶의 의미를 되찾은 것 같았다. 자신의 실력을 알고 있기에 낙양의 어느 도박장에도 갈 수 없었다.
아무리 변장을 하고 가도 두어 판만 놀아보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들통 나고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설태만이 살아있다고 광고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분탄로의 제약을 완전하게 가릴 수 있는 곳이 등장했다.
자연 조급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안 되오. 삼일 후에 한 명이 탈퇴를 하게 되는데 그때가 되어야 가능하오."
정원제란 말이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떠나는 사람이 있을 때 즉 결원이 생겼을 때만 새로운 회원을 받는다 한다.
"다른 친구들도 회원 될 사람을 데리고 올지도 모르겠군…."
"장형! 그럴 수는 없소. 내가 꼭 회원이 되어야 하오. 반드시 되어야 한단 말이오."
이제는 아예 필사적이다. 모처럼 만에 무료한 세상살이의 탈출구를 찾았는데 그것이 다시 무산되려 하고 있었다.
"그때는 가입비의 대소로 결정되지 않겠소. 내가 힘을 써보겠지만 다른 쪽에서 돈으로 치고 들어오면 방법이 없는지라…."
"두 배! 내가 두 배 내겠소."
"그렇게까지야… 필요 없게 해보겠지만 만일에 대비 하셔야 하오."
돈을 만들려 함인가 설태만이 서둘러서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그런 설태만의 모습을 미소로 배웅을 하며 섯다가 조용히 뇌까렸다.
'악의 구렁텅이에 발을 담근 것을 환영한다. 설태만….'
"어이! 장형 수고가 많구먼. 나도 이런 역 한번 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 좋은 술에 미녀에…."
소살우였다. 설태만이 나가고 난 후 어디서 나타났는지 남은 술을 홀짝이며 한쪽에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지금껏 저놈에게 쓴 돈이 오만 냥인데 이십만 냥으로 불어나니 십오 만냥을 번 것 아뇨."
백산과 광견조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었다. 설태만의 파멸을 위해서 무슨 일인가를 추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큰 형님은 어디 있소?"
"청루(靑樓)."
* * *
세상이란 참 묘하다. 밝은 곳이 있으면 반드시 어두운 곳이 존재한다.
그런 것이 음양의 이치라면 할말이 없지만 어두운 곳에서도 또다시 그 음양의 이치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어둠도 다 같은 어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늘진 곳과 아예 빛이 없는 죽어버린 곳이 또 존재하기에.
청루(靑樓).
낙양의 화려한 야경이 멀리 보이는 곳, 한 때는 저 불빛 아래서 웃음을 팔고 교태를 부렸던 수많은 야화(夜花)들이 마지막을 장식하는 곳,
쓸모없이 죽어버린 꽃들인가 그들이 밟고 있는 대지조차 질척하니 젖어있었다.
거의 쓰러져가는 집들에 푸른색의 조그마한 등이 달려있고
그 불빛 아래로 몸도 마음도 죽어버린 듯 피곤한 눈동자를 가진 여인네들이 그 앞을 지나고 있는 백산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었다.
구리돈 열문, 밥 한 끼 값도 안 되는 돈을 위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인들의 얼굴에는 살아있는 자의 생기가 없었다.
그냥 그대로 손님이 오면 받고 오지 않아도 그만 이라는 표정들이었다.
"이봐! 물어볼게 있는데?"
그녀들 중 둥그런 얼굴에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창기에게 다가가면서 말을 건넸다.
"나는 쟤들보다 싸. 다섯 문이면 돼."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백산을 향해서 조용히 속삭일 뿐이었다.
"하려는 게 아니고 돼지새끼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서… 한 냥 주지."
"돼지는 왜?"
수백 번의 가랑이를 벌려야 벌 수 있는 거금임에도 불구하고 은화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돼지에 관해서만 묻고 있다.
"오늘 돼지고기가 먹고 싶어졌거든."
하얗게 웃고 있는 백산의 표정을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퇴기가 모를 리가 없었다.
사람을 떨게 하는 공포는 없었지만 누구를 죽이기 전에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살기(殺氣).
처음으로 늙은 퇴기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관심의 표정인가, 백산의 손에 있던 은화 한 냥을 가져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죽으면 이것으로 관을 만들어 줄게, 저기 보이는 제일 큰 건물이야."
"자, 술 좀 받아 놓고 기다려, 화주로 파전이 있으면 더 좋고."
백산의 품속에서 한 움큼의 은화가 쏟아져나오며 사방으로 빛을 발했다. 한 순간 청루 주변이 환해지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여기에 널린 것이 화주고 파전도 금방 만들어."
살아서 오라는 말이었다. 얼굴에 싱긋 미소를 지으며 퇴기가 가리킨 건물을 향해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인간과 짐승의 배설물이 어우러진 묘한 냄새를 맡으며 거의 발등까지 빠지는 곳을 아무 거리낌 없이 걷고 있는 백산의 뒷모습을 무심한 눈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희망이 없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패배의식이라 했다.
"취익!"
쿵! 쿵! 쿵!
또 화가 난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냥 어쩔 수 없이 숨을 쉬고 있는 고깃덩어리 일 뿐이다.
죽을 용기조차 없는 그런 이들이다.
그런 세상에 화가 났고 아무리 발악해도 바뀔 수 없다는 현실에 더 암담해 지는 것 같다. 자신이 나서서 이들을 구해 준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이런 음지는 반드시 생겨난다.
하지만 음지이고, 죽을 때까지 잡을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희망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빌어먹을!'
"크윽!"
욕설과 함께 문을 열어주며 인상을 쓰고 있는 놈을 향해 일권(一拳)을 먹여 버렸다.
화가 나있는 그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날리는 주먹에 붉은 기운이 어렸고 문을 열었던 상대는 얼굴이 함몰되며 바로 즉사를 해 버렸다.
주먹 가득 묻어나는 피를 털지도 않은 채 화려하게 치장된 복도에 오물 가득한 발자국을 남기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가 끝나는 곳에 넓은 회랑이 있고 화려한 불빛 아래 십여 명의 인물들이 백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굴 찾아온 모양인데 그리 폭력적으로 나오면 쓰나?"
십여 명의 흑의인들 뒤쪽에서 나온 소리였다. 사십대 정도 되어보이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인물, 살이 붙기는 했지만 돼지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살이 안 찐 돼지도 있었네?"
돼지, 이곳 청루 같은 하급 창굴을 관리하고 있는 포주를 칭하는 비어였다.
백산의 입에서 돼지란 말을 들은 인물의 얼굴에 기묘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돈마(豚魔)라 불리고 있지만 결코 그렇게 불릴 입장이 아니었다.
"사람도 찾기 전에 죽고 싶은가!"
이곳은 청루, 창굴이다. 여기서 일하는 여자들은 낙양 번화가에서 밀려난 퇴기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만 가지고는 이곳을 유지할 수 없다.
젊고 싱싱한 여자들도 꽤 있다. 바로 팔려온 여자들이다.
가족에 의해서 팔려온 여자, 권세 있는 집안의 자제들과 놀아나다 그들에 의해서 이곳으로 묻혀버린 그런 여자들이 청루를 유지하는 기반인 것이다.
그 고관 자제들과 놀아나다 이곳에 팔려온 여자들은 지금의 경우처럼 보호자나 가족이라며 찾아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결코 데려가지 못한다. 애당초 고관 자제들로부터 여자를 넘겨받을 때 처리비용까지 같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곳 청루는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땅속에 들어가기 전 까지 이곳에서 살아야한다.
그것이 청루의 불문율이다.
돼지를 쳐다보는 백산의 입가에 차가운 살소가 맺혔다.
"지금부터 질문은 나만 한다. 우선 첫 번째 질문. 약 팔 개월 전에 표령이란 여자가 이곳으로 팔려왔다. 있었나 없었나."
'이자! 위험한 자다.'
돈마의 얼굴색이 변했다. 십여 명의 인물들이 둘러싸고 있는데도 태연한 신색으로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
"죽여!"
경험상으로 볼 때 바로 처리하는 것이 좋다. 시간을 끌면 일만 더 복잡해진다.
혹시라도 관가에 연락을 하고 오는 놈들이 가끔씩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돈으로 입막음을 하고 있지만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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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갑니다
즐독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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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감사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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