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목(碑木) - 그 숨은 이야기
[이 가곡의 탄생배경은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3년 어느 날, 6.25전쟁 때 치열했던 전쟁터 강원도 화천군 백암산 기슭
에서 비롯된다. 백암산 기슭엔 소위 계급장을 단 육군 장교 한 명이 부하
들과 함께 순찰을 돌고 있었다. 전방 소대장직을 맡고 있었던 이 장교는
산을 오르내리면서 우연히 이끼 낀 돌무덤을 발견했다.
시선을 따라 무덤 쪽으로 발길을 옮긴 소대장은 깜짝 놀라 멈칫했다.
일반 무덤처럼 생긴 그 곳엔 6.25전쟁의 가슴아픈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묘비처럼 꽂혀 있던 썩은 나무등걸, 녹슨 철모, 카빈소총
한 자루, 그리고 고즈넉이 피어있는 산목련…. 적과 총을 겨누며 싸우다
숨진 한 군인의 초라한 무덤이라는 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전사한 용사가 누구인지, 또 그를 누가 묻어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1953년
7월 27일(판문점휴전협정일) 6.25전쟁이 끝나고 10년 남짓 세월이 흐른
그 때서야 장교의 눈에 띄인 것이다. 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이끼되어
맺히고, 지나는 이들이 던진 돌이 더미 되어 쌓여있었다.
젊은 소대장은 즉석에서 시 한편을 지어 바치며 땅속에 누워있는 묘 주인
의 넋을 달랬다.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의 숭고한
넋을 위로하며 헌시를 지은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는 훗날 음악인 "장일남" 씨에 의해 작곡된〈비목〉의
노랫말이 돼 훌륭한 가곡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 오고 있다.
묘비처럼 꽂혀있던 썩은 '나무등걸'은 노랫말에서 "이름 없는 비목"으로
표현됐다. 나무로 세워진 묘비란 뜻이다. 백암산에서 순찰을 돌다 詩를
지은 그 소대장은 국립국악원장을 지낸 음악평론가 "한명희(韓明熙)"씨
가 장본인으로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명희씨는 1939년 3월 1일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고(현 72세) 1958년 충주고, 서울대 음대를 거쳐
1968년 동 대학원과 1988년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 철학과를 졸업 했으며
철학박사(1994년 성균관대)로 서울시립대 음악과 교수를 정년 퇴직해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에 살고 있다.
또 작곡가 장일남씨(전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는 2006년 9월 24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4세. 황해도 해주 태생인 故人은 평양음악대를
졸업한 뒤 창덕여고, 숙명여고 음악교사를 거쳐 한양대 작곡과 교수로
30여년간 몸담았었다. 또 라디오, TV에서 클래식음악 프로그램 진행을
맡는 등 40년 넘게 가곡과 고전음악보급에 앞장서왔다. '기다리는 마음'
'석류' 등 많은 가곡들을 남겼고 오페라작곡가로도 유명했다. '원효대사'
'춘향전' '불타는 탑' 등은 해외에서도 여러 번 공연됐었다.
[가곡"비목"의 작사가/ 한명희(韓明熙)님의 글 중에서]
40년 전 막사 주변의 빈터에 호박이나 야채를 심을 양으로 조금만 삽질을 하면 여기 저기서 뼈가 나오고 해골이 나왔으며 땔감을 위해서 톱질을 하면 간간히 톱날이 망가지며 파편이 나왔다.
그런가 하면 순찰삼아 돌아보는 계곡이며 능선에는 군데군데 썩어빠진 화이버며 탄띠 조각이며 녹슬은 철모 등이 나딩굴고 있었다. 실로 몇개 사단의 하고 많은 젊음이 죽어갔다는 기막힌 전투의 현장을 똑똑히 목도한 셈이었다.
그후 어느날 나는 그 격전의 능선에서 개머리판은 거의 썩어가고 총열만 생생한 '카빈총' 한 자루를 주워왔다. 그러고는 깨끗이 손질하여 옆에 두곤 곧잘 그 주인공에 대해서 가없는 공상을 이어가기도 했다.
전쟁 당시 'M1소총'이 아닌 '카빈총'의 주인공 이라면 물론 '소대장'에 계급은 '소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락없이 나같은 20대 한창 나이의 초급장교로 산화한 것이다. 일체가 뜬 구름이요, 일체가 무상이다.
처음 "비목(碑木)"을 발표할 때는 가사(歌詞)의 생경 함과 그 사춘기적 무드의 치기(稚氣)가 부끄러워서 "한일무"라는 가명을 썼었는데 여기 일무(一無)라는 이름은 바로 이때 응결된 심상이었다.
이렇게 왕년의 격전지에서 젊은 비애를 앓아가던 어느날, 초가을의 따스한 석양이 산록의 빠알간 단풍 의 물결에 부서지고 찌르르르 산간의 정적이 고막에 환청을 일으키던 어느 한적한 해질녘, 나는 어느 잡초 우거진 산모퉁이를 돌아 양지바른 산모퉁이를 지나며 문득 흙에 깔린 돌무더기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필경 사람의 손길이 간 듯한 흔적으로보나 푸르칙칙한 이끼로 세월의 녹이 쌓이고 팻말인 듯 나딩구는 썩은 나무등걸 등으로 보아 그것은 결코 예사로운 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것은 결코 절로 쌓인 돌이 아니라 뜨거운 전우애가 감싸준 무명용사의 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 카빈총의 주인공, 자랑스런 육군 소위의 계급장이 번쩍이던 그 꿈많던 젊은 장교의 마지막 증언장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제 이야기가 여기쯤 다다르고 그때 그시절의 비장했던 정감이 이쯤 설명되고 보면 "비목"같은 간단한 노래가사 하나쯤은 절로 엮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감성적 개연성을 십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정(詩情)이 남달라서도 아니요, 오직 순수하고 티없는 정서의 소유자였다면 누구나가 그같은 가사 하나쯤은 절로 빚어내고 절로 읊어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 그때 그곳의 숨김없는 정황이었다.
그후 세월의 밀물은 2년 가까이 정들었던 그 능선, 그 계곡에서 나를 밀어내고 속절없이 도회적인 세속 에 부평초처럼 표류하게 했지만 나의 뇌리, 나의 정서의 텃밭에는 늘 그곳의 정감, 그곳의 환영이 걷힐 날 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TBC 음악부 PD로 근무하면서 우리 가곡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쏟던 의분의 시절, 그 때 나는 방송일로 자주 만나는 작곡가 "장일남"씨로 부터 신작가곡을 위한 가사 몇편을 의뢰받았다.
바로 그때 제일 먼저 내 머리속에 스치고간 영상이 다름아닌 그 첩첩산골의 이끼 덮인 돌무덤과 그옆을 지켜섰던 새하얀 산목련이었다.
나는 이내 화약냄새가 쓸고간 그 깊은 계곡 양지녘의 이름모를 돌무덤을 포연에 산화한 무명용사로, 그리고 비바람 긴세월 동안 한결같이 그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그 새하얀 산목련을 주인공따라 순절 한 연인으로 상정하고 사실적인 어휘들을 문맥대로 엮어갔다.
당시의 단편적인 정감들을 내 본연의 감수성으로 꿰어보는 작업이기에 아주 수월하게 엮어갔다.
이렇게 해서 "비목"은 탄생되고 널리 회자(膾炙)되기에 이르렀다.
오묘한 조화인양 유독 그곳 격전지에 널리 자생하여 고적한 무덤가를 지켜주던 그 소복한 연인 산목련 의 사연은 잊혀진 채 용사의 무덤을 그려본 "비목(碑木)"만은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한 셈이며 지금도 꾸준히 불려지고 있다.
"비목(碑木)"에 얽힌 일화도 한두가지가 아닌데, 가사의 첫 단어어인 "초연"은 화약연기를 뜻하는 초연(硝煙)인 데, "초연하다" 즉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오불관언 의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한때는 "비목(碑木)"이라는 말 자체가 사전에 없는 말이고 해서 패목(牌木)의 잘못일 것이라는 어느 국어 학자의 토막글도 있었고, "비목"을 노래하던 원로급 소프라노가 "궁노루산"이 어디 있느냐고 묻기도 한 일이 있었다.
"궁노루"에 대해서 언급하면, 비무장지대 인근은 그야말로 날짐승, 길짐승의 낙원이다.
한번은 대원들과 함께 순찰길에서 "궁노루" 즉, "사향노루"를 한마리 잡아왔다.
정말 향기가 대단하여 새끼 염소만한 "궁노루" 한마리를 잡았는데 온통 내무반 전체가 향기로 진동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고 그날부터 홀로 남은 짝인 암놈이 매일 밤을 울어대는 것이었다.
덩치나 좀 큰 짐승이 울면 또 모르되 이것은 꼭 발바리 애완용 같은 가녀로운 체구에 목멘 듯 캥캥거리며 그토록 애타게 울어대니 정말 며칠 밤을 그 잔인했던 살상의 회한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더구나 수정처럼 맑은 산간계곡에 소복한 내 누님 같은 새하얀 달빛이 쏟아지는 밤이면 그놈도 울고 나도 울고 온 산천이 오열했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이란 가사의 뒤안길에는 이같은 단장의 비감이 서려 있는 것이다.
초연이 쓸고간 깊은계곡 깊은계곡 양지녘에 비바람긴세월로 이름모를 이름모를 비목이여 머어언 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옛날 천진수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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