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봉방(露蜂房)
더위가 자취를 감추자 서늘한 기운이 대지에 내려섰다. 작년 이맘때가 생각난다. 벌집을 사서 벌술을 담그려다가 그만 둔 적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종종 이용하는 약초 카페가 있다. 야생 산야초 약재와 재배 농산물을 판매도 하고 구매도 하며 관련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는 곳이다. 전국 회원이 수만 명이며 전문 약초꾼인 카페지기의 엄하고 철저한 운영방침으로 우수카페로 선정된 바 있다. 나는 여기서 4 계절에 걸쳐 나오는 산야초의 꽃, 열매, 잎, 줄기, 뿌리를 건재로 사기도 하고 생재로 사서 말리거나 쪄 두었다가 한방약차로 달여 먹기도 하고 약술로 담그기도 하고 식재료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는 약초공부도 되고 건강도 챙기게 되어 내 노년을 장식하는 즐거움의 하나가 되었다.
활용 방법 중에서도 산야초를 술에 담그면 오래 보관할 수 있기에 더덕, 도라지, 사삼, 하수오, 상황버섯, 영지버섯, 삼지구엽초, 당귀, 천마 등으로 여러 약술을 담그곤 하였다. 그런데 남편은 한 잔 술에도 금방 벌게지고 나 역시 한 모금 술에도 얼굴을 찡그리곤 하니 술 담그기란 취미생활에 가까웠다. 돈 들여가며 술 사고 술병 사고 약재 사서 정성껏 담근 술은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를 넘기면서 진열대 위에서 관상용으로 있다가 내방객의 접대용으로, 애주가들의 선물용으로 변신해버린다.
여름이 짙어가자 카페에서 ‘노봉방(露蜂房) ’이라는 이름 모를 약재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노봉방’은 벌의 집이었다. 사람 머리통만큼이나 둥글면서 크고 누런빛으로 나무나 바위나 땅 속에 있으며 한국 전통의 민간요법 약재로 사용한다고 한다. 이 벌집을 따서 잘게 썰어 찌거나 말리거나 볶아서 약으로 사용하는데 예부터 땅 속의 숨은 보물이라 하였으며 특히 무덤속의 노봉방은 약효가 제일 높아서 10킬로그램에 300만원에서 500만원에 호가하고, 산삼보다 더 좋은 귀한 영양식품으로 여긴 만큼 그 약성이 탁월하여 호흡기, 소화기, 순환기, 뇌와 신경계 질환 등 여러 질환에 적용범위가 넓고 어린이, 병약자, 환자에 이르기까지 효능이 적용된다고 한다. 허준의 ‘동의보감’,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 북한 발행의 ‘동의학사전’에도 효능이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구미가 당긴 나는 노봉방으로 명품술을 만들어 소유하고 싶어졌다. 약술로 담그는 동물은 벌 외에도 많다. 뱀, 지네, 달팽이, 두더지, 사향, 사슴, 소, 자라, 거북이, 곰, 오소리, 태반, 쥐, 해삼, 염소, 해마 등 동물의 내장이나, 뿔, 꼬리, 눈알, 음경, 고환, 다리 등을 재료로 사용한다.
카페에 등재된 노봉방 사진을 보고 벌집 1.7킬로그램 25만원에, 장수말벌 48마리에 10만원, 도합 거금 35만원에 사들였다. 커다란 스치로폼 상자에 담겨온 담금주전용 유리 술병 안에는 35도 독한 소주 속에 둥그스름한 큰 벌집과 뽀얗고 오동통한 애벌레들이 6각형 벌집 속에 들어앉아 있고 노랗게 빤질거리는 몸통의 장수말벌들이 둥둥 떠 있었다.
아아! 소주 속에 사체가 되어버린 애벌레와 벌. 그들이 생물이고 생명체인 걸 왜 진작 염두에 두지 못했을까? 그리고 그 생명체가 소주 속에서 죽어갈 때의 모습이 상상되기 시작하면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죄를 저지른 느낌에 당혹한 나머지 판매자에게 전화로 통사정 이야기를 하고 물품을 되돌리는 조건으로 이미 지불한 대금의 일부만 환불 받기로 겨우 합의하였다. 부피가 큰 택배물이라서 혼자서 재포장하는 과정을 도저히 감추기가 어려워 남편에게 보였다. 평소 양약보다 한약을, 양의학보다 한의학을 존중하여 약초를 공부하고 생재, 건재 약재를 구입하여 가족들의 건강을 도모하던 마누라를 믿고 경비 들어가는 거며 내가 좋아하는 취미활동에 별 말 없었던 그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소리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매일 108배와 참선으로 아침을 열고 불교서적을 밑줄 긋고 메모까지 해가며 심독을 하는 등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활화하는 불자였기 때문이다.
남편은 물끄러미 담금병을 바라보다가 표정이 일그러졌다.
“ 나무관세음보살, 당신이 어째 …….”
평소 남편과 티격태격하면서 뭐든지 내가 옳다며 주장했던 나다. 오늘 이 일은 정말이지 내가 잘못 했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 짧아도 한참 짧았던 짓거리였다. 하물며 나 또한 자비의 종자를 위하여 살생을 금하라는 불타의 가르침에 따라 바퀴벌레나 파리도 죽이지 않으며 살아왔었다. 육식도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며, 못 하기도 하며 살아왔었다. 또한 근교 농가 주말에 가서 재배하는 농작물이 병이나 벌레로 죽어가면 농부들은 수확이 줄어든다며 아쉬워하지만 그 죽어가는 농작물을 생명체로 인식하여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던 나였는데 말이다.
비단 불교에서만 아니라, 일회성이며 유일성을 지닌 생명의 존귀성을 지극히 강조한 선각자가 있다. 아프리카 가봉에서 의료봉사를 한 노벨 평화상 수상자, 독일계 프랑스인 알버트 슈바이처는 의사이며 철학자이며, 음악가이며, 루터교 목사, 개신교 신학자이다. 제 1차 대전 때는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적국의 외국인으로 구금도 당하고 프랑스에서는 전쟁포로로 억류되어 본 적이 있다. 그런 체험을 바탕으로 쓴 저서『문화철학』에서 “나는 살고자 하는 생명체들에 둘러 싸여 있는 살고자 하는 존재”라며 인간인 나 자신의 생명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 대한 두려움과 존중심도 아울러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며 그는 벌레조차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하면 좋을까? 모든 동식물은 생태계의 한 생물에 불과한 것을……. 생태계란 살고자 하는 동물과 식물의 군집과 그것들을 제어하는 물리적, 화학적 환경요인으로 구성된 복합체계다. 그런 이유로 생태계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의 원리로 지탱할 수밖에 없다.
이 정글의 법칙은 인간과 인간끼리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힘없는 자는 강한 자에게 눌리고 없는 자는 있는 자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1등은 2등을 누르고 기고만장한다. 이기고 승리하는 자의 찬란한 기쁨 뒤에는 슬픔의 눈물이 있고 내 웃음의 행복 뒤에는 불행의 눈물이 있음을 누가 헤아려 줄 것인가. 인간과 동식물간의 관계 또한 그렇다. 소, 돼지, 개, 닭, 오리, 미꾸라지, 장어는 각각 갈비탕, 삼겹살 구이, 보신탕, 삼계탕, 오리구이, 추어탕, 장어구이라는 음식으로 인간에게 잡아먹힌다. 또 소나 밍크, 뱀, 양, 코뿔소 같은 동물은 가죽으로 거듭나기 위해 그 겉껍질들이 오늘도 내일도 벗겨지고 있지 않은가. 식물인 채소도 엄연한 생명체이건만 요리로 인간의 밥상에 오르게 되면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느끼며 목구멍으로 넘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살인행위는 몰인정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규탄하면서 동물이나 식물을 살생하거나 학대하는 행위는 당연하다며 죄악시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 위주의 사고다.
지금 바야흐로 가을철이다. 올해도 노봉방 헌터들은 마을과 산야를 돌아다니며 노봉방을 채취하고 담금술 매니아들은 노봉방주를 담글 것이다. 많은 벌들이 자신의 보금자리(벌집)와 새끼들(애벌레)과 먹이(꿀. 화분)까지 빼앗기고 또 산 채로 담금술에 넣어질 것이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나는 이 생태계에서 생명이 있는 하나의 생물로 존재하는 현실과 상황에, 비애에 젖고 무력감에 몸을 떨 뿐이다.
생태계. 그 비정하고 잔혹한 법칙을 무너뜨려서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는 세상을 여는 것이 과연 무지개 같은 꿈에 불과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