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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페레 공항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 10 25
누군가 어깨를 툭, 하고 치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눈떠보니 열차는 신도림역을 막 지난 참이었다. 맞은편 사람도 졸다가 깬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가방 위에, 그리고 내 허벅지 위에도, 초록색 껌 한통이 놓여 있었다.
툭. 다시, 툭.
키 작은 할머니가 열차의 통로를 지나고 있었다. 빨간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든 백발의 할머니는 살 테면 사고 말 테면 말라는 식으로 바구니에서 껌을 하나씩 꺼내서 툭툭 던지고 다녔다. 자리마다 한통씩, 자고 있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공평하게. 툭, 툭. 어떤 사람은 배에, 어떤 사람은 어깨에 맞았고 고개를 젖히고 자다가 목에 맞고 캑캑대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피곤한 퇴근길 지하철이었다.
열차 칸의 끝에 다다른 할머니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돌렸던 껌을 회수하려는 모양이었다. 껌만 도로 가져가는 경우도 있었고 껌 대신 천 원짜리 두어 장을 챙기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그럴 때도 할머니는 굽신거리며 인사를 하거나 고맙다는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오늘 하기로 한 일을 해내고 있을 뿐이라는 듯 지폐만 손에서 낚아채 갔다. 구걸이 아닌 거래, 그런 느낌이었다. 묘하게 당당한 그 기운에 압도되어 나도 껌을 사는 쪽을 택했다.
납작한 종이 포장 위에 고딕체의 반듯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자작나무로 만든 핀란드산 자일리톨' 자작나무, 핀란드, 자일리톨. 거기 적혀 있는 단어들 때문인지, 가본 적 없는 이국의 서늘한 바람이 묻은 편지를 받는 것만 같았다. 열어보니 둥글넓적한 껌 여덟 개가 투명한 캡슐 안에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중 하나를 눌러 은박 포장지를 벗겼다. 껌을 입에 넣자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기운이 입안에 퍼졌고 귀밑에서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본 적 없는 이국’이라는 말은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핀란드에 가본 적이 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해본 적 없다.
*
육년 전 여름. 나는 핀란드의 탐페레라는 작은 도시를 경유했었다. 목적지는 아일랜드 더블린이었는데, 가장 싼 항공편을 찾다보니 핀란드를 거쳐야 했던 것이다. 경유지인 탐페레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자정에 가까운 늦은 밤이었다. 그런데도 한쪽 벽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통유리창 밖이 대낮처럼 환했다. 처음으로 경험한 백야였다. 나는 그제야 내가 먼 나라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삼 개월 동안 더블린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면서 머물 계획이었다.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는 설렘과 동시에, 이제 준비해온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는 안도가 교차했다.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는 글쎄, 돌이켜보면 초라했다. 그래도 명색이 다큐멘터리 피디 지망생인데, 외국 한번 나가본 적 없다는 사실이 졸업학기를 앞두고서야 큰 결격사유처럼 여겨진 탓이었다. 취업박람회에서 진로 상담원은 내게 ‘취업전선에 뛰어든다’는 말을 들어봤느냐고 물었다. 말 그대로 전쟁이라면서, 나는 아직 거기에 뛰어들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준비운동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피디는 경쟁률이 높은 직종인데 내 스펙, 학교, 학점, 모든 것이 다 평범하다고 했다. 영어 점수는 높은 편이지만 요즘 이 정도는 많이들 가지고 있어서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면서.
우선 휴학을 했다. 해외연수는 갈 처지가 안 됐다. 이미 학자금 대출이 있었으니까. 돈을 쓰는 게 아니라 벌면서 외국 생활도 해보고, 젊을 때 사서라도 한다는 고생도 좀 해보고, 이 기회에 영어 실력도 더 키워보고…… 뭐 그런 기대를 안고 이것저것 물색해보다 흔히들 그렇듯 나도 워킹홀리데이를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여행사와 유학원을 들락거리고, 비자 발급에 필요한 서류를 떼러 다니고, 몇 번의 착오 끝에 현지의 일자리를 구하고 비행기 값을 모으는 데 한 학기를 다 보냈다. 나에겐 고심 끝의 결정이자 엄청난 도전이고 인생의 특별한 이벤트였는데, 다 준비하고 나서 보니 결국 남들이 한번씩 해보는 걸 나도 똑같이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게, 유행의 일부일 뿐이라는 게, 그저 준비운동을 마친 것일 뿐이라는 게,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졌다.
탐페레 공항은 규모가 작아서 공항이라기보다는 버스 터미널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출입국 절차를 위한 공간을 제외하고 나면, 사람들이 대기할 수 있는 홀에 까페 하나, 식당 하나, 키오스크 하나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늦은 밤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홀에 놓인 벤치에 앉아 항공편 이름과 이착륙 시간, 게이트가 나열된 모니터를 올려다봤다. 내가 타야 할 더블린행 저가 항공편은 다섯시간 반 뒤에 출발했다. 다섯시간 반. 말 그대로 시간을 때우는 것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옆자리에 놓여 있던 신문을 집어 들어 펼쳤다. 뜻을 알 수 없는, 유난히 점이 많은 알파벳들이 줄지어 있었다. 아마도 핀란드어일 것이다. 우리말과 핀란드어의 문법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예전에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었다. 나는 기사에 실린 사진을 보고 글자들의 뜻을 짐작해보면서 그것을 천천히 넘겨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돌았다.
“미안─해요, 제─가 당─신을 놀라─게 했군요.”
한 노인이 건조한 목소리의 영어로 말을 걸어 왔다. 얼핏 봐도 나이가 꽤 많아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이마며 눈가며 할 것 없이 얼굴 전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엷은 검버섯이 얼굴을 뒤덮다 못해 듬성듬성 난 머리카락 사이까지 피어 있었다. 아주 느린 호흡으로 말했으면서도 그 한마디를 뱉는 것이 힘겨웠는지,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세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노인의 얼굴을 좀더 살폈다. 녹색 눈동자를 가진 노인이었는데 그 초록빛 눈은 어딘가 남다른 면이 있었다. 어딜 보고 있는지 잘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나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노인은 내가 아닌 내 뒤쪽 모니터를 향한 것 같은 시선을 그대로 둔 채, 재킷 주머니를 뒤적여 자신의 비행기 티켓을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여전히 느릿한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저─는 앞이 거─의 보이지─않아요. 당─신이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그가 내민 티켓을 받아 들었다. 헬싱키행 비행기였고 앞으로 네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당신의 비행기는 네 시간 뒤에 출발해요. 여기서 더 기다려야만 해요.”
노인은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지 깊고 초점 없는 눈을 끔뻑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주섬주섬 캐리어와 배낭을 챙겨서 일어났다. 그가 앉은 채로, 그러니까 내 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몇─시에 비행─기를 타─죠?”
제 비행기는 다섯시간 반 뒤에 출발해요.
노인이 얼굴의 모든 주름을 동원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 그것─참 잘─됐군─요.”
우리는 공항 건물 밖으로 나가 주변을 한 바퀴 산책하기로 했다. 내가 한국에서 왔고, 해외여행이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노인이 그걸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대기 시간 동안 공항 안에만 있으면 핀란드에 가본 적이 없는 것이 되지만, 밖에 나갔다 와보면 나중에 핀란드에 가본 적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냐는 논리였다. 핀란드를 그저 경유하기만 한다는 나의 여정에 노인은 핀란드 사람으로서 약간 속이 상한 듯했다.
잘 걸을 수나 있을까? 노인의 제안에 속으로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지팡이를 사뿐히 짚으며 곧잘 걸었다. 축축 늘어지는 말투도, 듣다보니 적응이 되었다. 그는 한마디 하고 숨을 몰아쉬고 한마디 하고 또 숨을 몰아쉬면서도 끊임없이 말을 했다. 노인이 먼저 내게 자신을 꺼내 보였다. 젊은 시절에는 사진기자로 일했고 은퇴 후에는 사진작가로 활동했다는 것. 이년 전, 지병으로 쓰러진 뒤로 시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는 것. 더는 예전처럼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된 점은 슬프지만,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오─늘도 이─렇게 친절─한 숙녀─분이 저를 도와─주고 있─죠.”
그의 영어는 아주 느리기 때문에 알아듣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번이나 노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다시 한번 말해주겠느냐고 되물어야 했는데, 노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역시 그랬다.
“네? 다시 한번 말해주시겠어요?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요?”
내가 잘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계산해보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노인은 적어도 구십살, 많으면 백살쯤 먹은 셈이었다. 무려 2차대전에 참전했다는 노인과 대낮같이 밝은 밤에 산책하고 있자니 어쩐지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조명이 환히 켜진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걷다보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라 못 들었을 줄 알았는데, 노인이 그 소리를 듣고 크게 웃었다.
“앉을─까요?”
공항 주변은 줄기가 새하얀 자작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온통 푸르기만 했던 땅이 착륙하면서 하얗게 변하던 순간을, 마치 벨벳의 결을 다르게 넘기는 것 같았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나는 나무 아래 벤치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노인이 메고 있던 배낭에서 종이봉투를 꺼냈고 그 안에서 납작한 호밀빵을 집어 들고 내게 내밀었다. 처음 만난 사람이 주는 걸 덥석 받아먹어도 되나? 하는 생각도 잠시, 고소한 냄새가 허기를 돋웠고 나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마지막으로 기내식을 먹은 지도 반나절이 훌쩍 넘어 배가 무척이나 고팠다. 나는 빵을 받아 한입 베어 물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쫀득한 속에 알갱이가 씹혔는데 그건 분명히 쌀이었다. 빵 안에 밥이라니. 그런데 이렇게 맛있다니. 처음에 노인이 같이 대기 시간을 보내자고 했을 때 살짝 귀찮다는 생각을 한 것이 미안해졌다. 노인은 말하는 것보다 더 느린 속도로 빵을 씹고 있었다. 나는 몸도 성치 않은 노인이 왜 이렇게까지 힘들게 외출해서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지가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헬싱키에는 왜 가시는 건가요?”
“동─창회에 갑니─다. 제게는─ 일년─중 가─장 중요─한 행사─랍니다.”
“그렇군요.”
“항─상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참석─하지요.”
동창회 사이사이에 늘 부고 소식이 있고, 바로 그 이유로 참석 인원이 매년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그런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껄껄 웃었다. 이번에는 노인이 내게 물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하고 싶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다큐멘터리 피디가 되고 싶다고 했다. 노인은 어쩐지 크게 기뻐했다. 자기도 시력을 잃기 전에 다큐멘터리 보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다─큐멘터─리를 좋아─했나요?”
“글쎄요. 언제부터였을까요.”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러자 그 끝에 접시가 있었다. 새하얗고, 반짝반짝 광이 나는, 아주 커다란 접시. 위성 케이블 설치 붐이 일던 구십년대 중반,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어딜 가든 집집마다 케이블 위성 접시가 현대인의 필수품처럼 하나씩 달려 있던 시절이었고, 나는 중학생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텅 빈 집에 혼자 돌아와 교복 치마 밑에 추리닝을 덧입은 이상한 차림을 하고서는 손목에서 신발주머니를 빼지도 않은 채로 마룻바닥에 볼을 대고 누워 다큐멘터리 채널을 켜곤 했다. 그곳에선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자연 다큐를 비롯해 히트한 해외 다큐멘터리를 몇 번이고 재방송해주었다. 사막으로 북극으로 또 밀림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카메라의 워킹과, 마치 조물주와도 같았던 성우의 목소리. 나는 아마도 그런 것들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지구대기행’, ‘실크로드’ 같은 다큐는 한번 보고 재방송으로 보고, 보고 또 봐도 좋았다. 줄거리는 물론이고 내레이션을 거의 외울 정도였다.
나는 가정통신문 장래희망 기입란에 항상 ‘다큐멘터리 피디’라고 적어 냈다. 일학년 때도, 이학년 때도, 삼학년 때도. 다큐에 빠지고 나서부터는 또래 친구들이 전부 덜떨어진 아이들 같아 보였다. 생활기록부의 장래희망란이 의사에서 변호사로, 변호사에서 다시 건축가로 들쭉날쭉 매년 바뀌는 애들이 유치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휴, 쟤네는 ‘지구대기행’을 보기나 했을까. 만물의, 인생의 진리를 알까. 나 자신이 학교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인 것처럼 느껴져 우쭐했고, 동시에 따분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긴장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때만큼은 틀린 영어 문법을 쓰고 싶지 않아 오래오래 문장을 머리에서 굴리다 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다큐멘터리를 좋아해왔다고.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오직 이것밖에 없는 것 같다고.
“사─랑에─ 빠졌─군요.” “네, 사랑. 아마도요.”
노인은 나중에 다큐멘터리가 되면 꼭 핀란드에 다시 와서 오로라를 찍으라고 말하면서 다짐 받듯 덧붙였다. 반드시 겨울에 와야 한다고 말이다. 지금처럼 밝은 백야에는 오로라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추운 겨울이 돌아올 때, 하늘이 어둠으로 뒤덮여 있을 때, 꼭 이곳에 다시 들러달고 당부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약속하면서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오로라를 떠올렸다. 발밑 아득히 자리한 별에서 이곳을 향해 쏘아 올린 듯한 빛의 기둥. 정지해 있는 듯하다 어느샌가 저 멀리 헤엄쳐 가는 색색의 빛줄기들.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에도 언젠가는 밤이 찾아오고 또 오로라가 넘실대겠지.
좀처럼 어두워질 것 같지 않은 하얀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을 때 노인이 재킷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일회용 카메라였다. 시력이 나빠진 다음부터는 일회용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그걸로 내 사진을 찍어주고 싶다며 엄지손가락으로 필름을 말았다. 나는 괜스레 머리와 옷깃을 가다듬었다. 그가 나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는 셔터음 소리를 들으니 나도 갑자기 사진이 찍고 싶어졌다. 노인에게 허락을 구하고 어깨에 메고 있던 DSLR 카메라로 노인을 찍었다. 내 셔터음을 들은 그가 말했다.
“이─제 공항─으로 돌아─갑시다. 비행─기가 오고─ 있을 겁─니다.”
공항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노인은 자신의 짐가방을 활짝 열어 놓고 뒤적거리더니 커다란 스케치북과 마커펜을 꺼냈다. 그러고는 내게 집 주소를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방금 찍은 내 사진을 인화해서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글씨를 아주 커다랗게 써서 저시력 환자용 독서기를 통해 보면 자신도 글씨를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스케치북과 마커펜은 노인에게 수첩과 볼펜인 셈이었다. 나는 신입 방송부원 모집 대자보를 쓰던 실력을 살려 큼지막하게 주소를 적어나갔다. 사각사각 써내려가는 내 마커펜 소리를 들으며 노인이 얼굴에 퍼져 있는 주름을 더 쭈그러트리며 웃었다.
나는 노인의 비행기가 출발하는 게이트에 그를 데려다주었다.
“당신은 여기서 삼십분 정도 기다리셔야만 해요. 승무원이 안내를 시작하면 그때 들어가세요. 아시겠죠?”
노인은 문제없다고 거듭 말하며 어서 가보라고 손등으로 허공을 내저었다. 나는 바로 옆 게이트에서 수속을 하고 시야가 노인에게 닿을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서 뒤돌아보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치 날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노인의 얼굴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삼개월의 워킹홀리데이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는 더블린에서 두어 시간 떨어진 한 시골 마을의 재활원에서 지냈다. 절반은 몸이 불편한 노인들이 재활 치료를 받는 곳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치매 노인을 위한 호텔식 요양원이었다. 나는 매일의 객실 청소를 맡았다. 오전 시간 내내 청소기를 돌리고 매트리스 커버와 이불 시트를 빼내고 새 시트를 끼우고 하다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재활원 내부에 마련된 직원 숙소로 돌아가 간단히 요리해 먹고는 다시 사용된 시트를 세탁하고 널고 걷어서 개어놓는 일을 반복했다. 청소와 빨래, 빨래와 청소 속에 하루가 잘도 흘러갔다.
가뜩이나 낯선 환경인데 사람들과 말을 할 시간이 많지 않아서 처음에는 좀 외로웠다. 습진을 달고 살긴 했지만 돈은 꽤 벌었다. 그곳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서부터는 유럽 각국에서 온 동료들과 얕은 친분을 맺기도 했고, 주말에 더블린이나 갈웨이 같은 곳으로 짧은 여행을 다니며 이국적인 풍경과 자연을 눈에 담기도 했다. 나는 종종 DSLR 카메라에 여러 인종의 동료들을 영상으로 담으며 작은 흥분을 느꼈다. 비싼 채소를 못 먹고 밀가루만 먹어대서 변비에 걸린 동료들에게 한국에서 가져간 변비약을 나눠주고, ‘코리안 메디슨’ 최고라는 찬사와 함께 ‘아시아의 나이팅게일’이라는 별명을 얻고, 이따금 마음먹고 재료를 준비해 그들이 맛있다고 껌뻑 죽는 김밥을 말기도 하고, 또 가끔은 영어로 고심해둔 농담에 동료들이 웃었을 때 뿌듯해하기도 하면서.
공항에서 만났던 노인이 문득 떠오를 때도 있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의 국적이 핀란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방을 청소하다 저시력 환자용 독서기를 발견했을 때. 요양원 입소자 중 나이가 너무 많아서 죽음에 가까워져가는 노인의 방을 청소할 때. 아니면 무심코 카메라의 사진을 최근 찍은 것부터 거꾸로 넘겨보다 결국 맨 앞에 찍힌 사진인 노인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처음 만났을 때처럼 불쑥, 그가 내 어깨를 건드리는 것만 같았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날,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먼저 나를 반긴 건 우편함 바닥에 깔려 있던 핀란드 노인의 편지였다. 겨우 네 시간 남짓 만났을 뿐인데, 석달 내내 같이 지냈던 더블린의 동료들보다 핀란드의 노인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나는 헬싱키로의 짧은 여행을 마치자마자 편지를 보냈을 터였다. 그의 동창회는 어땠을지. 작년보다 적어진 참석자 수에 속이 상하지는 않았을지. 돌아오는 길에는 혼자서 비행기를 탔을지. 많은 것들이 궁금해졌다. 나는 마치 노인을 문 앞에 세워두고 석달이나 기다리게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허겁지겁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에는 나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노인의 짤막한 손편지, 오로라 사진이 인쇄된 엽서, 그리고 내 사진이 들어 있었다. 헤어지기 직전, 노인이 일회용 카메라로 찍어준 것이었다. 사진은 허리 즈음에서 자연스럽게 잘렸고 내 머리 위에는 적당한 여백이 남았다. 아무리 한때 사진작가였어도 그렇지,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구도를 잘 잡았는지 놀라웠다. 나는 책상 옆 두 번째 서랍을 열어 접착테이프를 꺼냈다. 손가락 길이만큼 잘라낸 테이프를 둥글게 말아서 책상 앞 창틀에 오로라 엽서를 붙여두었다. 그렇게 해두면 엽서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마지막 학기 개강 첫날, 등굣길에 학생회관에 들러 편지지와 우표를 사고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노인에게 답장을 쓴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문 앞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려고 했다. 분명히 그런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첫날부터 일교시 강의에 지각하는 바람에 학생회관에 들르지 못했다. 둘째 날에는 수강신청할 때 졸업 필수 과목을 하나 빼먹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학적과에 전화하고, 메일을 보내고, 교수실에 찾아가 사정을 봐달라고 부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셋째 날에는 드디어 편지지를 사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우체통에 넣는 것보다는 우체국에 직접 가서 부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려면 네시 반 이전에 가야 하니 또 다음 날로 미루게 되었다.
결국, 나는 학기 내내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그리고 학기 내내 방송국 신입 피디 공채에 원서를 넣었지만 전부 다 서류에서 탈락했다. 나는 피디 채용 정원이 이렇게 적은지 몰랐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피디가 되고 싶어하는지도 미처 몰랐다. 면접이라도 봤다가 떨어졌으면 이해라도 하지, 원서만 썼는데 바로 불합격 통보를 받으니 떨어진 이유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스펙만 볼 것이 아니라 중고등학교 생활기록부까지 다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이를테면, 그래도 육년 내내 생활기록부에 장래희망이 ‘다큐멘터리 피디’라고 되어 있는 사람은 적어도 면접은 한번 보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딱 한번 면접을 보기는 했다. 낚시 전문 케이블 채널이었다. 서류전형과 필기시험에 통과하고 실기면접까지 봤지만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던 마지막 질문은 면접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민물낚시와 바다낚시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마지막 기말고사를 앞두고서는 노인에게 답장해야겠다는 마음 자체를 완전히 접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다가 막차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마저 공부하기 위해 책상에 앉으려는데, 창틀에 붙여둔 오로라 엽서가 눈에 들어왔다. 답장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어영부영하다보니 노인이 편지를 보낸 지도 벌써 반년이나 지나 있었다. 핀란드의 날씨는 추워졌겠지. 대낮처럼 밝기만 했던 날들도 다 지나가고 이제 온종일 어둡기만 하겠지. 그곳엔 오로라가 있을까. 노인은 내 편지를 기다리고 있을까.
편지 생각만 하면 체한 듯 가슴이 답답했다. 다음 날 치를 시험은 성적의 칠십 퍼센트를 좌우하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이 과목은 반드시 A를 받아야 평균 학점의 소수점 앞자리가 바뀐다. 편지는 나중에 생각하자. 집중해야 해. 나는 빠른 속도로 엽서를 떼어냈다. 엽서의 뒷부분이 죽, 찢어졌다. 동그랗게 말아놨던 테이프가 창틀에 그대로 붙어 있었고 그 위에 하얗고 얇은 종이의 흔적이 남았다. 나는 편지 봉투를 꺼내 오로라 엽서를 다시 집어넣고 서랍을 닫았다.
그래, 사실 내가 답장을 해주겠다고 한 적은 없었잖아. 받은 거 자체로 의미가 있고, 또 노인은 벌써 나에 대해 잊어버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차피 늦은 거, 좀더 한가해지면 답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편지에 대해서는 되도록 잊어버리려 노력했다.
졸업 후 나는 한 외주 제작사에 취직했다. 아무래도 방송 일도 경험할 수 있고, 또 제작 분야에서 일한 이력이 다음번 방송사 공채 응시 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직원들이 나와 비슷한 마음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거의 자원봉사나 다름없는 식으로 일했다. 아르바이트할 때와 받는 돈 자체는 비슷했지만 여기서는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일했기 때문에 시급으로 따지면 훨씬 적었다. 차라리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초라하다고 여겨질 때였다. 주로 아침방송의 십분짜리 코너를 제작했는데, 육 밀리 캠코더를 들고 다니며 작가들이 써준 대본대로, 시키는 대로 찍고 편집했다. ‘전국의 원조 맛집을 찾아서’라는 이 코너에서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라고는 “맛이 어떠세요?” “큐, 하면 맛있다고 하는 거예요” 같은 것들이었다. 시골 어르신들이 육 밀리 캠코더를 든 나를 보고 ‘아이고, 감독님’이라고 불러줄 때는 민망하면서도 살짝 기분이 좋긴 했지만.
월급이 두달째 밀렸을 때 아빠가 쓰러졌고 엄마가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외주 제작사 일의 비중을 줄이고 아르바이트의 비중을 늘려나가다 결국은 풀타임으로 취직했다. 큰 기업은 아니지만 건실하다고 알게 모르게 소문난 식품회사의 회계팀이었다. 그나마도 경제학을 부전공해서 가능한 일이라며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최종 합격 통보를 알리는 문자메시지를 받았을 때, 아마 밤 열시였을 거다. 소식을 들은 엄마는 아빠가 잠든 육인실 병상에서 숨죽여 울었다고 했다.
연봉계약서에 서명하던 그 순간, 씁쓸한 감정이 들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기뻤다. 방송국이고 피디고 뭐고 지긋지긋했다. 대신 4대 보험이 어쩌고 하는 말들과 상여금, 특근수당, 연차와 실비보험 같은 단어들이 그렇게나 따뜻하고 푹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수습 기간이 끝나고 정직원이 되면서 가족 의료비도 지원해주었다. 아빠는 그 돈으로 수술할 수 있었다.
신입사원 교육을 받고, 다음 해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똑같은 교육을 해주고, 이따금 회식을 하고, 연말정산 시즌이 다가오면 야근을 하고, 과장님이 소개해준 남자와 두어달 만나다 헤어지고…… 그런 나날들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이어졌다. 졸업한 지 육년 만에 학자금 대출을 완납하던 날에는, 유명하다는 베이커리에서 조각 케이크를 하나 샀다. 방문을 닫고, 불을 끄고, 노트북으로 ‘북극의 눈물’ DVD를 재생했다. 너무 여러번 들어 익숙한 배경음악이 깔렸다. 나는 모니터에서 흘러나온 네모난 빛 안에 케이크 접시를 두고 천천히 한입씩 떠먹었다. 혀끝에 닿은 생크림이 달았다.
*
야근하다 들른 회사 근처 식당에서, 저녁 뉴스 화면 아래로 지나가는 신입 피디 채용 공고 자막을 본 건, 일주일 전이었다.
그날 회사 탕비실에서 뜨거운 물에 털어 넣은 믹스커피가 다 식어버릴 때까지 저어대다가 그대로 개수대에 쏟아버리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인터넷 브라우저를 켜고 방송국 홈페이지 주소를 입력한 뒤 엔터키를 눌렸다. ‘신입 피디 공개채용’이라는 팝업창이 떴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는 어느새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양식을 채워 넣고 있었다.
오랜만에 써보는 이력서였다. B여자고등학교 방송반 부장, I시 청소년 영상물 공모전 은상 수상, C대학 교내 방송국 부국장, 아일랜드 워킹홀리데이, M프로덕션 근무, D식품 경영지원부서 재직 중. 또 뭐 없나? 공인 영어 점수는 이미 만기된 지 오래였다. 있으나 마나 하다는 프리미어 자격증과 MOS 자격증을 쓰고 나니 더 쓸 게 없어 이력서가 휑해 보였다. 운전면허 2종 보통을 썼다가, 지웠다.
자기소개서는 총 다섯 문항이었는데, 질문은 육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자신이 반드시 피디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기술하시오. 인생에서 가장 도전적이었던 경험과 그로 인해 느낀 점을 기술하시오. 리더십을 발휘했던 경험을 3개 이상 기술하시오. 그중에 가장 난감해서 말문이 막혔던 질문은 이거였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했던 경험과 그 이유를 기술하시오.
나는 하얀 바탕에 깜빡이는 커서만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 무언가 보이려다가, 말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브라우저 창을 닫고 노트북을 꺼버렸다. 앞으로 그 방송사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일은 다시 없을 거라고, 마음먹었다.
*
퇴근하자마자 단물이 다 빠진 자일리톨 껌을 휴지통에 뱉어버리고 코트와 가방을 방바닥에 내팽개쳤다. 책상이 놓인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틀 위에 붙은 테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래 전에 저곳에 엽서가 붙어 있었다는 걸, 테이프 위의 얇은 종이 찌꺼기가 말해주었다. 아무렇게나 찢겨 남겨진 종이는 때가 타서 새카매졌고 테이프는 접착력이 거의 다해 너덜거렸지만, 어쨌든 여태 그곳에 붙어 있었다. 나는 테이프 위에 남은 꼬질꼬질한 종이의 흔적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천천히 두번째 서랍을 열었다. 통장과 여권을 들어내고 그 아래 깔렸던 노트 두권과 책 한권을 또다시 들어냈다. 그리고 맨 아래, 핀란드 노인이 보냈던 편지 봉투가 모습을 드러냈다.
깜깜했다. 그곳에 편지 봉투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어서 봉투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쓰였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노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던 일을 없었던 일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수록 정말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가 이미 죽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해가 지나고 두해가 지나고, 노인이 정말 그렇게 되었다면, 그걸 내가 알게 된다면…… 나는 미안해서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봉투를 꺼냈다. 열린 입구를 아래로 향하게 기울이자 툭, 하고 내용물이 쏟아졌다. 뒷면이 찢긴 오로라 엽서, 그리고 육년 전의 나였다. 사진을 집어 들었다. 지금은 절대 시도할 것 같지 않은, 유행 지난 빽빽한 일자 앞머리가 눈썹 위에 가지런했다. 내가 이랬었나? 촌스러웠지만 그래도 귀여웠다. 세상에, 사진 속의 나는 팔자 주름도 없다.
그런데 팽팽한 것은 사진 속 내 피부뿐만이 아니었다. 들고 있는 사진이 이상하게 빳빳하게 느껴졌다. 무심코 사진을 뒤집었다. 뒤에 두꺼운 종이가 덧대어져 있었다. 점이 많은 알파벳이 쓰여 있었는데, 읽지는 못했다. 글씨가 아닌 그림을 보고 그게 시리얼 상자를 잘라서 붙인 거라는 걸 알았다. 이게 왜 붙어 있지? 나는 편지를 꺼내려 봉투를 다시 집어 들다가 조금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왼쪽 위 발신인 주소를 쓰는 곳과 오른쪽 아래 수신인 주소 쓰는 곳 사이에, 봉투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주 흐릿했다. 주소와는 다르게 연필로 적었는지, 지워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봉투를 좀더 가까이 가져와 대각선으로 쓰인 글자를 읽어나갔다.
Do not bend (Photo inside) 구부리지 마시오 (사진이 들어 있음)
말 그대로 노파심이라는 게 이런 걸까. 사진이 지구 반대편 먼 길을 거쳐 가는 동안 행여나 구겨질까, 노인은 많이 걱정했던 것 같다. 나는 시리얼 상자를 가위로 자르고, 그것을 풀로 사진의 뒷면에 단단히 붙이는 노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얀 밤, 태양이 뭉근한 빛을 내는 창가에 앉아 가위와 풀과 사진 그리고 편지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더듬거리는 노인의 쭈글쭈글한 손을.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오래 울었는데도 이상하게 진정이 잘 되지 않았다. 심장이 물에 뜬 듯 출렁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봉투 안에 든 편지를 꺼내서 펼쳤다. “글씨를 힘차게 쓰던 용감한 한국의 숙녀분께.”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구나. 나는 마치 그 편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노인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한줄 한줄 읽어 내려갈 때마다 알 수 없는 곳을 향한 미안함의 눈물이 자꾸 흘렀다. 편지의 끝에는 연락하고 지내자는 말과 함께 숫자 열세개가 적혀 있었다. 노인이 전화번호까지 적어줬었어? 왜 나는 이런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대체 왜.
충동적으로 휴대폰을 들어 편지에 적혀 있던 번호를 입력한 다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계속될 때마다 휴대폰을 든 손이 덜덜 떨렸다. 어떡하지……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저음의 느릿한 여자 목소리였다. 핀란드어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상대방에게 영어를 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가 이번에는 영어로 내가 누구인지 물었다. 나는 편지 봉투 위에 적힌 이름을 내려다보았다. Yarn이라고 쓰여 있었다. 노인의 이름이 얀이었구나. 내가 물었다. 얀이, 그곳에 있습니까? 수화기 너머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 이스─ 리빙.”
“뭐라고요?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히─ 이스─ 리─빙.”
리빙? living인가? leaving인가? 어디로 떠났다는 거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다시, 다시 한번만 말해주시겠어요?”
“히─ 이즈─! 슬─리─핑!”
그가 있었다. 자고 있었다.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육년 전에 탐페레 공항에서 얀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오, 당신을 기억해요. 나는 얀의 아내입니다. 당신이 도와줬던 이야기를 들었어요. 고마워요. 얀이 곧 일어나면 아침식사를 하면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겠어요.”
나는 봉투에 적혀 있는 주소가 맞는지 여러번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노인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부인과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아침밥도 먹고, 늦잠도 자면서.
나는 눈물을 닦고 내가 가진 가장 커다란 노트와 마커팬을 꺼냈다. 그리고 큼직한 글씨로 미루고 미뤘던 편지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D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