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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목(碑木)
초연히 쓸고 간 깊은 계곡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 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
잊혀지지 않는 비목(碑木)
해마다 6월이면 6.25전쟁이 생각나고, 고향에서 겪은 피난시절이 떠오른다. 아름다운 고향 산야 이곳 저곳에 배어 있는 전쟁의 크고 작은 상흔들은 세월과 함께 영원히 지워지겠지만, 아직도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며 이 여름을 괴롭히는 애잔한 추억이 있다.
6.25 때 서울서 할아버지 댁이 있는 안동 풍산으로 피난 와서 풍북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전쟁 중인 50년대 초 어느 가을이었다. 그 때는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면 인근에 있는 학교에서 육상선수단을 파견하여 학교대항 400m계주 경기를 벌였다. 우리 학교는 풍산면에 있는 다른 학교와 서로 원정경기를 가졌는데, 한번은 행정구역이 다른 예천군 호명면에 있는 호명북부국민학교까지 원정경기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 하기야 안동군 풍산면과 예천군 호명면은 접경하여 있고, 더구나 우리 학교는 접경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호명북부국민학교가 그리 멀지는 않았다. 접경에 가까운 호명면 직산1리의 학생들은 행정구역이 다르지만 거리가 가까운 우리 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호명북부국민학교의 운동회 날이었다. 우리 학교 선수단과 응원단은 지도교사와 함께 안동과 예천의 접경을 이루는 피실재를 넘어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가느뫼(艮山) 마을 앞을 지나 낙동강 지류 내성천의 고평다리를 건너 호명북부국민학교로 원정경기를 하러 갔다. 그 때의 고평다리는 목조였다. 아마도 전쟁 중 파괴되어 미(美) 공병대가 임시로 가설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처음에는 수면과 가까이 낮게 가교를 설치하고 자동차 바퀴가 닿는 자리에 유공철판(有孔鐵板)을 깔았는데, 나중에는 역시 목조였지만 높고 튼튼한 다리를 놓았었다. 물론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다.
행정구역이 다른 학교까지 원정경기를 간다는 것이 그 때는 꽤나 먼 곳에 가는 느낌이었다. 칭기즈칸이 유럽 정벌에 나선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당시 우리 학교 선수들의 실력은 대단했다. 야생마처럼 빠른 선수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 학교 응원단도 제일이었다. 오죽했으면 이웃 풍서국민학교에 다녔던 친구가 우리 풍북국민학교의 응원가를 환갑이 지나서도 기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풍~북의 건아들은 제비보다 빠르리~♪” 목청껏 불렀었다.
운동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고평다리를 건너서 국도를 따라 산모롱이를 돌 때 동행하던 선생님이 “우리, 광석사 절 쪽으로 가 보자”고 하시더니 오른쪽 가느뫼 마을을 관통하여 마을 뒷산인 광석산 오솔길을 올랐다. 마침내 광석사 절이 보였다. 절이라기보다 암자 정도의 작은 규모다. 절 경내를 구경하다가 텃밭 한 쪽에 길쭉한 막대 두 개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빛바랜 막대에 희미한 먹글씨가 씌어 있었다. 비목(碑木)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목 아래 땅이 약간 봉긋하게 솟아 있고 잡풀이 듬성드뭇 돋아 있었다. 비문은 한자(漢字)였는데, ‘滿洲 吉林省…’ 이라고 어렴풋이 기억된다.
누군가 인민군 묘라고 했다. 그런데 인민군이라면 주소가 북한 어디일 텐데 왜 만주일까? 그럼 중공군인가? 아니다. 중공군은 예천 이곳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자료를 찾아보니 전쟁 전 만주의 조선족 의용군 수만 명이 인민군에 편입되어 전쟁 초에 참전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 묻혔다는 인민군이 바로 그 인민군일 수도 있겠다.
광석사에서 내려다 보이는 골짜기가 바로 피실(稷谷)이다. 피실은 6.25격전지였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예천서 안동 쪽으로 고평다리를 건너 옛 국도를 따라 피실 골짜기를 조금 올라오다가 길 왼쪽 아래 밭 구석에 북한군 탱크 한 대가 한 동안 처박혀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대영식품 공장이 들어서 있다. 요즘도 차를 타고 그 옆을 지날 때는 그 탱크와 함께 광석사의 비목이 떠오른다. 비목의 주인이 그 탱크의 운전병들이 아니었을까?
광석사의 비목은 반 세기를 지난 지금까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 전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그 사연을 알렸다. 늦었지만 혹시 한 줌의 유골이나마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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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