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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
지상강좌
백 년 전의 미래
오암 박길수_서울교구, 신인간사 이사
1.
지난해부터 우리
삶은 하루하루가 힘겨운 싸움의 연속이고,
또 그런 점에서 또 하루하루가 소중한 것을
매순간 절실히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두 번째 맞이하는 봄도,
겉으로 보기에는 전과 다름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 천도교인에게 봄은
단순히 한 계절의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봄에 교인은 교인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그리고 나라와 세상은 나라와 세상대로
새로운 사람, 새로운 교회, 새로운 나라와 세상으로
다시개벽하실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오늘은 “백 년 전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백 년 전이라고 하면 과거의 일인데,
그것을 ‘미래’라고 하면
어색하게 느껴질 거라 생각합니다. 그 의미는
이 설교를 통해서 하나씩 풀어가 보려고 합니다.
수운 대신사께서 동학을 창도한 1860년이
포덕 원년이고 올해가 포덕 162년입니다.
그 162년의 역사 속에
천도교와 천도교인은 ‘백년’이라는 이름의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치르며 지나왔습니다.
여기서는 그중에 천도교 역사에 있었던
백주년 기념사업의 역사를 짚어 보겠습니다.
천도교 역사에서 최초의 백주년 행사는
포덕65(1924년)에 있었습니다.
대신사탄신백주년 행사입니다.
천도교인들은 3.1운동 이후 어려움에 처한 교단을
대신사탄신백주년을 맞이하여 일신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성금 모금을 하여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답지한 성금의 내역은
현재 성금록으로 보관되어 있으며,
당시 교호(敎戶)의 구성이나
교인들의 인구학적 분포를 가늠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입니다.
또한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은,
1921년에 준공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중앙대교당과 함께,
시일식을 비롯한 교회 의식은 물론이고,
천도교청년당의 어린이운동과 청년, 여성운동,
그리고 각종 일반 사회단체의 집회,
문화공연 등의 장소로 활용되면서,
1920년대 천도교 신문화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공간’이 한 시대의 교회(단체)의
흥망과 성향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는,
그 핵심 빌미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두 번째 백주년은
1927년 해월신사 탄신백주년입니다.
‘해월신사탄신백주년기념관’을 건립하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대신사탄신백주기념관이
공연장을 염두에 두고 건설되었다면,
해월신사백주년기념관은
“서적종람관(縱覽館)”으로
활용하려고 계획하였습니다.
당시 기록들이 그 점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서적 종람관은 지금의 도서관과 박물관입니다.
백 년 전의 천도교 도서관 건립의 꿈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꿈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해월기념관 겸 천도교도서관”이
명실상부한 모습으로 자리매김 되는 날이
교회 중흥의 작은 전기가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행하게도 몇 년 전에
우선 천도교자료실을 이름만이라도
“천도교중앙도서관”이라는 기관으로 변경하여,
후속작업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백주년은 포덕101년(1960)
동학 창도백주년 기념사업이었습니다.
기념식과 식후 기념공연 외에 특별한
기념사업을 전개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부터 60년 전인 이 시기를
직접 기억하는 원로들도 계시지만,
그해 4.19혁명으로 교단 안팎의
여러 혼란한 상황이 가중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좀 더 넓게 보면,
일제강점기 말기-해방정국-6.25전쟁-독재체제 하에
교단 운영의 철학과 진로의 혼선 등이
‘창도백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계기를
맥없이 보낼 수밖에 없게 한
원인(遠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창도백주년을 맞이하여 천도교여성회에서
대신사 순도 이후 폐허화되었다가,
최윤 사모님이 최소한도의 기거처로 사용되던
용담정을 재건하였고,
창도백주년 전후하여 착수한
<천도교백년약사> 상권이 1970년대 전후에
간행된 것이 기념사업을 대신하였습니다.
천도교백년약사 하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으로 간행되지 못한 채,
몇 년 전에 《천도교백년약사》라는
통합본으로 간행되었습니다.
백년약사 하권은
그것이 나와야 할 시점으로부터 50년,
반세기가 지난 이 시점까지도
간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 천도교가 처해 있는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역사인식이
아직도 통일되지 못하고 있음과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지금이라도 천도교백년약사 하권과
백년부터 백오십년까지 역사서가 나온다면,
이는 진부한 역사관이나 역사 자료의 나열이 아니라,
새로운 천도교 역사관에 입각한
새로운 역사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포덕102년(1961)은
의암성사 탄신 백주년이었습니다.
창도백주년 사업은
국가적 혼란 상황에서 제대로 기념하지 못하였지만,
그 이태 전(1959)에 묘소를 수찬하고,
묘비를 건립하여
당시 이승만 대통령까지 방문한 일과
충북 청원군 대주리에 유허비(1962)를 세운 일,
그로부터 몇 년 후
탑골공원에 의암성사 동상을 세우게 된 것(1966),
의암성사 전기를 간행(1967)한 것이
그나마 탄신 기념에 값하는
의미 있는 사업의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네 번째 맞이한 중요한 백주년은
포덕105년(1964) 대신사 순도백주년이었습니다.
이때는 대구 달성공원 내에서
대신사 동상을 제막하였습니다.
이 사업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회의장은 물론이고
경북지사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이 사업의 고문이나 위원으로 참여하여
성대한 순도 기념식을 거행함으로써,
천도교가 대신사 순도 백년 만에 국가적으로
실질적인 공인이 되는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다섯 번째 백주년 기념사업은
포덕134년(1993)의 보은취회 백주년과,
포덕135년(1994)
동학혁명백주년 기념사업이었습니다.
대신사탄신백주년에 이어 이때도 교단 내적으로
대대적으로 교인들의 성금 모금이 진행되었습니다.
동학혁명 백주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단의 전위단체로서
동학민족통일회가 1991년 재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주년 기념사업은
기념관 건립 등 교단 내부 문제로
좋은 기회를 크게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국제학술대회 개최, 기념논총 간행,
탑골공원에서 1백주년 기념식 거행 등을 하였으며,
해를 넘겨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이
전주에 세워진 것은 다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1997년 12월 24일 인일기념 백주년이었습니다.
이때는 천도교홈페이지를 개통하고,
수련복을 제정하였으며,
그리고 슬라이드 영상상연회,
자료 및 도서 전시회 등을 개최 등
문화적인 측면에서
교단의 분위기 반전을 시도하였습니다.
1998년의 해월신사 순도 백주년,
1999년의 소파 방정환 탄신 백주년,
2004년의 갑진개화운동 백주년,
2005년 천도교현도백주년 등
굵직굵직한 백주년의 역사적인 계기들이 있었습니다.
교세가 약해진 현실에서
그날 하루나 전후 이틀 동안의
기념식과 식전 식후 행사를 치르거나,
외부 초청강사의 특별강연,
기념 논문집 간행 등으로 갈음되거나,
다른 사회단체가 진행하는 기념행사에
‘손님’으로서 참여하는 정도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기억할 만한 성과를 남긴 것은
거의 전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의 백주년 사업은
삼일운동백주년입니다.
교단에서는 백 년 전 3.1운동 당시처럼
천도교인은 물론 기독교, 불교 등의
다른 종단 주요 인사까지 참여시켜
공동대표 33인과 수백 명의 추진위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범국가적, 범시민적 백주년 기념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갔습니다.
만 3개년에 걸쳐 매년 추진된 기념사업은
기념자료집 간행, 백주년 기념식과 등
다채로운 사업을 전개하였고,
3.1운동의 주체로서의 천도교의 기여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일부 바꾸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가장 핵심적으로 추진하던
3.1운동 백주년 기념관 건립을 달성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나아가 범국가적인 백주년 기념사업은
뒤늦게 정부가 주도하고 나서면서
3.1운동 백주년과
임시정부 백주년 기념사업으로 분산되면서
국가적 차원의 의미 있는 변곡점을 만들어 내는 데는
한계를 노정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2019년 9월에 맞이하는
천도교청년회 창립 백주년 행사도
전야제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이어서 지난해는
우리 교단의 출판 역사상 중요한 <개벽> 잡지
창간 백주년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이에 대한 기념 학술대회가 개최되었지만,
교단 내에서는
의미 있는 사업을 준비하다가 예산 문제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2.
이상으로 포덕 161(2020)년까지
천도교 역사에서 맞이하였던
백주년의 기념사업, 기념행사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역사에서 1924년 대신사출세백년기념사업
1964년의 대신사순도백주년기념사업,
그리고 1994년 동학혁명백주년기념사업과
최근의 삼일운동백주년기념사업을 제외하고
우리 교단에
뚜렷한 변곡점을 남기지는 못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3.1운동 이후 거의 매년 백주년으로 기념할 만한
역사적인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그것들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올해 2021년은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천도교소년회 설립(1921.5.1) 백주년입니다.
또 천도교중앙대교당
준공(1921.2.28) 백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022년은,
어린이날 선포(1922.5.1) 백주년이 되는 해이며,
의암성사 순도 백주년입니다.
2023년은 개벽사의 대표적인 잡지인
<어린이>지 창간(1923.3.20.) 백주년이며,
천도교소년회가 주축이 되어
범사회적으로 전개한
어린이날 행사(1923.5.1)의 백주년입니다.
2024년은
대신사 탄신 이백주년(1824.10.28.)이며
천도교여성회 창립 백주년이기도 합니다.
2025년은
천도교유지재단 백주년
(1925.4.4-천도교재단기성회 발기회)입니다.
2026년은
우리 교단의 기관지인 <신인간> 창간 백주년이며,
또 이해는 천도교가 핵심 역할을 한
6.10만세운동 백주년이며,
<개벽> 폐간 백주년입니다.
올해부터 앞으로 만 5년의 시간은
우리 교단의 백년사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하였던 1920년대 초반기의
백주년이 잇달아 전개되는 기간입니다.
물론 교인 여러분 중에는
백주년이니 기념사업이니 기념행사니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이고,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주년의 계기들은,
특히 올해부터 맞이하는 6년 동안의
천도교 최전성시대의 백주년 기념들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활용하느냐에 따라 침체한 교단의
발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5년 동안 잇달아 전개되는 백주년의 기념은
‘백 년 전에 준비된 미래’로서,
우리 천도교가 스스로 새로워지고,
천도교의 힘으로
세상을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는 계기,
한마디로 다시개벽의 계기로 삼아야 하고,
또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백 년 전 3.1운동 당시,
1919년 3월 1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3.1운동은 우리나라의 국권이
일제에 의해 빼앗기던 때부터
의암성사께서 10년 동안 준비해 온 일이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백년 전의 미래’라고 붙인 것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즉 ‘백년 전의 미래’라는 말씀의 첫 번째 비밀은
바로 성사의 10년 준비 기간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사의 3.1운동 준비를 이야기하면,
우이동 봉황각에서 483명의 지방 두목들에게
49일 기도를 통한 이신환성의 수련을 시킨 일만
되풀이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사의 큰 뜻은
단순히 국권을 회복하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원대한 후천 다시 개벽의 사상과
정신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있었다는 점을
새롭게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백 년 전 1918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기입니다.
그리고 약 20년이 지난 1940년 전후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이 1918년부터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1940년대까지를 역사학자들은
전간기(戰間期), 즉
전쟁과 전쟁 사이 기간이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는 오늘의 근대 세계의 질서가
실질적으로 형성된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 산업혁명과 제국주의시대를 거치며 발전해 온
서구 자본주의 중심 세계가 완성된 때라는 것입니다.
서구적인 근대문명의 완성기입니다.
저는 성사께서 읽었던 세계대세의 흐름은
단순히 ‘민족자결주의’ 정도가 아니라,
이렇게 서구적 근대문명이
‘완성’과 더불어 몰락이 가시화되는 시기,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 - 새로운 시대가
바야흐로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가시화되는 문명사적 전환, 천도교 식으로 말하면
다시개벽의 구체적인 현실화 시기라는 점을
주목했다고 생각합니다.
의암성사께서 3.1운동을 준비하던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시기가
근대문명이 완성기이자 몰락의 시점(始點)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가지 현상은
스페인 독감과 제1차 세계대전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코로나19와 기후위기를 인류 전체의
전쟁 상황으로 맞이하고 있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러한 시대 대세를 읽으신 성사께서는
바로 그 10년의 시간에
단지 국권 회복이 아니라,
거대한 근대문명 이후 세계, 즉
후천개벽, 다시개벽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준비를 통해 우리 교단은
1919년에 3.1운동을 전개하였고,
1937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킬 때까지
약 20년 동안은 우리 교단의 활동이
가장 왕성하게 전개하였던 이유입니다.
당시 일제의 엄혹한 관리 체제 하에서
숱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수많은 사회운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단지 ‘민족 독립’ 만이 아니라,
‘시대 대세의 순응 병진’하는 것, 즉
다시개벽, 인문개벽의 절대적 호기를
실기(失機)할 수 없다는 절박한 시대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1926년 이후
급격하게 위축되기 시작한 천도교단의 내적 역량과
일부 지도자의 노선 변경 등으로 말미암아,
1931년의 만주사변으로 치달아가는
동아시아 정세에 자주적으로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을 드러내었고,
1945년 일본 패망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의 노력들은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대 흐름을 일별할 때,
1920년부터 만 5년 동안의 천도교 역사는
범상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올해부터 우리가 맞이하는 백주년 기념의 역사들,
즉 지금부터
백년 전 1920년대에
천도교단과 청년 등이 전개하였던 여러 가지 노력들은
이러한 문명사적인 전환,
우리 천도교의 용어로 말하면
후천개벽, 다시개벽을 위한
백 년 전의 미래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이제 이야기를 방향을 다시 한 번 돌려서,
저는 1920년대
천도교의 최전성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10년에 창간된 천도교회 기관지
<천도교회월보>을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백년 전의 미래’의 핵심 실마리가
그 <천도교회월보>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천도교회월보>는 의암성사께서
후천개벽, 다시개벽을 준비하던
바로 그 해에 창간이 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저는 지난해부터
1910년도에 창간되었던 <천도교회월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1910년부터 1922년
성사께서 환원하시던 기간 동안 천도교회월보는
150호까지 발행되었습니다.
그 속에는
당시 성사의 말씀이 곳곳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성사께서 <천도교회월보>에
직접 글을 싣지는 않았지만, 당시 필자들이
성사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인용하거나,
또는 그 말씀을 떠올리면서 글을 써 나갔습니다.
현재 <의암성사법설>에 편성된 성사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글로 쓴 것’이어서
(물론 구어체, 문답 형식도 일부 있지만)
상대적으로 ‘문어적(文語的)’이며 사변적인 데 비하여
<천도교회월보>에 인용된 성사님 말씀은
<해월신사법설>처럼
구어체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고,
따라서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 심오한 철학과
원대한 시대인식이 모두 담겨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거기에 ‘천도교회월보’ 기자들이 인용한
성사의 말씀들을 종합하여 그 특징을 한마디로 하자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시체(時體) 말로는 개조(改造)라 할 수 있고,
또 그때 천도교가 주력하던 시대 용어로 보면
‘개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당시(1910년대) 성사 말씀은
“천도교의 종교성과 사회성”에 대한 말씀처럼,
천도교의 사회 참여 또는
독립운동을 염두에 둔 말씀도 많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천도교인들이 학문에
열심을 다하여야 한다는 말씀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부는 신학문, 즉
새로운 공부여야 한다는 것이고,
새로운 종교로 나아가는 공부여야 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공부여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공부여야 한다는 것이고,
나아가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는
공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나 시대나 사람이나 세상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여기서 더 주목되는 것은
‘새로운’이라는 수식어입니다.
이 ‘새로운’과 유사한 말로
‘장래(將來)’라는 말도 많이 쓰이고,
또 직접적으로
‘미래(未來)’라는 말도 자주 등장합니다.
이러한 성사의 말씀을 전하는 기자는
황산 이종린, 야뢰 이돈화가 대표적인 인물이고
그 밖에도 여러 필진들의 기사가
성사의 말씀을 인용하며 전개됩니다.
성사가 훈화 말씀을 하시는 자리에 함께 있던 분들이
제각기 자기의 생각에 따라
중요한 대목을 발췌하여 글을 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새로움의 내용입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람, 새로운 세상의 내용이
백 년 전 그 당시뿐만 아니라, 백년 후의 오늘,
오늘 이후의 내일을 향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이
오늘 제 설교의 핵심입니다.
현재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19 상황으로 말미암아
인류 전체가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행군의 길에서 우리는
인류의 삶의 양식이 전면적으로 재편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누구나 절감하고 있습니다.
이제 인류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인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새로워질 것인지를 두고
많은 담론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담론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술의 발전과 보급도
하루가 다르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환의 본질이 무엇인지,
어떻게 전환해야 하는지,
어느 곳으로 전환해 가야 하는지
아직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시대 인류에게 요구되는
전환의 본질적인 내용은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특히 <천도교회월보>에서 뚜렷이 발견되는
천도교 시대의 천도교의 교리적 전개,
개벽의 비전 속에서 이미 선행적으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리고 올해부터
매년 다가오는 백주년 기념의 역사들은
바로 이렇게 백 년 전에 예고되고, 예비 되고,
예정된 미래를
하나씩 성취해 나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 요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사께서
1919년 3.1운동을 앞두고 두목들을 모아 놓고
하신 말씀의 의미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이란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되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라는 말씀입니다.
성사의 이 말씀은 단지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이라는 당시의
직접적인 시대적 과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되었습니다.
독립정신을 심어준다는
사회적 역사적 운동의 구호가 아닙니다.
이미 1900년 성사께서 일본으로 망명하던 당시부터
일관되게 가지고 있던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을 향한
개벽운동의 그 정신, 천도교의 종교적 이상과 이념을
3.1운동을 통해 심어주겠다는,
종교 지도자요, 천도교 제3세교조로서의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4.
<천도교회월보> 안에 담긴 성사의 말씀,
백 년 전 과거에 이미 준비되어 있던
백 년의 미래를 위한 많은 얘기 중,
세 가지만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전 지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만 할 뿐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차원, 지구적인 범위, 지구적인 규모에서
이 세상의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전 지구적이라는 것은
단지 지리적인 범위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 이외에 자연환경까지를 사고하는 것입니다.
경천이라고 할 때의 하늘적인 것,
경인이라고 할 때의 인간적인 것,
경물이라고 할 때의 사물과 사건에 이르기까지,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동시에 고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코로나19를 맞이하면서
전 인류적인 과제로 대두하고 있는
세계적인 인식의 전환 움직임과
정확하게 동일한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바로 그 점에서 “수운대신사나 해월신사의 말씀,
가르침, 언어만이 아니라,
그 시대 시대의 언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말과 가르침까지도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천도교회월보>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동학시대의 천도교, 다시 말해
수운대신사 시대, 해월신사 시대의 교리를
의암성사 시대의 교리로, 다시 말해
천도교 시대의 교리로
재해석하고 재발견하고 재구축하는 작업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백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천도교 시대의 교리를 망각하고,
다시금 동학 시대의 천도교로 회귀하여 왔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우리는 항상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사의 입장에서 청년운동은
1919년 9월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1900년대에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청년은 단지 젊은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어린이는
청년보다 더 새로운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천도교 어린이 운동을
언제나 해월 신사의 ‘아이도 한울님이니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말에서 근거를 찾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
성사의 구상과 의도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새롭다는 것은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시대 변화에 따라
변화하고 성장하고 다시 새로워지는,
쉽게 말해서 살아 있는 존재, 살아 있는 의식,
살아 있는 실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한 설명은
제가 조금 풀어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그 본지는 제 말이 아니라 성사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근거하여 <천도교회월보>에
기사를 게재했던 당시 천도교의 사상가,
지식인들의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 도입부에서 지난 시기의
백주년 기념사업과 기념행사의 상황을 말씀드리고,
그리고 올해부터 숨 가쁘게 진행되는
백주년의 역사들을 열거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전개되는 백주년의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가 바로 직전 살펴본 대로,
성사의 원대한 천도 경영의 철학과 사상 속에서 전개된
대단히 의미 있는 계기들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역사적 사건들을 단지 사업을 위한 사업,
행사를 위한 행사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천도교의 미래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준비하고 기념해 나가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기,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함께 -
다른 나라의 것도 공부하기,
항상 새로워지기”야말로 올해부터 전개되는
여러 가지 백주년 역사를 기념하고자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백주년 사업을 한다면,
그것은 지난 백 년 동안의 기념사업과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중앙총부나 기념사업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나, 천도교인으로서 내가
어떠한 존재로서 천도교를 신앙하며,
천도교인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하고,
수양하는 계기도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전 세계의 형편상
무슨 일이든지 일을 벌이기보다,
가능하다면 일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지내는 편이 권장되는 시대입니다.
해월신사님은
“일이 있으면 이치에 맞게 일을 처리해 나가고,
일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서 공부를 하라
[有事則以理應事, 無事則靜坐存心]”고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 이 시대는 우리가 새롭게
천도교의 시대를 준비하며 공부할 때이고,
공부하기에 좋은 때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작년부터 개인적인 차원에서
천도교를 새롭게 공부하게 되었고,
또 제가 하고 있는 출판업과도 연관 지어서
‘개벽총서’ 시리즈를 준비한다든지,
“다시개벽”이라는 잡지를 복간하여 간행한다든지,
지구인문학연구소를 개설하는 일들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일들이 저로서는
백 년 전의 미래를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앞으로의 제 삶에서 실용하고, 실천하고
실현하는 일입니다.
교회적으로도 우리는 예컨대 3.1운동을
민족운동으로서가 아니라 개벽운동으로서,
문명의 대전환운동으로서 인식하고 계승하는
인식의 대전환을 기획해야 하겠습니다.
백 년 전에 의암성사는
“천도교는
미래의 종교, 장래의 종교, 지구적(세계적) 종교”라고
단언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이후, 지금부터
우리가 밟아나가게 될 시대를 향한
가르침이기도 하였습니다.(이 강좌는 2월 28일
대교당 설교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