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회 목사 임직식] 욥 6:25 아멘입니까
독수리가 오른쪽에서 120km 날아오고 참새가 왼쪽에서 80km 날아와서 정면으로 부딪쳤습니다. 그런데 독수리가 죽어버렸습니다. 이 현상을 무슨 현상이라 한 줄 아십니까? ‘세상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라 합니다.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 ‘목사’가 된 것 또한 세상에서 보기 드문 현상 중 하나일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자기가 대단해서, 특출해서 목사가 되었다고 착각한 사람이 있다면 온 우주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인이 순전한 나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 한 옥합의 값은 일당을 10만 원이라 치면 3천만 원입니다. 매우 값진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이 장면을 본 예수님의 제자들이 화를 냈습니다. 3천만 원이 순간 사라졌으니 아깝다는 것입니다. 그걸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지 왜 허비하냐고 책망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인데 절기 때에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걸 아꼈다가 팔아 이틀 후 유월절에 가난한 자들에 나눠주지 한꺼번에 이런 식으로 허비했느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걸 보고 들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평가하셨을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 14:6-8)
가난한 자를 절기에 돕는 일 옳고 맞다. 그러나 이 일보다 더 높고 숭고한 일이 있는데 이 여인은 그 일을 한 것이다. 내게 좋은 일을 한 것이라며 이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이틀 후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임을 당하시는데, 오늘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으니 주님께 좋은 일을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옳고 맞는 말이나 일보다 주님 보시기에 더 좋은 일과 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욥이 고난의 이유도 모른 채, 극한 고통을 느끼며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머니 뱃속에서 유산되었다면,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렸다면,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연약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극한 고통을 느끼자 괴롭고 힘듦을 토로한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크고 심한가를 역설한 것입니다. 욥의 이런 말을 다 들은 친구 엘리바스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데 이유 없이 고난을 주었겠느냐 너의 죄 때문이니 회개하라고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자 고통 중에 있던 욥이 듣고 하는 말입니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욥 6:25)
친구의 말 자체는 옳고 바른데 왜 나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고 고통스럽고 아프냐는 것입니다. 친구의 옳은 말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은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옳은 말이 전부는 아닙니다.
신약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0:23-24)
말이 옳다고 모두 유익한 말은 아니고 말이 옳다고 모두 덕을 세우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옳은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은 남에게 유익이 되고 덕을 세우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돌탕 비유에서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자기 일에 성실한 돌탕의 형의 말을 들어보세요.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28-30)
옳은 말 같으나 유익하거나 덕이 되는 말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말씀 보겠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눅 15:24)
아버지는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얻어서 기쁜 것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목자처럼,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처럼 아들을 얻어서 기쁘다는 말씀입니다. 목사 임직과 준목 인허를 받은 분들은 다니엘처럼 결심하십시오.
옳은 일보다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옳은 말보다는 유익하고 덕을 세우며 살리는 말을 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설교할 때도 더욱 그리하시길 축원합니다. 묻겠습니다. 이 말씀에 아멘입니까?
민수기 10:29~32에 모세와 호밥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모세가 처남 호밥에게 가나안 땅으로 진행하는데 동행하자고 요청하자 호밥이 나는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겠다고 합니다. 모세는 더 정중히 청합니다.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 것을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그리고 약속합니다.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가 법궤 위에 항상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모세는 늘 친구처럼 자기에게 자세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고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호밥에게 이렇게 간절히 동행 요청하고 있습니다. 지나칠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불신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모세는 영성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광야 길을 잘 아는 호밥의 지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균형 잡힌 지도자입니다. 기도만 강조하고 책은 멀리하거나 책만 읽고 기도하지 않는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열매, 성숙한 믿음과 성숙한 인격이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동행한 호밥 어떻게 되었을까요? 호밥과 그 가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목축을 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후손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몇 군데에 등장합니다. 그중 예레미야 35장에 집중해보면, 호밥의 후손인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나옵니다. 선조 요나답이 후손들에게 명령하기를 ①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②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습니다. 후손들은 그대로 다 지켰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레갑 사람의 가문에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였도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렘 35:18, 19)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한 자에게는 풍족한 은혜가 주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을 받고 세움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사나 죽으나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부르신 주님만을 위해 사는 자들이지 밥그릇을 위해 사는 자는 아닙니다. 시대가 어떻게 바뀌었든 사명으로 살면 밥그릇은 주님이 책임져 줍니다. 목회는 믿음과 인내로 합니다.
임직자들에게 묻습니다.
1. 옳은 일보다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옳은 말보다는 유익하고 덕을 세우며 살리는 설교와 말을 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입니까?
2. 영성과 지성을 갖춘 균형 잡힌 목사가 되십시오. 아멘입니까?
3. 밥그릇을 위해 살지 마시고 여러분을 부르신 주인을 위해,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사명으로 사십시오. 아멘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