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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67
창세기 25:1-11
아브라함의 죽음
이제 아브라함의 생애가 마감된다. 아브라함의 사망이 이즈음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수명이 다하여 사망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자기 언약을 나타내시는 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이미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신 말씀에 근거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이다.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4-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내 언약”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언약이고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루시는 언약이다. 여기에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브라함은 그저 자기 죄성으로 말미암아 이스마엘을 양산하는 것에 불과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생식기에 의한 후손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할례 언약을 주셨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씨에 대한 약속은 분명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자손이라고 한 것이 분명하다(갈 3:16).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7)라고 한 말씀과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라고 한 말씀을 통해 보자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다른 자손은 씨에 대한 약속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는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다. 즉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이미 모리아산 계시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하늘의 별을 통해 하나의 씨, 한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모래를 그 씨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한다는 말씀을 통해 여러 자손이 모래와 같이 존재하고 그 원수들을 정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그두라는 취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믿음의 사람이 윤리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만한 일을 하였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으로 보여주시는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1절). 본문이 아브라함이 생을 마감하는 시점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사라의 죽음 이후에 후처를 맞이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히브리서 11:12에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이라고 하였기에 사라가 127세로 사망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137세였기에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두라에게서 6명의 아들을 쉽게 낳을 수 있었다는 것에 쉽게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얻은 시기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아브라함이 언제 후처를 취하였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그의 아들들이 얼마나 되었는가 하는 문제도 아니다. 육적으로 생식 능력에 대한 것이 아니며 결혼 관계의 도덕성에 대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많은 아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는 것이냐 하는 것과 대비해 진정한 아브라함의 상속자는 이삭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두라”의 ‘케투라’는 ‘연기를 내다, 불을 피워 향기를 내다’라는 뜻의 ‘카투라’에서 유래한 단어로 ‘짙은 향기’라는 뜻이다. 우리 성경에서는 “후처”라고 번역하였지만 히브리어로는 ‘여자, 아내’라는 단어 ‘잇샤’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역대기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아브라함의 소실 그두라가 낳은 자손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요 욕산의 자손은 스바와 드단이요(대상 1:32)
여기서 “소실”은 ‘필레게쉬’인데 ‘첩, 소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본부인 외에 내연의 처나, 첩 혹은 후처라는 말이 아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종족 번식을 위해 일부다처제의 차원에서 결혼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정식 아내로 불린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필레게쉬’로 사용하지 않고 ‘잇샤’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계시의 목적이 있는 표현이다.
갈라디아서 4:22-31에서 사라와 하갈을 두 언약으로 비유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두라 또한 그 언약에 반영된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언약의 아들이 이삭이라면 이삭 외에 다른 아들들을 육의 아들로 본다면 그두라 역시 육적인 존재의 ‘잇샤’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즉 언젠가 언약의 아들 안에 합류되어야 할 존재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두라의 아들 역시 여러 민족이고 그 여러 민족들은 하늘의 별을 보여주고 드러내기 위한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존재로 말씀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주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12:2)라는 말씀에서 “큰 민족”(히, ‘고이’)은 혈연관계에 있는 한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가 섞인 민족이고 한 통치 아래에 있는 나라로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를 통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대적의 존재를 장악하고 정복함으로 이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브라함의 후손을 이루는 것 그것이 언약의 성취이다. 그 언약 성취의 과정으로 그두라를 통해 얻은 후손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두라”라는 이름에 제물로 태워지는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두라의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물의 향기가 되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이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2-4절). 그두라의 자손들 앗수르 족속, 르두시 족속, 르움미 족속 미디안 족속 등은 이스라엘의 대적자가 되어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한다. 진리를 대적하며 언약의 아들 후손을 모독하며 죽이는 인생을 산다. 그것이 바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존재로 곧 죄인들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기에 여섯 아들은 “시므란”(히, ‘지므란’ : 음악가), “욕산”(히, ‘요크샨’ : 교활한), “므단”(히, ‘메단’ : 불일치, 다툼), “미디안”(히, ‘미드얀’ : 떠들썩 한, 말다툼하는, 논쟁하는), “이스박”(히, ‘이쉬바크’ : 떠나다, 해방되다, 버려두다), “수아”(히, ‘슈아흐’ : 굽히다, 기울어지다)라는 이름으로 죄의 권세 아래 붙잡혀 있는 결핍되고 부족하며 세상의 문화를 좇는 우리의 다양한 죄악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름들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정복되고 장악당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고 복이다(엡 1:3). 이런 점에서 ‘여섯의 아들’은 영원한 안식, ‘7’이 되시는 언약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6-29)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5-6절).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다고 하였다면 서자들에게 줄 재산이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었다고 한다면 이 말씀은 재산에 대한 문제가 아니며 이 땅의 소유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라는 표현은 아브라함 언약의 상속자로서 언약대로 하늘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즉 모든 것을 주셨다는 뜻으로 “소유”라는 말은 의역이다.
그래서 여기서 “재산”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맛타나’는 ‘희생 제물,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제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은혜가 주어질 것이라는 계시를 담고 있다. 지금은 잠시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언젠가 동방에서 성막의 문이 있는 동쪽을 통해 지성소가 있는 서쪽으로 오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이방인의 구원을 예시한 것이다.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2-1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7-10절).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부름을 받았을 때 나이가 75세(12:4)였으니까 175세에 사망을 하였다는 것은 약속의 땅에 100년을 살았다는 것이고 이는 곧 하나님의 은혜의 안에서 완전한 안식을 누렸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은 손자 야곱과 에서가 15세까지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를 창대케 하시고 후손을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케 하실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상태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40강의 도표 참고).
“그의 나이가 높고 기운이 다하여”라는 말씀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것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향해 믿음으로 이끌려 왔기에 자기 힘을 다 잃고 버려진 상태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자기 부인의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라는 표현은 언약의 열조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안식 안에 합류되었다는 의미이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6, 58)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11절).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서 모든 것이 성취되었고 이제 하나님의 언약은 이삭을 통해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말씀한 것이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물려준 것은 흔히 말하듯이 단순히 재산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이삭에게 주어진 재물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것들이다. 즉 언약이 아브라함을 이끌어 왔고 또한 이삭을 이끌어 갈 것을 상속된 것으로 표현하였다.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재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언약에 대한 관심이어야 한다. 그것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다(2024020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