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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아시아 대륙 동부 한반도에 건국한 민주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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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자원의 매장과 관련이 깊은 퇴적암층으로는 조선누층군과 평안누층군이 중요하다. 조선누층군은 옥천지향사대를 중심으로 퇴적된 지층으로서 주로 두꺼운 석회암층으로 이루어졌으며, 강원도 동남부와 이에 인접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에 분포한다. 삼척·동해·단양·영월·문경 등지의 시멘트 공업은 조선누층군의 석회암을 배경으로 발달했고, 석회동굴의 대부분도 그러하다. 평안누층군은 조선누층군과 거의 같은 지역에 분포하나 분포면적이 협소한데, 삼척·정선·영월·문경 등지의 탄전을 포함하고 있다. 삼척·정선·영월 지방에서 전라북도의 이리지방에 걸쳐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발달된 옥천지향사에서는 조선누층군과 평안누층군으로 이루어진 북동부와 변성 정도가 낮은 시대 미상의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남서부가 구분된다. 중생대 중기에는 분포면적이 아주 협소한 대동누층군이 쌓였고 충남탄전의 석탄이 이에 매장되어 있다. 대동누층군이 쌓인 후 한반도는 격렬한 단층·습곡 작용을 곁들인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을 받았으며, 화강암의 대부분도 이때 관입하였다. 경상남도·경상북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상분지는 중생대 말기에 거대한 호소였으며, 이곳에 육성층(陸成層)으로서 경상누층군이 쌓였다. 신생대 제3기층은 포항·동해·서귀포 등지에 소규모로 분포한다.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친 기간에는 화산활동이 비교적 활발하여 제주도·울릉도·철원 등지에 화산지형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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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은 한반도의 경동운동으로 형성된 산맥이기 때문에 높고 맥이 뚜렷하다. 소백산맥도 높고 맥이 뚜렷하여 융기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태백산맥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나간 광주산맥과 차령산맥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비대칭적 경동지형에 주로 지질구조선을 따라 하곡이 파이고 하곡들 사이에 산지가 남음으로써 나타나게 된 2차적인 산맥이다. 따라서 이 산맥들은 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며, 전반적으로 맥이 불분명하다. 산맥은 교통에 큰 불편을 주며, 산맥 양쪽 지방은 고개 또는 영(嶺)을 통해 이어진다. 영서지방과 영동지방을 잇는 태백산맥의 대관령·한계령·진부령·미시령, 중부지방 또는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을 잇는 소백산맥의 죽령·이화령·추풍령·육십령 등은 중요한 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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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주요평야는 일반적으로 큰 하천 하류에 발달되어 있으며, 하천과 평야의 관계가 매우 긴밀하다. 큰 하천은 서해와 남해로 유입하며, 과거에는 수운(水運)에 널리 이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국토종합개발과 관련된 용수원(用水源)으로 중요하다. 한국 하천들은 여름철의 집중호우로 연간유량의 약 60% 이상이 홍수로 유출되며, 갈수기에는 유량이 크게 줄어들어 유황(流況)이 불안정하다. 하천의 유황은 다목적 댐의 건설로 다소 안정시킬 수 있다. 소양강 댐, 충주 댐 등의 대용량 다목적 댐을 갖춘 한강의 유황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안정되었고, 물의 이용량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심한 집중호우가 내릴 때는 홍수피해를 면하지 못한다.
김포평야·평택평야·논산평야·김제평야·나주평야·김해평야 등 큰 하천 하류의 평야에서는 하천이 토사를 운반해 쌓아 놓은 충적지(沖積地)가 핵심부를 이루고 있다. 충적지는 비옥하고 지면이 평평하여 오늘날은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져 거의 논으로 이용된다. 집중호우시에 침수피해가 크게 발생하는 곳이 바로 충적지이다. 1920년대부터 일제에 의하여 하천가에 대규모의 둑이 쌓여지고 수리시설이 갖추어지기 이전 한국의 평야는 대부분 수해와 한해(旱害)가 심하여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충적지는 큰 하천의 중상류 지방에도 발달되어 있으나 골짜기를 따라 좁게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평야지대의 충적지 주변에는 기복이 작은 구릉지가 펼쳐지기도 한다. 이러한 곳은 논·밭·과수원·임야 등 토지이용이 매우 다양하며, 충적지와는 토질이 다르고 과거에는 대부분 삼림으로 덮여 있었다. 한편 춘천·원주·충주·대구 등은 하천 중상류의 넓은 침식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산지로 둘러싸인 침식분지는 화강암의 차별침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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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해안선이 국토면적에 비해 매우 길다. 서해안과 남해안은 만·반도·섬이 많아 해안선의 출입이 극히 심하지만 동해안은 비교적 단조롭다. 이러한 차이는 한반도의 지반운동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일반적으로 융기해안은 단조로운 반면에 침강해안은 복잡하다. 지반이 침강하면 산지는 반도나 섬으로 남고, 골짜기는 만으로 변한다.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이 끝나는 남서해안은 해안선이 특히 복잡하여 리아스식 해안(Ria Coast)의 세계적인 보기로 꼽힌다.
동해안은 깨끗하고 시원한 사빈(砂濱)이 많이 발달되어 이들 사빈은 해수욕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빈의 뒤에는 경포·청초호·영랑호·화진포 같은 석호도 나타난다. 동해안의 사빈들은 동해사면을 흘러내리는 하천들로부터 모래를 충분히 공급받아 안정되어 있다. 서해안은 해안선이 복잡하여 사빈이 발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사빈이 파랑에 의하여 형성되는 지형이므로 주로 태안반도나 안면도에서와 같이 바다로 돌출된 해안에 나타나는데, 이러한 곳은 하천이 유입되지 않아 모래의 공급이 부족하여 서해안의 해수욕장들은 모두 축대를 쌓아 사빈의 침식을 막고 있다. 남해안은 섬이 많아 사빈의 발달이 서해안보다 빈약하다. 해수욕장으로 이용되는 사빈은 거제도·남해도·달산도 같은 섬에 거의 한정되어 있다. 서해안과 남해안은 조차(潮差)가 커서 사빈 대신 개펄 또는 간석지의 발달이 탁월하다. 특히 서해안은 조차가 세계적인 데다가 해안선이 복잡하여 파랑의 작용이 활발하지 않고 하천들이 홍수시에 대량의 토사를 운반하여 개펄이 발달하기에 알맞다. 조차가 큰 해안에서는 하천의 토사가 하구에 집중적으로 쌓이지 못하고 조류(潮流)에 의하여 바다로 제거된다. 하천의 토사 중 모래와 같은 조립물질은 하구 가까이에 쌓여 사질(砂質) 간석지를 형성하고 점토와 같은 미립물질은 조류에 의해 멀리 운반되면서 수면이 잔잔한 만에 쌓여 점토질 간석지를 이루어 놓는다. 개펄의 발달은 한강·임진강·예성강 등의 큰 하천들이 유입하는 경기만이 가장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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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강수량이 800~1,500㎜로서 한국은 세계적으로 습윤지역에 속한다. 산지가 많아 저기압이 통과할 때라도 전선성강수에 지형성강수가 결부되는 것이 보통이어서 강수량의 분포가 상당히 복잡하게 나타난다. 섬진강유역을 중심한 남해안의 산간지방이 1,400~1,500㎜의 최다우지(最多雨地)이고 북한강 중상류지방은 1,200~1,300㎜로 제2의 다우지이다. 대구를 중심한 영남내륙지방은 800~900㎜의 소우지(小雨地)로서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으로 둘러싸여 비가 적게 내린다.
강수는 여름에 집중되며, 6~8월의 3개월간의 강수량은 연강수량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장마철인 7월의 강수량은 연강수량의 약 30%에 이른다. 장마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확장과 더불어 북상하는 장마전선이 몰고 온다. 장마전선은 남해안지방에서는 6월 하순에 걸치기 시작하여 7월 중순에는 서울지방에 도달한다. 겨울철은 건계로 12~2월의 강수량은 연강수량의 10% 정도이다. 북서계절풍은 한랭건조하나 서해 해상을 통과할 때 습기를 많이 공급받으면 폭설을 몰고 온다. 연강수량은 해에 따라 변동이 심하다. 연강수량이 1,364.8㎜인 서울의 경우 1949년에는 633.7㎜가 내린 반면에, 1940년에는 2,135㎜가 내려 그 차가 무려 1,500㎜에 이른다. 강수량의 변동은 여름 강수에 의하여 좌우되며, 강수량이 적은 해는 한해(旱害), 그것이 많은 해는 수해가 일어난다. 한해는 넓은 지역에 걸쳐 발생하기 때문에 수리시설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그로 인한 피해가 수해보다 심각했다. 옛 문헌에 의하면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말까지 심한 가뭄이 300회 이상 발생했다. 예로부터 수리시설의 확충에 힘을 기울여온 일이나 서양보다 150년 앞서 측우기를 만든 것 등은 심한 강수량의 변동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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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후는 사계의 변화가 뚜렷하다. 중위도의 아시아 대륙 동안, 북태평양 서쪽 연변에 위치하기 때문에 주변지역에서 형성되는 기단(氣團)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기단은 계절의 특색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겨울에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부근에 찬 공기가 쌓여 정체성 고기압인 시베리아 고기압 또는 시베리아 기단이 발달하여 한랭한 북서계절풍이 불어온다. 시베리아 고기압은 주기적으로 성쇠를 반복하여 위세를 떨칠 때는 한파가 내습하여 전국적으로 날씨가 맑아지고 기온이 떨어지며, 위축될 때는 기온이 올라가고 이동성저기압이 통과하여 날씨가 궂어진다. 시베리아 고기압의 성쇠는 대략 1주일을 주기로 반복되며, 이로 인해 삼한사온(三寒四溫)현상이 나타난다. 해가 길어지면서 봄이 시작되면, 시베리아 기단은 쇠약해지고 이동성고기압인 양쯔 강 고기압이 한국을 자주 지나가 날씨가 화창해지고, 그뒤를 따라 이동성저기압이 통과할 때는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내린다. 그리고 3월 하순에 접어들면 남쪽에서부터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기 시작하여 북쪽으로 올라가는데, 남북간에 약 15일의 차이가 나타난다. 봄에는 중국의 화북지방에서 황사(黃砂)가 불어와서 대기가 매우 혼탁해지며, 가뭄이 계속되어 산불이 자주 일어난다.
태양고도가 점점 높아지면 저위도로 물러났던 북태평양 고기압이 북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해오며, 오호츠크 해 기단과 북태평양 기단 사이에 형성되는 장마전선이 상륙하면 장마철로 접어들고, 7월 중순경에 장마전선이 북한지방으로 올라가면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기단의 지배하에 들어가 1일최고기온이 30℃를 넘는 삼복더위가 계속된다. 한여름은 비가 적지만 태풍이 내습하여 더위가 식혀지기도 한다. 태풍은 주로 7~9월에 내습한다. 한국은 대부분 태풍의 진로에서 약간 벗어나며, 강력한 폭풍우를 수반한 태풍은 남부지방에 2년에 1회, 중부지방에 4년에 1회 정도 내습한다. 가을은 9월에 접어들어 시베리아 기단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이로부터 떨어져나오는 이동성고기압이 자주 통과하여 맑은 날이 많다. 가을에는 대기가 투명하여 하늘이 높아 보이며 풍부한 일조량은 농작물의 결실에 좋다. 늦가을에는 서리가 내린다. 평균 초상일(初霜日)은 서울지방이 10월 중순, 남해안지방이 11월 중순경으로 남북간에 약 1개월의 차이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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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생의 수직적 분포는 한라산(1,950m)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도에서는 대략 해발 500~600m까지를 난대림 또는 상록활엽수림대, 해발 1,500m까지를 온대림 또는 낙엽활엽수림대, 그 이상의 정상부를 한대림 또는 침엽수림대로 구분할 수 있으며, 해발 1,800m 이상의 산정부에는 털진달래·암매·눈향나무·시로미 같은 아고산대(亞高山帶)의 식물이 분포한다. 온대림과 한대림 간의 경계는 지리산 1,350m, 태백산 1,300m, 설악산 1,060m, 금강산 1,200m, 낭림산 1,050m, 백두산 900m로서 북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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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대 제4기의 플라이스토세에는 빙기와 간빙기가 반복됨에 따라 범세계적으로 해면(海面)이 100m 이상 여러 번 오르내렸는데, 해면이 낮았을 때는 황해가 육지로 드러나는 한편 중국의 황허·양쯔 강과 황해로 유입하는 한반도의 여러 하천들은 하나의 수계(水系)를 이루었고, 일본의 규슈[九州]와 혼슈[本州]도 아시아 대륙과 이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육상동물과 담수어류는 중국 및 일본의 그것들과 공통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며, 한국 특산종이 적다. 조류(鳥類)의 경우 중국과 공통된 것이 약 90%에 이르며, 한국 특산종은 울도방울새·뿔종다리·붉은배동고비·울도오색딱다구리·제주도오색딱다구리·크낙새·참수리·들꿩 등 소수의 아종(亞種)뿐이다.
포유동물은 7개목에 속하는 22개과의 105개종 또는 아종으로 나뉘며, 박쥐목·쥐목·식육목이 75개종 또는 아종을 차지한다. 조류는 18개목 65개과 420여 종 또는 아종이 있는데, 참새목·도요목·기러기목·매목이 316개종 또는 아종을 차지하며, 48개종이 텃새이고 266개종이 철새이다. 철새 중에서 112개종은 겨울새, 64개종은 여름새, 90개종은 봄·가을의 나그네새이다. 크낙새는 희귀종의 텃새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파충류로는 민물에 사는 거북목의 남생이와 자라가 있고, 뱀목에는 도마뱀류의 3개과 9개종 또는 아종과 뱀류의 3개과 15개종 또는 아종이 있으며, 양서류로는 6개과 17개종 또는 아종이 있는데 개구리목이 5개과 14개종을 차지하고 있다. 어류는 23개목 173개과 872개종 또는 아종이 알려졌다. 이중에서 담수어류는 약 150개종으로서 잉어와 가물치가 큰 것들이고, 한강의 황쏘가리와 금강의 어름치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곤충은 약 5,000종이 있는데, 나비목이 약 1,350개종을 차지하여 가장 많고, 딱정벌레목의 장수하늘소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유일한 곤충으로 몸길이가 12㎝에 이르는 것도 있다.
權赫在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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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거의 모두가 한민족(韓民族) 또는 한족(韓族)이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0년 현재 한민족을 구성하는 인구는 약 7,482만 명으로 이들 한민족은 세계 각 지역의 여러 나라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그들의 지역적 분포를 보면 남한에 4,700만 명, 북한에 2,217만 명, 중국에 204만 명,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북아메리카에 206만 명, 일본에 66만 명, 러시아에 49만 명, 라틴아메리카·유럽·중동·동남아시아 및 기타 지역에 39만 명가량이 거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모두 하나의 민족으로서 일체감을 가지는 까닭은 한민족의 계통과 형성 및 이동과정에서 신화·역사·체질·문화, 특히 언어의 공통된 특질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우선 한민족이 모두 단군(檀君)의 자손이라고 믿는 것은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조선(古朝鮮)의 첫 임금인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보는 〈단군신화〉에서 연유한다. 그것은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의 아들인 단군이 BC 2333년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했다는 건국신화이다.
그러나 전세계 인류 중에서 한민족이 차지하는 위치와 민족의 계통분류 및 그들의 이동역사에 따르면 한민족의 형성시기는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체적 형질의 특징으로 볼 때, 세계의 3대인종인 황색 몽골 인종(Mongloid), 백색 코카서스 인종(Coca-soid), 흑색 니그로 인종(Negroid) 중에서 한민족은 몽골 인종에 속한다. 한민족은 피부 색깔뿐만 아니라 곧은 머리카락과 짧은 얼굴에 광대뼈가 나오고 눈꺼풀이 겹쳐져 있으며, 둔부에 몽골 반점이 있는 등 몽골 인종의 공통된 신체적 형질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몽골 인종은 그들의 집단이동과 지역분포에 따라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신체적 형질과 생활양식에 차이가 생겨서 고시베리아족(Paleo-Siberians)과 신시베리아족(Neo-Siberians)으로 구분된다. 그중에서 한민족은 신시베리아족에 속하며, 언어의 특성에 따른 알타이어족(Altaic language family)과 우랄어족(Uralic language family) 중에서 한민족의 언어는 터키족·몽골족·퉁구스족의 언어와 더불어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민족들은 제4빙하기의 후기구석기시대까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Yenisei) 강과 알타이 산 기슭에 살고 있었다. 그후 기온이 상승하여 빙하가 녹으면서 후기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 때 시베리아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했다. 터키족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북쪽까지, 몽골족은 지금의 외몽골을 거쳐 중국의 장성 및 만주 북쪽까지, 퉁구스족은 흑룡강 유역까지, 그리고 한민족은 중국 동북부인 만주 서남부의 랴오닝[遼寧] 지방을 거쳐 한반도 남부까지 이동하여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서 초기 농경시대에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이와 같은 한민족의 형성 및 이동 과정에서 발전된 문화는 지금까지 남아 있어 후기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의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역사상 고대의 중국문헌에 나타나는 숙신(肅愼)·조선(朝鮮)·한(韓)·예(濊)·맥(貊)·동이(東夷) 등의 여러 민족들은 그 전부 또는 일부가 우리 한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랴오닝 지방의 한민족은 북부의 초원지대에서 목축을 하는 한편 남부의 평야지대에서 농경을 주로 하면서 농경·목축 문화를 발전시켰고,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온 한민족은 자연환경의 조건에 따라 목축을 버리고 농경에만 집중하면서 독특한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처럼 오늘의 중국 랴오닝 지방과 한반도에서 농경과 청동기문화를 발전시킨 한민족이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서 부족연맹체의 족장사회를 통합하여 고대국가를 성립시킨 것이 바로 고조선(古朝鮮)이다. 그 이후 국가가 나누어져서 몇 개의 새로운 독립국가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통합되는 역사적 과정은 매우 복잡했지만 민족은 하나의 단일민족으로서 한민족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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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언어이다. 우리 한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질은 그들이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와 그 언어를 표현하는 문자, 즉 '한글'이다. 현재 남한과 북한은 물론 전세계의 각 지역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해외 동포들은 거의 모두가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글을 쓰고 있다. 한국어가 전세계의 언어 가운데서 차지하는 위치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전세계의 3,000여 개 언어 중에서 언어사용인구의 규모로 볼 때 20위 안에 들 정도로 큰 언어라고 평가되고 있다. 또 한국어는 동아시아에서 중국어 및 일본어와 함께 3대 문명어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어와 중국어 사이에는 우리말에 한자 어휘가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유사성이 거의 없다. 한국어와 일본어 간에도 약간의 유사성이 보이기는 하지만 많은 차이가 있다.
한국어는 계통적으로 오히려 터키어·몽골어·퉁구스어를 포함하는 알타이어족과 더 가까운 친족관계를 가지고 있다. 알타이어족은 구조에 있어서 교착어(膠着語)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전치사를 쓰지 않고 후치사인 조사를 쓰며, 성과 수를 표시하는 일정한 규칙이 없고, 모음조화의 현상이 뚜렷하며, 품사의 배열에 있어 동사가 마지막에 오는데 그러한 특성들을 한국어도 많이 가지고 있다.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들 중에서도 한국어는 특히 퉁구스어와 가장 가까운 친족관계에 있다. 한국어가 퉁구스어와 특별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퉁구스·만주 여러 민족들이 흑룡강 유역을 비롯한 만주지방에 살았다는 지리적 인접성 때문이 아니라 언어의 음운체계(音韻體系)·문법체계·어휘에 있어서 유사성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퉁구스어는 일반적으로 퉁구스만주어 또는 만주퉁구스어라고도 불리며 그 분포 지역은 시베리아 동부, 사할린, 중국의 동북부 만주지역, 신장웨이우얼[新彊維吾爾] 자치구, 몽골 인민공화국의 일부지역 등 광범위하게 걸쳐 있으나 그 언어사용인구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며, 전체를 포함하여 1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금(金)나라를 세우고 한국의 북쪽 땅을 자주 침범했던 여진족(女眞族)의 언어도 퉁구스계의 언어이며, 만주어는 청(淸)나라의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알타이어족 특히 퉁구스만주어와 공통되는 한국어의 구조적 특질은 음운체계와 문법체계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음운체계에서 볼 때 한 단어 안에서 모음들이 동화현상을 일으키는 모음조화가 뚜렷하고, 단어의 첫머리에 오는 자음에 제약이 있는 것은 두 언어의 공통된 특질이다. 즉 한국어는 이미 15세기에 '아,
, 오'와 '어, 으, 우' 등 두 계열의 대립이 뚜렷한 모음조화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으며, 단어의 첫머리에 2개 이상의 자음이 허용되지 않았고, '마'와 같은 유음(流音)이 단어의 첫머리에 오는 것을 기피했다. 문법체계에 있어서는 앞에서 알타이어족의 특성으로 지적한 바와 같은 교착어의 특성을 한국어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때부터 이미 확립된 것으로 알려진 한국어의 경어법(敬語法)은 알타이어족의 다른 언어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구조적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어휘에 있어서도 한국어에는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특수한 어휘가 많다.
한국어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대의 한국어는 고조선을 비롯하여 부여·고구려·옥저·예 등 북쪽 갈래의 부여계(夫餘系) 언어와 진한·변한·마한을 포함한 삼한의 남쪽 갈래인 한계(韓系) 언어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 2갈래의 언어는 원래 근원이 같은 공동의 조상이 되는 조어(祖語)에서 나왔으나 오랫동안 격리되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분화하는 과정을 겪게 됨에 따라서 차이가 생긴 것으로 풀이된다. 그 조어가 바로 부여·한 공통어(夫餘韓共通語)인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어의 역사를 추적해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단계의 것으로 생각된다. 북쪽 갈래의 부여계 언어는 뒤에 고구려어로 이어지고, 남쪽 갈래의 한계 언어는 신라와 백제의 언어로 이어진다. 이 단계까지는 한국어의 고유 문자를 가지지 못하고 표의문자(表意文字)인 중국의 한자를 빌려 표음문자(表音文字)와 같이 이용한 이두(吏讀) 문자를 만들어 썼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신라 때의 향가(鄕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하나의 공동 조어에서 분화된 2갈래의 언어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다시 하나의 언어로 통일되어 당시의 도읍이었던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방언이 통일된 신라의 표준어가 되었다. 그뒤 고려의 건국에 따라 새로운 도읍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방언이 고려의 표준어로 바뀌었으며, 그것은 조선에도 그대로 이어져 고려의 중앙어가 오늘의 한국어 모습으로 굳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어가 하나의 통일된 언어일지라도 지역에 따른 변이(變異), 즉 방언이 다양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제주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서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 방언에는 육지의 방언과는 다른 옛 말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각 도의 방언이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중에서 함경도 방언과 경상도 방언이 특히 유사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고려시대 이후 경상도 사람들이 함경도로 많이 이주한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짐작된다. 또 각 지역의 방언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제주도 방언을 제외하고는 한국어의 방언들이 일상적인 회화에 소통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조선시대 초기에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로 한국어는 한글이라는 고유한 문자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국어는 소리와 문자가 변화를 겪어 몇 개의 글자와 사성(四聲)을 나타내는 방점(예컨대 ㆆ, ㅸ, △, ㆁ, ㆍ 등)이 없어졌고, 한일합병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어와 한글을 쓰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한편 한국인에게 일본어를 강제로 쓰게 하는 등 언어의 수난을 겪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남한과 북한이 정치적으로 갈라져서 언어의 이질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해방 직후에는 일제강점기의 언어탄압정책의 영향으로 한동안 일본어의 잔재가 우리말에 남아 있었고, 남한에서는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의 물결에 따라 새로운 문물·제도·과학기술의 도입과 더불어 영어를 비롯한 서구의 외래어가 분별없이 들어와 한국어와 혼용되는 경향이 있으며, 북한에서는 러시아와 중국어의 영향 및 북한 자체의 언어정책에 따라 분단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언어가 이질화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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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때그때의 환경과 생활형편에 적합한 종교적 신앙과 의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주위의 다른 민족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그들로부터 새로운 외래 종교를 받아들여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종교사상에 맞도록 그것들을 변용시켜왔다. 오늘날 한국에는 국교(國敎)가 없고,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정부통계에 따르면 한국에는 각종 교단(敎團)의 수가 255개이고(2001), 교당(敎堂)의 수는 4만 9,935개이다(1999). 또 1999년에 실시한 인구 및 주택 센서스 조사결과에 의하면 신도의 수는 종교인구 대비로 볼 때 불교(23.1%), 개신교(19.66%), 천주교(6.62%)로 나타났다.
종교적 신앙과 의례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의 고대 원시신앙은 고조선의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천신(天神)을 믿고 산천과 조상의 영혼을 숭배하며 무속(巫俗)을 행하는 것이었다. 단군신화의 환인은 천제였으며 고대 한민족의 신앙 대상이었다. 단군도 인간으로 화신하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사상 때문에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I天)은 모두 한 해의 농사를 마치고 천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의(祭儀)에는 집단적인 가무와 음주가 행해졌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그러한 의례를 통하여 신과 인간과 자연 사이에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었다. 또 고대 한국인의 원시신앙은 지금까지도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무속과 거의 일관된 사고의 구조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무속의 원형으로 생각되고 있다.
삼국이 정립된 뒤에는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고 도교를 받아들여 태학과 국학을 세우고 태학박사·오경박사·의(醫)·역(易) 박사제도를 두어 귀족 자제들에게 유교의 경전을 가르쳤다. 특히 신라에서는 유교·불교·도교의 원리를 바탕으로 풍류도의 단체정신이 매우 강한 화랑도(花郞徒)의 청소년 집단을 만들어 교육·군사·사교 단체의 기능을 강화하는 동시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했다. 통일신라는 사찰·불상·탑 등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룩하여 그 유물이 지금까지 전해져서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들이 많다. 불교의 교세는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거란·여진·몽고의 침입에 대한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성격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불교가 국교로서 더욱 보호되고 장려되었다. 〈팔만대장경〉의 조판은 그러한 호국불교의 염원에서 착수된 것이며, 인쇄술의 발달을 자극하여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에서는 유교와 한문학의 교양을 지닌 사람을 등용하기 위한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승려에게 출세의 길을 마련해주기 위해 승과(僧科)라는 국가시험제도를 두었고, 사원에 토지와 노비를 급여하고 면세와 면역의 특전을 베풀어 사원경제가 팽창했으며, 승려들은 귀족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또 신라 말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풍수지리(風水地理)사상이 크게 유행했다. 이것은 지리도참설이라고도 하는데, 귀족들의 생활원리에 침투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과거제도에 지리과(地理科)가 생기기도 했다.
조선왕조는 처음부터 유교를 국가의 지배적인 통치이념으로 삼아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의 원리에 따라 문물제도를 갖추었다. 중앙에는 성균관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향교와 서원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제사를 행했다. 유교는 종교적 신앙과 윤리적 실천의 2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유교의 종교적 신앙과 의례는 천지의 교사(郊社)에 대한 제사와 조상의 조묘(祖廟)에 대한 제사 및 성현들의 문묘(文廟)에 대한 제사로 집약되었다. 이러한 제사 의례는 형식을 매우 중요시했다.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의 윤리적 실천 강령을 행동과 생활의 규범으로 삼고 실행에 옮긴 것은 주로 양반의 상류계층이고, 평민인 일반 민중들은 오랜 전통의 관행에 따라 천신을 비롯하여 산천과 조상의 영혼을 숭배하고 무속을 행했다. 유학자들은 옥황상제·칠성·염라대왕·사해용신·신당 등을 신봉하는 도교적 소격서(昭格署)의 혁파를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민간에서는 물론이고 왕실에서조차도 도교의 신봉이 여전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관념적·형식적인 주자학(朱子學)에 반대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실사구시(實事求是)·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는 실학파가 나오고, 서양의 천주교도 온갖 박해와 순교 끝에 수용되었다. 이어서 그리스도교 여러 교파의 개신교들이 들어와 한국인의 종교적 신앙뿐만 아니라 서양교육과 의술을 전파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한국의 천주교 전래는 중국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간접적인 전파가 이루어졌으나, 17세기초부터 들어온 한역서학서를 통해 서학을 연구하는 가운데 천주교 신앙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면서 천주교의 전파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개신교도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K. F. A. 귀츨라프, A. 윌리엄슨, R. J. 토머스 등에 의해 성서의 번역과 배포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1885년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의 전복음셔언〉을 가지고 H. G. 언더우드와 H. G. 아펜젤러가 입국하면서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본격적으로 교육·의료 사업과 농촌운동을 실시하고, 조선의 봉건사회를 개화시키며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의 초기 천주교와 개신교는 조선사회 전통과의 이질감 때문에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일제강점기 때 기독교회와 천주교의 반일성과 애국성, 그리고 조선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는 선교사들을 통하여 민족교회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성장과 함께 교파가 분열되고,이에 반한 소종파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곧 교회일치연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정치적 변화에 접하게 되면서 상실된 자아확인과 정신적인 피난처를 위한 종교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하여 한국 기독교는 놀랄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교회의 양적 성장은 그 내적 순수성과 도덕적 차원, 신의(神意)를 토대로 한 사회정의실현의 주체적 원동력이라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일부 교회와 교인들의 기복적 신앙, 반지성적 무아상태의 신앙, 교회의 상업화·기업화·대중화, 일부 교역자의 부패 등이 부조리로 지적되었다.
이밖에도 정치적 불안정과 사회적 혼란이 고조되었던 조선시대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현실생활의 불안과 위기의식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정감록(鄭鑑錄)과 십승지(十勝地) 기타 후천개벽사상들이 민간에 침투하여 여러 계통의 신흥종교 교단들이 형성되었다. 한국의 신흥종교는 계통으로 볼 때 동양의 유교·불교·도교 계통과 서양의 그리스도교 계통에서 파생된 것과 단군계를 비롯하여 동학계·무속숭신계·증산계·봉남계 등 한국에서 발생한 것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통이 국내·외, 동·서양의 어느 것이든지 간에 한국의 신흥종교들은 한국에서 새로운 이념이 첨가되었거나 기존의 교리를 고치고 바꾸어 새로운 내용의 것으로 변용된 것들이다. 이러한 신흥종교들은 일부 기성종교들의 진부한 신앙을 지양하고 신도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는 동시에 민족정기를 북돋아주는 기능을 가지기도 하지만, 말세의 구제와 이상세계의 개벽을 내세워 혹세무민하고 사회를 더욱 어지럽게 하는 역기능도 가지고 있다.
총체적으로 볼 때 한국의 종교는 역사상 왕조의 교체와 더불어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등장해왔고, 이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에 알력과 갈등이 계속되었으며, 외래의 종교라도 한국에서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무속과 여러 종교사상들이 습합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韓相福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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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의 성별·연령별 구조를 보면, 인구 피라미드의 유형이 피라미드형에서 항아리형으로 변모되고 있음이 확연하다. 이는 인구의 발전단계가 제2단계인 다산소사의 급증형을 지나 소산감사의 증가형인 제3단계를 거치고 있으며, 머지 않아 소산소사의 제4단계 정체형에 이를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그리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1세대 후인 2020년경에는 전형적인 서구형의 인구구조를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연령별 인구구조의 변동 추이를 보면, 1970년대를 기점으로 유년층(0~14세)의 비율이 낮아지는 반면, 경제활동 연령층(15~64세)의 비율은 상승하고 있다. 1960년에 총인구의 42.3%였던 유년층 인구 구성비는 1970년에는 42.5%로 미증했다. 그러나 이는 1980년에는 34.0%로 감소했고, 1990년에는 다시 25.8%로, 그리고 2000년에는 21.7%로 격감했다. 또 경제활동 연령층은 1960년에 54.8%, 1970년에 54.4%였던 것이, 1980년에는 62.2%, 1990년에는 다시 69.2%로 늘어났고, 2000년에는 71.2%로 늘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뚜렷한 현상은 노년층(65세 이상)의 구성비가 현격하게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1960년에 2.9%에 불과했던 노년층의 구성비는 1970년에 3.1%로, 1980년에는 3.8%로, 그리고 1990년에는 5.0%, 2000년에는 7.1%로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변화의 추이, 즉 유년층의 감소와 경제활동연령층의 미증 및 노년층의 급증 추세는 출생률의 감소와 평균수명의 증가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2020년경까지 앞으로 적어도 1세대 동안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 말은 한국 사회가 노령화 사회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경제활동인구에 대한 유년인구와 노년인구의 부양비를 보더라도, 1960년에 각각 77.3%와 5.3%였던 것이 1990년에는 33.7%와 7.2%로 변했다. 그리고 2021년에 이르면, 유년인구의 부양비는 22.2%로 줄어드는 대신 노년인구의 그것은 18.4%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인구구조의 변화가 노령화 추세를 지속하게 되면, 갖가지 사회문제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나타나게 된다. 가령 학령인구가 초·중·고등교육으로 가면서 차례로 줄어들어 교육의 양적 기회확충이라는 지금까지의 교육 부문의 주요과제는 앞으로는 질적 기회의 제고라는 새로운 과제로 대두될 것이다. 또 그동안 덮어두었거나 형식적인 겉치레에 그쳤던 노인복지의 문제가 사회보장에 관한 정책의 가장 중요한 논점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 예상된다.
당장은 크게 눈에 띄지 않으나 점차 심각성을 더해가는 문제로는 남녀 인구구성의 불균형을 지적할 수 있다. 결혼적령인구(남자 25~29세, 여자 20~24세)의 성비를 보면, 1960년에 78.6이었던 것이 1990년에는 104.7로 무려 26.1이나 높아지고 있다. 이는 신생아의 출생성비를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1990년의 0~4세 인구의 성비는 113.1이나 되고 있다. 이는 출산력 저하현상과 전통적 남아선호 의식이 맞물려서 작용한 결과로 최근에는 출산 전 태아 성판별이 용이해지면서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비의 불균형은 앞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적잖은 문제를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출산행태는, 그간의 가족계획 만능의 정책에 덮혀 제대로 논의되지도 않은 채 사회적으로 정당화되어왔지만, 윤리적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산업별 인구구조의 변화는 그간의 한국의 경제발전과정을 잘 반영한다. 산업별 인구구성비의 변화를 보면, 1960년에 1차산업 66.6%, 2차산업 8.5%, 3차산업 24.0%였던 것이 1970년에는 각각 50.5%, 14.3%, 35.2%, 1980년에는 34.0%, 22.6%, 43.4%로 변했다. 즉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는 1차산업 인구가 급감하는 대신 2차산업 인구가 두드러지게 증가했다. 이것이 1990년에는 1차산업 18.3%, 2차산업 27.3%, 3차산업 54.4%로 변하여, 산업화가 성숙단계에 접어들면서 1차산업의 비중은 계속 감소하는 대신 3차산업의 비중이 커짐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당분간 더 지속되어 점차 선진국형에 접근하게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인구의 국외 이동은 조선시대 말기부터 시작되었는데, 초기에는 간도 및 연해주 지방으로 상당한 이민이 있었고, 20세기초에는 하와이로 가는 계약이민까지 있었다. 그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강제 또는 반강제적으로 많은 인구가 해외로 떠나갔다. 8·15해방 직전까지 만주와 중국에 약 220만 명, 소련의 연해주, 사할린, 중앙아시아 등지에 약 30만 명, 일본에 약 200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다. 지금도 중국에 약 150만 명, 일본에 약 60만 명, 소련에 약 30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 1962년 해외이주법이 제정된 이후 현대적 의미의 이민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세계 여러 나라에 100만 명에 가까운 교민이 진출해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타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8·15해방과 6·25전쟁은 유례없는 인구의 대이동을 초래했다. 해방 직후에는 북한에서 약 180만 명의 인구가 월남했고, 일본·중국 등 해외에서 약 160만 명의 동포가 귀국하여, 모두 350만 명에 가까운 인구의 사회적 증가가 이루어졌다. 또 6·25전쟁중에 다시 10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월남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인구의 대이입은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는데, 특히 대부분의 이입인구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지역에 정착하여 도시문제를 더욱 가중시켰다.
한국의 인구밀도는 1910년에 약 60명/㎢이었으나 1935년에 100명/㎢을 넘어섰다. 남한의 인구밀도는 1949년에 200명을, 1967년에는 300명을 넘어섰고, 1990년 432명, 2000년 476명으로 세계 3위의 고밀도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가 국토에 균등하게 분포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인구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매우 단순하면서도 유용하게 사용되어온 모델은 신의주와 포항을 잇는 선을 긋고 그 대각선을 기준으로 하여 한반도를 동북부와 서남부의 2부분으로 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주로 지형적인 조건에 따라 인구가 희박한 고원 및 산악지역과 조밀한 하천분지 및 평야지역을 대비시킨 것으로, 농경사회에서의 식량생산과 취락 발달의 관계를 토대로 인구의 분포를 설명한 것이다. 이 모델의 설명은 오늘날에도 기본적으로 틀리지 않다. 그러나 8·15해방과 6·25전쟁, 그리고 무엇보다도 1960년대 이후의 급속한 산업화·도시화와 그에 수반된 인구이동의 결과, 인구의 분포는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8·15해방 당시 14.5%에 지나지 않았던 한국의 도시화율은 1960년에는 35.8%, 1970년에는 49.8%로 늘어났다. 이어 1980년에는 57.2%로 늘어나 도시 거주인구의 수가 총인구의 절반을 넘어섰으며, 1990년 79.4%, 1996년 87.1%로 늘어나 사실상 도시 사회로의 개편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행정구역의 변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8·15해방 당시의 부(府:지금의 시에 해당하는 행정구역)로는 경성(서울)·인천·개성·대전·전주·군산·광주·목포·대구·부산·마산·진주·해주·평양·진남포·신의주·함흥·원산·청진·나진·성진의 21개 도시로, 그 중 12개(개성 포함)가 남한에, 그리고 9개가 북한에 있었다. 1996년 현재 남한에는 서울특별시와 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의 5개 광역시 및 72개 시를 합쳐 모두 77개의 시가 있다. 그에 비해 8·15해방 당시 134개였던 군은 1995년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군과 시가 통합되면서 93개로 줄어들었다. 그간의 도시화는 이처럼 도시의 수가 늘어나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기존의 도시, 특히 대도시를 향한 인구의 집중에 의해 선도되었다.
대도시의 성장은 기반 산업의 발달과 고용기회의 창출에 의해서라기보다 이농인구의 집중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전형적인 제3세계의 도시화 과정을 거쳤다. 2000년 현재 우리나라의 6대도시 인구는 2,123만 명에 이른다. 이들 도시의 인구는 1980~85년 사이의 5년간에 17.6%, 그리고 1985~90년의 5년 동안에는 12.7%가 증가함으로써, 같은 기간 동안 나머지 9개 도와 시의 인구증가율 1.2%와 3.3%를 각각 크게 웃돌고 있다.
그러나 대도시의 인구증가를 지배적으로 주도한 것은 서울과 수도권의 인구 증가이다. 서울을 향한 인구와 기능의 과도한 집중은 한국의 국토구조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크고 어려운 문제이자 한국 공간정책의 기본적인 과제이다. 2000년 현재 수도권의 인구는 총인구의 절반에 달하며, 그 중 서울의 인구가 985만 3,972명, 인천의 인구가 246만 6,338명, 경기도 인구는 928만 13명(외국인 포함)에 달한다. 8·15해방 당시 인구 90만 명에 불과했던 서울의 인구는 1960년에 240만 명에 이르렀고, 2000년 현재 1,000만 명에 가까운 거대도시가 되었다. 대체로 1970년을 기점으로 총인구에 대한 도시거주인구의 비율이 절반에 이르게 되었고, 이때부터 서울의 인구는 5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제 서울은 거대도시의 과대·과밀 문제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고, 국가의 지역정책 기조에도 서울의 인구분산이 주요과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로 공공기관의 지방이전, 공업입지의 분산, 서울 시내 대학 입학정원의 증원 억제 및 지방 쪽에서의 상응한 투자촉진 및 육성책이 행해졌다. 그러나 정치권력과 경제력이라는 힘의 분산을 동반하지 않는 인구와 산업입지의 분산책은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서울로의 집중은 날로 가속화되어갔고, 이 무렵부터 서울의 교외화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즉 서울의 인구증가율 자체는 다소 완화되기 시작하지만, 주변의 인천·수원·안양·의정부 등 위성도시들이 급성장하게 되고, 성남·부천·과천·광명·안산·구리·고양·시흥·군포·의왕·하남·일산·분당·평촌·산본 등이 모두 1970~90년대 이후 새로 시로 승격하거나 신도시로 건설되어 사실상 서울의 거대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성장과 수도권의 거대도시화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것은 한국의 도시화 자체가 산업화와 함께 급속히 진전되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도 서울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점하는 지배적 위치가 공간적 집중을 가속화시켰다는 데에서 보다 직접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서울은 조선시대 이래 600년 동안 한국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중심지였으며,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에 있어서도 불균형개발전략의 선두에서 혜택을 받은 개발거점이었다. 정치·경제 부문에서의 의사결정권의 집중은 필연적으로 사회 전부문에 걸쳐 기능의 공간적 집중을 불러왔다. 지방자치가 실시되고 있지만, 서울은 정치적 권력의 전부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도 기업체본사 분포, 총매출액, 금융여신, 대학생수, 연구인력, 연구개발비, 투자총액 등의 전국대비 비율로 볼 때 상당히 높은 비율을 차지하여 한국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이른바 한국 국토의 독과점적 공간구조는 서울의 종주도시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들의 이러한 급속한 도시화는 도시산업의 발달이 성숙되지 못한 데다 도시 기반시설이 미비한 상태에서 장기 도시계획의 수립을 앞질러 진행되었고, 따라서 실업·빈곤·교통혼잡·주택부족·환경오염·범죄증가 등 각종 도시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도시들의 급성장과 부산·대구·광주·대전 등 지방 대도시들의 부상, 그리고 포항·울산·마산·창원·여천·구미 등 동남권 신흥 공업도시들의 비약적 성장에 비해 나머지 지역의 중소도시들은 미미한 성장을 보이거나 정체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시의 수가 배가되기는 했으나, 전술한 수도권의 위성도시들 및 동남권의 신흥공업도시들을 제외하면, 동해·태백·나주와 같이 인접도시의 행정구역 병합에 의해 인구수를 채운 도시들, 삼척·제천·문경과 같은 광산 도시들, 송정·영천·김해·경산·밀양과 같이 지방 대도시의 외연적 팽창에 힘입은 인접 위성도시들, 그리고 아산·보령·서귀포 등 관광도시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했다. 농어촌지역의 중심지로는 영주·정읍·남원·공주·상주·서산·김제 등 소수의 전통적 행정중심지들이 약간의 인구증가와 주변 행정구역의 편입으로 가까스로 시로 승격했을 뿐이다.
도시화는 농촌지역의 인구유출을 초래했다. 1970년대 중반을 고비로 한국의 농촌지역 인구는 절대감소하고 있다. 1960년 농가인구는 1,424만 2,000명으로 총인구의 56.9%였으나 1980년에는 1,082만 7,000명으로 총인구의 28.4%를 차지했으며, 그 이후 계속 감소하여 1990년666만 1,000명으로 총인구의 15.5%, 2000년 403만 2,000명으로8.7%에 불과하게 되었다. 수도권과 남동임해공업지역 및 제주도를 제외한 전지역에서, 심지어 농촌생활권의 핵심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읍까지도 대부분 인구의 절대감소를 겪고 있다.
농촌 인구의 절대감소는 농촌 인구압의 완화 및 농가당 경지규모의 확대라는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크고 심각한 몇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지나치게 빨리 진행된 데에서 야기된 부작용이기는 하나, 그러한 결과가 도시와 농촌의 양쪽 모두에 부담을 지우는 쪽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단순한 인구이동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고 있다. 즉 대도시 쪽에는 고용과 기반시설의 측면에서 수용능력을 넘어 인구가 집중하는 데에서 과대·과밀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농어촌지역에는 젊고 교육받은 인구의 선택적 유출로 발전잠재력 자체가 황폐화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특히 경제활동 연령층의 급속한 유출은 농촌인구의 노쇠화를 재촉했고, 그결과 농어촌지역의 사회경제적 활력은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다. 이는 지역의 수요밀도를 전반적으로 낮추게 되어,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선거 기반과 교육, 대중교통을 비롯한 공적·사적 서비스의 입지기반을 약화시키고 마침내 그 질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버스 노선이 축소·폐쇄되고, 학교가 분교로 전락한뒤 곧 폐교되며, 마을마다 빈집이 늘어가는 등 사회적 휴경지가 증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구유출 → 생활환경 악화 → 인구유출의 악순환'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농어촌의 발전을 이끌어갈 젊고 의욕적인 인구집단이 결여되어 있어, 새로운 기술의 혁신을 스스로 이룩하거나 받아들일 잠재력도 고갈된 형편이다. 여기에다 최근 우루과이라운드로 상징되는 농수산물 시장의 개방추세는 전통적 농업의 생존기반마저 위협하고 있어, 사실상 한국의 농어촌 지역은 정상적 생활공간으로서의 존립 자체까지 위협받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70년대 이후 새마을운동이 농어촌 소득증대와 생활환경개선에 이바지했고, 지금은 농어촌구조개선이라는 이름 아래 농어촌정주권개발사업 등이 추진되고 있으나, 투자의 규모로 보아 대세를 바꾸어놓을 수준이 되지는 못한다.
지역간·도농간 격차를 해소하고, 균형된 발전을 이룩할 새로운 공간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은 한국의 지역정책이 당면한 최대의 과제이다. 한편으로 대도시의 과대·과밀 문제를 해소하고, 다른 한편으로 농어촌지역에 현대사회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새로운 취락체계를 창출해내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양자는 사실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서로 현상을 달리하는 같은 문제이기도 하다.
柳佑益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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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는 지난 30~40년 동안 크게 성장했다. 1962년 이후 GNP가 해마다 실질적으로 평균 8% 이상 성장하여 1968년 1만 6,530억 원, 1978년 24만 630억 원, 1988년 131만 3,710억 원, 1996년 386만 6,404억 원이 되었다. 이로써 유량(流量:flow)으로서의 GNP와 상당 수준에 달할 지하경제만으로는 한국경제가 고소득국에 크게 뒤지지 않게 되었다.
소득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저축률도 높아져 1970년에는 18.0%에 머물던 국내총저축률이 1980년에는 23.1%로 오르고 1990년에는 35.3%가 되었다. 그러나 1997년33.4%로 낮아지면서 2000년 32.3%, 2001년 29.4%로 계속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표6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80년대 중반까지는 국내저축으로 경제성장을 위한 소요자본 조달이 어려워 외자를 투자재원으로 사용했으나 1986년부터는 저축이 투자를 초과하게 되어 남는 재원을 해외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다시 국내저축으로는 투자재원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해외자본으로 부족분을 충당하고 있다.
한국은 선진국이 과거 200~300년간에 걸쳐 이룬 성장을 20~30년간에 이루었다는 의미에서 압축적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경제를 막론하고 경제성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이 4가지 조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어 있다면 성장은 그만큼 어려워진다. 첫째, 경제를 성장시키려는 의지, 둘째, 기술과 지식의 축적, 셋째, 일반 국민의 왕성한 저축성향과 기업의 충분한 투자의욕, 넷째, 새로운 기술과 경영방법을 개발함으로써 이윤을 얻고, 그 과정에서 국민의 소득을 증가시키고 국민경제를 성장시키는 기업가의 정신자세가 건전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30여 년 간 한국의 경제성장이 크게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곧 위의 4가지 조건이 대체로 골고루 구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밖에 한국의 경제성장에 동력을 제공한 또 하나의 요인은 유리한 국제환경이다. 1960년대에는 UN이 설정한 '개발의 10년대' 때문에 선진국 시장이 많이 개방되어 덕을 보았고, 1970년대에는 오일 쇼크 이후 중동에 쌓인 오일 머니가 국제금융시장으로 흘러들어가서 이것을 우리가 빌려 쓸 수 있었으며, 1980년대에는 '3저현상'이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적 조건과 요인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사회구성원 간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경제성장은 이룰 수 없다.
지난날 한국의 경제성장과정에서 정부는 기본 전략을 세워 이를 집행했고, 기업가는 여러 가지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도 자본과 노동을 동원하여 생산을 조직했으며, 노동자는 일하려는 강한 욕구, 규율,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잠재력을 보여주며 쉬지 않고 일했다. 이들의 협력이 없었거나 또 이들 가운데 어느 한 쪽이라도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면 한국의 경제 성장은 훨씬 지연되었을 것이다. 물론 시행착오와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는 사회의 모든 부문을 통제했으며 각종 낭비와 왜곡을 초래하기도 했다. 최고 엘리트가 성장목표를 설정하고 전문기술관료공무원들이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창안하는 가운데 이들이 펼친 성장의 시나리오가 1970년대의 과잉·중복된 중화학공업 투자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대외지향적 성장전략은 적절한 것이었으며, 자동차·조선·전자 부문 등에 대한 투자 역시 1970년대에는 과잉으로 보이기도 했으나 다행히도 1980년대에는 수출의 기반이 되어 국제수지 흑자달성에 기여했다.
기업은 정부의 세제·금융 특혜 속에서 성장했고 비생산적인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린 것도 사실이나 경험도 없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 성장을 가속화하고 이 과정에서 고용을 창출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성장 과정에서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노동자였다. 노동자들은 아직도 산업사회의 직업윤리를 확립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악조건 속에서도 마치 일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열심히 일했다. 정부나 기업이 여러 가지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급속히 성장한 것은 바로 이들의 부지런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과소비 등으로 미루어볼 때 경제를 성장시키려는 의지가 반감되었고, 자체기술을 개발하지 못한 상황에서 선진국들의 기술보호정책으로 기술도입이 어렵고, 기업의 투자의욕도 저하되었다. 또한 고급인력은 과잉공급 되고 있지만 고급노동력이 부족하며 임금은 점점 올라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단순 기업경영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국제환경도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에서 구서독 경제의 초점이 구동독 및 동구로 향하고, 미국은 아직도 만성적 적자에 허덕이고 있으며 일본도 금융긴축을 행하고 있어 국제금융시장이 우리에게 크게 불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유무역의 새로운 국제경제질서를 창출하려는 노력(예를 들어 우르과이라운드)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며, 더 나아가 국제경제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면 과거에 급속한 성장을 가능케 했던 요인은 마모되고 있는 반면 새로운 성장요인은 배양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과거 성장의 과실이 분배되는 과정에서 소외된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 빈곤감에 허덕이고 있다.
소득분배에 대해서는 국내에서의 실증적 연구가 제한적인 데다가 그나마 존재하는 연구결과들은 당사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입수가능한 통계자료가 안고 있는 양적·질적 결함 때문에 분배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한 토대로 사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을 전제로 할 때 계수상으로 나타난 분배상황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거나 한국 자체의 시계열 분석상으로 볼 때 각각 상대적으로 양호하거나 또는 최소한 크게 악화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한국의 가구소득 분포상태는 1980년대에 들어서 불평등의 정도가 점차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득분배구조에 대한 강한 불만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유는 첫째, 공식통계에 잡힌 소득과 실제 소득과의 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고소득층일수록 공식통계에 잡히지 않은 소득이 큰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소득분배에 관한 통계숫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실제로 돈 잘 버는 자영업자들이나 자산가들의 소득을 포착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소득분배에 관한 여러 연구들의 분석결과는 실제의 분배상태보다 좋게 나타났다고 본다. 둘째, 경제성장 과정에서 근로자들이 감수해온 장시간 노동과 빈번히 발생하는 산업재해를 감안할 때 상당히 높은 임금소득도 근로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불평등한 것이다. 상대적 빈곤감의 확산은 경제주체들 간의 협력체제를 허물어뜨리고 있다. 사실 지난날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경제구성원 간의 협력체제는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난날의 협력체제는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정부의 물리적 강제력과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의해 뒷받침된 '강요된 협력체제'였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일련의 민주화 과정을 통해 강압적 국가장치가 소멸된 현재 상황에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과거와 같은 협력체제를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강요된 협력체제를 '자발적 협력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한국경제의 과제이다. 자발적 협력체제는 절대적·상대적 빈곤감을 해소하고 경제적 형평을 달성할 때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경제적 형평의 달성은 한국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다. 한편 경제적 형평의 달성은 과거에 압축적 성장과정에서 배태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19세기 서구의 성장은 갈등을 흡수하는 점진적 과정을 밟은 데 비해 한국에서는 성장과정에서 누적된 욕구와 불만이 압축되어 나타났다. 따라서 이 문제들은 압축성장과정에서 갈등구조를 심화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정부와 기업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로서 적극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는 매우 복잡하여 용이한 대책을 세우기가 쉽지 않다. 과거에는 성장·안정 등 목표가 비교적 단순했고, 금융·재정·무역·노동·산업 등의 각 부문별로 직접적인 통제수단이 많았다. 그러나 현재는 목표가 복잡·다기해졌을 뿐 아니라 직접 통제수단은 거의 사라진 가운데 간접 통제수단은 미개발상태에 있다. 또한 과거 권위주의시대에는 군을 배경으로 한 지배 엘리트와 법학이나 경제학의 배경을 가진 전문기술관료의 분업이 매우 빠르게 이루어져 국민의 합의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현재는 국민의 합의도 도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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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금융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한국의 금융시장은 제 기능을 발휘해왔는가',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의 금융시장이 과거 저축동원의 극대화나 금융자금의 효율적 배분에 기여했는가'의 문제이다. 지난 20~30년간 한국에서 금융시장을 매개로 하여 동원된 저축은 대단히 많았지만 그 저축이 금융시장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거시경제의 높은 성장률을 볼 때 금융이 투자자금의 효율적 배분에 실패했다고 속단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 투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금융기관이 개개의 프로젝트 심사분석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둘째, '한국의 금융제도는 한국경제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한가' 그리고 '현재 금융기관이 자생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현재 금융기관, 특히 은행은 크게 부실한 상태에 있다. 예를 들면 1989년 어떤 은행의 손익계산서를 살펴보면 수입이자 8,126억 원에 지불이자가 7,158억 원(이것은 한국은행 차입금에 대해 시장이자율보다 훨씬 낮은 이자를 지불하도록 보조를 받은 결과임)으로 순금리 수익이 968억 원에 불과하다. 여기서 대손상각 314억 원을 빼면 대손상각 후 순금리 수익은 654억 원이다. 그런데 월급 704억 원, 퇴직금 등 급여 251억 원, 경비(판공비·정보비·업무추진비 등) 594억 원 등 인건비적 성격을 띠는 비용이 1,549억 원이나 된다. 이것은 자금의 운용으로 이익을 창출하는 은행이 이자수입으로부터 인건비의 절반도 뽑아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수입수수료, 유가증권 매매익, 신탁보수, 보증료 등의 수입으로 당기순이익 217억 원은 올리고 있으나 외국과 비교해볼 때 수익상황이 너무 나쁘다. 다른 은행도 거의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부실대출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1988년말 현재 전체 은행의 부실대출 규모는 총대출의 약 6.5%, 비정상대출 규모는 약 23%에 해당한다(1989년말에는 많이 개선되었으나 아직도 그 규모가 큼). 따라서 부실대출에 대한 대책으로는 ① 자율경영으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 ② 공채를 발행하여 부실채권을 해결한다. ③ 수신이자율을 고정시키고 대출이자율을 자유화시킴으로써 은행수지를 개선시킨다. ④ 한국은행의 특별융자를 제공한다. ⑤ 채무기업의 주식과 부실채권을 교환한다. 위와 같은 대책을 마련할 수 있으나 현재 최선의 것이 어느 것인지는 계속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부실채권을 해결해준다 하더라도 은행이 정상화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아직도 금융환경이 금융자금의 효율적 배분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환경 개선을 위해서는 정부가 은행경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납득할 만한 규칙을 만들어놓고 이를 잘 지키도록 감시만 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금융자율화의 요체인 대출과정에서의 은행의 자율성이 확립될 것이다. 또한 진정한 자율화를 위해서는 경제의 실물부문 더 나아가서는 정치·사회가 자율화되어야 한다.
셋째, '한국경제가 국제화하고 또 세계금융시장이 통합되는 추세 속에서 한국의 금융시장은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금융의 국제화는 막기 어려운 추세이나 국내 금융기관들이 국제화에 대한 준비를 착실히 한 후 문을 열도록 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금융시장은 대출시장에서 외국 금융기관의 비중이 너무 크다. 그러나 외국 금융기관의 수익률이 국내 금융기관보다 높다고 무조건 비난하기보다는 국내 금융기관의 자율성을 제고하여 국내 금융기관의 수익성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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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장기발전목표는 민주국가와 복지국가의 건설로 요약할 수 있다. 이와 같은 2가지 발전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재정측면에서의 주요 정책과제는 한편으로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서 재정의 사회개발기능을 강화하는 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국가건설을 위해서, 의회예산주의와 조세법률주의의 확립을 통해 재정민주주의를 정립하고, 지방자치제도의 정착을 위해 지방재정의 기능을 강화하는 일이다.
한국의 재정은 1960, 1970년대의 경제성장추진을 위한 적극적인 산업투자지원, 1980년대 전반에는 안정적 성장을 위해 긴축정책을 통한 인플레 요인 억제의 역할을 주로 담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국민복지증진과 형평제고 등을 위한 재정의 사회개발기능이 소홀히 됨으로써 여러 가지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민주화 추진에 의한 정치적·사회적 변화와 함께 경제여건의 개선을 계기로 재정의 사회개발기능이 점차적으로 강화되는 재정기능의 정상화가 시급한 과제로 등장했다.
한편 재정민주주의의 첫번째 과제인 '의회 없이 예산 없다'는 의회예산주의는 매년 국회에서 심의되는 예산이 전체공공부문예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으로써 유명무실화된 실정이다. 재정민주주의의 또다른 근간인 '법률 없이 조세 없다'는 조세법률주의도 각종 성금·기부금·공과금 등 개인과 기업이 부담하는 준조세와 지하경제에서의 뇌물수수 등 불법거래행위로 말미암아 크게 퇴색되어왔다. 따라서 앞으로 올바른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재정측면에서의 민주주의원칙이 우선적으로 확립되어야 한다. 지방재정기능을 강화하는 일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지방자치제의 정착,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균형발전뿐만 아니라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위해서도 긴요하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지방자치제가 확산되고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지방재정제도의 확충 및 건실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방단체가 재정적인 자립기반이 취약하여 지방예산의 상당부분을 중앙정부로부터의 재정지원에 의존하게 되면 지방단체의 행정적 독립성이 유지되기 어렵고 이것은 결국 건실한 지방자치제의 정착을 어렵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향후 장기발전목표로서 민주국가와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재정운영의 기본방향이 조정되어야 하며, 또한 다방면에 걸쳐 재정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하여 재정과 금융 간의 유기적 관련성을 살펴보자. 과거 성장제일주의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재정규모를 초과하는 경제개발재원을 금융부문에 대한 직접적 통제를 통해 조달했다. 이것은 각종 특별회계 기금과 개발금융기관·은행(특수은행·시중은행 포함)을 연결하는 복잡한 자금통로를 형성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지배하에 있으면서도 국회의 예산·결산 심의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정부의 금융부문에 대한 직접적 통제는 금융부문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하여 자금의 흐름을 왜곡함으로써 막대한 규모의 사금융시장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과거에 재정이 비민주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부의 성장제일주의에 따른 경제전반에 걸친 직접적 통제에 그 원인이 있으며, 정부의 금융부문 지배는 이것의 현상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 전반에 걸친 민주화 요구에 따른 재정민주주의의 확립은 동시에 금융의 민주화, 금융의 정상화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복지재정의 확충에 따라 각종 연금기금·사회보장기금의 역할이 확대될 전망이고 보면 재정과 금융의 유기적 관련성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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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한국의 경제성장은 크게 보아 동태적 비교우위 체제에 입각한 국제분업과 그 분업체계를 활용한 수출지향적 정책의 전개과정으로 요약된다. 물론 이러한 정책기조 속에서도 3단계의 구분이 가능하다. 수출지향적 정책을 채택했지만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하여 균형성을 유지했던 제1, 2차 5개년계획 기간이 첫번째 단계이고, 중화학공업화의 기치하에서 불균형성장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제3차 5개년계획 기간 이후의 1970년대가 2번째 단계이며, 마지막 단계는 1970년대말 1980년대초의 위기를 겪으면서 불균형성장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 과도한 산업육성정책이 지양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의 시기이다.
특히 1980년대 중반에는 정부의 안정화 정책과 이른바 3저라는 외부적 호조건이 우리 경제에 고도성장과 국제수지 흑자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1980년대말에 이르러 한국경제는 국내외적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먼저 대외적 무역환경의 변화를 보면,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중심이 되던 미국 경제가 국제적 정치경제의 우위성을 상실하고 유럽공동체(EC)의 결속과 같은 지역주의가 대두하였으며, 신흥공업국이 기존의 선진국과 산업구조 조정에서 마찰을 일으켜 신보호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의 국가와 중국 등의 개발도상국들이 시간당 1달러 이하의 낮은 임금을 밑바탕으로 하여 맹렬히 추격하고 있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민주화의 물결에 의해 과거의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무너져 전문기술관료가 택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크게 제약되었다.
이러한 대외적 환경변화에 직면하여 과연 정부의 시장개입을 통한 전략적 무역 및 산업 정책은 유효한 것이며, 또 이러한 정책이 국내의 정치경제적 여건 속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1970년대에 성행한 산업조직론연구에서 출발한 신무역이론은 국가간의 무역이 국가간의 생산비용 차이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규모의 경제성이 한 상품생산의 지역적 집중을 가져오는 독립적 힘이 되어 무역을 발생시킨다는 이론을 확고히 했다. 따라서 규모의 경제성과 불완전경쟁이 국제무역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이라면 시장의 작용이 효율적이 아닐 수 있고 오히려 정부의 개입이 시장결과를 개선할 수도 있다는 것이 신무역이론의 정책적 결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정부개입주의는 순수이론적 이유(개입주의의 실행상의 어려움, 경제적 지대의 귀속의 불확실성, 한 산업에서의 이익과 다른 산업에서의 손실에 대한 정보의 불충분)와 정치경제학적 이유(국제적 측면에서의 근린궁핍화 효과, 국내적 측면에서의 비효율적 재분배 효과)를 근거로 비판받을 수 있다. 비록 자유무역에 따른 자주성의 손실과 자유무역의 이익을 쉽사리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선결과제는 국내의 이해갈등을 민주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공정한 시합규칙을 확립하는 것이며, 이러한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에 의해서만이 개방에 따른 충격을 극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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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경제력집중이 커다란 정치·경제의 문제로 대두되어왔으며, 특히 최근의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논의과정에서 더욱 부각되고 있다. 단순한 형태의 경제력집중은 한 시장에서의 독점 내지 과점 형태로 나타나지만, 한국에서는 이러한 기업집중을 초월하여 흔히 재벌이라고 불리는 기업집단이 경제력집중의 가장 중요한 형태로 되어 있다. 재벌에 의한 경제력집중의 현황은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기업집단의 규모 측면에서 살펴보면 30대 기업집단은 고용 및 출하액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1970년대 이래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해온 35류 산업과 38류 산업에서 50%에 가까운 출하액 비중을 점유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30대 기업집단의 확대경향 속에서도 상위 5대집단의 비중이 하위집단에 비하여 계속 증대됨으로써 양자간에 양극화 현상을 볼 수 있다. 둘째, 시장구조의 측면에서 살펴볼 때 각각의 기업집단이 상품시장에서 갖는 시장점유율 순위를 보면 1987년 총 1,499개의 출하품목 중 2/3에 가까운 941개 품목이 해당시장에서 3위 이내의 시장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한편 3위 이내에 들지 못하는 품목은 총출하액에서 10.8%의 비중만을 차지함으로써 기업집단은 시장지위가 비교적 높은 시장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기업집단의 소유집중 측면을 살펴보면, 상호출자 또는 일방적 출자를 통해 기업집단의 계열기업은 개인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 그리고 그가 지배하는 다른 계열회사에 의해 소유되고 있다. 특히 상위 기업집단은 계열회사 중 공개법인의 비율이 낮을 뿐만 아니라 공개법인의 경우에도 주식공모비율이 낮아 전반적인 기업공개수준은 저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제력집중의 발생 원인으로는 저개발경제에서는 기업인 능력이 희소자원이라는 점, 대규모 시장을 대상으로 한 선진기술의 도입에 의한 독과점화, 정부의 대기업 위주의 성장정책, 그리고 금융 및 자본시장의 미발달 등을 들 수 있다. 기업집단에 의한 경제력 집중은 계열기업 간에 자원을 공유하는 것에 기인하는 포괄적 공동효과(synergy)를 얻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지만, 근본적으로 경제주체 간의 경제적 기회의 불균등과 아울러 소유집중과 기업집단의 성장과정에 대한 불신이라는 부정적 측면을 갖는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그것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사회적 긴장감을 조성하고 나아가서는 경제체제나 정치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야기하여 경제윤리를 왜곡시키는 결과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 경제력집중이 갖는 구조적 특징을 독과점적인 대규모 계열기업으로 구성되는 기업집단이라는 조직과 그것의 다부문 활동 및 소유집중이라고 하면 그 대책도 자연히 이 3가지 요인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또한 경제력집중에는 시장외적 요인도 많으므로 정부의 개입이 필요한데, 다만 정부의 실패로 인해 오히려 현상을 더욱 악화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기업집단이 갖는 문제는 단순한 경제영역을 넘어서 정치·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되어 있으며, 이것이 경제력집중대책의 방향설정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은 이 문제를 개인의 가치판단의 문제로 돌리거나 또는 과거에 정부의 경제개입이 보편화되어 기업성과가 기업 자신의 위험부담과 창의력의 결과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식의 사회심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해결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에서 경제력의 집중은 기본적인 경향이며 한국자본주의에서는 그 개발과정의 특수성으로 인해 그 경향이 더욱 가시적으로 나타났으며, 또한 현재에도 그 경향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객관적 사실로서 인정하는 데 문제해결의 출발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정부·기업·국민대중의 이견이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조정되는 것을 필요로 하며, 궁극적으로 경제민주화와 정치민주화는 동전의 양면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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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의 농업을 위기상황으로 진단하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모순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즉 1인당 경지면적이 세계적으로 최하위수준에 있으면서도 오늘날 상당한 농경지가 유휴화되고 있다. 또한 식량자급률은 매년 저하되어 40% 이하의 수준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생산 농작물은 과잉생산과 가격하락으로 농가는 물론 정부까지도 농정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편 농작물의 가격하락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발표나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농축산물이 물가상승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도시근로자 가구와 농가구의 연간소득에 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기회만 있으면 농업을 포기하고 농촌을 떠나려 하고 있다(→ 이농).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 및 생활격차는 196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현상이며, 그 주요 원인으로는 농촌지역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상대적으로 미흡했던 점과 농업이 갖는 구조적인 특성이 지적되고 있다.
다른 한편 전반적인 식량자급률의 저하나 국내농산물의 과잉생산, 소작농지의 증대, 그리고 농촌노동력의 부족 등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는 경제정책의 기조전환과 국내 농산물에 대한 소비구조의 변화와 크게 관련을 맺고 있다. 즉 1970년대 후반 정부정책의 기조가 개방화로 전환됨에 따라 농산물에 대한 정부수매가의 인상이 억제되고 부족농산물의 도입을 확대하여 국내 농산물가격을 안정시킨다는 '개방농정'이 등장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농업은 자원이용구조를 조정하면서 급속히 상업농 생산체제로 전환했으며, 이는 결국 '농업-농민-농촌'의 삼위일체 체제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론적으로 1970년대말부터 1980년대에 걸쳐 나타난 농업의 근본원인은 농업외적인 부문의 변화에 농업부문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정책적 대응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농업의 여건은 더욱 불리해질 전망이다. 농축산물의 수입개방화는 더욱 확대되어 농업소득원이 점차 줄어들게 되고, 농업노동력의 고령화로 혁신적인 경영개선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또한 농업부문에 대한 환경오염의 규제가 점차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여건변화에 대해 한국농업이 장기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는 효율적인 생산체계를 확립하여 부가가치가 높은 고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농민 1인당 농경지 소유면적을 3정보로 제한하고 있는 농지소유제도를 완화하여 대규모 영농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과제는 농축산물의 수입개방 시기를 최대한 늦춤으로써 국내 농민이 새로운 여건에 적응할 시간을 확보해주는 것과 구조조정 기간중 불가피하게 수입되는 농산물로 인하여 피해를 입게 될 농가에 대한 직·간접의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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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우위론은 교역국 간의 비교우위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생산요소의 상대적 부존비율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생산기술이 정적이고 외생적으로 주어져 있는 경우에 타당하다. 기술 자체가 동적으로 변화하고 내생적으로 다른 생산요소와 상호 작용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새로운 기술의 출현에 의한 기술의 발전을 기업가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산업화(신제품의 생산, 신공정의 도입 등)하는 과정이 곧 경제발전과정이라는 세계경제의 역사적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동태적 비교우위론을 바탕으로 임금수준과 기술수준을 두 축으로 하여 선진국·중진국·후진 국 간의 국제분업구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즉 선진국은 높은 기술수준을 필요로 하는 제품에서, 중진국은 선진국보다 낮은 임금과 후진국보다 높은 기술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갖는 제품에서, 후진국은 주로 값싼 임금을 경쟁력의 기초로 삼는 제품에서 산업특화한다. 이때 1986년 이후의 한국과 같이 중진국의 임금수준이 크게 상승하게 되면 중진국의 비교우위 영역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높은 임금상승에 의한 산업의 국제경쟁력 약화는 구조적으로 임금보다는 기술요소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산업으로의 산업구조조정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산업간 특화에서는 기술집약적인 산업을 지향해야 하며, 제품차별화 측면에서는 고급품을, 수직적 특하의 측면에서는 부품산업을 추구해야 한다. 거시적 기술지표와 기술분야별·산업별 기술수준 측면에서 자세히 검토해보면 한국의 기술수준은 전반적으로 선진국에 뒤떨어져 있으며, 그중에서도 모든 생산제품의 필수기술인 생산기본기술이나 생산현장기술은 특히 취약하다. 이는 한국의 산업기술이 자체개발보다는 선진국에서 이미 성숙기에 이른 기술을 소화·흡수하는 과정에서 축적되어왔다는 데 기인한다.
한국은 1980년대 후반기에 들어와 임금상승 외에도 정치민주화, 시장개방, 국제기술보호주의 심화 등과 같은 기술활동에 큰 영향을 주는 환경변화를 경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업의 기술적 강화를 통한 국제적 비교우위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기술활동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해야 하며, 이것은 정부의 책임이다. 이러한 환경을 조성할 때 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정책수단은 유인(incentive)과 규제(penalties) 체제의 확립, 그리고 기술관계전문기관(specialized technological agent)의 설립으로 대별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경제의 가장 핵심적인 선결과제는 기술력강화에 있으며, 이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는 기본적인 책임은 정부에 있는데,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슘페터의 자본주의 경제발전관을 재음미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대부분의 생산은 민간기업에 의해 이루어지며,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기업가의 혁신에 있고, 이에 대해서는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슘페터는 혁신을 수행하는 기업가에게 신용을 공여하는 은행의 역할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은행은 기업으로 하여금 성장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투자자금을 신용창조를 통하여 싼 비용으로 풍부하게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할 뿐 아니라 기업의 투자내용을 심사하고 기업가에게 조언을 제공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은행이 기업투자에 대하여 심사를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가 그 운영의 경제성을 확보하기 위해 마련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한국의 성장과정은 슘페터가 상정한 바와는 상당한 거리를 지니는 것이었다. 물론 기업가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정부가 자본을 동원하여 그것을 성장의 전략부문에 집중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경제구조가 단순하고 경제규모가 왜소한 상황에서는 민간에 비해 풍부한 정보와 인적 자원을 보유한 정부의 직접적인 자원배분결정이 보다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면서 경제문제의 소재가 자원의 동원에서 자원의 효율적 이용으로 바뀌게 되며, 경제구조의 파악이 힘들어지고 그에 비례하여 계획의 어려움이 증대된다. 이는 정부개입에 의한 자원배분의 비효율적 개연성이 높아짐을 의미하며, 사실상 한국경제는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경험했다. 즉 기업은 스스로 혁신을 추구하기보다는 정부의 특혜적 자원을 획득하는 데 급급했으며, 자금의 흐름이 왜곡된 상황에서 비생산적 투기에 의한 불로소득 획득의 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그나마 규모가 큰 기업은 큰 손실을 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국민부담에 의해 이를 보전해주는 '위험의 사회화' 현상이 만연된 분위기에서는 투자의 효율성을 기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민간기업이 불확실성을 감수하면서 각고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기술혁신에 뛰어들 유인이 발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국내외 여건의 급변에 대응하기 위한 산업구조조정의 시점에 서 있는 한국경제로서는 직접적인 기술정책의 개선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으로 기술혁신을 저해하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즉 정부는 산업정책의 기조설정으로 자금배분에 간접적·유도적 방식으로 개입해야 하며, 기업은 정부에 대해 '특혜는 주되 개입은 말라'는 식의 모순을 불식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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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가 최근에 경험해온 급속한 임금의 상승, 원화절상, 그리고 경제개방 등의 국내외 여건의 변화에 대응하는 핵심적인 전략으로는 산업의 기술집약화가 제시된다. 이러한 기술집약화는 산업 내의 구조와 산업 간의 구조에서 공히 기술집약도가 높은 부분의 비중이 높아질 것을 요구한다. 현재 한국 중소기업의 문제도 이와 같은 큰 흐름에 적응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다. 즉 중소기업은 첫째, 산업구조의 기술중심의 고도화에 맞추어 스스로의 기술력을 높여야 하며, 둘째, 고임금과 경제 개방화에 따른 국제경쟁력을 고려하여 기존업종의 고부가가치화와 고부가가치업종으로의 사업전환을 추진해야 한다. 셋째, 이상의 노력을 조직적으로 뒷받침받을 수 있는 바탕으로서 중소기업은 국내적인 차원은 물론 국제적인 차원으로까지 계열화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넷째, 경제의 정보화가 급진전되는 상황에서 중소기업의 내부적 노력이 효율적으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정보능력을 제고함이 필요한데, 중소기업은 독자적인 차원에서보다는 상호협력적인 차원에서 정보망을 형성해야 한다. 다섯째, 경제의 개방화 추세에 맞추어 중소기업도 비교우위의 변화에 따라 해외로의 생산입지 이전을 적극적으로 검토해봄 직하다.
이상의 중소기업 발전방향에 비추어볼 때 현행 중소기업지원정책은 그 초점이 불확실하고 경제여건의 변화에 따라 정책수단의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이 불충분하다. 그리고 현시점에서 중소기업 지원정책의 초점은 중소기업의 경영안정능력을 키워주고, 적극적인 입장에서 구조조정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더 나아가 정보화·국제화를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의 급격한 국내외 여건변화로 한국 중소기업의 활로는 스스로의 기술력 제고에 있으며, 이와 연관하여 계열화·정보화·국제화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방향이다. 이것은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한국 전체산업의 구조조정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이 경제 전체구조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인해 발생하는 특수한 측면, 즉 대기업 대 중소기업 사이의 관계는 기업규모의 양적인 차이를 넘어서, 경제적 자원에 대한 영향력을 통해 양자 사이에 총체적인 지배·종속 관계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민경제 전체의 차원에서 양자는 분명히 상호보완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러한 상호보완성의 증진이 국민경제의 균형적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경제의 현실은 대기업, 특히 일부 소수 재벌의 수중에 경제력의 집중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이므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흐리게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현재 한국 중소기업이 직면한 위기의 극복은 단순한 중소기업 지원정책이라는 협소한 차원을 넘어서 국민경제 전체의 산업조직적 차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치적·경제적 민주화 차원에서 검토되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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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분배 문제는 그것이 갖고 있는 규범성으로 인해 과학성을 강조하는 주류경제학에서는 크게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분배의 공정을 실현하는 문제는 자원배분의 효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배의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핵심적인 과제의 하나로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사회적 공정성의 실현이라는 과제는 그 성격에서 일관성의 정책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의미에서 부단히 자본주의에 대한 짐으로 작용할 것이다. 한편 공정성의 개념은 객관적으로 정의하기가 불가능하지만, 공정성의 기준을 크게 나누어보면 그 하나는 분배의 '결과'를 중시하는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분배의 '과정'을 중시하는 사고로 나누어진다. 이때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분배의 공정성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자본주의적 시장경제하에서 원천적 소득분배는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는 구조 자체가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소득분배의 일부만을 설명해줄 뿐이다. 시장 자체가 항상 불완전 경쟁요인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분배는 사회제도적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경제영역에서 개체나 이익집단 간의 관계는 경제적 힘의 배분관계에 의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경제적 힘의 불평등 배분은 한편으로는 지배와 예종의 관계를, 다른 한편으로는 소득분배의 불공정성을 유발하게 마련이다. 이때 '조직'과 '소유'는 힘의 중요한 원천이 되기 때문에 분배의 공정성을 실현하고 사회구성원 간에 친화력 있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득분배정책과 함께 경제적 힘, 그리고 자산 소유의 분산이라는 정책이 동시에 추구되지 않으면 안 된다.
분배문제에 의한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기본방향은 우선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정책목표를 여타 거시정책목표 달성의 하위수단으로 간주했던 과거의 시각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 그리고 분배의 공정성은 가능한 한 원천소득분배를 대상으로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분배정책은 자산 및 경제적 힘의 배분 내지는 통제와 같은 포괄적 요인을 대상으로 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지역간의 소득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함이 중요하다.
趙淳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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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이후 한국의 정치사는 다음 6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제1공화국(1948~60), ② 제2공화국(1960~61), ③ 1961년의 5·16군사정변에 이은 제3공화국(1963~72), ④ 유신체제로 일컬어지는 제4공화국(1972~79), ⑤ 제5공화국(1980~87), ⑥ 제6공화국(1988~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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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에 의해 1952년에 재선되었고 1954년 사사오입개헌을 통하여 1956년 또다시 4년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주의라는 편협한 이데올로기적 틀내에 정치를 묶어 놓았고 조봉암의 진보당을 비롯한 모든 진보세력과 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여기에 더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정권은 신국가보안법제정, 〈경향신문〉 폐간, 지방자치단체장 직선제 폐지등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적 규범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폭거를 자행함으로써 정당성의 위기를 맞게되었다. 정당성의 위기는 1958년부터 시작된 경제침체와 상승작용을 일으킴으로써 이승만 정권에 대한 지지는 추락했고, 마침내 1960년 3·15부정선거와 독재에 항의하는 4·19혁명으로 정권이 붕괴되고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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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기반의 취약성으로 인해 장면 정권은 진보와 보수중 어느 세력도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과거와의 단절을 주장하는 급진 개혁세력들은 부정선거, 권력남용, 부정축재자처벌에서 정부가 너무 미온적이라 비난했고, 한편 혁신세력의 상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위험시하던 반공우익세력은 혁신세력에 대한 제재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장면 정권을 공격했다. 장면 정부는 좌우의 협공을 받다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과 그의 지지자들이 일으킨 5·16군사정변에 의해 붕괴되었고, 제2공화국은 수립 9개월 만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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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쿠데타 이후 2년여에 걸친 군부직접통치를 끝내고 박정희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에 복귀했지만, 박정희가 지향한 것은 민주적 정치질서의 창출이 아니라 강력한 권위주의적 질서를 토대로 근대화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이었다. 산업화의 정치가 전개되면서 경제주의와 행정주의가 정치의 자율성을 억압했다. '선성장, 후분배'의 구호아래 정치는 산업화를 지원하는 종속적 지위로 격하되었다. 제3공화국하에서 정당이 복구되고 국민의 대표가 의사당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지만 국민의 생활을 설계하는 자들은 국민에 의해서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이었다. 갈수록 정당, 이익집단, 결사체가 이끌어가는 정치의 영역이 줄어든 반면, 행정의 영역은 늘어만 갔다. 제3공화국하에서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와 같은 정권안보기구를 수립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에 비해 월등한 물리적 강제력과 정보통제력을 갖고 있었으나, 주기적 선거, 반대당의 허용, 상당한 언론의 자유, 노조의 허용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외피는 제한적으로 유지했다. 1960년대의 경제개발의 성공으로 박정희 정권은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1967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으나 헌법의 임기제한에 의해 3선 출마가 불가능해지자 1969년 야당과 학생들은 물론 공화당내의 김종필 지지세력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1971년의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3번째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71년의 2회의 선거는 박정희가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내에서 정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71년의 선거에서 야당의 후보인 김대중은 박정희의 경제개발모델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고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뒤이어 치러진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당내분열과 관권선거라는 불리한 여건하에서도 대도시지역을 석권해 89석을 획득함으로써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113석에 근접하게 되었으며 또 다른 개헌시도를 저지할 수 있는 의석수를 확보하게 되었다.
1971년 선거이후 노동자, 빈민, 지식인의 저항이 분출했고 박정희 정권은 선거를 통한 권력유지방식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을 폐기하는 유신체제의 수립작업에 들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3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1971년 12월 불안한 안보정세를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무렵 미국과 중국 간의 화해, 중국·일본 간의 국교정상화 등 정세변화에 따라 남북대화가 열리게 되었으며 1972년 7월 4일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간의 관계개선을 상징하는 '남북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7·4남북공동성명).박정희 대통령은 안보위기에 대처하고 통일에 대비해 국력을 집중한다는 명분으로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여 헌정을 중단시킨 후 11월 계엄령하에서 실시된 국민투표를 통해 이른바 '유신헌법'을 공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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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독재와 영구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극도로 억압적인 권위주의 체제였다. 유신체제하에서 박정희는 국민적 동의에 기초해서 권력을 위임받고 행사하려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자신을 행정, 입법·사법 3부위에 군림하는 초헌법적인 독재자로 부상시켰다. 유신체제하에서 대의정치와 정당정치는 황혼을 맞이했다. 유신체제에서 국회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그 가운데 2/3는 1구 2의석의 중선거구에서 선출하고 1/3은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박정희는 1/3에 달하는 유신정우회 의원을 확보하게 되었고 자연히 여당인 공화당에의 의존은 줄어들게 되었다. 강한 여당은 강한 야당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야당과의 권력경쟁 자체가 소멸된 상황하에서 집권 여당은 할 일이 없어졌다. 유신체제하에서 여당도 야당도 아닌 박정희의 친위 보안부대인 중앙정보부, 경호실, 보안사령부 등이 국민의 여론을 수집하고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시민사회는 해체를 강요당했다. 노동자들은 병영식으로 통제되었고 농민들은 새마을 운동의 일원으로 편성되었으며,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 통제도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을 멈출 수 없었다. 비민주적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야당은 물론 원외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나갔고 이에 대해 정부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동으로 대처했으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은 확대되어 갔다.
민심이 민주공화당 정권을 떠나버린 결과로 마침내 1978년 12월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보다도 더 많은 표를 획득하는 이변이 일어났고(신민당 32.8%, 민주공화당 31.7%), 이에 고무된 신민당은 김영삼을 새 총재로 선출하여 유신체제에 대한 공격을 가중시켰고,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의 의원직을 박탈했다. 그 결과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의 시위소요사태인 부마사태(釜馬事態)가 일어났고 부마사태의 진압을 위해 부산과 마산지역에 계엄령이 발동된 가운데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다(→ 10·26사태). 박정희의 피살 직후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헌법에 의해 국무총리 최규하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나 유신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유신정권의 붕괴는 권위주의 독재의 제도화에 실패한데서 기인한다. 박정희는 자신이 물러난 뒤에도 유신정권을 계속 유지 시킬수 있는 이데올로기와 제도화된 정치조직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권력은 박정희와 근위병조직인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경호실로 집중되었고 제도화된 정치조직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강권조직을 핵심으로하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위기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강경일변도로 밀고 나가는 '권력경화증'에 걸려 있었다. 결국 유신정권은 비제도화된 집정관적(praetorian) 권위주의 정권이었고 유신의 창업자인 박정희가 피살됨으로써 자동적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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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극을 치르고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은 역대 권위주의 정권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태생적인 정통성의 결함에 시달려야했다. 전두환 정권은 유신헌법을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7년 단임제의 채택을 통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높히려 했으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4년 이후 학원자율화조치, 정치인 해금조치 등의 유화정치를 실시했으나, 이는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높히기 보다는 오히려 전두환정권에 반대하는 야당, 재야인사, 시민운동세력, 학생들로 하여금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동원을 조직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5년 2·12 총선을 통해 패권적 집권여당과 다수의 군소야당으로 구성된 다당제구조를 공고히하려했다. 그러나 2·12 선거에서 사회운동세력들이 해금된 보수야당 정치인들의 조직인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신한민주당의 선거운동을 적극 지원한 결과 신당바람이 일어났다. 2·12 총선결과 신한민주당이 67석을 획득했고 '충성스런 야당'인 민한당은 35석밖에 얻지 못했다. 2·12 총선은 권력의 소재지의 변경을 가져오지는 못했으나 민의의 소재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밝혀주었다. 그 결과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되었고 신한민주당은 사실상 해체된 민한당을 흡수함으로써 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대안세력으로 등장했다.
2·12 총선 이후 신한민주당이라는 강력한 조직적 반대세력이 제도정치권에 등장함으로써 전두환 정권은 일방적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갈 수 없게되었다. 신한민주당은 전두환 정권을 개헌을 위한 협상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압력을 가했으나 여전히 국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집권여당인 민정당과 전두환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신한민주당은 2·12 총선 1주년이 되는 1986년 2월 12일에 '일천만 개헌추진운동'이라는 이름하에 직접 거리로 나가 대중을 동원했다. 신한민주당과 사회운동세력간의 연합에 의한 대중동원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마침내 전두환 정권은 1986년 4월 30일 개헌협상테이블을 여는데 양보했다. 그후 1년동안 개헌논의가 진행되었으나 신민당의 대통령직선제와 정부여당의 내각책임제는 접점이 없이 평행선을 달리게 되었고 1986년 7월 30일 발족한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는 단 한차례의 공식회의도 열지 못했다. 여야간의 개헌협상이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학생들과 사회운동세력의 거리 시위는 격화되었다. 혼란의 와중에서 정권은 제도권 야당을 분열시키려는 공작에 나섰다. 1986년 12월 24일 명목상의 신민당 총재인 이민우는 7개항의 자유화조치가 선행되면 민정당의 내각제개헌안을 고려해보겠다는 소위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야당의 실질적 두 지도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여당에 협조적인 이민우 구상에 동조하는 당내분파를 숙청하기 위해 66명의 의원을 이끌고 신민당을 탈당하여 김영삼을 총재로 하는 통일민주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했다. 직선제 개헌에 대한 양김씨의 일관된 자세는 제도권 야당의 기회주의를 의심해왔던 사회운동세력들의 야당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데 기여했다. 이민우 구상의 좌초로 전두환 정권은 더 이상 협상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개헌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1987년 4월 13일 야당과의 개헌협상을 마감하고 현행 헌법 방식에 의해 대통령직을 후임자에게 승계하겠다는 4·13 호헌선언을 했다.
4·13 호헌조치가 발표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의 물결이 거리를 휩쓸었다. 이러는 와중에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 은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국민적 저항운동이 형성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이제까지 방관자적 자세를 보여왔던 중산층들이 민주화를 위한 시위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제도권 야당과 사회운동세력들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라는 전국적 규모의 민주화 연합조직을 결성했고, 국민운동본부는 1987년 6월 10일 12·12사태의 주역중의 한명인 노태우의 집권 민정당의 대통령후보지명일에 맞추어 전국적 규모의 시위를 조직했다. 소위 '6월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6월민주화운동은 야당, 사회운동세력, 학생, 중산층을 포함하는 최대 민주화연합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시위는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 경찰력만으로 진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해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연합의 핵심적 요구를 수용하는 정치적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민주화연합세력의 요구를 수용하는 '6·29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사태의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고 신민당의 두 지도자는 정권의 즉각적인 퇴진을 수반하지 않는 6·29선언을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민주화를 위한 대타협이 이루어졌다.
1987년 6·29선언으로 대타협이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거리의 정치는 자연히 개헌과 선거정치로 이동했다. 여야간의 일련의 협상을 거친 후 대통령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새 헌법이 마련되었고 국민투표를 거쳐 채택되었다. 선거국면이 전개되면서 민주화의 두 주역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이 일어났다. 민주화를 이루어 내기 위해서 양김씨는 그들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협력했다. 그런데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난 뒤 그들은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경쟁이다. 그러므로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뭉쳤던 세력들이 민주화 이후 서로 다른 이익을 대표하기 위해 경쟁한다는 것은 너무도 '민주적'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갈라서기'가 너무 빨리 왔다.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완결되기도 전에 민주화를 주도하던 세력들은 두 대통령후보(김영삼, 김대중)를 중심으로 나뉘어졌고 그 결과 구권위주의세력이 지원하는 후보인 노태우에게 선거승리를 안겨 주었다. 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가 단일화되지 않고서는 정부와 집권당의 지원이라는 엄청난 이점을 안고 있는 노태우후보를 이길 수 있는 확률이 희박했다. 더구나 집권세력에 의해서 지역주의가 동원됨으로써 두 야당후보 지지표의 지역적 고착화를 가져와 권위주의를 반대하는 대다수의 표를 어느 한 후보에 집중시키지 못했다. 이에 더하여 사회운동세력까지 양김을 따라서 분열함으로써 구권위주의세력의 후보를 당선시키는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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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가 등장한 후 1988년 4월 26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결과는 구권위주의 세력들이 승리를 선언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대통령선거에서 두 야당후보의 표를 분산시키기 위해 조성한 지역주의는 국회의원 총선에서도 표의 지역적 고착화 현상으로 나타나 의회에서 안정적 다수를 꾀하던 집권여당이 1950년대 이래 최초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총선 직후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재빨리 3당공조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여소야대의 권력구조가 등장했다. 세 야당의 느슨한 연합이 의회를 장악함으로써 구권위주의 세력이 민주화의 의제와 속도를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정치지형이 형성되었다.
의회를 장악한 세 야당은 노태우 정권에 5공비리를 파헤치고 군부권위주의의 잔재를 청산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노태우 정권 역시 5공을 청산하라는 야당과 국민으로부터의 압력을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5공세력을 정권의 핵심으로부터 축출하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려는 전략적 계산을 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가 성공리에 치러진 후, 야당은 국정조사권을 활용해 5공화국의 비리와 의혹을 파헤치는 조사에 착수했고 10월에는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에 관한 청문회를 열었다. 5공청산을 위한 청문회 정국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측근과 친인척의 축출과 사법처리를 거쳐 전두환 전 대통령이 5공비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 국민 사과를 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했다.
5공청산을 위한 청문회는 신생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역행하는 민중주의의 정치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학생들은 거리에서의 시위를 통해,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 이익집단들은 집단행동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함으로써 제도권 정치가 거리의 정치에 압도당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거리로부터의 요구를 제도권에서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거리의 장외정치세력을 장내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구권위주의체제와의 연속성 위에서 태어난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거리의 의회'의 확산은 보수세력의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켜 신생 민주주의를 불안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더하여 1989년의 동구와 러시아의 사회주의 몰락과 3저현상의 소멸로 인한 한국경제의 국제경쟁력 약화가 노태우 정권에게 보수회귀를 위한 구실을 제공했다.
1989년의 공안정국의 조성에서부터 출발하여 1990년초 3당합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조치를 통해 노태우 정권은 수세기를 마무리하고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반격에 나섰다. 1990년 1월 22일 민정당의 노태우 총재,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3당합당에 합의함으로써 민주자유당(민자당)이 탄생했다. 3당합당으로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에서 벗어나 의회 내에서 안정적 지지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으나, 3당합당은 여소야대하에서 추진되어오던 민주화 개혁의 종식을 가져왔다. 먼저 지방자치의 실시가 기초자치의회 선거로 축소되고 지방자치의 핵심인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여론과 야당의 끈질긴 요구에도 불구하고 차기 정권으로 연기되었다. 6공화국 초기에는 경제력 집중억제시책, 금융실명제 준비, 토지공개념 관련 법안 추진 등의 경제민주화를 위한 개혁시도가 있었으나 3당합당 이후 경제민주화 개혁을 추진하던 세력들이 퇴장을 강요당했고 여소야대 시기에 추진되어왔던 경제개혁은 무산되거나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조직노동자들에 대한 공세도 강화되었다. 3당합당 이후 취해진 노태우 정권의 대노동자공세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와 같은 변혁지향적인 민주노조운동의 불법화, 무노동무임금원칙의 엄격한 적용, 총액임금제와 같은 임금가이드라인의 부활 등으로 나타났다.
3당합당은 지역주의를 더욱 심화시켰다. 3당합당은 호남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평민당을 배제한 반호남의 정치연합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3당합당은 한국 국민을 지역에 근거한 '2개의 국민'(two nations), 즉 호남 대 비호남으로 갈라놓았다. 3당합당이 의도한 2개의 국민전략은 선거정치에서 그 힘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991년 지방의회의원 선거에서 평민당은 부산, 대구, 경남, 경북, 충북, 제주에서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그후 평민당과 3당합당에 동참하지 않은 통일민주당 의원들이 결성한 민주당과의 합당으로 민주당이라는 통합 야당이 출현했으나 1992년의 총선에서도 지역주의적 투표행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992년의 총선은 같은 해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의 전초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92년 3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특기할 사실은 정주영이라는 한국의 최대 재벌총수가 이끄는 통일국민당의 돌풍이었다. 창당 후 불과 2개월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국민당은 유효득표수의 18%를 얻어 31석을 당선시키는 이변을 창출했고 정주영은 이에 고무되어 차기 대통령을 꿈꾸게 되었다. 총선이 끝난 후 정국의 초점은 자연히 연말의 대통령 선거로 모아지게 되었다. 민자당 후보의 결정과정에서 당내 소수파의 수장인 김영삼은 다수파를 누르고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 이는 노태우 대통령의 독특한 수동적 리더십에 힘입은 바 크다. 노태우 대통령은 후계자 선출과정에 직접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집권여당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민주적 과정을 통한 대통령 후보의 선출을 가능하게 했으며, 집권여당인 민자당을 탈당하고 야당의 중립적 선거관리내각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선거 이후의 정통성 시비를 제거하여 평화적 정권이양에 기여했다. 1992년의 대선에서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는 42.0%를 얻어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33.8%)와 국민당의 정주영 후보(16.3%)를 누르고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 민주화의 진전을 의미했다. 김영삼 정부의 등장은 1960년대 이래 처음으로 한국 민주화를 이끌었던 민간인 지도자가 선거를 통해 권력을 계승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김영삼 정부는 자신을 '문민정부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적 의미를 규정했다. 김영삼 문민정부의 첫째가는 역사적 과제는 군부권위주의의 해체작업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김영삼 정부가 구권위주의세력의 지지를 받아서 출범했기 때문에 김영삼 정부가 개혁보다는 현상유지를 꾀할 것이라고 우려했으나 김영삼 정부는 예상을 뒤엎고 구권위주의를 청산하기 위한 개혁에 나섰다. 먼저 구권위주의 정권의 핵을 이루고 있었던 군부 엘리트들을 숙청했고, 군부 내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려오던 하나회와 같은 정치군인 집단들을 해체했으며,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를 재확립했다. 안기부에 대한 국회의 통제가 제도적으로 마련되었으며,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이 금지되고 활동영역을 군 내부로 한정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다음으로 김영삼 정부는 공직자 재산공개를 통해 관료와 정치인의 사정에 나섰으며 1993년 6월 '공직자윤리법'을 제정해 공직자 재산공개와 등록을 제도화했다. 또한 정치자금법 개정과 금융실명제의 단안을 내림으로써 권력과 금력간의 유착관계를 근본적으로 단절하고 깨끗한 정치의 실현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이와 함께 1995년 6월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의 단체장과 지방의회의원을 동시에 선출하는 4대 지방선거를 실시함으로써 중앙정치에서 시작된 민주화를 지방으로 확산시켰다.
김영삼 정부의 전광석화 같은 개혁조치에 기득권 세력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로 개혁으로 인한 가시적인 과실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기득권 세력들은 개혁에 대한 저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개혁정치에 대한 불만은 1995년의 지방선거에서 표출되었다. 이러한 개혁정치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김영삼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에 나섰다. 1995년 12월 19일 자민련을 제외한 여야 대다수 의원들의 찬성으로 5·18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역사바로세우기는 법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12·12, 5·18 관련자들을 처벌함으로써 세계 민주화 역사에 기록될 업적을 남겼다.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에서 군부권위주의정권의 과거를 단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예상을 뒤엎고 군부권위주의 정권의 과거를 단죄함으로써 집권 후반기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1996년의 최대의 정치행사인 총선에서 승리의 초석을 쌓았다.
1997년의 대통령 선거는 1987년 달성한 민주화 10년을 자축하고 21세기 한국의 진로를 선택하는 잔치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택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한국 민주주의는 중대한 시련에 부딪쳤다. 1996년까지만 하더라도 낙관적 분위기가 한국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1997년 선거의 해가 시작되면서부터 한국형 발전모델의 문제점이 연속적으로 노출되었다. 1996년말에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법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화이트칼라와 민주화 시민운동의 동참을 불러일으키면서 1987년 이래 처음으로 민주화 사회운동세력과 노동운동세력 간의 확장된 연합을 형성시켰고 최대한으로 확장된 저항연합은 김영삼 정권으로 하여금 유연적 노동시장을 마련하려던 개혁조치를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노동법파동은 불길한 조짐이었다. 노동법 파동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한보사태와 김현철파동이 연이어 터졌다. 한보사태와 김현철 파동은 한국 자본주의가 아직도 투명성과 절차적 공정성을 갖추지 못하고 정치인, 기업인, 금융인 간의 3각유착관계의 네트워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선거의 해에 터져나온 내부적 문제들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김영삼 정부는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을 단행하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한보사태에 이어 진로, 대농, 기아와 같은 재벌의 부도가 연이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는 '부도유예협약'이라는 형태로 문제를 봉합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신호는 외부로부터 올 수밖에 없었다. 타이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인도네시아를 거쳐 한국에 상륙했을 때, 세계 자본가들이 한국 금융의 건전성을 시험하자 한국 자본주의의 취약성은 백일하에 드러났고 마침내 국가부도까지 몰리게 된 경제위기가 발발했다. 국가부도의 벼랑에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지원을 받는 대가로 IMF 관리체제를 수용하는 형태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으나 한국형 발전모델에 대한 한국인들의 자존심과 신뢰는 산산히 부수어져 버렸다.
위기와 함께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이제 1997년의 대선은 민주화 10년을 자축하는 축제가 아니라 IMF 관리체제를 초래한 국난의 극복으로 초점이 이동했다. 말하자면 누가 이 국난을 초래했으며 이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은 무엇인가였다. 위기적 상황에서의 선택의 결과는 먼저 김대중 정부로의 정권교체였다. 정부수립 50년 만에 처음으로 평화적인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정권교체는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위기상황에서 여에서 야로 정권교체를 선택함으로써 한국인들은 정권의 실패를 표로써 심판할 수 있는 주권자로서의 능력을 과시했다. 또한 위기상황에서 평화적인 선거를 치러냄으로써 한국인들은 외부적 상황의 변동에 관계없이 민주주의가 '우리 동네의 유일한 게임'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했다. 말하자면 1997년의 선거는 한국 민주주의가 전환의 과정을 마감하고 공고화 과정에 진입하기 위한 결정적 문턱을 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둘째로 1997년의 선택은 이제까지 이데올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배제된 세력에게 민주화를 위한 국민통합을 위임한 선택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스스로를 '국민의 정부'라고 규정함으로써 지역통합, 사회통합, 민족통합을 바라는 국민의 요구에 화답했다. 셋째로, 김대중 정부는 냉전의 해체와 경제의 세계화라는 세계사적인 대전환기에 민주주의, 시장경제, 세계주의로의 3중적 전환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받고 있었다. 이에 호응하여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새 정부의 국정의 기본 이념이라고 선언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의 정부에게 1998년은 위기관리의 해였다. 위기하의 한국경제를 IMF와의 협조하에 정상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1998년에 김대중 정부에 맡겨진 첫번째 과제였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하기 전부터 한국경제를 좌지우지했던 5대 재벌그룹 총수들과 시장경제 원리에 맞는 방향으로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그리고 노동자의 협력 없이는 경제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김대중 정부는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했다. 뒤이어 당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민주적 시장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기업, 금융, 노동, 공공의 4대 부문에서 포괄적인 경제구조개혁이 실시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외환위기 관리노력과 4대 부문 구조조정의 결과로 한국은 외환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의 노력과 국민들의 위기의식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경제위기는 진정되었으나 한국의 정치는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아직도 한국정치는 위기에 처한 경제를 소생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한국경제의 재도약에 짐이 되고 있다. 고비용 저효율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제도개혁은 지지부진한 가운데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있는 지역갈등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정치개혁이 앞으로 김대중 정부에게 맡겨진 최대 과제임을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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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국으로 출발한 대한민국 외교의 기본 과제는 국제사회로부터 정통성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생 대한민국정부는 1948년 정부수립 후 되도록 많은 나라와 국제기구의 '승인'을 획득하는 것을 외교의 우선적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세계정부의 성격을 가진 국제기구인 국제연합(UN)은 1948년 12월 한국정부를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선언했고, 북한의 침략에 대해 UN군을 파견했으나 북한을 지지하는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의 반대로 40년 이상이나 UN 회원국 가입을 저지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1989년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냉전체제가 종식됨에 따라 한국 외교의 반경은 전세계를 포괄하게 되었다. 한국은 1991년 9월 북한과 함께 UN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했으며 1998년 9월 현재 수교국의 숫자는 러시아 등 구사회주의 국가의 대부분을 포함하여 183개국에 이르렀다. 냉전체제의 해체와 북한의 경제적 실패, 한국의 경제적 도약으로 남북한간의 외교경쟁은 한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해체와 상호경제회의(CMEA)의 해체는 북한을 외교적, 경제적 고립에 빠뜨린 반면, 한국은 경제적 강국으로 부상한 데 힘입어 동유럽과 러시아의 구사회주의권의 국가들은 물론이고 비동맹 제3세계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확대, 심화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는 한국외교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한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에 힘입어 과거의 원조수혜국의 위치에서 벗어나 원조공여국으로 지위상승에 성공했고, 민주화로 인권침해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당당하게 지구촌 민주주의의 일원이 되었다. 달라진 한국의 위상은 선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초청을 받음으로써 확인되었다. OECD의 일원이 됨으로써 한국은 빈곤과 독재가 공존하는 제3세계로부터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가 상생하는 제1세계로 지위상승을 이룩할 수 있었다.
건국 이후 반세기 동안 한국 외교의 핵심분야는 안보외교, 경제외교, 통일외교였다. 건국 이후 분단국가의 수립과 한국전쟁을 치른 한국의 외교 중심축은 안보외교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외국자본의 유치, 수출확대, 국내시장 개방압력에 대처하기 위한 경제외교의 중요성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냉전이 종식된 뒤,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고 통일에 대비한 남북간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통일외교가 한국외교의 새로운 중심 영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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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냉전의 와중에서 분단국가로 탄생했고 전쟁까지 치른 국가이다. 따라서 생존을 위한 국가안보의 확보는 대외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48년 건국 이후 북으로부터 강한 군사적, 정치적 도전을 받아온 한국은 후원국인 미국으로부터 한국의 안전에 대한 보장과 군사원조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정부의 1차적 외교정책의 목표는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UN군의 파견이었다. 6·25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뒤에는 UN군의 계속적인 한반도 주둔과 미국으로부터 한국의 안보에 대한 공약을 계속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어왔다. 1953년 7월 27일 이승만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이 성립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한국군의 증강을 위한 군사원조를 얻어내는 데 활용했다. 한국은 미국을 한국 방위에 묶어두기 위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UN군 사령관에게 이양하는 조치까지 감수했다. 냉전기의 한국의 최고 목표는 북한으로부터의 남침을 방지하고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안보외교의 첫번째 시련은 데탕트라는 국제안보환경의 변화로부터 나왔다. 1969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시아로부터 발을 빼는 '괌 독트린'을 발표했고, 이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부분적으로 철수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주한미군 2만 명의 철수와 한국에 대한 안보공약의 축소로 한국은 안보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한국은 이에 대응하여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의 육성과 남북대화를 추진했다. 1960년대의 베트남전 파병, 1970년대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은 미국을 한국에 계속 남아 있게 하려는 한국정부의 노력과 연관된 것이었다.
1980년대말의 냉전종식은 한국 안보를 위한 획기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노태우 정권은 냉전의 해체로 조성된 유리한 국제환경을 포착, 활용하기 위해 북방외교를 전개했다. 먼저 동유럽권 구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수교를 시작으로 구소련과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정상화는 한국에 유리한 안보환경을 조성했다. 외교수립 이후 러시아는 1961년에 체결된 북한과의 상호원조조약을 1996년 9월에 폐기했고, 중국은 경제적 실익에 기초해 북한을 일방적으로 지원했던 종래의 정책을 수정했다.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정상화와 정치·경제교류의 확대는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안보문제와 관련된 최대의 외교현안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것이었다. 북한은 1985년에 국제핵비확산조약을 체결했으나 그 실행을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핵안전협정체결을 미루고 있었다. 한편 북한이 핵폭탄 제조를 추진하고 있다고 판단한 한국·미국 등 여러 나라는 다방면으로 압력을 가해 북한으로 하여금 IAEA와의 핵안전협정을 체결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정부는 1991년 12월 남한에 핵무기의 보유 및 배치와 핵연료 재처리 및 농축시설의 설치를 배제하는 내용의 비핵원칙을 선언했다. 북한은 1992년 1월 30일 IAEA와 핵안전협정을 체결했으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IAEA의 핵사찰을 거부하고 1993년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의 NPT의 탈퇴로 조성된 안보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은 긴밀한 협조 아래 북한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1994년 6월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으로 경수로지원에 대한 대가로 북한의 핵사찰 수용과 남북정상 회담이 약속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과 '조문파동'으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으나 1994년 10월 21일 대북경수로지원에 대한 대가로 핵사찰을 수용하는 북·미간의 제네바 핵협상이 타결, 서명되었고 북한 핵을 둘러싼 안보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대북경수로지원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설립되었고 경수로지원사업은 북한 잠수함침투사건에도 불구하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탈냉전기에도 여전히 한반도는 냉전의 한복판에 있다. 경제실패로 북한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은 군사력이다. 북한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국에 대해 '벼랑끝외교'를 벌이고 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북한은 인공위성인지 장거리 미사일인지 확인되지 않은 물체를 발사해 한국을 비롯해 미국과 일본을 놀라게 했다. 북한은 탈냉전시대에 여전히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 했다. 체제붕괴의 위험에 처한 북한 지도부는 미사일이나 핵개발의 위협을 통해서 정치적 생존을 보장받고 동북아시아 평화비용의 지불을 요구하는 경제외교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강성군사대국' 건설 정책은 한반도의 안보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북한의 강성대국론에 대해 김대중 정부는 군비경쟁을 통한 대북군사우위확보로 대응하기보다는 쌍방 신뢰구축과 군비통제를 통해 소모적인 군사적 대결구조를 청산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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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 한국외교의 제1차적 목표는 안보외교였으나 한국 경제의 성장과 냉전의 해체로 말미암아 외교의 중점이 경제외교로 이동하고 있다. 개관해 볼 때, 한국의 경제외교는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원조외교',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의 차관 및 투자유치와 시장확보 활동,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중반까지의 국내시장보호를 위한 통상외교,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시장개방과 투자유치를 위한 외교의 시기로 대분할 수 있다.
1970년대초까지 경제원조는 전후 경제복구와 경제개발을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한국은 외국, 특히 미국의 경제원조 없이는 기본적인 경제적 요구도 충족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해외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원조를 받아내고자 했다. 미국의 경제원조는 국가예산 보조를 위한 재정지원 외에 한국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1950년대말까지만 해도 곡식·원면·원자재·의료품 등 생필품에 집중되었으나, 그후 1970년대초에 무상원조가 끝날 때까지 점차 산업발전의 기반형성을 위한 원조로 전환되었다. 1960년대 중반 한·일관계정상화, 베트남전 파병결정 등에 경제적인 동기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은 이러한 전반적인 경제발전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가 격감됨에 따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아시아개발은행(ADB)·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의 역할과 비중이 증대되었고 그에 따라 미국 일변도의 한국 경제외교도 점차 다변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한국의 적극적인 해외경제진출의 시기였다. 한국은 베트남에서 쌓은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중동에서의 건설사업, 기타 지역에서의 시장확대에 집중적인 노력을 했는데, 외교는 이러한 해외경제활동을 인도하고 지원하는 새로운 사명을 떠맡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경제외교는 1980년대 후반에 와서 국내시장보호라는 새로운 사명을 갖게 되었다. 즉 미국이 무역적자에 허덕이게 되고 잠시나마 한국이 1980년대말에 무역흑자국이 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시장개방압력이 강화되었다. 시장개방문제는 한·미 쌍무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우루과이라운드(UR)를 통한 다자간 협상에서도 집중적으로 대두되었고, 특히 농산물 시장개방과 관련하여 한국외교에 커다란 과제를 안겨주었다. 한국외교는 민주화로 인해 막강해진 국내적 압력과 격화된 통상갈등으로 말미암아 증대된 국제적 압력의 틈바구니에서 균형 있고 합리적인 정책을 모색해나가는 데 고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경제외교는 세계화로 조성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세계화는 국제금융자본의 급격한 이동을 가져와 마침내 외환위기를 불러일으켰고 한국을 IMF 관리체제하에 들어가게 했다. IMF 체제하에서 한국의 경제외교는 외환위기와 외채위기의 해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를 위해 첫째 해외시장의 개방과 개척을 통한 우리 상품과 서비스의 수출확대에 노력하고 있고, 둘째, 적극적 투자유치를 통해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이며, 셋째, 외채구조의 개선과 상환부담 경감을 위한 금융외교를 전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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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국으로 출발한 남한과 북한이 전쟁까지 치르게 되면서 통일외교는 당분간 설자리가 없었다. 더구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는 데 국력을 집중했기 때문에 통일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남과 북에 다 같이 '선 경제건설 후 남북통일'이라는 공식이 지배했다. 남과 북이 접촉을 시작한 것은 전후 복구가 끝나고 경제건설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선 1970년대부터였다.
남·북한은 1970년대초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공식적인 접촉을 갖고, 1971년 적십자회담을 시작으로 하여 1972년에 7·4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는 데까지 발전했으나, 남북대화는 북한측의 거부로 중단되었다.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에 대한 외교정책 특별선언'(6·23선언)을 통해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하고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문호를 개방했다. 제5공화국이 등장한 뒤, 전두환 대통령은 '남북한당국최고책임자회의'를 제의했으나 북한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후 1984년 북한의 대남수재민 구호제안을 계기로 남북적십자회담·남북국회회담·남북체육회담·남북경제회담 등 일련의 남북대화가 진행되었으나, 북한은 1986년부터 일체의 남북대화를 거부했다.
민주화의 결과로 탄생한 6공화국의 노태우 정부는 민주화로 높아진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탈냉전으로 조성된 유리한 국제질서를 이용하여 통일외교의 영역을 넓히는 데 성공했다. 북방외교로 러시아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여는 데 성공했고 나아가 북한과의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하는 데 성과를 거두었다. 노태우 정부는 '7·7선언',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등을 통해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방법의 평화통일정책을 추진했다. 1990년대초 북한은 경제적인 파탄과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남·북한의 UN 동시가입을 수락하고, '남북고위급회담'이라는 이름의 총리회담을 수락했다. 1990년 9월 4일부터 5차에 걸친 남북고위급 본회담을 거쳐 남북은 1991년 12월 13일 역사적인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어서 1992년 2월 19일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는 위의 기본 합의서 외에 정치, 군사 및 교류, 협력의 '분과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효시킴으로써 남북한 당국은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화해·공존 관계를 제도화해 나갈 수 있는 기본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의 경제위기와 동구와 러시아의 사회주의정권의 몰락이라는 변화된 국제환경하에서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이했다. 김영삼 정부는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 는 없다"고 선언하며 적극적인 남북관계 개선의지를 밝혔으나, 그로부터 불과 15일 만에 북한은 NPT의 탈퇴를 선언해 남북관계는 오히려 위기국면으로 치달았다. 북한의 핵사찰 거부로 조성된 긴장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핵협상의 타결로 일단 해소되었고 남북한은 관계개선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6년 4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한이 주도하고 미국과 중국이 참여해 상호신뢰구축과 한반도평화체제구축을 논의하는 4자회담을 제의했으나 1996년 9월 북한 잠수함의 좌초사건을 비롯한 예기치 못한 돌발변수의 등장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북정책에서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었다.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불리기도 하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흡수통일포기, 교류·협력에 있어서 정경분리원칙의 적용, 평화정착 우선주의의 채택으로 요약된다. 김대중 정부의 통일외교가 김영삼 정부의 통일외교와 차이가 나는 영역은 대북정책의 일관성이다. 김영삼 정부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강경정책과 온건정책을 왔다갔다 함으로써 대북정책의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고 상호신뢰관계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 반면, 김대중 정부는 또다른 북한 잠수정 좌초사건 등의 남북관계를 위협할 만한 상황의 발발에도 불구하고 인내를 가지고 햇볕정책을 실시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먼저 민간기업을 통한 금강산 관광으로 국민의 피부에 와닿았다. 6·25전쟁 이후 최초로 남한 사람들이 대규모로 북한 땅을 밟는 감격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체제보호를 위하여 한국을 포함한 외부에 대한 개방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특히 한국에 의한 독일식의 '흡수통일' 가능성을 크게 우려해 온 북한은, 종전의 정권들과 달리 김대중 정부가 북한체제 유지론에 기초로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와 대북 평화·협력의 추구에 초점을 둔 대북 포용정책을 일관성 있게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데 대해 마침내 신뢰의 태도를 나타냈다. 그 결과 2000년 6월 13~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분단 55년 만에 평양에서 첫 남북 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남북관계는 종전에 비해 전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상호신뢰구축에 기초한 남북관계 실현의 가능성이 한층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韓昇洲 글 | 任爀伯 참조집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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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1세기 또는 한 세대에 걸쳐 일어난 사회변동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기간의 변화를 일반적으로 '근대화'라 규정해도 무방하며,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는 크게 3번의 파도가 일었다고 비유할 수 있다. 첫번째 파도는 19세기말의 문호 개방에 따라 서양문화와 접촉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한 문화접변(文化接變)의 경험이고, 2번째의 큰 물결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해방과 함께 서양의 문물이 직접 밀어닥침으로써 전개된 또 한번의 문화접변이다. 그리고 3번째는 20세기말 대략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정보화의 물결이다. 한 세기 전의 개화 과정에서 우리는 자주적인 근대화에 일단 실패하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쓰라림을 맛보았다. 해방 후에도 남북 분단과 전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한 채 방황했지만, 마침내 1960년대초에 이르러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에 착수함으로써 비로소 본격적으로 자생적인 근대화를 경험하게 된 셈이다. 이제 파란많은 20세기를 마무리하고 대망의 21세기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우리 나라도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정보통신 기술의 혁신에 힘입어 정보화의 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다만 한국사회의 근대화는 워낙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를 경험한 과정이었으므로 일종의 '농축된 역사'로 이해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과거의 전통적 농경사회(農耕社會)와 현재의 지배적인 산업사회(産業社會), 그리고 미래지향의 정보사회(情報社會), 이 3가지 요소들을 동시에 안고 있으면서 변화를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성격은 이러한 전통과 변화의 특징에 비추어 간추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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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전제군주제와 비교적 엄격한 신분제의 틀 속에서 귀족통치를 근간으로 해서 유지되었던 전통사회의 조직원리는 가족과 친족 중심의 촌락공동체적 요소와 유교적 요소로 집약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적 요소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인간관계에서 인정과 정서적 만족을 중시하고 모든 관계를 인간적·정의적으로 간주하려 하며 무엇이든 개인적인 문제로 인식하려는 '인정주의' 성향이 강하다. 이는 권리와 책임에 뿌리를 둔 서양의 개인주의와는 다르다. ② 사람의 정체의식은 개인으로보다는 집단 소속에 의해 좌우되고, 개인의 욕구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는 '집합주의'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가족과 친족 및 동족집단을 중시하는 '가족주의'가 집합주의의 핵심이었다. ③ 인정주의적 성격이 강한 사회적 유대의 기초는 각종의 연줄에서 찾고, 연줄로써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심을 추구하려는 '연고주의'가 성행했다. 연줄로는 혈연이 가장 중요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동향인들의 지연, 동창생들의 학연, 같은 직장 출신의 직연 등이 의사혈연적(擬似血緣的)인 성격을 띠어 각종 파벌이 쉽게 형성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④ 대인관계, 집단의 조직, 신분 질서에서 상하 위계서열을 중시하고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소중히 여기는 '권위주의'가 또 하나의 강력한 특징이었다. ⑤ 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인정하고 계층간의 지나친 격차나 부당한 차별대우를 격렬하게 반대하는 일종의 '평등주의' 또는 평준화 의식이 사회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이는 불의에 대한 저항의식과도 일맥상통하는 전통이다. ⑥ 사람들의 행위를 평가할 때, 특히 지도층에 대해서는 더 엄격하게, 올바른 예절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도덕주의' 혹은 규범주의도 중요한 특성이었다. ⑦ 예의를 숭상하고 도덕성을 강조하다 보니 때로는 지나치게 형식 위주의 '의례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사회조직원리의 전통적 요소 외에도 한국사회의 전통적 가치지향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① 일반적으로 한국인의 시간지향은 현세주의적이다. 과거를 중시하고 조상숭배를 강조하는 것도 결국은 현재의 삶에서 행복을 얻기 위함이다. ② 유교의 영향 아래 사대부 계급에서는 정신적인 삶과 학문을 가치있게 여기는 숭문사상이 지배했으나,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대체로 물질적 부(富)를 추구했다. ③ 아울러 세상에서 출세하여 가문을 빛내야 한다는 지위지향성 혹은 속칭 출세주의가 상당히 강했다. ④ 그 출세를 위한 첩경을 배움, 즉 교육에서 찾았던 것도 유교적인 가치의 한 표출이다. ⑤ 권위주의적 지향은 신분·지위·연령·성별에 의한 차별을 당연시했고, 특히 남존여비의 가치는 자녀의 출산과 양육에서 남아선호·남녀차별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⑥ 가족주의·연고주의 등으로 말미암아 폐쇄적인 집단주의와 대외적 배타성이 강했다. ⑦ 감성적이고 인정스러움 대신에 감정이 격하여 갈등이 쉽게 일어나고, 폐쇄성과 도덕성은 갈등관계를 흑백논리로 가르는 성향을 부추겼다. ⑧ 출세를 위한 성취지향이 강한 반면, 이것이 경쟁에서 배타성과 감정을 타게 되면 격렬한 갈등을 야기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사회의 전통적 요소는 근대화에 저항하는 요인인 동시에, 한편에서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 사회가 새로운 환경에 대처하여 적응하는 데 기여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오늘날까지도 근대화 과정에 여러 모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근대화는 국제적 문화접변에 의해 일어나는 일반적인 변동과 우리의 자주적인 적응 변동의 변증법적인 작용의 결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변화는 먼저 경제 및 사회 구조면에서 일어난 '산업사회화'와 의식과 인간관계 차원의 '물질사회화'라는 2가지 측면의 변화로 요약할 수 있다. 다만, 세기말의 시점에서 급격하게 진행하고 있는 정보사회화가 앞으로 우리 사회의 성격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산업사회화란 주로 공업화를 수반하는 사회변동을 특징짓는 말로서, 산업구조가 농업중심에서 제조업, 나아가 사회간접자본과 서비스업 중심으로 변하는 과정이며, 이에 따라 농업도 공업화를 겪게 됨으로써 농촌 인구가 줄고 도시가 급격하게 성장하는 도시화를 수반했다. 가령, 도시(시부) 인구의 비율이 해방 당시 1945년에 12.9%, 1960년에 28.0%이던 것이 1990년에 이미 74.4%로 대폭 증가했다. 직업도 다양해지고 집단조직은 규모가 커지면서 공식·복합화되며 계급도 다원화되고 전반적으로 대중사회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가족의 구성과 기능도 축소되고, 개인중심주의가 만연하면서 인간관계가 이익사회화하며, 정신과 문화가 세속화하는 경향을 띠어왔다. 경제성장으로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공산품이 널리 보급됨으로써 자본주의적 소비지향의 생활양식이 자리잡게 되어 황금 만능, 물질 숭상, 쾌락 추구의 풍조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특히 대중매체의 발달과 그에 따른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욕구는 다원화되고 기대 수준은 끊임없이 높아지는 한편, 출세주의 지향의 교육열이 경쟁을 자극하여 이기면 그만이라는 목표 달성을 최우선으로 삼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편법주의가 자행되기에 이르렀다. 경쟁에서 뒤떨어진다고 느끼는 집단에서는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의식이 생겨나고, 이러한 격변으로 인한 부적응의 문제가 개인과 제도 차원에서 모두 일어나 개인적으로는 인간성 왜곡현상을, 구조적으로는 격렬한 갈등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동반하는 물질사회화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추세와 가치관의 혼란으로 1990년대 말에는 외환위기에 직면하여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에 의존하여 경제구조 조정에 의한 경제회복의 진통을 겪어야만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준비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급속도로 전개하는 정보화로 인한 사회문화적 변동을 경험하게 되었다. 소위 IMF 위기는 우리의 가치관과 행동유형 및 조직원리 등을 서방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체계의 자본주의적 원칙에 맞추어야 하는 변혁을 요구했고, 이는 한편 우리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를 청산하고 사회 모든 부문에서 합리화, 효율화, 전지구화(globaliaztion)를 추구해야 하는 선진화를 촉진시키는 효과를 자아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단기적으로 실업이 증가하여 사회적 갈등의 씨를 뿌렸고 우리 경제의 전지구적 종속상태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정보사회화는 아직도 초보적인 진행을 보이고 있는 변동이므로 뚜렷한 추세를 읽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하는 부문이 정부와 기업 뿐 아니라 연구와 교육, 가계와 개인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으로 급속히 확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가령, 사이버공간 혹은 전자공간 속의 커뮤니케이션은 일상생활의 대인관계에서 직접적·대면적인 의사소통을 약화시킴으로써 공동체적인 삶의 세계를 다칠 소지가 크고, 주로 대중문화 분야에서는 다양한 신매체, 멀티미디어와 뉴미디어를 타고 전사회 구성원들에게 수시로 다가갈 수 있는 문화 내용이 자칫 비속한 외래문화의 홍수에 떠밀려 문화의 저질화와 도덕성의 마비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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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별 취업자의 구성도 1963년 농림어업 종사자는 62.9%였으나 1997년에는 10.5%로 급격하게 감소한 반면, 생산근로자와 단순노무자는 15.0%에서 36.6%로 늘어났다. 판매·서비스직은 같은 기간에 15.6%에서 23.1%로, 사무직은 3.5%에서 12.2%로, 그리고 전문기술직과 관리직은 3.3%에서 17.6%까지 각각 증가했다. 특기할 사항은 정보화의 정도를 보여주는 직업구조의 변화 추세다. 전문기술직과 행정관리직을 정보직업군으로 분류할 때 1990년에 8.7%였던 것이 1992년에 10%를 기록하고 1997년에는 17.6%로 급신장했고, 정보처리부문의 상대적 비중도 1990년의 25.1%에서 1995년에는 28.4%로 증대했는데, 이런 수치들은 대체로 1990년의 일본의 수준과 근접하다.
이러한 산업과 직업상의 변화는 사회계층의 구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주로 인구조사 자료로써 직업의 성격에 따라 국민의 계급 구분을 하는 사회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중간계급과 근로계급(또는 노동자계급)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계급 구성의 변화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자본가와 정치 엘리트로 구성되는 상류계급은 극소수로서 계급 구성상의 상대적 비중이 미미하지만 1960년 이래 꾸준한 증가를 보인다. 중간계급에는 크게 3가지 범주가 있는데, 첫째는 학력이 높고 전문지식을 요하는 전문직으로 고위 행정관리직을 포함하는 중상계급이다. 1960년의 0.9%에서 1992년에는 1.7%로 2배가 늘었지만, 그 비중은 역시 한정되어 있다. 이에 비해 상대적 팽창이 가장 뚜렷한 2번째 중간계급이 이른바 신중간계급이다. 교육연한, 훈련기간, 전문지식의 수준이 중상계급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전문·기술직과 사무직으로 구성되며, 1960년의 6.6%에서 1992년에는 무려 22.3%로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3번째가 구중간계급이다. 이들은 대부분 자가고용을 하거나 가족 단위의 경제활동을 하고, 소수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각종 자영업자들이다. 이들도 1960년대에는 13.0%이던 것이 1992년에는 22.3%로 대폭 늘었다. 산업사회화의 진전에 따라 가장 급격하게 증가한 계급은 근로계급으로, 1960~92년 사이에 8.9%에서 33.3%로 증가했다. 도시의 하층계급은 초기 경제성장 과정에서 오히려 약간 늘어나다가 1980년에는 다시 줄어들었다. 산업화로 인하여 농가 인구가 전체적으로 감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이다. 계급구성에서도 농촌의 독립자영농층이 1960년에는 40%나 되었지만, 1992년에는 11.6%로 줄었으며, 농촌하층계급도 24%에서 5.2%로 축소되었다. 다른 계급분류법을 채택하여 분석하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큰 추세는 별로 다르게 나타나지 않는다.
위의 관찰에서 1가지 주목할 것은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화 해가는 과정에서 중간계급이 점차 비대해지는 소위 '중산층 사회'로 자리잡아간다는 점이다. 중상계급·신중간계급·구중간계급만 해도 1980년에는 46.3%나 되고, 여기에 농촌의 독립자영농까지 합치면 60%가 중간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회조사에서도 밝혀지듯이, 한국 국민의 60.6%(도시 표본의 63.6%, 농촌 표본의 54.7%)가 자신을 중류계층으로 간주한다는 자료도 있다. 이처럼 중간계층의 비중이 커진다는 것은 일단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여러 가지 여론조사에서 드러났듯이, 한국의 중산층은 아직도 정치적으로 일정한 성향을 확고히 갖추고 있다기보다는 상당한 정도 유동적인 지향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특수한 정치·경제적 쟁점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성향을 띠기도 하지만, 또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근로계급보다도 더 진보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 현실이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들 중산층이 우리 사회에서 교육을 가장 많이 받고 의식이 뚜렷한 계층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한국사회의 계층구조가 계속 변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계급적 구조의 고착화 같은 현상은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다만, 1997년 이후의 IMF 관리체제 아래 실업이 늘고 거품이 빠진 경제규모가 1인당 소득 1만 달러에서 다시 6,000달러 수준으로 떨어지는 진통 속에 과거 중산층으로 간주하던 사람들의 1/3 정도가 이제는 중간계급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조사보고가 있었다.
사회계층의 구성이 이처럼 변하고 있는 현상의 이면에는 사회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왔다는 사실도 함축되어 있다. 우선 공업화에 따른 도시화는 주로 농촌 인구의 이촌향도라는 지리적·수평적 대규모 이동에서 연유하는데, 그와 같은 수평적 이동에 의하여 농업에서 비농업으로 직업을 옮김으로써 결국은 사회계층적 지위의 상향 이동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부모는 농사를 지었지만 자식세대에는 비농업으로 상향이동을 함으로써 이촌향도가 세대간 이동을 가능하게 한 반면, 도시 내의 직업구조가 바뀜에 따라 도시에서도 세대간 상승뿐 아니라 세대 내 사회이동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앞에서 한국사회의 계급 구성이 아직은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했지만, 최근의 국민 여론조사에 따르면,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60% 이상의 응답자들이 세대간 이동의 가능성이 높다는 희망적인 대답을 했고, 과반수 이상이 세대 내 이동까지도 가능성이 높다고 인식한다. 그리고 응답자의 학력이 높을수록 사회이동에 대해 더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희망적인 전망이 금융위기를 겪은 1997년 이후에도 유지될 수 있을지는 재검토해야 할 사항이다. 아마 21세기에 들어서서 경제가 건전성을 회복하고 다시 성장을 지속할 때에는 밝은 전망도 되살아날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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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구조의 변동에서 특기할 현상은 근로계급이 확대 일로에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근로계급 또는 노동자계급이라고 해도 전적으로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선 크게 나누어도 생산직·판매직·서비스직은 일의 성격이나 조직체의 피고용률이 같지 않고, 경제적 보상이나 사회적 지위면에서도 분명히 차이가 난다. 생산직이라 해도 숙련도의 다양성에 따른 차이가 매우 중요하다. 취업자수는 1963년에 756만 3,000명이었으나 경제의 전환기라 할 수 있는 1975년에 1,169만 2,000명, 1997년에는 2,104만 8,000명으로 30여 년 사이에 3배나 늘었다. 이 중 여성취업자수도 1963년에 34.8%에서 1975년에 36.4%, 그리고 1997년에는 41.0%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실업률은 8.1%에서 4.1%, 2.6%로 꾸준히 줄어 들었으나, 1998년 IMF 관리체제 이후 급격하게 증대하여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한편, 취업자의 피고용률도 1963년의 31.5%에서 1975년에 40.6%, 1997년에는 62.8%로 높아졌다. 이중 여성의 피고용률만 보면, 1965년에 20.9%였으나 1975년에 29.4%, 1996년에는 59.6%로 확대되었다. 상시 고용률도 1965년의 67.7%가 1975년에 72.8%, 1996년에는 86.2%로, 여성의 경우에도 같은 기간에 65.2%로부터 77.0%, 83.9%로 각각 증대되었다. 그러나 대기업체 근로자의 비율은 1970년의 52.1%에서 1996년에는 27.2%로까지 떨어졌다.
제조업 부문의 주당 근로시간은 1970년에 53.4시간에 1975년에는 50.5시간으로 줄었으나, 1980년에는 오히려 53.1시간으로 늘었다가 1988년부터 다시 빠르게 감소하여 1997년에는 47.8시간으로 떨어졌다. 제조업의 명목임금지수는 1980년을 100으로 잡았을 때, 1985년에 183.8이었으나 1991년 중반에 4,446.9까지 올라갔다. 실질임금지수도 1980년의 100.0에 대하여 1985년에 130.3, 그리고 1991년 중반에는 223.5라는 증가를 보였다. 한편, 소비자 물가지수는 같은 기간에 각각 100.0, 141.0 및 200.0의 상승을 기록했다. 이에 비해 노동생산성 지수는 1990년을 100으로 할 때, 1970년에 23.4 수준에 머물렀고, 1975년에 37.8, 1980년에 47.8, 그리고 1996년에는 187.0으로 계속 상승했다. 근로자의 임금수준은 우선 남녀간에 약 2대 1의 격차를 보인다. 1971년에 여성의 월평균 임금이 남자의 45.0%이던 것이 1987년에야 51.0%로 과반 수준을 기록했고, 1997년에는 61.5%로 올랐다. 임금수준은 학력에 따라서도 상당히 차이가 난다. 대학 졸업자와 대비한 고교 졸업자의 임금수준이 1971년에 57.4%에서 1975년에 47.2%로 하락하여 1980년대까지는 계속 50% 이하에 머물렀다가, 1988년에 52.4%까지 회복하고 1996년에는 67.9%로 올랐다. 산업별, 직업별 격차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약간의 기복이 나타난다. 가령 1975년에는 전기가스, 수도사업을 으뜸으로 금융, 보험, 부동산, 용역업에 이어 건설업, 서비스업, 도소매 및 음식숙박업, 광업, 농림수산업, 운수창고 및 통신업, 그리고 제조업이 가장 저조했는데, 1996년에 오면 우선 산업별 격차가 대폭 줄었을 뿐 아니라, 그 순서도 바뀌었다. 가장 높은 부문은 여전히 전기가스 및 수도사업이고 다음이 서비스업, 건설업, 금융보험, 부동산 및 용역업, 광업, 운수창고 및 통신업, 그리고 도소매 및 음식숙박업에 이어 제조업이 또한 가장 낮은 부문이다. 직종별 임금격차는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커지는 추세이고 순서도 달라진다. 1975년에 행정관리직을 최고로 전문기술직이 다음이고 사무직, 판매직, 서비스직, 생산직 그리고 농림수산직이 제일 낮았으나, 1996년에는 행정관리직, 전문기술직, 사무직에 이어 생산직이 다음이고 농림수산직, 판매직, 서비스직의 차례로 바뀌었다(→ 3D기피현상).
한국사회의 노동 일반과 관련하여 1가지 더 언급할 것은, 지난 1960년대 경제성장에 착수하던 때에 비해 근로자들의 일에 대한 의욕과 성취동기가 점차 저하하기 시작해 오늘날에는 이른바 3D, 즉 '더러운 일, 어려운 일, 위험한 일'(dirty, difficult, dangerous)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만연하고 있다는 평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생산성도 크게 악화되었고 일의 질도 나빠져서 수출시장에서 반품이 늘어나고 있다는 불평이 높다. 이처럼 일에 대한 욕구가 변하게 된 것은 경제성장에 따르는 생활수준의 향상과 여가 선호의 기풍이 작용한 탓도 있지만, 노동운동의 성격이 이념적·정치적인 것으로 변한 데에서도 기인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성향은 1997년에 맞은 외환위기 이래 IMF 관리체제 아래에서도 변함이 없이 나타났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 때는 기업과 정부의 구조조정으로 정리해고 명목의 대량 실업이 불가피하게 발생했음에도 3D 직종의 기피현상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노동운동의 정치적 성격은 더욱 노골화하는 방향으로 변절하고 있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토착적 자본주의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하던 19세기말부터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조직적 움직임에서 그 가냘픈 뿌리를 엿볼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초기현상에 불과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상당히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식민 지배하에서 제한된 활동밖에 할 수 없었고, 민족독립운동과도 연결되는 정치적인 성격을 띠었다.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 노동운동이 제법 활발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좌우 대립이 극심했으나 정부수립 후 국가에 의해 불법화되었고, 이에 맞서기 위한 친정부 노동단체인 대한노동총연맹(대한노총)이 이후의 노동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 단체는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해체되었다가, 다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으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노총은 외형상으로는 산업별 노조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영향 아래 하향식 조직으로 운영되는 비민주성을 지니고 있었고, 고도경제성장과 안보의 이름으로 노동운동은 일정한 수준에서 억제당했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1963년의 노동관계법 개정은 정부 개입의 폭을 넓혔고, 1972년의 유신 이후에는 노동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강화되었다. 결국 노사관계는 정부의 노동억제·경영옹호라는 일방적인 정책의 비호 아래,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전개되었다.
지속적인 성장 속에서 국가의 억제와 경영층의 무관심을 더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근로자들이 격렬한 저항을 시작하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의 일이었으나 1979년 10·26사태 이후 발족한 제5공화국에서는 노동운동에 대한 억제책을 오히려 더 강화했다. 산업별 조합 체제를 기업별 조합 체제로 개편했고, 교섭 당사자인 노동조합이 외부의 전문가나 상급 노동단체에다 교섭권을 위임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른바 제3자 개입 금지조처를 취함으로써 조합의 교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경제성장에 따르는 빈부격차의 확대와 저소득 근로자층의 분배불균형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사회적인 민주화 요구가 확대되는 가운데, 정부의 억제적인 노동정책과 노사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간섭, 그리고 기업 내의 권위주의적 차별제도 및 관행 등에 깊은 불만을 지녔던 근로자들은 1987년 6·29선언이라는 정치권의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적 자율화의 의지 표명이 있은 뒤부터 폭발적인 노사 분규로 돌입하게 되었다.
그 뒤의 변화를 검토하기 위해 먼저 노동조합의 성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산업별 노조의 수가 1963년의 16개에서 1997년에는 41개로 늘었으나, 1980년대부터는 산업별 노조의 성격이 달라진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조합수는 1963년의 1,820개에서 점차 증가해 1970년대 후반에는 4,000개를 넘었다가, 1980년부터는 다시 2,000여 개로 줄었고, 1987년 후반부터 획기적인 증가를 보이기 시작하여 1990년에 이르면 무려 7,698개나 되었다가, 다시 1997년에는 5,692개로 줄었다. 조합원수도 꾸준히 늘어나서 1963년에 22만 4,000명에 불과했던 것이 1990년에는 188만 명이 넘게 증가했다가 1997년에는 148만 4,000명으로 감소했다. 비농가 상시고용 인력에 대비한 조합원의 비율은 1963년의 20.3%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다가 1980년대에 상당히 줄었으나, 역시 6·29선언 이후에는 신장세를 다시 보이다가 1993년에는 또 다시 17.2%로 줄었다.
지난 한 세대에 걸쳐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노사분규 발생건수와 그 원인 및 형태에서 나타난다. 가령 1970년대만 해도 연간 100건 내외이던 분규가 1980년 한 해에 407건으로 증가했고, 다시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6·29선언 이래로 폭증해 1987년에는 3,749건으로 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남겼다. 그후 다시 감소하여 1990년에는 322건, 1996년에는 85건으로 급격히 줄었다. 분규 원인도 임금인상이라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의 쟁점과 근로조건 등이 가장 빈번하게 등장했고, 분규 형태 또한 농성·작업거부·시위 등 과격하고 격렬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동안 임금은 1987년에는 10.1%, 1988년에 15.5%, 1989년에 21.5%, 1990년 18.8% 인상하여 4년간 무려 72.8%의 인상을 기록했고, 실질임금도 각각 6.9%, 7.8%, 14.5%, 9.4%로 4년간 41.3%나 인상했다.
6·29선언 이후 노동법이 개정되어 1980년말의 법개정에서 후퇴한 것을 바로잡고, 노동조합의 조직과 활동을 대폭 자유화하고 강화하는 쪽으로 기여했다. 노동운동은 노조의 조직확대와 강화를 어느 정도 실현했으며, 한국노총도 과거의 부정적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체제내 운동, 준법, 비폭력뿐만 아니라 노사간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협조를 강조하면서 성과 배분 요구를 하는 자세로 자리잡고 있다. 한편 재야운동 세력은 사회일반과 노동운동의 민주화, 조직활성화, 정부와 사용자의 의식화라는 면에서 기여한 바 있는 반면, 좌파 이데올로기를 표방함으로써 급진적·체제부정적 논리와 과도한 정치투쟁 편향의 성격을 띠고, 노조활동에 대한 외부 간섭을 강화하고 경영참여에 대한 지나친 요구를 하면서 불법·위법·폭력·파괴 등의 수단에 빈번히 의존하는 등 갈등을 격화시킨 점도 있다. 1980년대 후반 자유화 이래로는 일부 노동운동 세력이 이른바 민주노총을 결성하여 노동운동을 진보적인 정치운동으로 연결시키고자 시도하면서 때로는 과격한 노동쟁의를 주도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모든 과정에서 노사관계가 상당히 대등의 것으로 정착되는 기틀을 마련했고,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 단체 교섭의 효율성 제고 등의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해오고 있다. 이러한 추세로 가면 노동운동과 노사관계의 성격이 질적으로 향상될 소지는 있으나, 아직도 노사 양측이 서로에 대해 가져온 부정적인 관념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노조의 정치성향이 규칙 위반 또는 국가의 일방적 개입 같은 관행도 극복함으로써 산업평화와 공생적인 노사관계를 정립해야 하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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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적인 수준에서 가족과 관련된 한국사회의 특성을 일별하고, 사회정책의 특징을 개관하기로 한다. 가족과 사회정책을 동시에 취급하는 이유는 과거 공업화와 도시화가 일어나기 전, 사회적 분화가 저급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가족의 기능이 다원성을 유지했고, 그 속에는 여러 형태의 사회보장도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가족이 노인과 장애자 등 불리한 여건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했고, 친족집단이 일종의 사회보장기구 구실을 수행했다. 그러나 근대화의 여파로 사회적 분업이 확대되는 한편, 가족의 성격 자체가 바뀌게 됨으로써 가정이 사회보장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사회보장은 사회정책의 차원에서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총가구수는 1960년에 430만 가구 정도였으나 1985년에는 거의 1,000만을 육박하는 957만 가구로 증가했으며, 1995년에는 약 1,296만 가구에 이르렀다.
가족의 외형적인 구성뿐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특성에도 변화가 오고 있다는 증거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과거에는 가부장제도 아래 남성 중심의 위계서열적 권위주의가 가족 내의 인간관계를 지배했으나, 점차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민주적인 생활양식과 관행이 일반화되면서 가족 내에서도 친자간·부부간·형제간에 상당히 평등하고 민주적인 인간관계가 확산되고, 남녀 성별에 의하여 차등화되었던 가사도 남녀가 공동으로 수행하는 유형이 젊은 세대로 갈수록 보편화되고 있다.
한국 가족의 또 하나의 특성은 가족주의이다. 특히 핵가족을 중심으로, 드물지만 때로는 친족집단을 중심으로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면 혈연과 가족 관계를 축으로 하는 폐쇄적인 집단이기주의가 형성되고 타집단이나 개인의 당연한 권리 같은 것은 쉽사리 묵살할 수 있는 성향을 조성한다. 과거에는 폭넓은 친족집단을 주축으로 하는 가족주의가 공동체적 유대를 지키는 기둥이 되었으나, 개방적인 현대사회에서는 사회 전반 또는 지역공동체의 포괄적인 발전에 역기능을 하는 측면을 안고 있다.
사회가 분화하고 제도가 다양해짐에 따라 가족의 사회적 기능도 인구의 재생산, 자녀의 양육과 초기 사회화, 정서적 안정의 유지, 소비경제와 여가 및 오락의 관리 등으로 축소되고 종교, 정치, 교육, 생산적 경제, 사회통제, 복지와 사회보장 등의 기능은 약화 내지 상실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보장이라는 측면의 사회정책이 문제로 등장한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는 가족과 친족의 사회복지 및 보장 기능이 당연시되었으므로 특별한 재해나 전란에 의한 난민을 구호하는 제도 외에는 뚜렷한 사회보장정책이 없었다. 일제강점기 말기(1944)에 제정하여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승계되었던 '조선구호령'이 식민지시대의 사회보장제도를 규정하는 법으로서 이 또한 주로 빈민을 구호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미군정의 구빈사업 역시 이재민과 빈곤층에 대한 구호 위주의 소극적인 것이었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공포된 구헌법에는 제19조에 '노령·질병 등의 근로능력이 없는 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규정만 두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사회보장정책이 실효를 거둘 수 있는 기틀은 마련하지 못한 채, 전란을 겪고 외국 원조에 의존하며 생존하던 중 1960년대초부터 비로소 사회보장에 관한 법제화를 시도하고자 보건사회부에 사회보장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사회경제적 발전단계에 걸맞게 제도 도입을 연구하여 법제화를 시작했고, 1963년에는 포괄적인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사회보장정책은 대략 3가지 분야로 나누어진다. 첫째, 국가와 개인, 고용주와 피용자가 안정된 생계와 건강한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연대적으로 적립하고 혜택을 공유하는 사회보험제도, 둘째, 무능력자, 군경 및 기타 국가 유공자, 이재민 등에게 국가가 재정과 의료 보호를 제공하는 공적부조사업, 셋째, 어린이와 노약자·여성·장애자 등에게 각종 도움을 제공하는 사회복지 서비스이다. 이 가운데 어느 분야든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전개되어온 양상은 처음에는 특수 부문에 대한 보험·보호 등을 위주로 한정된 범위에서 실시하다가 사회경제적 발전이 진전됨에 따라 자원의 확충도 고려하여 점차 혜택의 종류와 범위를 넓혀가는 방식으로 진전시켜왔다는 것이 특징이다. 분야별로 개략적인 것에 대해서 살펴본다.
사회보험 분야에서는 공무원연금법(1960. 2. 6 시행)을 비롯한 선원보험법(1962 제정, 미시행)·군인연금법(1963. 2. 6)·산업재해보상보험법(1964. 6. 9)·사립학교교원연금법(1973 제정, 1975 시행)·의료보험법(1964. 6. 5)·국민복지연금법(1973 제정, 1988 시행)·군인보험법(1962 제정)·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 의료보험법(1977 제정) 등의 법률적인 조처들이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공무원연금법 적용 대상자수는 1960년에 23만 7,476명이던 것이 1970년에 41만 5,393명, 1980년에 96만 4,812명으로 절정을 이루었다가 1990년 현재 84만 3,262명, 1996년에는 97만 1,000명으로 다시 증가 추세에 있다. 사립학교교원연금법에 해당하는 교직원수도 1975년에 4만 명 정도이던 것이 1980년에 8만 9,493명으로 늘어나서 1990년에는 15만 3,922명, 그리고 1996년에는 19만 2,000명을 기록하고 있다. 국민연금제도는 공무원·교원·군인 등을 제외한 18세 이상 60세 미만의 국민을 대상으로 하며, 1996년 현재 가입자는 742만 6,000명이다.
한편 의료보험제도는 근로자를 중심으로 한 직장보험에서 출발하여 지역보험조합, 직종별 단체들의 직종조합, 그리고 공무원·사립학교교직원·군인가족·연금수급자를 대상으로 한 공교(公敎)의료보험공단 등 집단별로 보험자를 구성하고 각 보험자별 독립채산방식에 의해 자체 운영하는 다보험자체계로 운영되었으나, 2000년 7월 1일부터 집단별 보험자가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 통합되면서 통합의료보험체계로 변경되었다. 의료보험 적용 인구는 1977년에 320만 명이었으나, 1980년에는 911만 3,000명으로 대폭 증가했고, 1990년 4,017만 6,000명, 1999년에는 4,517만 3,000명에 이른다. 여기에는 물론 공적부조사업에 속하는 의료보호 대상자는 제외되었다. 이렇게 볼 때 의료보험 대상자는 총인구 대비 96.4%(1999)이고, 의료보호까지 합치면 거의 전국민이 의료보장의 혜택을 받고 있다.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전되면서 산업재해도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실시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시행 첫해인 1964년에 64개 사업체 8만 2,000명 정도의 근로자가 적용 대상이었는데, 1970년에 이르러 5,583개 사업체의 약 78만 명, 1975년에는 2만 1,369개 사업체의 160만 3,454명, 1986년에는 7만 865개 사업체의 474만 9,342명, 그리고 1990년에는 12만 9,687개 사업체의 근로자 754만 2,752명에게 적용되었다. 업종별로는 역시 제조업이 으뜸이고 이어 건설업·운수업·창고업·통신업·광업 기타의 순으로 많은 사업체와 근로자들이 가입하고 있다.
공적부조사업 부문에서는 1961년에 제정한 생활보호법을 시작으로 군사원호보상법(1961 제정), 재해구호법(1962), 자활지도사업에 관한 임시조치법(1968), 의료보호법(1971), 국가유공자 등 특별법(1962), 기타 재해구조로 인한 의사상자 구호법 등이 제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생활보호는 거택보호·자활보호 및 시설보호의 형태로 구분하는데, 1966년에 대상자가 약 330만 명이었고 이는 총인구의 11.5%에 이르렀다. 1970년대 전반에는 150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고 그 비율도 5% 미만이었는데, 1970년대 후반에 증가했다가 1990년에 220만 명(5.2%), 1996년에는 150만 6,000명(3.3%) 수준으로 감소했다. 의료보호 대상자는 1977년에 200만 명 가량으로 총인구에 대한 비율은 5.8%였는데, 1980년대초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1986년에 439만 명 정도에 10.6%로 정점을 이루었다가, 다시 1990년 393만 명(9.9%), 1996년에는 174만 명(3.8%)으로 떨어지고 있다.
사회복지 서비스 부문에서는 1970년에 전반적인 사회복지사업법을 만들었고, 1973년에는 모자보건법, 1981년에는 아동복지법·심신장애자복지법·노인복지법을 제정했다. 이 방면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종래 복지시설은 주로 전쟁고아·부랑아 등을 중심으로 운영했으나, 경제사정이 호전되고 사회가 달라짐에 따라 사회복지시설 수용 대상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모자보호와 부녀자 직업보호 및 아동복지시설은 수가 줄어들고 수용 인원도 감소하는 데 반해서 노인과 장애자를 위한 시설과 수용자가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 생활수준이 더욱 향상되고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더욱 산업사회화되며 물질사회화의 물결에 휩싸여 변화가 계속 진행됨으로써 가족의 사회복지적 기능은 점차 줄어들고, 국가에 의한 보장이 강화되는 추세에 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한 재원의 확보, 수혜 범위의 확대와 공정성의 신장, 전달체계의 합리화와 사후 관리 효율화 등의 정책적인 과제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족의 사회적 구실에 관련하여 지금과 같이 핵가족화하는 상황에 비추어 가족 성원들이 각자 개인화하고 공동체적 관심과 상호부조의 정서를 상실해가는 현재의 경향을 방치해도 좋을지, 전사회적으로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끝으로, 근대화의 결과로 한국사회가 얼마나 질적으로 개선되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대체로 근대화는 경제적 풍요를 가져왔고 물질사회화를 초래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질적인 측면을 두고 볼 때 부정적인 변화도 놓칠 수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간단한 몇 가지 자료를 살펴보면 인명에 관련하여 교통사고 발생 건수와 인원 및 사망자수는 지난 40여 년 사이에 각각 24.4배, 19.2배 및 3.1배가 늘었고, 산업재해 발생 건수는 1990년까지 2.5배로 증가했다가 그후 감소하는 추세이지만, 그로 인한 사망자수는 15.3배나 된다. 환경오염도 대개 악화되는 경향인데, 1990년대의 적극적인 환경정책 시행으로 그나마 대기오염 시설을 줄이고 있다. 사회생활 면에서는 먼저 이혼율이 비록 미미하지만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고, 비행학생수도 20년 전에 비해 5.5배, 범죄 발생 건수도 약 3배로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화가 한국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준 반면 부정적인 결과도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며, 특히 1997년의 금융위기는 이러한 근대화의 음지가 전사회적으로 노출된 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金璟東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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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사가 겪은 충격과 혼란, 변화와 발전은 한국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화에 일관된 정체성을 주고 있는 것은 단일 언어로서의 한국어의 존재이다. 고유언어는 있었으나 고유문자는 갖지 못했던 옛날에 한민족은 오랫동안 중국의 한자를 빌려서 이두(吏讀)를 사용해왔다. 그러다가 15세기 중반 조선 세종 때 훈민정음이 창제됨으로써 제 나라 말을 제 나라 글씨로 적을 수 있는 고유문자를 갖게 되었다. 한글은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음소문자로서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한글의 사용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자해독률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한글전용정책은 일부 민간 및 학술 단체로부터 끈질긴 반대에 부딪혀 이를 관철하지 못하고 현재까지 한글전용과 국한문혼용이 양립되고 있다. 국민의 문화생활에 밑바탕이 되는 어문정책의 혼란은 오늘을 사는 한국 국민을 '한글세대'와 '국한문혼용세대'로, 한국 출판물을 한글전용서적과 국한문혼용서적으로 갈라놓았고, 심지어 같은 일간신문의 지면조차 한글전용지면(사회면·지방면·스포츠면 등)과 국한문혼용지면(정치면·경제면·국제면·논설면 등)으로 갈라놓았다. 그결과 한글을 전용할 경우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자해독률을 자랑할 수 있는 한국인이 국한문을 혼용할 경우에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제 나라의 신문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교육받은 문맹(文盲)'이 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해방 이후 남북의 분단과 6·25전쟁의 체험, 그리고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된 한국사회의 급격한 산업화와 국제화는 한국문화에 있어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그리고 고유의 것과 외래의 것을 뒤섞이게 했다. 스포츠 분야, 도시생활 분야,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외래어들이 우리의 일상용어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한국의 언어에도 내재되어 있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고유의 것과 외래의 것의 혼합, 그리고 언어생활 그 자체가 체험하고 있는 급격한 변동의 과정과 그 역동성은 오늘의 한국문화 전반을 규정하는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산업화·도시화·대중화·민주화·국제화로 가고 있는 현대 한국의 사회변동의 추세는 문화의 각 분야에 있어서도 문화적 가치의 변화, 그 전달수단의 확충과 전달대상의 확대, 나아가 문화적 창조행위에의 참여 내지는 참여욕구의 확산 등 폭넓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변화의 모습을 언론·출판·문화 분야에서 다음과 같이 개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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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근대화와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신문·방송과 같은 언론의 대중매체(매스 미디어)가 널리 보급되어 거의 모든 시민의 일상생활 속에 자리잡게 되었음은 현대문화의 주요 특징의 하나이다.
서양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매스 미디어가 등장한 것은 1609년 독일의 두 도시에서 나온 주간신문을 효시로 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비록 그 실물이 보존되어 있지 않지만 믿을 만한 기록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이율곡의 〈경연일기 經筵日記〉에 의하면 독일에 앞선 1578년(선조 11)에 민간인이 조보(朝報)를 날마다 인쇄하여 여러 군데에 팔아서 돈을 번 일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록 2개월 남짓 간행된 뒤에 금압되기는 했으나 이것은 세계 최초의 인쇄된 민간 상업일간신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같은 조보의 인행(印行)을 통해 언론의 보도기능을 확충하려던 시도보다도 더욱 주목되어야 할 것이 언론의 간쟁(諫諍)기능, 곧 비판기능이었다. 그때그때 정사의 시비나 관리들의 잘잘못을 가려 바른 말을 직언하는 간쟁언론은 사헌부·사간원의 이른바 언관(言官)들뿐만이 아니라 상소를 통해서 군주에게 간언을 서슴지 않던 재야의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조선시대의 사림(士林) 문화의 큰 기둥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간쟁언론의 전통은 19세기말 개화의 과정에서 '정부에 대한 감시'(check on government) 기능을 스스로의 구실로 맡고 나선 근대적 신문의 탄생으로 자연스럽게 계승되었다. 대한제국 말기에 근대적 신문이 나오기는 1883년 정부기관(統理衙問 博文局)에서 간행한 〈한성순보 漢城旬報〉가 처음이요, 민간지로서는 1896년에 서재필(徐載弼)이 창간한 〈독립신문〉이 그 효시이다. "우리는 바른 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폐일 터이오"라고 밝힌 〈독립신문〉의 창간논설은 바로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감시자로서의 이른바 자유주의형(libertarian type) 신문의 탄생을 밝혀주고 있다.
서양에서는 인쇄업자·우편업자 등이 돈벌이를 위한 상업적 동기에서 근대 신문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한성순보〉나 〈독립신문〉이 다 같이 비상업적 계몽주의 동기에서 개화의 방편으로 신문을 발행했다. 그리고 그러한 한국신문의 고유한 특성은 일제강점기의 민족지와 8·15해방 후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의 정론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한국언론계에 본격적인 상업신문이 등장한 것은 8·15해방 이후의 정치적·이념적 대립이 정부수립으로 일단 수그러지고, 6·25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막을 내린 1950년대 중반부터였다. 미군정치하에서 좌우로 분열되었던 공론권(公論圈)은 정부수립 이후에는 여·야로 갈라지고 공론의 대중매체인 신문도 여당지 또는 친여당지와 야당지 또는 친야당지로 갈라졌다. 그러나 1950년대말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의 폭정이 심해짐에 따라 불편부당의 중립을 표방하며 이제는 정론신문이 아니라 상업신문을 지향하게 된 대부분의 신문조차 비판적인 야당지로 선회하게 되었다. 그에 대해서 여당지 내지는 반관영지(半官營紙)는 독자를 얻기가 어려운 열세에 몰려 있었다. 신문매체에서 여·야의 대국이 보인 이러한 불균형은 방송매체의 정부장악으로 어느 정도 중화될 여지는 있었으나 정부여당은 그보다 더욱 직접적인 수단에 호소하는 것이 예사였다. 공권력에 의한 언론통제 내지는 언론탄압이 그것이다. 특히 1961년 장면 민주당 정부를 5·16군사정변으로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집권시대 18년과 1979년 10·26사태 뒤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 7년 동안은 설득력있는 정당성을 갖지 못한 권력과 비판적 감시자로서의 전통을 갖고 있는 언론매체 사이에 긴장관계가 지속되었다.
4·19혁명으로 탄생한 단명의 민주당 정권을 예외로 하고 역대 정권은 헌법에 명문화되고 있는 언론 자유를 한갖 구두선으로 그치게 하는 갖가지 법률로 언론의 규제를 시도했다. 반공을 제1국시로 내세웠던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1948년에 제정된 국가보안법과 1958년에 개정된 신국가보안법이 비단 용공 언론만이 아니라 정치적 반대자나 비판자의 소리까지 억압하고 위축시키는 데 확대적용되곤 했다. 1961년 5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장군은 먼저 군사혁명위원회의 계엄령 포고 제1호를 공포하여 4·19혁명 이후 우후죽순처럼 쏟아져나온 언론매체를 대폭정리했다. 그뒤에 제정된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1962. 12. 30), 전파관리법(1961. 12. 30),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1963. 12. 12), 방송법 등은 모두 신문·통신·방송 및 출판사의 등록요건을 강력히 규제하고 신고와 허가의 이중적인 통제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시작된 '유신통치'시대는 한국언론의 중세기적인 암흑기를 가져왔다. 유신헌법은 필요한 경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 입법도 가능하게 하는 규정을 마련했으며, 실제적으로 이 시기에 언론통제를 위한 수많은 법률이 제정되었다. 언론인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1974.1.8), 제9호(1975.5.13)가 반정부적·비판적 보도와 출판을 금지함으로써 언론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했다. 1979년 10월 26일 이후 '서울의 봄'이라 일컫던 민주화의 소강기(小康期)는 이듬해 비상계엄령이 선포됨으로써(1980. 5. 17) 다시 그 싹이 꺾이고 말았다(→ 언론통폐합). 전두환 장군이 이끄는 국군보안사령부를 배경으로 한 국가보위입법위원회는 계엄령 치하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언론기관의 통폐합과 언론인의 대량해직을 단행했다. 그결과 당시 발행되던 전국의 28개 일간신문 가운데 11개(중앙지 1, 지방지 8, 경제지 2)를 정비하고, 전국의 29개 방송사 중에서 6개(중앙사 3, 지방사 3)가 한국방송공사(KBS)에 흡수·통합되고, 한국문화방송(MBC) 계열사 21개의 주식 51%를 서울 MBC가 소유주로부터 인수하여 계열화하고, 7개 통신사가 통폐합되어 단일통신사로서 연합통신이 창설되었다. 이를 전후해서 172개 가량의 정기간행물이 하루 아침에 등록취소되고(1980. 7. 31), 617개의 출판사가 또한 등록취소되었다. 한편 이 와중에 직장에서 해직된 언론인은 무려 770명이나 되었다. 한편 국가보위입법위원회가 제정한 '언론기본법'은 정보청구권과 취재원 보호를 위한 진술거부권 등을 부여한 반면 언론표현물에 대한 압수규정을 강화하고, 언론통제를 용이하게 하는 여러 독소조항을 담고 있어 그 개폐문제가 처음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언론기본법이 시행되면서 전두환 정권하에서 이 법의 취지에 따라 몇 개의 언론단체가 생겨났다. 한국방송위원회·한국방송심의위원회·언론중재위원회, 그리고 한국언론연구원과 한국방송광고공사가 그것들이다. 물론 권력의 언론 및 언론인에 대한 통제와 탄압은 법을 방편으로 하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하의 각종 권력기관에 의한 언론제작에의 개입·간섭, 언론인에 대한 법외적 또는 초법적 테러 행위와 그 위협 등이 언론을 위축시켰다. 더욱이 전두환 정권하에서는 문화공보부에 홍보정책실을 두어 언론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일삼기도 했다.
변혁을 위한 일대 전기는 1987년에 마련되었다. 6월의 시민항쟁은 마침내 집권세력으로부터 민주화와 언론자유를 약속하게 한 이른바 '6·29선언'을 쟁취했다. 1987년 11월 제137회 정기국회는 '언론기본법'을 폐기하고 이에 대신하여 '정기간행물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방송법', '한국방송공사 개정법률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새로운 언론정책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그에 따라 언론통폐합 조치로 사라졌던 신문·잡지가 복간되고, 새로운 정기간행물이 대거 쏟아져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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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말 현재 한국에는 전국적인 보급망을 갖는 10개의 중앙종합일간지와 약 30개의 지방지가 발행되고 있다. 그밖에도 특수일간지로는 서울에서 발행되는 10개에 가까운 경제지, 3개의 스포츠지, 수종의 어린이 또는 학생 신문, 2개의 영자신문 등이 있다. 종합일간지 가운데에는 1920년 일제강점기에 창간되어 지령 2만 호를 넘는 역사가 깊은 신문이 있는가 하면 1990년대에 창간된 새 신문도 있다. 서울에서 발행되고 있는 종합일간지 중에는 하루의 발행부수가 100만 부를 넘는 신문이 있는가 하면 10만 부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방신문도 있으나 정확한 신문의 발행부수는 공사제(公査制)가 실시되고 있지 않아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추정치로 따져 하루의 전체 신문발행 총부수는 1,000만 부를 웃돌고 있고 유가발행부수도 1,000만 부를 크게 밑돌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평균 1가구당 1개 신문의 보급을 예상하는 수치이다. 일간신문의 발행면수는 1970년대 말기까지 매일 8면씩 주 48면, 언론통폐합을 강행한 이후 1981년 1월 1일부터는 매일 12면씩 주 72면으로 매우 빈약했다. 그것은 1970년대부터의 고도경제성장에 따른 광고수요의 증대와 정보량의 급격한 팽창에도 불구하고 증면이 억제되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87년의 이른바 '6·29 선언' 이후 언론의 자율화 추세에 따라, 그리고 서울 올림픽 대회의 개최에 따라 점진적인 증면이 거듭되어 1991년말 현재로는 매일 28~32면을 발행하는 신문이 흔하게 되었다. 지면의 컬러 인쇄도 보편화되었고, 신문제작의 전산화(CTS)에 의한 편집이 활판제작법을 대치해서 빠른 시일 안에 보급될 전망이다. 주요 언론단체로는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기자협회, 한국신문윤리위원회, 한국언론인금고, 관훈 클럽 등이 있다. 현재 발행되고 있는 한국의 신문은 모두 한국신문협회에 가입하고 있고, 대부분의 신문사에는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있어 이들 각사 노조는 1988년 11월에 발족한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에 가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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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로는 1980년말 언론통폐합을 통해 정비된 2개의 통신사만 1990년대에 들어서도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 그 이전까지 존속했던 양대 통신사(동양통신과 합동통신)가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창설된 연합통신은 언론통폐합과정에서 시사통신·경제통신·산업통신까지 흡수한 대형 종합통신사로, 전국의 신문사와 방송사가 공동으로 출자하고 있다. 또 하나의 통신사인 내외통신은 공산권 특히 북한에 관한 보도를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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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말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는 주간지 1,338종, 월간지 2,672종, 기타 정기간행물 1,842종이 발행되고 있다. 이것은 1961년말의 주간지 338종, 월간지 178종, 기타 간행물 83종, 또는 1980년말 언론통폐합 이후의 주간지 94종, 월간지 659종, 기타 간행물 428종에 비하면 엄청난 증가세를 기록하고 있는 숫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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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의 신속성과 광역성 및 광범위한 영향력으로 인해 권력을 쥔 집단은 방송을 국유화하거나 관영화함으로써 방송 내용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방송이 광고매체로서 갖는 효율성과 수익성은 영리를 추구하기 위한 방송의 민영화 또는 상업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방송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공영화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정부·기업·일반 대중 사이의 상이한 욕구와 이해관계는 방송의 위상을 국영(관영)·민영·공영 중 어떤 형태로 정립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를 불러일으켜왔다. 일제강점기에 첫 라디오 전파를 띄운 경성방송국은 8·15해방 후 미군정청 공보부에 귀속되어 운영되던 과도기를 거쳐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공보처 산하의 국영방송으로 새롭게 발족했다. 모든 방송이 국영으로 운영되던 건국 직후의 단일체제는 먼저 1954년 12월에 민간방송인 기독교중앙방송국(CBS)이 개국되면서 2원화되었다. 그뒤 1959년 4월 부산문화방송국이 창설되면서 상업방송시대로 접어들었다. 1962년 12월에는 한국문화방송(MBC)이, 1963년 4월에는 동아방송(DBS)이, 1964년 5월에는 라디오서울(RSB)이 문을 열면서 민간상업방송은 경쟁체제에 돌입하게 되었다. 한편 1961년 12월에는 KBS-TV가 개국되면서 본격적인 텔레비전 방송시대의 막이 올랐고, 그 뒤를 이어 1964년에는 동양텔레비전방송주식회사(TBC-TV)가, 1966년에는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MBC-TV)가 문을 열면서 텔레비전도 국영방송과 민간상업방송으로 2원화되어 3사 경합시대로 들어섰다.
1980년에 단행된 언론통폐합조치는 방송계에도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때까지 국영방송과 민간상업방송으로 2원화되었던 방송구조는 '공익'을 우선한다는 이른바 '공영' 방송체제 수립을 명분으로 TBC와 DBS 등을 흡수하여 비대화된 KBS와 MBC의 2대 방송망 조직으로 재편성되었다. 그밖에는 기독교방송·극동방송·아시아방송 등 3개 종교방송이 특수 라디오 방송만을 할 수 있도록 남게 되었다. '공영방송'은 허울뿐이었다. 방송사의 주요인사와 프로그램 편성에 대한 정부권력의 간여는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고, 1980년 12월부터는 한국방송공사법에 따라 KBS도 광고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공영'의 이름 밑에 운영되고 있던 방송의 실상은 '국영상업' 방송이었다. 이러한 방송의 운영과 프로그램 편성에 대한 시청자의 불만은 1986년 2월부터 KBS-TV 시청료납부거부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방송의 역사에 특기할 만한 이 자발적인 시청자운동은 그 다음해 6·29선언을 쟁취한 민주화 시민운동의 전주가 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6·29선언 이후 방송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87년 10월 기독교방송(CBS)이 박탈당한 보도기능을 부활시켰다. 1988년 12월에는 언론통폐합 당시 KBS가 보유하게 되었던 MBC의 주식 70%를 방송문화진흥회가 인수하도록 하는 방송문화진흥법안이 국회에서 의결되었다. 1990년 4월 천주교의 평화방송(PBS)이, 5월에는 불교방송(BBS)이 각각 FM 종교방송으로 문을 열었고 6월에는 교통방송국(TBS)이 개국되어 FM 방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1990년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한국 방송의 구조를 국영방송·공영방송·상업방송이 병존하는 3원체제로 개편한 새 방송법의 공포였다. 1989년 5월 방송위원회의 위촉으로 방송제도연구위원회가 마련한 보고서의 건의에 따라 제정된 이 새 방송법안은 방송계와 학계 및 일반사회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여당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통과되었다. 새 방송법에 따라 그해 12월에는 교육방송(EBS)이 KBS에서 독립하여 개국하게 되었고, 1991년 12월에는 민영방송인 서울방송(SBS)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에서는 MBC·EBS·SBS와 주한미군방송인 AFKN의 4채널, 그리고 KBS의 2채널 등 총 6채널을 통해 TV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컬러 방송은 1980년 12월 1일 KBS 제1TV를 통해 처음 시험방송이 실시되었다. 같은 해 12월 22일부터는 KBS 제2TV와 MBC-TV도 컬러 시험방송을 시작하여 전면적인 컬러 TV 시대에 돌입했다. 컬러 방영이 시작된 1980년 당시에는 흑백 TV 수상기 618만여 대에 비해 컬러 TV 수상기는 13만 여 대밖에 되지 않았으나 다음해 81년에는 이미 컬러 TV 수상기가 100만 대(117만 7,808 대)를 넘어섰고, 89년 7월말에는 643만여 대로 늘어났다.한편 1981년 2월 2일에는 한국 최초로 UHF 채널을 통한 TV 교육방송이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다. 1985년 10월 1일부터 KBS와 MBC가 수도권지역에서 음성다중방송을 시작하여 음악방송, 스포츠 방송은 스테레오 음으로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외국영화는 원어와 우리말 더빙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1990년 1월 1일부터 KBS가 착수한 텔레비전의 문자다중방송(teletext)의 시험 서비스는 뉴미디어 시대를 개척한 한국방송의 또다른 이정표이다.
한국 텔레비전의 표준 컬러 방식은 미국·일본 등과 동일한 NTSC(national television system committee) 방식이며, 북한은 독일·영국과 같은 PAL(phase alter-nate line) 방식을 쓰고 있다. 외국(일본의 NHK)에서 조사한 미디어 통계에 의하면 1990년 현재 우리나라의 라디오 수신기는 3,860만 5,000대, TV 수상기는 900만 대로 전 인구대비 21.8%의 보급률을 기록하고 있다. 국내의 모든 방송사는 한국방송협회에 가입하고 있고 각 방송사에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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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점진적인 전용화, 교육받은 인구의 팽창과 높은 문자해독률, 산업화·도시화·국제화에 따른 정보 및 정보수용의 폭발, 인쇄용지난의 해소와 소자본에 의한 출판사의 설립가능성 등 여러 요인에 의해서 한국의 도서출판은 적어도 그의 양적인 통계에 있어 세계의 선두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중국·미국·영국이 누락된 유네스코의 1987년 통계를 보면 한국의 연간 서적출판 종수는 4만 4,288종으로 프랑스(4만 3,505종)·스페인(3만 8,302종)·일본(3만 6,346종) 등에 앞서 소련(9만 1,145종)에 이어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듬해 1988년에는 미국·영국·중국·일본·프랑스의 통계가 누락된 유네스코 통계연감에서 한국의 연간 서적출판 종수는 4만 2,842종으로 2위를 기록하고 있다.
1948년 정부수립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의 연간 도서발행 종수는 1,136종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58년에도 도서발행종수는 1,281종으로 거의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었으나 다시 10년 후인 1968년에는 2,528종으로 배가 증가했고, 이 해의 도서발행총부수는 530만 3,277부를 기록했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난 1978년에는 연간 도서발행이 1만 5,149종으로 6배나 증가했고 총발행부수는 5,853만 6,520부로 무려 10배 이상 늘어나게 되었다. 한국의 연간 도서발행 총부수가 1억 부를 넘게 된 것은 1983년(1억 441만 1,111부)부터이며, 그 절정을 이룬 것은 연간 발행된 4만 1,712종(초판·중판 포함)의 도서가 2억 4,183만 9,337부의 발행부수를 기록한 1990년이었다. 1991년말에는 도서발행 종수는 2만 2,769종, 총발행부수는 1억 3,461만 6,495부로 격감하고 있다.
1991년 통계를 도서종류별로 보면 1위가 문학서적(4,373종), 2위가 학습참고서(3,765종), 3위는 사회과학서적(3,276종), 4위는 아동서적(3,213종), 5위는 기술과학서적(2,208종)으로 되어 있다. 제1위를 기록한 문학서적을 다시 장르별로 보면 소설이 2,219종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그뒤를 시(804종)·수필(403종)·희곡(82종)·평론(55종)이 잇고 있다.
한국에서 번역되는 외국서적은 1982~91년의 10년 동안 초판 기준 3,000종에서 5,000종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다. 1991년 번역된 외국서적의 신간은 3,901종으로 이를 부문별로 보면 문학서적이 1,326종으로 가장 많고 그뒤를 종교서적(612종)·사회과학서적(434종)·기술과학서적(265종)·예술서적(245종)·철학서적(231종)·순수과학서적(124종) 등이 따르고 있다. 1991년말 현재 등록된 한국의 출판사 총수는 6,299사로 이중 반 이상인 3,762사는 당해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출판하지 않은 '무실적' 출판사이다.
崔禎鎬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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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단선형 학제는 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균등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으며 인간의 성장·발달 단계와 합리적으로 연계되고 사회 체제와도 유기적으로 통합되고 있다. 특히 1980년 개정 헌법에는 평생교육의 진흥을 천명하고 이어 1982년에는 '사회교육법'을 제정함으로써 학교 교육과 함께 사회 교육을 교육 제도 안에 통합했다. 1999년도에는 보다 다양한 형태의 평생 학습 기회가 모든 국민에게 제공될 수 있도록 현행의 사회 교육법을 평생 교육법으로 개정할 예정이며 이로써 21세기 지식 기반 사회에 대응해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원하는 교육을 자유롭게 학습할 수 있는 '열린 교육 사회, 평생 학습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 구축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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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학교 제도는 6-3-3-4제로서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초등학교 6년, 전기 중등교육기관인 중학교 3년, 후기 중등교육기관인 고등학교 3년, 후기 중등교육 이후 단계인 고등교육기관으로 구성되었다. 또 초등교육 이전 단계의 취학전 교육기관인 유치원은 기간 학제에 포함되지 않고 있다. 유치원을 포함한 각 단계 별 학교교육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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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초에 유아교육이 태동한 이래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유치원이 학령 전 교육기관으로 보편화되었다. 1998년 현재 만 3~6세 아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유치원 교육은 8,973개 유치원에서 53만 3,000여 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유치원 취원율은 37.2%에 이르고 있다. 유치원의 취원율이 1975년에 1.7%, 1985년에 18.6%에 지나지 않았음을 고려해볼 때 유치원 교육이 급속도로 팽창해왔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증가율은 1992년부터 유치원 취원 연령이 4세에서 3세로 낮춰짐에 따라 취학전 교육의 기회가 더욱 확대된 데 기인했다. 유치원의 교육과정은 건강생활, 사회생활, 표현생활, 언어생활 및 탐구생활 영역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유아의 연령과 발달 수준, 기후, 계절, 학부모의 요구 등을 고려하여 하루 180분 기준으로 교육 활동을 하고 있으며 연간 180일 이상의 교육 일수를 정하고 있다. 1999년도에 제안된 교육발전 5개년 계획에 따르면, 2000년도부터 도서·벽지 지역부터 만 5세아에 대한 무상 유아교육을 실시하고 2003년도에는 무상교육 실시지역을 면지역으로까지 확대할 방침이며, 무상 유아교육이 실시되지 않는 지역에 거주하는 생활보호대상자 및 저소득층 자녀에 대한 유아교육비를 보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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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교육법에서 초등교육을 무상 의무교육으로 실시할 것을 규정한 이래 1960년대 초에 초등교육은 거의 완전 취학을 보여왔다. 1998년 현재 383만 4,000여 명의 학생이 5,688개의 초등학교에서 무상 의무교육을 받고 있다. 현재 초등학교의 학급당 평균 학생수는 35명으로서 이는 세계 여러 나라에 비해 여전히 큰 학급 규모이기는 하나 10년 전인 1981년의 평균 학급 규모인 50명에서 크게 줄어든 것이다.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10개 교과 활동(도덕·국어·수학·사회·자연·체육·음악·미술·실과·영어)과 특별활동 및 학교 재량 시간 등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1, 2학년은 관련 교과를 통합하여 국어, 수학, 바른 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의 5개 교과로 운영하고 있다. 주당 수업 시간은 1, 2학년의 경우 23~25시간이고, 3~6학년은 29~33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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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중등교육기관인 중학교는 1986년부터 도서·벽지 지역을 중심으로 무상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있으며 점차 대도시로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중학교 교육은 1998년 현재 201만 1,000여 명을 대상으로 2,736개의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971년에 중학교의 취학률은 53.3%였으나 1998년 현재 99.9%로 크게 상승하여 취학률 면으로 보면 이미 완전 의무교육이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1969년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된 무시험 입학제도에 의하여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중학교의 학급당 학생수는 1981년의 65명에서 1998년 현재 41명 수준으로 크게 감소했으나 여전히 학급 규모가 과대한 편이다. 중학교 교육과정은 교과 활동과 특별 활동으로 편성되어 주당 34시간의 수업을 하도록 되어 있다. 교과 활동은 도덕,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체육, 음악, 미술, 가정, 기술·산업, 영어 등 11개의 필수 교과 활동과 한문, 컴퓨터, 환경, 기타 필요한 교과 등 4개의 선택 교과 활동으로 편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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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교육의 기초 위에 중등 보통교육과 전문교육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고등학교는 일반계 고등학교와 실업계 고등학교가 주류를 이루고 그 밖에 과학고등학교·체육고등학교·예술고등학교 및 외국어고등학교 등의 특수 목적 고등학교가 있다. 1970년도에 31만 5,000여 명의 학생이 408개교의 일반계 고등학교에, 25만 5,000여 명의 학생이 418개교의 실업계 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 그동안 고등학교 교육기회가 계속 확대되어 1998년 현재 139만 9,000여 명의 학생이 1,149개교의 일반계 고등학교에, 그리고 92만 7,000여 명의 학생이 772개교의 실업계 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어 일반계 대 실업계 고등학교 재적학생의 구성비율이 60 : 40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고등학교 교육기회의 확대로 취학률이 1971년 30%에서 1998년 96%로 증가했다. 일반적으로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는 대학 진학 준비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실업계 고등학교에서는 취업을 위한 직업 준비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반계 고등학교 졸업자 가운데 약 30%만이 당해 년도에 대학 진학을 하고 그 가운데 약 30%는 대학 진학에 실패해 재수를 하며 나머지 약 40%는 비진학 또는 미취업 상태에 있다. 그리고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자 중에는 약 10%가 대학에 진학하고 나머지 약 85%는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한다. 한편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는 일반계 고등학교 출신 비진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직업 과정을 설치·운영하고 있다.
서울을 포함한 대도시 지역의 중학교 졸업생들은 연합고사에 의한 학군 내 추첨 배정 입학 제도에 의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그 밖의 지역에서는 입학 고사에 의한 경쟁 시험제도에 의해 고등학교 진학을 하고 있다.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은 교과 활동과 특별 활동으로 나누어져 있고 교과는 보통 교과와 전문 교과로 구분된다. 보통 교과는 윤리, 국어, 한문, 수학, 사회, 과학, 체육, 교련, 음악, 미술, 실업·가정, 외국어의 12개 교과와 교양 선택으로, 전문교과는 농업, 공업, 상업, 수산·해운, 가사·실업, 과학, 체육, 예술 및 외국어에 관한 교과로 편성되어 있다. 졸업에 필요한 이수 단위는 204~216단위이다(1단위는 매주 50분 수업을 기준으로 1학기 동안 이수하는 수업량을 말함). 특별 활동은 학급활동, 학교활동, 클럽활동, 단체활동의 4개 영역으로 편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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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고등교육기관에는 4년제로서 대학·교육대학, 2년제로서 전문대학, 그리고 대학원이 있으며, 특별 학제의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방송통신대학과 산업대학이 있다. 1980년에 85개 대학에 40만 4,000여 명, 11개 교육대학에 9,400여 명, 128개 전문대학에 16만 5,000여 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이를 고등교육 취학률, 곧 만 18~21세 적령 인구수 대비 고등교육기관 재학생수 비율로 나타내면 17.1%였다. 그러나 18년이 지난 1998년 현재 그 수가 크게 늘어 156개 대학에 147만 7,000여 명, 11개 교육대학에 2만 900여 명, 158개 전문대학에 80만 1,000여 명이 재학하고 있다. 현재 고등교육기관의 취학률은 74.3%로서 1980년에 비해 급속도로 팽창한 것을 알 수 있다. 대학의 수업 연한은 4년으로 되어 있으나 의과·한의과 및 치과대학은 6년으로 되어 있다. 대학은 종합대학교와 단과대학으로 구분되며, 다양한 전공 계열을 두고 있다. 대학의 교육과정은 계열과 학과에 따라 다르나 일반적으로 전공과 교양으로 구분되고 교과목의 내용, 종류, 선택 범위 등은 대학별로 다양하다. 대학의 졸업이수 학점은 140~160학점으로 되어 있다.
교육대학은 초등학교 교원을 양성하기 위해 국가에서 설립한 특수 목적의 대학이다. 교육대학의 교육 과정은 초등교원의 자질과 직접 관계가 있는 만큼 현행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충실하도록 편성·운영되고 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교원은 4년제 사범대학에서 양성되고 있다. 한편 교사의 신규채용제도는 1991년부터는 종전의 국립 양성 기관 졸업자에 대한 의무발령제를 폐지하고 자격을 갖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공개임용고시제로 전환되었다.
전문대학은 단기 직업교육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으로 전문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중견 직업인을 양성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전문대학에는 공업·농업 등 다양한 계열이 설치되어 있으며 교육과정은 현장업무와 관련된 실용적인 내용으로 편성되어 있다. 교육과정 편성은 교양과 전공교과의 비율이 교양 20~30%, 전공 70~80%로 되어 있고 전공교과 중 이론과 실기의 비율은 50:50으로 되어 있다. 전문대학의 졸업 이수 학점은 80~120학점으로 되어 있다. 고등교육 단계의 특별학제에 해당되는 방송통신대학(1972년에 설치)과 산업대학(학제상의 명칭은 개방대학, 1980년에 설치)은 산업체 근로자 및 성인을 위한 계속 교육 기관이다. 방송통신대학은 현재 18개 학과에 약 19만 9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으며, 산업대학은 1998년 현재 18개 대학에 약 14만 6,0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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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부터 문맹 퇴치 교육·농촌 교육, 1960년 이후의 새마을 교육 등으로 출발한 사회 교육은 1980년 헌법에 평생교육 진흥이 명문화되고 1982년 '사회교육법'이 제정·공포됨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활성화되고 있다. 현재 실시되고 있는 사회교육은 그 성격 및 형태에 따라 준학교 교육, 직업 기술 훈련 및 학원, 일반 교양 교육의 세 영역으로 크게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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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학교는 교육법에 규정된 학제 중에서 기간 학제가 아닌 특별학제에 의한 학교를 말하는 것으로서 공민학교, 기술학교, 각종학교, 산업체 부설학교 및 학급, 방송통신고등학교 등이 있다. 초등교육 또는 중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학령을 초과한 자에게 보통 교육, 공민적 사회 교육, 직업 교육 등을 실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공민학교, 고등공민학교 및 고등기술학교는 그동안 정규학교 취학률이 높아짐에 따라 급격하게 줄어들어 고등기술학교를 제외하고는 폐교 직전에 있다. 1998년 현재 1개의 공민학교와 7개의 고등공민학교에 각각 170명과 525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으며, 17개의 고등기술학교에 9,0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 다른 준학교 형태로 중학교 과정, 고등학교 과정, 전문대학 과정 및 대학 과정의 각종 학교가 있다. 1998년 현재 중학교 과정 10개, 고등학교 과정 14개, 전문대학 과정 2개, 대학 과정 4개의 각종 학교가 있으며, 각 과정에 재학하고 있는 학생수는 중학교 과정 6,000여 명, 고등학교 과정 1,000여 명, 전문대학 과정 2,000여 명 및 대학 과정 7,000여 명 이다. 산업체에 근무하는 청소년들에게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의 교육기회를 주고 있는 산업체 부설학교는 1998년 현재 중학교는 모두 폐쇄되었고 고등학교는 14개가 있으며, 재학생수는 5,000여 명이다. 인근 정규 학교와의 협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산업체 특별 학급에 재학하고 있는 학생수는 1998년 현재 중학교 과정 2명, 일반계 고등학교 과정 1,000여 명, 실업계 고등학교 과정 9,000여 명이다. 학생이 감소 추세에 있는 방송통신고등학교는 1998년 현재 41개 학교가 있으며, 1만 3,000여 명이 재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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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적인 직업 기술 훈련은 1967년 '직업훈련법'이 제정되면서 정착되기 시작했다. 1977년부터는 사내 직업 훈련의 형태로 기업이 자체 훈련을 실시하도록 의무화되었고 각종 공공 직업훈련기관이 계속 확충되어 왔다. 현재 직업 훈련 기관에는 노동부 산하의 직업훈련원, 정부 기관의 직업훈련소, 시·도 단위의 지방훈련소 등이 있다. '사인(私人)이 다수인에게 30일 이상의 교육과정에 따라 지식·기술·예능을 교습하거나 30일 이상 학습 장소를 제공하는 시설'을 일컫는 학원은 대학 입시 준비를 비롯한 단기적인 교육과 기술 훈련을 돕고 있다. 1998년 현재 전국의 학원수는 6만 222개소, 수강자 수는 313만 9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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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교육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사회 교육 시설로는 도서관, 박물관, 문화원, 대학부설 평생교육원, 언론 기관 등이 운영하는 문화센터 등이 있다. 1998년 현재 전국에는 9,336개 도서관에 107만 6,630개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으며, 연간 이용 인원은 1억 5,203만 명이다. 박물관, 문화원, 대학부설 평생교육원, 문화센터 등에서도 평생교육 차원에서 일반인들에게 여가를 선용하면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 교육을 보완하면서 부분적으로 사회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방송(EBS)은 1990년 12월부터 한국교육개발원 부설기관으로 발족하여 프로그램을 제작·송출하고 있다. 교육방송은 1997년 한국교육방송원으로 승격된 후 기존의 1개 공중파 채널 외에 2개 위성 채널을 더하여 학교 교육 보완과 일반인을 위한 사회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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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교육법이 제정되면서 교육 활동을 지원하는 교육행정제도도 정비되었다. 중앙의 교육행정조직으로는 교육부(1991년 문교부에서 교육부로 개칭)가 있고 지방에 시·도와 시·군 수준의 교육행정조직이 있다. 교육행정은 1952년 교육 자치제를 일시 도입·시행한 후 1991년 새로운 교육 자치제를 도입·시행하기까지 중앙집권적인 교육행정 체제를 유지해왔다. 1991년부터 광역 단위의 지방 교육 자치제를 실시함에 따라 중앙의 교육부, 그리고 지방 교육행정기관으로서의 각 시·도 교육청과 시·군·구 교육청을 두게 되었으며 중앙의 보통교육행정이 시·도 교육청으로 대폭 이관되어 자치적으로 교육행정을 하고 있다.
중앙 교육행정기관인 교육부는 1998년 현재 기획관리실과 학교정책실, 평생교육국, 학술연구지원국, 교육환경개선국 및 교육정보화국 등 2실 4국 13담당관 24개과로 구성되어 있고 6개의 직속기관 학술원, 국사편찬위원회, 교육행정연수원, 국제교육진흥원, 교원징계재심위원회, 국립특수교육원을 두고 있다.
지방 교육행정기관인 시·도 교육청은 1991년부터 초등교육국·중등교육국·관리국(서울특별시는 이밖에 사회·체육교육국이 더 있음)으로 확대·개편되었으며, 시·군·구 교육청은 인구 규모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학무국과 관리국 또는 학무과와 관리과 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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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정부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념으로 한 새로운 교육정책을 추진했다. 미군정기에는 종래 복선형 학제를 단선형으로 개편하고 교육행정의 자치화를 꾀하는 한편 초등학교 교과서 편찬, 민주 교육 이념의 보급을 위한 교원 재교육, 문맹 퇴치를 위한 성인 교육, 각급 교육기관의 확충 등 교육 체제 정비에 주력했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전쟁으로 파괴된 교육시설을 복구하고 교원의 수급 조정 및 인사 체계 확립, 반공·도의 교육의 강화, 과학·기술 교육의 진흥 등에 중점을 두었다.
1960년대에는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거치면서 교육의 정상화를 촉진시키기 위해 1961년 9월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공포하고 1963년 2월에는 종래의 교육과정을 전면 개편했다. 그리고 1968년 중학교 평준화 시책에 따른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 도입과, 대학의 질적 향상을 꾀하고 지역간의 격차 해소를 위한 대학 입학예비고사 실시 등 입시 제도 변혁을 비롯하여 '국민교육헌장'의 제정, 통신 교육제도의 도입, 장기 종합교육계획 수립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1970년대의 교육은 '국적 있는 교육'이라는 기치 아래 반공 안보 교육, 주체성 교육 등에 주력했다. 한편 과학 기술 교육과 산학 협동 교육을 강화하여 전국민을 대상으로 과학화 운동에 힘썼고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의 사회적 기능을 개발하기 위한 새마을교육을 전개했다. 대학 교육의 확충과 함께 대학원 교육의 강화를 지향하는 고등교육 개혁사업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입시 제도에 있어서는 고등학교 평준화와 지방 교육의 발전을 목적으로 고등학교 추첨입학 제도가 도입되었다. 또한 교육 연구·개발 기능을 담당할 국가 차원의 종합적인 교육 연구기관 한국교육개발원을 설치했다.
1980년대에 와서는 7·30 개혁 조치 등을 통해 ① 국민 정신 교육의 강화, ② 평생교육 및 전인교육의 강화, ③ 고등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졸업 정원제의 실시, ④ 대학 입시 제도에 있어서 국가 학력 고사 실시 및 고교 내신제 적용, ⑤ 유아 조기교육의 진흥, ⑥ 학원 자율화, ⑦ 과외 수업 금지, ⑧ 해외 유학에 관한 개방 정책 추진, ⑨ 교육세 부과 등을 골자로 하는 교육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밖에도 전문대학의 육성, 평생교육 기반의 조성, 산업대학의 설치 등을 추진하고 21세기의 교육 개혁사업 추진을 위해 교육개혁심의회(1985~87)와 중앙교육심의회를 설치·운영했다.
1990년대에는 1995년의 제1차 교육개혁안(5·31 교육개혁)에 이어 1997년에 제4차 교육개혁안을 발표함으로써 전체 교육개혁안을 완성하고 개혁안의 실천을 통한 한국교육의 새틀을 짜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98년은 해방 이후 반세기의 교육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개혁 조치들이 취해진 해로 기록될 수 있다. 이는 오랫 동안 쌓여 온 교육 구조의 해묵은 숙제들을 풀어야 한다는 당위적 요청이 21세기를 바로 앞둔 1998년 교육의 과제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해방 이후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고 여기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의 요청에 따라 교육개혁정책들이 가속력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21세기 한국 교육의 방향을 결정하는 차원에서 수립된 정책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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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는 법제화 되긴 했지만 그 실시가 유보되어왔던 교육 자치제가 동년 2월 임시국회에서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로 통과되고 3월 8일 공포, 3월 26일부터 발효됨으로써 30년만에 부활했다. 이후 민선 교육감이 선출되고 학생 1명당교육비를 기준으로 하는 총괄교부금제도 도입으로 지방교육재정의 자율화도 줄 수 있었다. 한편 학교 단위의 풀뿌리 지방자치를 완성하기 위해 1995년 교육개혁안에 따라 각급 학교에 학교운영위원회를 설치했으며 1997년 11월 18일 개정된 지방교육자치법에 따라 학교운영위원회의 대표(학교운영위원회가 구성되지 않은 사립 학교의 경우는 학부모 대표)와 교원 단체 대표로 구성되는 선거인단에서 교육감 및 교육 위원을 선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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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의 5·31 교육개혁안에서의 대표적 과제로 공교육 재원이 GNP의 5%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다. 1993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정치적 공약으로 약속되었던 이 과제는 1993~98년 문민정부 내내 최고의 관심이었는데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1998년 교육예산에서부터 공교육 재원이 해방 이후 처음으로 5%를 약간 상회하게 되었다. 1997년 말 IMF 관리 체제하의 재정압박으로 1998년의 실제 예산은 5% 이하로 편성 운영되었지만 경제 사정이 호전될 것을 예상할 때 교육에 대한 공공 재원 증대의 기본틀은 마련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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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제도 개혁은 교육 개혁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메뉴가 되어왔다. 교육부가 1998년 10월 19일 발표한 개혁안 '새대학입시제도 2002'는 무시험 전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무시험 전형제 채택에 따라 시험 점수는 최소 자격 기준으로 사용되거나 영향력이 최소화되고 심층면접을 통해 학생의 사고력, 특기, 품성 등을 종합 평가하는 방안을 채택하고 있다. 한편 이 제도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쌍둥이 정책으로써 '교육비전 2002 새학교문화창조' 방안이 발표되었다. 새학교문화창조란, 학교 현장의 입시 위주·교사 중심의 수업 관행을 일소하여 학생이 삶과 배움을 함께 즐길 수 있고 민주 시민·세계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춰 자아실현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새로운 학교 문화 실천 운동이다. 이 두 정책이 성공할 지는 현재로서는 미지수다. 다만 향후 2~3년간, 그리고 21세기로 전환해 가는 시점에서 한국 교육이 또 하나의 큰 실험을 수행해야 함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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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교육과정은 창의적이고 자기주도적인 학습 능력을 기르는데 중점을 두고 특히 단위 학교와 학생의 교육과정 선택 범위를 확대하는 데 방향을 두고 있다. 제7차 교육과정은 초등학교 1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 총 10개 학년을 국민 기본 교육과정으로 정하고, 이후 고등학교 2~3학년 2개 학년은 전면적인 선택과정으로 운영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시행 시기는 초등학교는 2000학년도부터, 중학교는 2001학년도부터, 고등학교는 2002학년도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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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대학교육 개혁은 매우 중요한 과제로 등장했다. 대학 개혁의 골자는 수요자 중심체제로 세분화된 학과의 유사학문간 통폐합을 실시해 대학의 전공 운영을 현재의 학과 중심에서 학부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과, 교수 업적 관리와 평가를 통해 교육과 연구의 질을 제고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학생들은 입학 후 자신의 적성과 흥미에 맞추어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전공을 복수 개 이상 설계하고 이수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이러한 개혁을 지원하기 위한 국가의 재정 지원도 확대되었다. 단, 이와 같은 재정 지원은 원칙적으로 대학이 제공하는 교육과 연구의 질적 수준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 즉, 공부하는 대학, 연구하는 대학의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2000학년도부터 대학의 면학 분위기, 학사관리의 엄격성, 교육의 질적 수준 향상을 위한 대학의 자발적 노력 등을 평가하여 우수 대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이를 위해 그동안 대학교육협의회의 대학평가사업을 시초로 시작된 각종 고등교육기관에 대한 평가를 '한국대학평가원'(가칭)에 맡겨 보다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평가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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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도 중으로 학교 교육 위주의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형태의 평생 학습 기회가 모든 국민에게 제공될 수 있도록 현행 사회교육법을 평생교육법으로 개정한다. 평생교육법은 원격 교육 및 직장 내 교육 등을 통학 학습 기회 확대, 유급 학습 휴가제 도입, 학습자 중심 공공 학습비 지원 등 국민의 학습권과 학습자 선택권의 최대한 보장 및 평생교육 지원 전담 기구인 '중앙 및 지방 평생교육센터' 운영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또한 학원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그 설립과 운영에 있어서도 다양성을 제고할 방침이다. 학원들은 이제 직업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이 강화되고 학점 은행제와 연계한 교육적 기능과 역할이 증대됨으로써 명실상부한 평생교육기관으로 발전할 것이다.
辛世浩 글 | 千歲英 참조집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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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고, 이미 1,000여 년 전에 10t이 넘는 종(鐘)을 주조했으며, 철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했을 뿐만 아니라 장영실(蔣英實)과 같은 위대한 발명가를 배출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기 극단적인 쇄국정치로 소위 산업혁명의 산물인 기계문명을 접할 기회가 극히 제한되었고, 35년 동안의 일제강점기에는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현대적 과학기술에 관심이 모아지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였다. 물리학·화학·생물학 등의 이학사학위 취득자가 각 분야당 5~10명 내외였고, 이들 가운데 일부가 대학 교수로 등용되어 과학교육이 시작되었으나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으로 다수의 학생과 교수, 교사, 교육시설, 교육재료 등을 잃었다.
전쟁 뒤 복구가 진전되었고, 교육환경이 점차 회복되긴 했으나 1962년부터 시작된 5개년사회발전계획안에 체계적인 과학기술진흥정책이 비로소 포함되었다. 경제발전은 과학기술의 진흥 없이는 이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5개년계획이 갱신될 때마다 과학기술관련 연구시설, 연구지원시설, 금융 및 세제의 조정, 이공계 인력양성 등의 의욕적인 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무역수지가 다시 적자로 들어섰다. 특히 무역개방압력과 기술보호장벽강화 등 국제적인 요인과 연구역량의 취약성 혹은 임금상승 등과 같은 국내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조업의 경쟁력이 일시에 둔화되었다. 최근에는 외환관리의 부실로 인하여 IMF의 금융구제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연구투자는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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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과학기술진흥법이 제정되었고, 동시에 정부조직 내에 과학기술처가 신설되었다. 또한 과학 연구의 주체가 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1967)가 설립된 데 이어 1971년에는 과학인력 양성을 위한 한국과학원(KAIS)이 설립되었다. 1975년 한국표준연구소 등 정부출연연구소가 설립되었고, 1977년 한국과학재단이 발족되면서 주로 대학교수들에게 연구비가 지원되기 시작했다. 특히 1974년부터 조성된 대덕연구단지 내에 정부출연연구소들이 점차 자리잡게 되었고, 다수의 민간연구소들이 이 단지 내에 이주하거나 혹은 신설되었다. 특히 1981년 KIST와 KAIS가 통합되어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되었으나 1989년 학사부는 다시 연구사업을 수행하는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와 교육기관인 KAIST(한국과학기술원)로 분리되었고 1995년에 광주에 새로 대학원과정인 광주과학기술원(K-JIST)이 설립되었다. 1990년 정부는 대학에 탁월성연구집단 조성을 목표로 하여 우수연구센터(SRC/ERC)사업에 착수했다. 그간 20여 개의 SRC와 28개의 ERC를 선정해 집중적인 연구비 지원을 하고 있다.
1989년 발족한 한시적인 '과학기술자문회의'가 1991년 헌법에 근거해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로 개편되어 대통령을 자문하고 있다. 또한 1998년에는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그에 근거하여 대통령이 의장이 되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구성했다. 또 종전에 과학기술부 등 관련부처에 속했던 과학기술 관련 정부출연연구소를 연구자율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기초기술, 산업기술 그리고 공공기술연구회의 3분야로 묶어서 국무총리실 산하에 두기로 하였다. 이 같은 새로운 체제가 실효를 거둘 때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연구역량은 크게 신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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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의 혼란과 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대학의 교육 여건은 매우 미약했고, 대학졸업생의 다수는 대학원 과정의 이수를 위해 해외유학을 떠났다. 특히 1950~59년에 약 5,000명의 대학졸업생이 유학을 떠났는데, 80% 이상이 미국에서 수학했다. 대학 교육의 여건이 갖추어지기 전에 국립·사립 대학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으며, 졸업생 수도 급증했다. 1962년부터 시작된 5개년사회발전계획이 추진되면서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가 늘어났고, 산업체 부설 연구소도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연구인력의 수요도 크게 증가했다. 1985년 당시 연구원 수는 인구 1만 명당 10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1996년에는 29명으로 크게 늘었다. 그러나 일본의 52.3명, 미국의 36.6명과는 큰 차이가 있다. 연구원수가 한국은 13만 명, 일본이 67만 명 그리고 미국이 96만 명인 점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실제 연구인력수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연구원수뿐아니라 연구역량도 아직 뒤쳐져있다. 즉, 1997년 우리나라 과학자가 발표한 논문수는 1만 여 편인데 이는 국제비교 17위에 속한다. 최근 대학의 연구환경이 개선되고 있으나 교수 대 학생수 비가 평균 1대 30에 이르며 교수의 과중한 강의부담 때문에 연구역량을 일시에 제고할 형편이 못된다. 2000년까지 이공계대학의 교수 대 학생 비율을 1대 20으로 감축할 계획이지만 그 실현여부는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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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연구투자비율은 근래 선진국수준에 이르고 있다. 즉, 1980년 국민총생산(GNP) 대비 0.55%였던 것이 1997년에는 2.9%에 이르는데 이 수치는 일본(1996)의 2.83%, 미국(1997)의 2.64%와 견줄 만하다. 그러나 연구투자총액기준을 보면 1997년 한국이 128억 달러, 일본이 1,301억 달러, 미국이 2,065억 달러여서 각각 우리나라의 10배와 16배가 된다. 정부는 2002년까지 연구개발비를 정부예산의 5%수준, 그리고 GNP 대비 5%까지 끌어 올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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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전 거의 황무지와 같았던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오늘의 수준에 이를 만큼 끌어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과학기술의 진흥없이 경제의 부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역대 정부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일관되게 강력한 과학기술육성책을 추진한 까닭이다. 1962년 이후 사회발전 5개년계획이 반복 수립될 때마다 과학기술 육성을 위한 각종 시책, 제도, 기구들이 신설되었고 기술진흥확대회의 혹은 기술진흥심의회의 운용, 대통령의 자문을 위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설치, 국무총리가 의장인 종합과학기술심의회의 운용, 정부조직내 과학기술처의 신설과 과학기술부로의 승격, 과학기술진흥법을 폐지하고 종전보다 더욱 강력한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특별법'의 제정과 그 안에 규정된 기구 및 제도의 개편, 신설 등 과학기술역량의 획기적 신장을 위해 의욕적인 정책을 펴나가고 있다.
기업체들은 자체의 연구개발역량을 제고하기 위해 자체 기구내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있다. 1985년 60여 개의 민간연구소가 1997년에 이르면서 3,000여 개로 증가하며 앞으로도 민간연구소 수가 늘어날 전망이다. 특히 기술보호장벽이 두터워졌고 특허 혹은 지적소유권 등 외래기술의 도입 혹은 모방이 어려워짐에 따라 기업체들은 연구소 설립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자체 연구능력의 축적없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절실함이 기업체로 하여금 연구소를 개설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이처럼 기업체 연구소가 증가하고는 있으나 연구능력을 갖춘 고급인력을 구하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재원의 부족, 교육 및 연구여건의 부실 등으로 인해 능력있는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부터 기업체는 대학의 연구 인력을 활용할 목적으로 몇몇 대학에 첨단과학기술분야 연구소를 건립 기증하고 있으며 연구시설을 공여하거나 연구비를 지원하는 등의 방식으로 산학협동 연구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내에 건립된 신소재연구소, 기초전력연구소, 자동화연구소, 컴퓨터신기술연구소, 정밀기계연구소 또는 뉴미디어연구소 등은 기업체들이 기증한 건물들이다. 기업체에 의한 연구소 건물의 기증은 다른 대학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산학협동 풍조 역시 전에 비해 크게 확산되었다. 또 많은 대학들이 대학구내에 과학기술 연구단지를 조성하여 중소기업의 기술지원을 위한 보육시설을 설치 제공하고 있다. 근래 경제의 침강사태에서 탈피할 목적으로 정부는 벤처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특히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든가 첨단적 생명공학 기술을 바탕으로 한 벤처산업이 대학을 중심으로 급히 성장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첨단적 기술의 경쟁력없이 산업의 발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비롯한 것이다.
정부 조직의 개편작업이 있을 때마다 과학기술처(부)의 존폐가 주요한 대상이었다. 원래 과학기술처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의 수립, 연구개발 우선분야의 선정과 평가, 분석 혹은 연구개발투자의 조정 등 국가차원의 연구개발사업을 총괄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그 기능보다는 오히려 정부출연연구소 관리가 주요한 업무인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이로 인하여 매번 과학기술처의 위상이 문제가 되었으나 1998년 정부조직 때 과학기술처가 부로 승격함으로써 총괄기능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1999년 정부조직개편작업에서 과학기술부 산하 출연연구기관의 관리부서는 총리실로 옮겨졌고 과학기술 총괄기능은 대통령이 의장이 되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로 넘어갔고 과학기술부는 이 위원회의 사무부처일을 맡게 됨으로써 과학기술부의 연구사업 조정 및 총괄기능이 오히려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대통령에게 과학기술에 대한 장단기적 과제에 대하여 자문하게 되어 있어서 과학기술부의 기능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나 과학기술부가 그 수임사항인 인력양성기능, 기초분야에 대한 연구비지원 기능, 그리고 국가적 연구과제에 대한 종합적 평가기구로서 그 업무를 충실히 한다면 과학기술역량의 제고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과학기술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우수연구센터의 지원뿐 아니라 1992년 이래 선도적 연구 프로젝트(소위 G7 프로젝트)에 중점적으로 지원을 해왔다. 또 근래에는 대학 등 기초연구의 역량을 제고하기 위한 창의성 연구프로젝트 지원사업에 착수했다. 그동안 한국과학재단은 연구업적이 현저한 과학자에게 '한국과학상' 및 '한국공학상'을 수여해왔으며 최근에 창립한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매해 연구업적이 뛰어난 젊은 과학자들을 선정하여 '젊은과학자상'과 5년간에 걸쳐 연구장려금을 수여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노벨상 수상자를 주로 한 외국인 회원을 영입하는 한편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 아카데미와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또한 1999년에는 우리 나라가 유치한 최초의 국제연구기관인 '국제백신연구소(International Vaccine Institute)'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 연구소는 세계 어린이 질병퇴치용 백신을 연구개발할 세계유일의 독립된 국제연구기관으로, 우리 나라가 소요경비의 일부를 지원하게 되어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 연구소 유치에 성공함으로써 우리 나라는 인도적 사업에 기여한다는 명분을 얻게 되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창립이나 국제백신연구소의 유치 등은 우리 나라 과학기술의 세계화에 일조할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 연구능력이 급성장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趙完圭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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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도로는 조선 중엽 황토현광장(지금의 광화문광장-동대문 간과 광교-남대문 간)의 +자형 도로로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기존도로의 포장과 확장에 치중하다가 1960년대는 고속도로를 중점 건설하여 고도경제성장을 위한 기반도로망을 구축했으며 1970년대는 국도포장사업을 본격화하여 지방균형개발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했다. 또한 1980년대는 주요 국도 및 지방도 포장을 거의 마무리하여 국민생활환경 개선에 치중했으며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고속도로망 확충과 국도확장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장래 국가간선망의 확충과 교통문제 개선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98년말 현재 전국의 총도로연장은 8만 6,989km로 이중 고속도로는 1,996km, 국도·지방도, 시·군도 등의 포장도로도 6만 4,780km로 전국이 일일생활권화되었다.
현재 전국을 격자형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남북을 7개축, 동서를 9개축으로 연결하는 도로망 구축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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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에 따른 국민소득 수준의 향상과 자동차 공업의 발달로 자동차 보유대수가 크게 증가하여 1962년 3만 814대에서 1997년 1,000만 대를 돌파했고 1998년말 현재 1,046만 9,599대를 기록하고 있다.
인구 1,000명당 보유대수도 1960년 1.2대에서 1990년 79.2대, 1998년 238대로 급성장하고 있다. 승용차의 경우 1962년 8,733대에서 1990년 207만 대, 1998년 758만 대로 증가하여 다른 차량의 증가속도를 크게 앞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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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는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제물포 간의 32.2km가 개통됨으로써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운수영업이 개시된 것을 그 다음 해인 1900년 7월 8일 한강철교가 완공되어 경인선이 완전 개통된 이후이다.
6·25전쟁으로 인해 철도설비는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으나 전후복구와 재건노력으로 1960년대 이후 국내 기간수송수단으로서 착실한 성장을 보여왔다. 경부고속도로 완공 이후 육로수송과 본격적인 경쟁관계에 돌입하여 여객의 경우 수요증가가 둔화되었으나 1990년대 들어 자동차의 급격한 증가에 따른 교통체증의 영향으로 철도수송의 중요성이 증가하고 있다. 현재 서울-부산 간 426km를 최고시속 300km로 달릴 수 있는 경부고속철도를 건설중에 있다.
한편 지하철은 1974년 서울에서 1호선을 개통한 이래 전국 6대 도시에서 운영 또는 건설중에 있다. 서울은 218.4km를 운영중이고 61.8km를 건설중이며, 2005년까지 120km를 추가 건설하여 2005년에는 수송분담율을 50%까지 높일 계획이다. 부산도 기존 32.5km 외에 2005년까지 79.7km를 추가 건설하여 수송분담율을 22.9%로 높일 계획이다. 기타 대구·인천·광주·대전에도 지하철을 건설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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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항만사업은 1876년의 부산항 개항, 1880년의 원산항 및 1883년의 인천항 개항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
수송실적의 추이를 보면 여객수송은 1962년 436만 명에서 1996년에 934만 명으로 21배가 증가했으나 이는 꾸준한 연육교의 건설로 많은 교통수요가 육상교통으로 전가되어 증가량이 소폭에 그친 데 기인한다.
화물수송은 1962년 604만t에서 1996년 5억 8,171만t으로 96.3배의 급신장을 보여 화물수송이 해운부문의 성장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요항만의 하역능력은 수출입 물동량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1975년 1,878만 1,000t에서 1996년 2억 8,844만t으로 15.4배가 증가했으나 계속되는 물동량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항만개발로 인하여 부산항 등 주요항만이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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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대한항공(KAL)이 민영화된 이후 수출지향적 경제정책에 힘입어 급속한 성장을 보였으며 1989년에는 국제수송 면에서도 세계 10위로 부상하게 되었다. 1988년에는 제2민간항공사업이 허가됨으로써 과거 독점사업체제에서 복수사업자에 의한 경쟁체제로 산업구조가 탈바꿈하게 되었다.
1998년말 한국과 항공협정이 체결된 나라는 75개국이며, 국제항공노선을 주 518회(KAL 352회, 아시아나 166회) 운항하고 있으며, 국내노선에도 33개 노선에 주 1,418회(KAL 801회, 아시아나 617회)를 운항하고 있다.
항공수송 실적은 1997년 국제여객이 1,659만 8,000명으로 최근 10년간 연평균 11.8%씩 증가했으며 국내여객도 2,563만 9,000명으로 17.8%의 높은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화물수송에 있어서도 국제화물은 163만 1,000t으로 최근 10년간 13.2%, 국내화물은 387천t으로 15.3%씩 증가했다.
운송용 항공기는 1999년 3월 현재 총 156대를 보유중이며 KAL 112대, 아시아나 44대로 이중 대형기종인 보잉 747기를 46대 보유하고 있다.
한편 늘어나는 항공수요에 근본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인천 영종도에 인천국제공항을 건설중이며 2000년 개항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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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이미 신라시대에 역(驛)이라는 제도가 있어 우편업무를 취급했다. 이 제도는 이후 고려·조선 시대에도 이어져 왔으나 개인간의 통신을 위한 우편제도는 없었다. 개인간의 서신왕래를 주 대상으로 삼은 근대 우편제도의 시작은 홍영식이 미국과 일본의 제도를 시찰한 후 1884년 서울에 우정총국(郵政總局)을 창설하고 인천에 분국을 개설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러나 1884년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은 폐지되고 우편제도도 중지되었다.
그후 1895년에 전반적인 제도개혁과 아울러 우편제도도 부활되어 서울과 각 지방에 우체사(郵遞司)가 설치되고 중앙에는 통신원(通信院)이 설립되었다. 1900년에 만국우편연합(UPU)에 정식 가입하고 국제우편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1905년에는 한일통신합동규약(韓日通信合同規約)이 체결됨으로써 420여 개의 우편기관이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이 기관들은 미군정에 의해 운영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체신부가 설치되었다. 체신부는 우편법의 제정과 1면 1국(一面一國)의 원칙으로 우체국 증설에 노력했으며 1970년에는 우편번호제의 실시, 1974년부터는 공산국가와의 우편물 교환제도도 시행했다.
1990년과 1996년에 서울에 2개의 우편집중국을 건설하여 우편 선진화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1996년에는 우정사업의 경영효율화를 위한 법률근거를 마련하고 경영평가에 의한 상여금 차등지급을 시행하여 1998년 최초로 우편사업 경상수지를 흑자로 전환시켰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우정연혁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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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도입된 것은 기록상으로는 1894년 한성전보총국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전화시험을 거쳐 1896년 10월에 개통된 궁내부 행정전화가 그 효시가 된다. 일반공중용 전화는 서울-인천 간의 시외전화가 1902년 개통되면서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 여름에는 서울에서 시내전화 교환업무도 개시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약 6개월 전 한일통신협정서가 강제로 체결되어 통신주권을 일본에 빼앗겼다.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의 전기통신사업은 일본의 식민지통치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주로 일반대중의 통제와 식민지 수탈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1941년의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계기로 한반도 대부분의 통신시설은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되었다. 그 결과 일반대중을 위한 통신설비의 확충은 이 1937~41년에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체신부가 발족되어 전기통신설비의 재건이 서서히 이루어지게 되었으나 재원의 부족으로 만족할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1952년에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가입해 통신분야의 국제협력활동이 시작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전국의 전화교환설비 등의 약 80%가 파괴됨으로써 전기통신설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1957년에 이르러서야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1965년에 텔렉스 자동교환망이 설치되어 수출입국을 지향하는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을 위한 효과적인 지원수단이 갖추어졌으며, 1967년에는 마이크로웨이브 전국통신망이 개통되어 대용량통신과 텔레비전 전송중계가 가능해졌다.
1970년에는 위성지구국이 구축됨으로써 전세계와의 대용량통신이 가능해졌으며 1971년에는 서울-부산 간 장거리자동전화가 개통되어 전국이 교환수를 거치지 않고 직접 연결되는 시대가 개막되었다.
1970년대에는 급증하는 전기통신의 수요에 대처해 전기통신분야에 대한 설비확장노력이 계속되었으나, 수요의 증가속도가 공급의 증가속도를 대폭 상회함으로써 1980년대 초에는 극심한 전화적체 현상이 생겼다.
1980년대에는 이와 같은 전화적체 문제를 해소하고 전자 및 통신분야를 새로운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전기통신부문 전반에 걸친 운영체계의 개편과 법령체계의 정비가 추진되었다. 이것의 일환으로 1981년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법이 제정되어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설립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한국전기통신공사는 종전에 체신부가 담당하던 전기통신사업의 운영을 전담하고 체신부는 전기통신사업의 감독과 정책수립만 관장하게 되었다.
또한 1982년 한국데이타통신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컴퓨터 통신과 같은 데이타 통신 서비스가 시작되었으며, 1984년에는 한국이동통신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차량전화 서비스, 무선호출 서비스와 같은 새로운 서비스가 제공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83년에는 체신부의 정책기능을 강화하고 체계적인 통신발전을 유도할 수 있도록 1961년에 제정된 '전기통신법'을 '전기통신기본법'과 '공중전기통신사업법'으로 분리·개편했다.
정부의 집중적인 투자노력에 힘입어 전화회선설비는 1987년에는 1,000만 회선이 달성되는데 이와 같은 눈부신 발전은 세계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로써 한국은 전화적체해소가 완전히 이루어졌고 전화를 신청하면 24시간 이내에 가설해주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나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또한 1987년 전국자동교환망이 완성되어 전국 어디서나 교환수를 거치지 않고 전화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첨단기술분야인 전기통신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한 정부는 관련기술의 개발, 축적과 기술기반 구축에도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전전자교환기의 국내개발이라는 야심적인 계획을 1982년부터 추진해 1984년 TDX-1A형 전전자교환기의 개발에 성공했다. 국내 기술진에 의해 개발·제작된 TDX-1A형 전전자교환기는 1986년부터 전국 전화교환국에 설치·운영되고 있다. 1989년에는 용량이 증가된 TDX-1B형이 개발·보급되었으며, 뒤이어 1991년에는 10만 회선 용량급의 TDX-10형의 교환기가 개발되었다.
1990년에 들어서 전기통신분야는 양적으로 전화회선보유기준으로 볼 때 세계 제9위이며, 기술측면에서는 전전자교환기의 자체개발능력을 갖추게 되어 명실공히 통신선진국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1994년에는 21세기 정보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정보통신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집중육성하기 위하여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개편했다.
정보통신부의 발족으로 여러 부처에서 관장하던 정보통신 관련 업무가 한 부처로 일원화됨으로써 정보통신부는 수요측면의 정보화촉진정책과 공급측면의 정보통신산업육성정책을 상호연계하여 정보통신분야의 정책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정보통신부는 '선(先) 국내경쟁, 후(後) 국제경쟁' 원칙에 따라 정보통신시장에 과감히 경쟁을 도입한 결과 1999년 4월에는 하나로통신이 시내전화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어 정보통신 모든 분야에 걸쳐 경쟁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한편 1994년 정부조직 개편으로 정보통신부가 소프트웨어(S/W) 산업육성 업무를 관장하게 됨에 따라 정보통신부는 1995년 S/W개발촉진법을 개정하여 S/W시스템 개발, 유통환경 촉진, 전문인력양성 등 S/W진흥시책을 강구하고, S/W산업에 대한 적정한 대가기준을 정하여 S/W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 또한 1997년에는 지역S/W지원센터를 설립하여 S/W산업의 저변을 확대했고, 1998년에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해외 S/W지원센타를 설립하여 S/W산업의 해외진출을 적극 지원하고 있으며, S/W관련 각종 지원기관을 S/W진흥원을 설립·통폐합함으로써 S/W산업에 대한 효율적이고 종합적인 지원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99년에는 서울 S/W타운 조성과 정보통신(IP)산업 활성화 대책 등을 중점 정책사업으로 추진하여 S/W산업의 세계시장 경쟁력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정보통신기술개발에 대한 산(産)·학(學)·연(硏)의 공동연구개발과 정부의 집중적인 기술개발지원의 결과 세계 최초로 부호분할방식(CDMA)에 의한 이동전화기술을 상용화하는 등 정보통신산업의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감으로써 정보통신 산업이 우리 경제에 있어 주력산업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1998년에는 305억 달러 수출 실적에 124억 달러 흑자를 구현함으로써 1997년부터 시작된 경제위기 극복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실업해소와 고용창출 문제가 우리 경제의 중심과제로 부상함에 정보통신전문투자조합 결성 등을 통한 IP산업 등 정보통신전문기업의 창업과 중소기업 위주의 기술개발 지원 등에 집중함으로써 정보통신분야의 지속적 성장기반을 강화하고 이를 통한 고용창출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현재 정보통신산업은 정부의 공정한 경쟁체제확립, 기술개발, 전문인력양성 및 S/W·벤처 기업 활성화를 통해 21세기 우리 경제를 이끌어갈 핵심전략산업으로 확고히 자리잡아가고 있다.
吳明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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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면적 중 적극적으로 이용 가능한 면적은 2만 6,000㎢에 불과하다. 1970년 ㎢당 국민총생산은 1억 7,000만 원에 불과했으나 1997년 현재 45억 3,900만 원으로 같은 기간 동안 경제밀도가 27배 가량 증가했다. 즉 지난 27년간 한국은 인구와 경제밀도가 엄청나게 증가했고, 국토개발과 환경보존의 필요성이 동시에 대두되었다.
인구의 절대적 증가뿐만 아니라 도시로의 급격한 인구유입 즉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주택건설을 위한 택지개발과, 경제성장에 따른 대규모 공업용지의 개발 및 농경지 확대를 위한 산지개간과 간척이 이루어졌다. 또한 임해공업단지조성을 위한 해면매립, 홍수조절과 용수 및 전력생산을 위한 댐의 건설이 이루어졌으며, 1968년 경인고속도로 건설을 시작으로 1970년 경부고속도로, 1973년 호남고속도로, 1975년 영동고속도로 등이 건설되어 국토가 일일생활권화되는 고속도로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밖에도 수도권을 필두로 전국의 각 지역에 신도시가 개발되어 1997년 현재 전국의 도시화율이 86.8%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1960년 이후의 다양한 국토개발로 국토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앞으로도 이러한 개발은 불가피하게 지속될 것이다.
1982~89년 간척 및 해면매립을 통한 241㎢의 국토가 확장되었으나 농경지와 산지가 각각 534㎢, 690㎢씩 줄어들고, 택지·공업용지·공공용지가 142㎢, 76㎢, 357㎢씩 늘어났으며, 890㎢의 국토가 내수면이나 여가용지로 전환되었다.
국토공간구조의 변화를 계획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노력은 일찍부터 있었으나, 국토개발 또는 국토계획이란 개념이 도입된 것은 1940년대이며, 제도적으로 정착된 것은 1962년 건설부의 신설과 1963년 국토건설종합개발계획법의 제정으로 보아야 한다. 국토건설종합계획법 제2조에 의하면 국토개발계획은 ① 토지, 물, 기타 천연자원의 이용·개발 및 보전, ② 수해, 풍해, 기타 재해의 방지, ③ 도시와 농촌의 배치 및 규모와 그 구조, ④ 산업입지의 선정과 조성, ⑤ 산업발전의 기반이 되는 중요 공공시설의 배치 및 규모, ⑥ 문화, 후생 및 관광에 관한 자원과 기타 자원의 보호시설의 배치 및 규모에 관한 사항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법제정과 정부기구개편에 따라 국토개발계획의 입안과 국토개발사업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울산공업단지 조성과 댐 건설 및 간척사업이 추진되었으며, 공업화를 위한 공업용수·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투자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60년대 국토개발은 체계적인 계획이나 지역개발적 차원에서 종합적인 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사회간접투자시설 위주의 하향적·청사진적·토목공학적 접근방법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같은 기간 동안에 서울-인천·울산공업·제주도·태백산·영산강·아산-서산 등의 특정지역이 지정되었고, 국토개발계획에 대한 몇 가지 시안들이 나왔으나 국가계획으로는 발표되지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 1972년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72~81)이 발표되었고, 성장거점방법에 입각한 4대권, 8중권, 17소권으로 권역을 설정하고 수도권 집중억제와 분산 및 지역격차의 해소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제1차 계획은 총량적 경제성장정책과 부문별 계획의 조정체계 결여, 계획추진체제의 미비로 하나의 지면계획에 불과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 계획·발표된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82~91)은 인구의 지방정착을 유도하고 개발가능성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며 국민복지수준의 향상과 국토자연환경의 보전을 기본목표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중심도시와 주변 농촌지역을 통합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5개 대도시생활권, 17개 중소도시생활권, 6개 농촌중심도시권을 설정했으나 중심도시로 지정되지 못한 도시들의 반발과 중국의 개방정책과 동북아시아 전체의 국제적 여건변화에 따라 개발계획이 수정되었고,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수정계획(1987~91)에서는 수도권을 포함한 5대 경제권을 설정하여 광역개발을 추진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5대 경제권은 전라남·북도를 포함한 서남권, 경상남·북도의 동남권, 충청남·북도의 중부권, 강원도의 태백권, 서울과 경기도를 포함한 수도권 등이다. 특히 1987년 서해안개발계획이 발표되었으며, 인천의 남항 개발, 아산항 건설과 석유화학산업의 입지, 군산 외항과 군장산업기지건설, 목포의 대불공단조성사업 등 서해안 항만도시들의 의욕적인 개발계획구상이 발표되었다. 1980년대 이후 동북 아시아 지역에는 급격한 변화가 계속되었다. 한·소국교정상화, 중국개방정책의 지속과 수교, 공산체제의 몰락으로 동북아시아시대 및 환태평양시대의 도래가 가시적으로 다가오면서 서해안뿐만 아니라 동해안과 남해안에도 개발의 열기가 높아져갔다. 동해안의 포항·강릉·동해·울산 등이 환동해권시대(環東海圈時代)를 여는 중심도시로서 역할을 강조하기에 이르렀고, 남해안의 부산, 마산-창원, 여수-여천-순천-동광양으로 둘러싸인 광역광양만권개발구상이 발표되었다. 늘어나는 콘테이너 화물수송을 위한 부산 콘테이너 부두의 확장과 인공 섬 건설, 광양 제2콘테이너 항 건설이 구체화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산업구조의 개편과 국제화 시대를 위한 국토공간의 재편성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또한 자가용의 기하급수적 증가와 인적·물적 수송량이 증대됨에 따라 철도·도로·항만·공항 등 사회간접자본시설의 부족현상이 심화되었다. 이에 부응한 국토개발사업으로서 광주첨단산업단지개발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10개의 첨단산업단지 또는 첨단연구단지의 조성계획을 수립했으며, 영종도 신국제공항 건설과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건설이 시작되었다.
한국은 드디어 공업화·도시화에 따른 고밀도 도시산업사회로 발전하고 있다. 제한된 국토공간에 대한 이용밀도가 높아짐에 따라 국토가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용량이 포화상태에 이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천 및 호수의 오염, 도시와 공업단지의 대기오염, 농약의 과다사용으로 인한 토양오염, 생활 및 산업 쓰레기, 무계획적인 간척매립으로 인한 연안역(沿岸域)의 생태계 파괴는 물론 석유류 소비증가에 따른 일산화탄소의 배출과 지구온난화, 냉각매체로 쓰이는 프레온 가스에 의한 오존층 파괴 등이 지구 문제로까지 확대되어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정부는 1977년 환경보전법을 제정했으며, 1990년 통합입법으로 되어 있는 환경보전법을 환경정책기본법·대기환경보전법·수질환경보전법·소음진동규제법·유해화학물질관리법·환경오염피해분쟁조정법 등의 6개 단일법으로 개편했다. 나아가 1992년 6월 5일에는 '환경보전을 위한 국가선언'을 선포했으며,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된 유엔환경개발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UNCED)에서 기후변화방지협약, 생물종다양성 보존협약에 서명하여 21세기를 위한 실천강령을 채택한 바 있다.
그밖에도 국토이용관리법에 의한 토지이용의 규제와 환경영향가치평가제도의 도입 및 환경영향권별 환경보전계획의 수립 등 국토개발과 환경보전을 조화있게 끌고나가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다. 그러나 1995년 본격적인 민선지방자치제의 실시이후 국토개발과 환경보전을 둘러싸고 갈등이 증폭되고 있어 이를 위한 개선책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고 있다. 예를들어 상수원보호를 둘러싼 수도권과 충청도·강원도와의 갈등, 위천공단건설계획으로 인한 낙동강 상·하류간 갈등, 영월댐 건설을 둘러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그리고 환경단체간의 갈등, 개발제한구역의 해제를 둘러싼 지방자치체와 주민 및 환경단체 간 갈등이 표출되고 있어 이에 대한 해결책이 시급하다. 이러한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고 국토개발과 환경보전간의 균형있는 조화를 위해서는 정책조정체제의 정비와 정책수단의 개발 및 실천성 확보, 재원의 조달과 국민들의 가치관 정립을 위한 환경교육의 강화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개발과 보전을 택일적으로 보지 않으면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한편, 1990년을 전후한 냉전체제의 해체이후 두만강 나진-선봉지구의 합작개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KEDO)의 북한 신포지구 원자력발전소 건설추진, 그리고 1998년 현대그룹의 북한 금강산 관광 성사는 이제 국토개발의 범위를 북한지역에 까지 확장시켜 놓았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한반도 전체로서의 국토개발과 환경보전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
崔相哲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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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란 오랜 역사의 학습과 축적의 소산이기에 대한민국 수립 이후의 문화만을 단절하여 서술하는 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한국문화의 전체적인 역사과정중 서양문화와의 만남 이전을 간단히 살펴본 뒤 그 이후를 중점적으로 개괄하기로 한다. 이때 문화현상 일반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존재의 궁극적인 차원을 다루는 종교라는 관점에서, 좁은 의미의 문화를 대표하는 예술의 전개과정 역시 종교와의 연관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관념적인 허구가 아니라 우리 문화의 실제적인 흐름과도 부합된다.
이렇게 볼 때 최초의 종교생할은 샤머니즘[巫敎]과 연결된 단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이나 민간 습속에 남아 있는 잔영을 참고할 때 샤머니즘의 특징은 죽어서 거룩한 존재와 교제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재생한다는 신비적 체험이 음주가무를 통해 가능해지고, 무아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교령(交靈)을 통해 신의 뜻을 알아내고 영력을 빌어 재액을 없애며 축복된 인생을 창조하려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신바람의 예술'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이 단계의 예술적 활동은 개인에 의한 의식적 소산이기보다는 오히려 집단적 무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밖에 없다.
뒤이어 고등종교인 불교가 유입되면서 샤머니즘과 불교가 창조적으로 혼합되는 통일신라시대 이전까지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 이를 '힘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견해도 있다. 이 단계에서는 대륙의 영향 아래 봉건적 국가권력과 신앙적 신의 위력이 합일되어 연관적 조화를 이루면서 권력을 과장적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그 창작의욕이 발현된다.
재래적 요소와 외래적 요소가 특색 있는 문화를 창조해가기 위한 이 과도적 단계가 지나가면 풍류도(風流道)와 연관된 단계, 즉 '꿈의 예술'이 펼쳐진다. 석굴암의 조각 등에서 그 전형이 발견되는데, 고대 그리스 예술의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엄'과도 상통하는 특징을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조형성보다 음악성이 좀더 강하게 느껴진다.
통일신라가 쇠퇴기를 맞이하면서부터 생동하는 정신과 육체의 균형된 표현이 좀더 내면으로 기울면서 '슬픔의 예술'이라는 특징이 두드러졌다. 이로써 통일신라 후반기와 그 뒤를 이은 고려시대는 80년에 걸친 전성기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항상 불안 속에 살아갔고 그 전성기마저도 혼란기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슬픔의 예술'이라는 단계 설정은 아주 무리한 것은 아니다. 고려청자가 그 상징이자 실제적인 산물이라고 여겨진다.
다음 단계는 유교주의를 표방한 조선왕조로서 예술적인 표현세계에서는 소박·건실의 정신이 특히 평민성과 결합되면서 '멋의 예술'을 보였다. 이 단계에서는 '무기교의 기교'가 특징이라고 설명하는 이론이 비교적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자연을 단순한 이용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관조의 대상으로 보는 넓은 의미에서의 자연주의는 서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와 기계문명, 그리고 관료체제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물론 양식상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 정신에서는 18세기까지의 서양예술의 주류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동양예술 내지 그와 동류인 한국예술은 19세기말부터 이전과는 그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서양적 보편성에 휘말려 들고 만다. 이 단계를 굳이 종교와 연관시키자면 그리스도교가 주목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비본래적인 상태로부터의 탈피를 뜻하는 '거듭남'(重生)이나 억압적인 상태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하는 '되살림'(復活)이라고 한다면, 서양과의 만남은 조선왕조를 뒷받침해온 유교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그 생명력이 고갈되어가는 상황에서 우리의 문화예술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초기단계에서 볼 때 한국에 유입된 그리스도교는 서양문명이라는 이질적인 체계 자체와 동일시되면서 이른바 복음의 진정한 생명력을 충일하게 살려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서양의 문물을 우리보다 일찍 받아들여 이를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삼아 주변국가들을 침공하고 식민지로 합병시킨 일본 제국주의로 인해, 서양문화와 그 원천이 되는 그리스도교적 원리의 수용은 더욱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멀게는 1631년 정두원에 의해 가톨릭 서적과 함께 여러 가지 과학·기술의 문물이 소개된 이후, 서양은 직접·간접의 경로를 거쳐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기도 한 우리나라에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충격들을 안겨주었다.
문화·예술 부문에서는 1884년 〈한성순보〉의 해외 문화 소개 기사 가운데 음악·미술이라는 새로운 낱말이 출현했고, 1898년에는 비록 미국 화가 휴버트 보스의 손을 빌려서나마 고종과 황태자의 등신대 초상화가 처음으로, 서양식 화법을 사용해 그려졌다. 1909년 2월 고희동이 일본 도쿄[東京] 미술학교에 유학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양화를 전공하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 변화를 '일제강점기의 신문화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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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화운동은 개화운동인 동시에 독립운동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띠고 언론·교육·산업·종교·사상·여성·소년·형평(衡平)·국학·한글·문학·연극·미술·음악·영화·체육·의료 등을 포괄했다. 이러한 신문화운동의 단계 중 특히 3·1운동 이후부터 만주사변까지의 기간에는 민족문화를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이 진흥되어 전국적으로 사립학교와 사립강습소 등이 설립되고, 마침내 민족의 성금으로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민립(民立)대학 기성(期成)운동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국어를 존중하고 문법을 통일하여 국어사전을 편찬하자는 한글운동으로 '조선어학회'가 창립되고, 큰사전을 편찬하는 단계까지 들어갔으며,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면서 민족사의 주체적·세계사적 발전상을 밝히려 한 민족주의 사학이 해외의 독립운동 전선과 국내 학계에서 일어났다. 예술문화의 영역을 살펴보면 우선 문학에서는 비로소 근대문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서구식의 단편소설·희곡·평론 등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문학적 성과는 1919년을 전후로 한 잡지와 동인지들의 발간에 크게 힘입었는데, 〈창조〉·〈폐허〉·〈백조〉 등이 그것이다. 연극에서는 신파조를 탈피한 신극 운동이 토월회를 중심으로 활발해졌으며, 영화에서는 나운규의 출현과 함께 비로소 볼 만한 영화가 상영되었다. 미술에서는 민간단체인 서화협회가 활발히 움직여 우수한 미술가들이 배출되었고, 음악에서는 홍난파를 중심으로 신음악운동이 일어났다. 예술로서의 무용도 최승희의 무용연구소가 서울에서 문을 열면서(1929) 본격적인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밖에 3대 민간신문인 〈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와 〈개벽〉·〈신생활〉·〈신천지〉·〈동광〉 등이 신문화운동을 지지·격려했으며,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의 기관지 〈문예운동〉(1926)이 출현했다.
1931~45년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기치로 내건 동화정책이 추진되면서 민족적 역량을 총집결한 신간회가 해체되고(1931),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동맹원 70~80명이 검거되는(1931, 1934) 등 문학·예술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또한 수양동지회원 백수십 명이 검거되었고(1937), 창씨개명이 선포되는 한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민족적 색채가 짙은 신문과 잡지가 모조리 폐간되었다(1938). 1938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이어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발표하고(1941), 조선어학회 사건을 날조하여 수십 명의 문화인을 검거하는 등 문화운동을 근저로부터 괴멸시키려 했다. 이때는 일제의 계속된 탄압과 회유에 의해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변절한 어두운 시대이기도 했다. 예컨대 1939년 일제는 친일 반민족 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를 조직했으며, 1941년에는 당시의 대표적인 문예지 〈문장〉과 〈인문평론〉을 폐간시키는 대신 일본어전용의 〈국민문학〉을 내놓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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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1945. 8. 15~1948. 8. 15)는 참으로 역동적 시기였다. 해방공간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상황의 격동에 따라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좌·우익의 구분에 따른 수많은 단체와 조직들이 명멸했다. 그러나 그 혼돈의 와중에서도 그 이후의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와 대별할 때 매우 고양된 문화·예술 활동이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방직후 문화예술인들의 대응이 가장 먼저 표출된 사건은 좌익 문학인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문학건설본부의 결성이었다. 이 조직은 이후 조선문학가동맹(1945. 12)으로 변화했으며, 이에 대응하여 우익계에서는 전조선문필가협회(1946. 4)를 결성했다. 미술계·음악계·연극계 등에서도 이러한 사태는 마찬가지였다. 미술계의 경우는 해방직후 정치적 성격이 아직 선명하지 않았던 조선미술건설본부가 동양화·서양화·조각·공예·아동미술·선전미술 등 각 분야를 망라하여 성립되었으나(1945. 8), 좌익계의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이 따로 결성되자(1945. 9) 해체되었다. 이후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을 중심으로 조선미술가동맹이 결성되었다. 조선미술건설본부가 해체된 후 우익계의 미술단체로는 고희동을 회장으로 한 조선미술협회가 생겨나 두 단체가 대립했으나, 단독정부 수립 후에는 미술동맹이 도태되고 조선미술협회가 대한미술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연극계의 경우도 해방직후 아직 좌·우익의 뚜렷한 구별 없이 조선연극건설본부가 성립되었지만, 이후 좌익계의 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연극건설본부 내의 좌익계와 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이 합쳐 조선연극동맹을 발족한 후 일제잔재 소탕, 봉건유제 청산, 국수주의 배격, 진보적 민족연극수립, 진보적 국제연극과의 제휴 등을 강령으로 내세우고 그 산하에 조선예술극장 등의 극단을 두었다. 한편 조선연극건설본부에서 이탈한 우익계 연극인들은 1947년 유치진 등을 중심으로 극예술협회를 성립시켜 순수연극과 순수예술주의를 지향했다. 이후 대한민국 수립으로 좌익계 연극인 대부분이 월북해버리자, 극예술협회가 연극계의 중심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단체들의 결성·해체·재결성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상황은 전체 문화·예술인들을 대표하려는 시도로 좌익계의 조선문화단체총연맹(1946. 2)과 우익계의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1947. 2)가 결성되는 것으로 하나의 정점을 맞는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경우 첫째, 해방 도상의 모든 장벽을 철폐하고 완전 자주독립을 촉성하며, 둘째, 세계문화의 이념에서 민족문화를 창조하여 전세계 약소민족의 자존을 옹호한다는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 이를 통해 민족문화를 수립하겠다는 좌·우익 공통의 명제가 현실 속에서는 합치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가장 비정치적인 활동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음악의 경우를 들어 당시의 상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 시기는 다시금 제1기(1945. 8. 15~12. 31), 제2기(1946. 1. 1~1947. 8. 15), 그리고 제3기(1947. 8. 15~1948. 8. 15)로 세분될 수 있다.
제1기에는 민족음악에 대한 해석자의 입장에 따라 악단이 정비되고 여러 가지 조직이 결성되면서 민족 좌·우파의 틀이 잡혀갔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조선음악가동맹이 결성되었는데(12. 31), 이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9. 15 결성) 전체와 조선음악가협회(10. 22 결성)의 일부를 흡수해 7대 강령을 발표했다. 강령은 일제잔재 음악의 소탕, 봉건주의적 유물 음악의 청소, 음악의 국수주의적 경향 배격, 악단의 반민주주의적 세력의 추방, 민족음악 유산의 정당한 계승과 외래음악의 비판적 섭취, 진보적 민주주의·민족주의 문화의 건설, 국제음악과의 교류협조 등으로 되어 있다. 이 음악동맹은 12월말에 이르러 민중국악운동을 내세운 국악원(10. 10 결성)과 연계되어 민족좌파로서 골격을 형성하면서 고려교향악협회-고려교향악단, 조선음악가협회(10. 22 결성), 이왕직아악부의 후신 구왕부아악부가 연계된 민족우파와 대립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제2기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안(1945. 12. 27)이 알려진 뒤 민족 현실에 대한 정치적 입장에 따라 좌·우익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벽두에 음악동맹은 국악원과 함께 조선문화단체총연맹(문련)에 참여하여 집단 역량화를 꾀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1946년 8월 15일부터 1년 동안 스스로 내건 강령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같은 시기에 전국음악문화협회가 현제명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우익을 대표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채동선을 중심으로 한 고려음악협회가 결성되어(1947. 2), 음악동맹의 비조선적 유물론이나 현제명 세력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민족자결 정신 아래 정통음악예술의 연구 창작 및 연주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우익 주도적 입장을 내세웠다. 채동선은 반탁을 표방하여 우익의 조직체와 맥을 같이했으나, 이후 제3기에는 미군정과 당국의 문화정책 및 사대주의적 극우파를 신랄히 비판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제3기는 미군정과 관계당국이 좌익계열의 모든 단체들을 비합법 단체로 규정한 1947년 8월 15일부터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 1년간이다. 이때 문련뿐 아니라 민주주의 민족전선 산하의 모든 정당·사회단체·음악단체가 불법화되었는데, 음악단으로는 국악원·조선가극동맹·대중음악가협회, 그리고 음악동맹이 해당된다. 음악동맹을 제외한 다른 단체들은 자체 조직 개편으로 변화된 상황에 대응했지만, 음악동맹의 김순남 등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는 월북한 후 북한에서도 1953년 '반동예술인'으로 몰려 숙청되어 악보 그리는 작업으로 연명하다가 1986년 타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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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1948년 이후의 상황은 대략 제1기 정부수립부터 휴전까지(1948~53), 제2기 휴전부터 5·16군사정변까지(1953~61), 제3기 5·16군사정변부터 제5공화국까지(1961~87), 제4기 6·29선언 이후 현재까지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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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수립되었다고는 하나 식민지적 상황으로 인해 국가 건설에 필수적인 경제기반이 붕괴된 상태에서, 사상대립으로 인한 치명적인 혼란과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겹치면서 문화·예술이 뿌리를 내릴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전쟁을 겪는 동안에는 예술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 역시 빈곤과 공포 속에 떨어야 했고, 본래의 예술과는 구별되는 선동·선전 기능의 수행이 그나마 공식적인 활동의 거의 전부를 차지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예술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반일을 내세우면서도 인력부족 등을 이유로 친일적 요소가 철저하게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의 대중문화가 밀려들자 주체적인 민족문화의 건설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휴전협정은 또 하나의 단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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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휴전을 맞이했으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좀처럼 복구되기 어려웠다. 더구나 국가안보를 명목으로 국가권력을 1인 내지 1당 독재체제 아래 영속시키려는 부정·부패는 민족정기를 더욱 흐리게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도 끈질긴 예술적 노력들은 적지 않은 성과와 새로운 시도들을 낳았다. 우선 특징적인 것은 전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실존주의에 의지한 예술적 산물들이 특히 문학분야를 중심으로 하여 큰 흔적을 남긴 것이다. 이들 작품은 대개 전후의 정신적·물질적 폐허 앞에서 인간조건으로서의 삶과 죽음, 그리고 생존의 근거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으며, 나름대로 휴머니즘에 입각한 답변을 시도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들로는 손창섭의 〈혈서〉, 장용학의 〈요한시집〉·〈원형의 전설〉, 선우휘의 〈불꽃〉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점차 문화적으로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영향권 안에 편입됨으로써 유학 등의 정보유입을 통해 당대 서구 모더니즘 예술사조들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미술분야에서 이제까지의 구상적 아카데미즘의 고루한 양식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나타난 1950년대말의 앵포르멜 운동은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예술작품들은 자칫 현실과는 유리된 상태에서 고전적인 미학원리의 중심개념인 독특한 쾌(快)로서의 미를 추구하는 것이 예술의 전부인 듯한 태도를 반사적으로 고집하게 하는 역작용도 낳았다. 그리고 대다수의 예술작업들은 전쟁과 계속된 실정으로 인해 고통과 혼란에 빠진 민족성원들이 그 와중에서도 지켜나가야 할 진정한 가치를 충분히 공유할 수 있게 해주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다만 그러한 정황에서도 〈사상계〉(1953. 4)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지식인들의 비판적 노력과 실존주의 예술경향을 계승한 사회 고발적인 예술산물들의 성과들에 대해서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좌절과 체념, 그리고 실의에 빠져 있던 민족성원들에게 1960년의 4·19혁명은 분명 하나의 돌파구였다. 이를 계기로 타성에 젖어 있던 기성세대 역시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를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동시에 민족의 장래에 대해 어떤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참여를 감행했으면서도 결코 현실정치의 담당 세력일 수는 없는 학생들의 한계가 정치적인 군부세력에 의해 가시화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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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헌정질서는 중단되고 대한민국은 군사독재라는 또 하나의 암초에 올라앉고 말았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극심한 민생고의 시급한 해결을 표방하고 나선 군사정권은 이른바 근대화를 위한 개발독재를 강력히 추진해갔다. 이러한 정책은 공과를 불문하고 우리 삶의 양태를 크게 변화시켰다. 아직도 유교적인 전통의 잔재가 사라지지 않고 있던 우리의 삶의 양식은 농촌의 파괴와 도시화, 특히 도시주변에서의 빈민 거주지역의 증대, 공업의 발달과 유흥사업의 번창, 도시의 아파트군들의 성립과 새로운 소비문화적 생활양식의 정착, 대중문화의 막대한 보급과 발전 등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산업화를 뒷받침하는 서구화와 이와는 좀처럼 양립하기 힘든 민족 주체성의 확립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보려는 시도는 정부의 입장에서건 민간의 입장에서건 그리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의 문화정책은 이 과정에서 대체로 관주도적인 양태로 지속되었다. 이러한 관주도의 양태는 이미 5·16군사정변 이후 포고령을 통해 모든 문화·예술 단체를 해체시키고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맹(1962. 1)을 결성하도록 한 것을 비롯하여 이후 민족성현을 기리기 위한 조각물들이나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국가의 문화정책과 동일시한다거나 심지어 국전에 새마을부를 설치하고, 새마을 영화·연극을 권장하며, 음반에 건전가요를 삽입하게 하는 등의 활동양식에서도 더욱 분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활동양식은 민간부문으로부터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시기를 통상적인 구분에 따라 1960, 1970, 1980년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960년대의 경우 문화예술 영역에서의 새로운 특질은 한편으로는 4·19혁명이 북돋아준 희망을 계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리얼리티와 감수성을 반영하려 한 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순수·참여 논쟁이야말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사건이었다. 이 논쟁은 결국 가까이는 해방공간, 멀리는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는 예술과 사회참여의 문제를 변화하는 1960년대의 상황에 맞추어 다시금 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적인 논지는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찬 현실상황에 문학과 예술이 보다 적극적으로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문학과 예술은 상식적인 인간통찰이나 파악으로서 사회현실에 참여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주장 사이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비록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김수영)라는 범상치 않은 통찰이 제기되기까지 했지만, 논쟁 자체는 더이상 심도 있게 전개되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동시에 이 시기부터 한글세대라고 통칭되는 신세대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세대들의 경험을 표출해낼 수 있었던 것 역시 특기할 만하다. 문학 분야에서의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무진기행〉 같은 작품들이나 미술에서의 추상표현주의 양식의 대두, 무용 분야에서의 현대무용의 적극적인 도입, 연극 분야에서의 부조리극 소개 등의 현상은 이를 말해준다.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 1960년대의 추세는 그 윤곽이 더욱 뚜렷해진다. 경제성장의 성과와 후유증이 점차 명확해지면서 한편으로는 문학과 예술은 사회의 모순과 갈등에 주목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경향과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하는 삶의 리얼리티를 예술이라는 매체의 가능과 한계에 입각하여 더욱 심도 있게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서로 공존하면서 우리 문화의 두께를 더했다.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특히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대중매체의 급속한 보급을 통해 막대한 양의 대중문화 산물들이 분출됨으로써 문화예술의 상업성이 증대되는가 하면, '청년문화'로 불리는 청소년 중심의 대중사회적 하위문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에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1960년대 후반에 창간되었지만 이 시기부터 적극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창작과 비평〉과 1970년대에 창간된 〈문학과 지성〉 등 두 계간지의 역할이었다. 이들은 1960년대의 순수·참여 논의를 한 차원 넘어서서 문화와 예술이 사회적 삶의 총체와 연관된 것임을 주장하고 실제로 그러한 편집을 고수함으로써 사회적 삶에 대한 예술문화의 대응력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탈춤보급운동에서 출발하여 마당극 또는 민족극으로 불리는 새로운 매체양식을 창출해낸 문화운동도 주목할 만하다.
이 시기의 성과물로는 우선 김지하의 〈오적〉으로 대표되는 저항시들, 황석영의 〈객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으로 대표되는 현실의 모순과 갈등을 드러낸 작품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장호 감독의 영화 〈별들의 고향〉, 김민기의 대중가요 〈아침이슬〉, 최인호의 소설들에서 엿볼 수 있는 좀더 대중적인 문화 분야의 성과들 역시 특기할 만하다. 동시에 음악·무용·미술 분야에서의 적극적인 현대화의 시도들이나 박경리의 〈토지〉 혹은 여타 분야에서 예술적 심도를 더한 성과들 역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집권세력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1979년 10월 26일 18년간 권좌에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고 이른바 신군부에 의해 정권이 계승되면서 민주화에 대한 희망의 불꽃은 다시 한번 폭풍 앞에 서게 되었다. 신군부에 의한 공포정치는 예술의 무기력함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하는 동시에 예술의 적극적인 무기화를 선언하게 하는 상황을 낳았다. 거의 전예술분야에서 '민족예술' 혹은 '민중예술'이라는 기치 아래 예술의 적극적인 사회적 영향력 행사를 실험하는 운동이 펼쳐졌다. 수많은 노동시·노동소설이 쓰여졌으며, 마당극·현장극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극 운동, 판화나 걸개그림으로 대표되는 민족 미술운동, 운동가요의 보급으로 대표되는 노래운동, 또 무용에서의 새로운 흐름들이 연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좀더 장기적인 예술문화의 증진과 자체단련을 꾀하는 흐름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의 과실에 힘입어 예술 각 분야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들이 나타났다. 연극이나 춤 등의 공연예술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양상은 이전 시기와 비교할 때 폭발적이라 할 정도의 공연의 증가와 관객증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기반이 잡혀 있던 미술·음악 분야에서도 전시와 음악회의 폭발적인 증대현상이 나타났음은 마찬가지이다. 또한 유학이나 상호 방문 공연 등의 행사를 통한 국제적인 정보교류의 증대는 각 영역에서 날로 변화하는 현대 사회의 생활양식에 대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예술의 토대 마련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여러 가지 굴곡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의 대한민국 위상의 고양은 우리의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고취했고, 맹목적이었던 서구 추종의 양태를 좀더 주체적인 대응의 양상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음악 분야에서 국악보급운동이라든가 춤 분야에서 해외공연의 증대 등의 현상이 이를 입증한다.
1987년 6월 29일 드디어 이른바 6·29선언이 이루어지고, 사회 각 분야와 함께 예술도 이제까지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시기를 또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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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선언 이후 출판부문에서는 출판사 등록 전면 개방(1987. 10. 19)을 비롯하여 판금도서해제(1987. 10. 19, 650종의 판금대상 중 431종 해제), 출판사 등록 절차 개선과 간행물 납본제도 개선(1988. 7. 30), 월북작가의 작품 출판과 공산권자료개방(1988~)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공연예술 부문에서는 금지가요해제(1987. 8. 18)를 비롯하여 동구권·미수교국 예술작품 국내개방(1988. 6), 월북음악가의 곡 해제(1988. 10. 27), 공연법시행령개정(1989. 1. 1)으로 인한 공연물 대본의 사전심의제 폐지 등의 조치가 있었다.
6·29선언은 집권세력의 자기 정당화를 위한 전시성 행사라고 해석되면서 국민 일부로부터 '당신들의 축제'라는 빈축을 샀던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에 대한 문화·예술인들의 참여를 자발적인 방향으로 돌려놓았고, 개·폐회식의 성공은 국제화 시대에 대비한 한국 문화·예술인들의 자기확인에 크게 기여했다. 개별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적인 보편성에 호소할 수 있는 문화발전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더구나 1990년 1월 3일 문화정책을 전담하는 독립된 중앙 행정부서인 문화부(1993년 문화체육부로, 1998년 문화관광부로 개칭)가 탄생했다. 그러나 문화창조력의 제고, 문화매개기능의 확충, 국민의 문화 향수기회 확대, 국제문화교류의 증진 등이 포함된 장기 계획이 2차례에 걸쳐 수립, 추진되는 과정에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관주도의 일회성 행사나 전시행정적인 면모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정부당국의 투자의지가 미약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또한 정부가 현대사회에서 가장 주요한 방송매체를 아직도 단지 보도 혹은 홍보 매체로, 더욱이 정권홍보의 매체로 인식함으로써 정보화와 국제화라는 조류에 맞설 수 있는 건전한 대중문화의 창출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어느 정도 정당하다. 공보처라는 중앙행정부서의 독립적 설치가 그와 같은 비판의 근거가 된다. 특히 문화산업 전반에 대한 정책의 미흡과 무관하지 않은 열악한 문화산업은 상업주의적인 발상에서 제작된 외국의 정교한 문화상품들에 대한 종속을 조장함으로써 아직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일제의 잔재 위에 또 다른 폐해가 겹치게 될 위험이 생겨나고 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결과 정권 교체와 함께 닥쳐온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지원체제와 무관하지 않게, 김대중 정권은 문화산업의 기간산업화를 국정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 선언과 함께 획기적인 조치로 인정받고 있으나, 문화적-인간적 가치 영역을 경제적 가치를 재는 척도로 재단할 때 생기는 부작용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 역시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정보화와 세계화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그 나름대로 절실하다. 학계와 예술계를 들끓게 했던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된 논란은 그 한 예가 된다. 여기서는 연극의 경우를 살펴 보기로 한다.
포스트모던 연극의 특징으로 지적되는 사항들에 대한 여러 의견을 요약할 때, 대체로 다음과 같은 6가지 항목이 제시될 수 있다.
① 연극성의 강조, 또는 대본으로부터의 해방 : 본질적 형식이라는 관념들의 거부, 예술작품이라는 자기동일성의 해체, 이미지들의 연극, 존재론적 신경증적 연극, ② 순간적인 우연성의 우위 : 즉흥성·즉각성·독창성·자발성의 강조, 비연극화, 불확실성과 형식적 이중성 철폐, 아버지 연출가로부터의 해방, 흐름, ③ 장소의 자율성 : 극장으로부터의 탈출, 연극과 비연극의 문지방 넘나들기, 사이성, ④ 결과보다는 과정으로서의 작품개념 : 자아반성성의 신장, 메타 연극, 공연 자체에 충실한 연극, 부재의 미학, 상품성의 거부, ⑤ 풍부성의 강조 : 재현이기보다는 제시, 임재의 미학, 불연속성, 서사의 거부, 음향·조명의 역할 강화, 빠른 전환, 해체성, 기호들의 표류, ⑥ 정치적 함의 : 사회적 및 맥락들 안으로 빨려드는 상태, 페미니스트 연극 등이다.
예술 전반에서 목도되는 이른바 해체 현상과도 연결되는 이와 같은 특징들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요소들에 대한 새로운 주목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단순한 '가벼움'의 지나친 노출이라는 현상을 낳기도 하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서구 중심적 현상이라는 지적과 함께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맹목적인 서구 추종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른바 정보화의 추세와 함께 한국에서도 제기된 '허상현실'에 대한 논란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검토는 그 나름대로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포스트콜로니얼리즘에 대한 관심이 차츰 자라나고 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 통치를 경험한 한국의 지식인들로서는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합당한 개념틀로서 받아들일 만하다.
정보화와 세계화에 대한 대비만큼이나 시급한 것이 통일에 대한 대비이다. 물론 통일이라는 과제는 우리가 당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의견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술활동이 정치적인 분위기 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각계의 많은 인사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남 북한의 문화 예술 교류에서 우리가 주도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의식을 묵시적으로나 현시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남 북한의 문화 예술교류에서 대결의식은 그 현실성이 어느 정도 인정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남 북한 간의 문화교류가 진정한 통일문화의 형성을 그 이념으로 설정하는 한 극복되어야 한다. 통일을 지향하는 문화, 또는 통일 이후 민족적 동질성을 확립하기 위한 통일문화란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민족적인 보편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문화'이다. 흔히 전통문화를 통한 민족적 동질성의 회복이 통일문화 형성에 중요한 매개물로 기대되는데, 남 북한이 각각 진행해온 전통문화 연구의 성과 자체를 서로에게 알린다 할지라도, 원형적인 상태의 탐색이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즉 동질성의 회복을 위해 생활문화 영역을 포함하여 전통문화유산을 확인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은 서로 간의 차이를 민족의 현재 및 미래 생활을 위해 가장 바람직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현대 예술의 경우에도 남 북한이 함께 상찬하는 문화, 즉 피지배지 시기에 민족적 양심을 지킨 문화인들의 작품발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원리적으로는 남 북한이 서로 상대편의 이념적인 견고성을 격파하기 위해 자기편의 첨단적인 작품을 강요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견해가 경청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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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혼란기에도 1947년 4월 19일 서윤복 선수가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했고, 그해 여름에 대한 올림픽 위원회가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1948년 런던에서 거행된 제14회 올림픽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스포츠도 침체국면을 맞았고, 국군 4군이 장병의 사기앙양책으로 스포츠를 장려함으로써 명맥이 유지되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제3공화국·제5공화국시대에는 스포츠를 정책적으로 장려하여 많은 실업 팀과 대학 팀이 생겨났으며 고등학교 이하에까지 그 연령층이 확대되었다. 태능선수촌이 생긴 것도 이즈음이었다. 1972년에는 제1회 청소년체육대회가 개최되었고, 특히 제5공화국시대에는 야구·축구·농구·씨름 등의 분야에 프로 팀을 창설하여 스포츠의 열기를 높혔으며, 1986년의 아시아 경기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했다. 이어 1988년의 서울 올림픽에서는 12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여 세계 4위의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1위를 차지하여 베를린 올림픽의 영광을 재현했으며, 종합성적 8위를 기록했다.
이와 같은 스포츠 정책을 위해 정부는 서울 올림픽에 대비하여 한시적으로 만들었던 체육부를 서울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도 오히려 체육·청소년부로 확대하여 존치시키고 있다. 현재의 문화정책과 비교하여 체육행정에 대한 공공투자가 과다하다는 견해도 있고, 지나치게 인재 중심으로 치중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사회체육을 위한 정책추진이 촉구되기도 한다. 특히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여 체육과 문화를 위한 지역주민 센터를 하나의 복합건물로서 계획하는 등의 대안도 검토될 만하다. 특히 청소년을 위한 정책은 협력체계망의 구축을 통해 계획·실시·평가될 만하다는 점에서 유관부처 간의 공동보조가 절실히 요청된다고 볼 수 있다.
金文煥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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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할일 대게 엄따..근데요...영어공부함..작문시간에 이런거 쓰라고 합니다. 여기서 추려서 쓰세요.
울 딸 보고 읽어 보랬더니 줄행랑~~~~
애덜이 읽기엔 좀 길고 지루하죠...
사회나 지리시험 다 지나갔다는 게 행복하네요. ㅋㅋ
숀님, 가끔씩 정말 정말 엉뚱해요. 킥킥... 다 읽으려다가 빠르게 마우스를 옮겼습니다. 근데 왜 이 글을 올리셨는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마음이 많이 복잡하신가봐요.
다른곳 소개했는 데...한국도 제대로 모르면서..다른 곳 소개하니깐 욱끼잖아요...
읽다가 포기 했어여.
허걱... 우리나라 만세... 호주보다 10배는 더 되겠는데요...ㅍㅎㅎㅎ
아! 잠 안 올 때 읽어야겠어요. 숀님 정말 대단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