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못 성지 1- 갈인연과 안 다블뤼 주교님 
이 달은 순교성월입니다. 순교 성월을 그냥 보낼 수 없어 짧은 성지순례를 하기로 했습니다. 갈매못과 해미 성지를 들리기로 했습니다. 먼저 찾은 곳이 갈매못입니다. 제가 2 년 전에 갈매못에 성지순례를 하고 와서 갈매못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올렸습니다마는 다시 이번에 찍은 사진과 더불어 나눕니다. 
첫번째로 안 다블뤼 주교님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한국 천주교회가 외국인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진리를 찾다가 신앙을 받아들인 유례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동료 순교자들 중에 외국인 선교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103 위 순교 성인 중에 외국인 선교사가 10 분입니다. 저도 2 년 전까지는 늘 특이한 교회 창립역사나 김대건 신부님이나 정하상 바오로에 대해 주로 강론을 하였지만 외국인 선교사를 언급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2 년 전에 갈매못 성지 순례 후에 외국인 선교사 중에서 안 주교님과 다른 2 분의 선교사을 소개하는 글을 쓰게 되었었지요. 
갈매못은 원래 갈마연이라는 말에서 연유된 명칭이라고 합니다. 갈마연은 풀이하면 목마른 말에게 물을 먹이는 연못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충청 수청이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까 갈증을 느끼는 말들이 목을 축이면서 쉬어가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갈마연이 이제는 순교자들의 얼이 영원한 생명의 샘이 되어, 그들의 신앙을 기리고 본받으려는 순례자들에게 영적인 생명의 물을 퍼주는 갈인연, 갈증을 느끼는 우리 인간에게 목을 축여주는 연못이 되었습니다. 실상 말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도 갈증을 느끼며 목을 축여줄 물을 갈망합니다. 영혼이 갈증을 느끼는 것이지요.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제가 ‘영혼의 쉼터’를 마련하려는 거고요. 갈매못은 달리 표현하면 갈인연, 인간의 갈증을 풀어주는 연못이 될 수 있습니다.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는 생명의 물이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모두 사마리아 여인처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찾습니다. 갈인연, 사람의 갈증을 축여주는 생명의 물이 있는 곳이 바로 갈매못입니다. 
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 해안가에 있는 이 순교 성지는 바다를 접하고 있어 가장 아름다운 성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도소리가 순교자들의 참수의 아픔을 달래주듯 철석거리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요한, 4, 14)” 우리 모두가 갈증을 느껴 물을 길러 나왔던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우리 모두는 목말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고자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물을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갈매못에서는 순교자들의 얼을 통해, 그들의 갈증을 채워주던 그 순수한 신앙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십니다. 여러분들도 갈인연, 사람의 갈증을 축여주는 생명의 물이 있는 갈매못으로 가서 그 물을 드시기 바랍니다. 
갈매못은 이름 모를 수많은 순교자(대략 500 명으로 추산합니다.)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지만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민 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회장 등 다섯 명의 성인이 같은 날 참수를 당한 곳으로 잘 알려진 성지입니다. 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 안 주교님은 조선 교구 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장 주교님이 순교를 당하자 후임으로 1866년 3월 7일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던 분입니다. 주교 임명 4일 만인 3월 11일에 당시 그의 복사 역할을 했던 황석두 루카 회장님과 함께 주 사목 활동지였던 내포 지방에서 체포됐습니다. 다블뤼 안 주교님은 대원군과 만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합니다. 사실 대원군이 먼저 찾았는데, 바쁘게 공소에 다니느라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대원군은 이미 화가 날대로 났던 후였고요. 이런 일이 있던 이후에 박해가 심해졌습니다. 병인박해이지요. 다블뤼 주교님은 당신 자신이 대박해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보고,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마구 잡혀 처형되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한 뒤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후 붙잡혔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도 거의 자진하다시피 하여 잡혀 서울로 압송됐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250여 리 떨어진 보령수영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들 네 명은 갈매못으로 향하게 됩니다. 서울에서 장장 250리 죽음으로 가는 긴 여정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이었던 장주기 회장님이 합세하며 모두 5명이 함께 순교의 여정을 걸었습니다. 
안 다블뤼 주교님 성상 특별히 안 다블뤼 주교님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저는 그분에 대해 알게 되면서 온전히 그분에게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1845년 10월, 한국에 입국한 이래 주로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사목활동 중에도 한국 순교사와 교회사 자료 수집에 열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블뤼 주교의 "한국 순교 비망기"(備忘記)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1863년 주교님의 거처에 화재가 발생하여 오랫동안 수집해 놓았던 귀중한 자료들이 타 버리고 말았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은 다블뤼 안 주교님이 그 전에 이미 순교사와 교회사를 나름대로 정리한 비망기를 프랑스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순교 ‘비망기’가 남았고 순교사 연구에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된 것입니다. 다블뤼 안 주교님은 앞서 언급한 "조선 순교자 비망기" 뿐만 아니라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긴 사목자이면서 학자이기도 한 분입니다. 
그는 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와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헌신적으로 사목할 뿐만 아니라 귀중한 자료 수집과 집필 활동을 쉬지 않고 했던 분입니다. 그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음식이 맞을 리 없으니,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무척 심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탁월한 언어 감각과 언변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말을 제대로 배워 아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또 나중에는 보신탕도 즐길 정도로 적응을 잘 하였고, 선교사 중에 가장 한국적인 분이었고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서품 후 배를 타고 입국하려다가 먼저 도착한 곳이 제주도 용수입니다. 지금 용수성지에는 김대건 신부님 일행 표착 기념관과 성당이 있습니다. 그때 당시 신부였던 다블뤼 주교님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한 것이지요. 그 후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사목하시다가 마침내는 순교를 당하신 것입니다. 다블뤼 안 주교님은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당할 때도 너무나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안 다블뤼 주교님 성상 뒷모습 유럽 명문가에서 세상적으로 최고의 삶을 살 수 있고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신부가 되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나라, 한 번 가면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나라, 미지의 나라, 조선이라는 곳으로 자진해서 선교를 떠난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 바보, 다블뤼 안 주교님. 그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바보이지만 이 세상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보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 이것이 바로 다블뤼 안 신부님의 좌우명입니다. 그는 그가 보내는 모든 편지의 서두에 이 말을 썼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가 ‘+ 그리스도의 평화’ 라고 쓰듯이 보내는 모든 편지에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고 썼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지닌 것에 대한 자부심, 행복감이 충만했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안 다블뤼 주교님 성상 옆모습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당할 때, 배교하라는 관리에게 너무나 유창한 한국말로 심문에 반박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치려고 하자, 화가 난 관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훨씬 더 심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은 아주 의연하게 고통을 감내하면서 자기가 지닌 모든 것, 바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거한 것입니다. 
저는 주교님의 순교 정신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적인 열정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언자적인 식견도 지니고 있던 분입니다. 훗날 한국교회에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중요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전의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수집을 하여 비망록을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유명한 [조선 순교자 비망기]입니다. 이 책은 병인박해 이전의 박해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록한 한국교회사에서 아주 귀중한 자료입니다. 
기념관 뒷면 그는 풍토병이라고 할 수 있는 위장병과 신경통을 앓았지만 밤에는 공소들을 방문하여, 교우들을 만나고, 돌아다니기 위험한 낮에는 집필 등의 학문 연구에 매진한 열정을 지닌 사목자이며 학자였습니다. 탁월한 언어 감각과 언변을 지니고 있었던 다블뤼 주교님, 놀라운 열정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신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던 그분을 만나는 모든 교우들은 탄복을 금치 못했습니다. 교우들과 어울리기 위해 기꺼이 보신탕을 함께 먹던 가장 한국적인 선교사로 알려진 다블뤼 주교님. 그는 단순히 예수님을 지닌 분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작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체포되기 직전에 동료인 만주 교구장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냈습니다. 1866년 3월 10일자 서한입니다. 이 서한에서 순교를 앞둔 주교님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내 차례도 올 것이니, 제가 싸움터에서 견디어 낼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순교의 현장에서 그날의 장면을 떠올려 보게 됩니다. 3월 30일 수난주일 충청 수사(水使) 앞에서 배교를 거부한 다블뤼 안 주교님이 먼저 칼을 받았고, 이어 오매트로 오 신부님, 위앵 민 신부님, 황석두 루가 회장님, 장주기 요셉 회장님이 차례로 치명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다블뤼 안 주교님은 조선에 입국한 지 21년이 되고, 전임 베르뇌 장 주교님을 도와 9년간 부주교직에 있다가 조선교구의 제 5대 교구장이 된지 불과 21일 되는 날이었습니다. 
기념관 색유리 다블뤼 안 주교님 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이 서울을 떠나 수영에 도착한 때는 성주간이었답니다. 참수를 당한 순교일은 3월 30일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님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답니다. 그런데 마침 이날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으므로 안 다블뤼 주교님은 그들에게 당일 사형집행을 청하였고, 이 청이 받아들여져서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순교자들의 처형장소는 바닷가였습니다. 당시 순교 장면의 목격자의 한 사람인 이 힐라리오가 기록을 남겼습니다.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 안 다블뤼 주교님의 그 때 나이는 49세였습니다. 예수님보다 16 년을 더 사시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 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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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새록 새록...감동이에요
감사드려요....
가보고싶어 지는곳입니다 록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