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성출현 |
금성 낮출현 |
혜성, 객성 |
일변 |
유색천기 |
해, 달 무리 |
지진 |
뇌전 |
대풍 |
해일 |
합계 |
3064 |
4572 |
895 |
255 |
857 |
5231 |
1416 |
1914 |
770 |
104 | |
우박 |
서리 |
때아닌 눈비 |
유색 눈비 |
안개 |
난동무빙 |
수재 |
한재 |
충재 |
전염병 |
25201 |
1861 |
772 |
482 |
48 |
424 |
54 |
1062 |
536 |
402 |
532 |
위의 표를 필자의 주장에 따라 시기별로 분할하면 다음과 같다.
시 기 순 |
해 당 연 도 |
총 건 수 |
제 1 기 |
1392-1450 |
1,840 |
제 2 기 |
1451-1500 |
1,421 |
제 3 기 |
1501-1550 |
6,010 |
제 4 기 |
1551-1600 |
4,312 |
제 5 기 |
1601-1650 |
3,670 |
제 6 기 |
1651-1700 |
3,977 |
제 7 기 |
1701-1750 |
2,832 |
제 8 기 |
1751-1800 |
790 |
제 9 기 |
1801-1863 |
349 |
필자는 위의 표를 근거로 하여 관련 기록들이 1500년부터 1750년까지의 기간에 집중되어 있음에 주목하였다. 이는 전체 건수에 비해 필자가 제시한 제3기~제7기의 기간이 82.5%차지하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필자는 자신이 제시한 대부분의 현상들이 소빙기 현상과 관련된 것이며, 따라서 이 분포상태는 소빙기의 실재를 확인시켜 줄뿐더러 소빙기의 이상현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도 알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 과정에서 각 시기간 기록의 심한 편차를 실록 기록 자체의 부정확성으로 의심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기록의 빈도가 떨어지는 제2기와 제8기 등은 조선왕조 일대 중 가장 안정된 시기로 실록 자체의 충실도도 높게 평가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실록의 천변재이에 대한 기록은 역성혁명 직후와 같은 정치적 불안정기를 제외하면 기록 자체가 거의 일지처럼 되어있기 때문에 기록의 조작이나 과장 같은 것은 상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때문에 소빙기에 본격적으로 접어든 이후에서는 기록이 너무나 사실성이 높기 때문에 어떤 의심도 개입시키기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위와 같은 자료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천변재이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다량의 유성 출현, 운석의 낙하로 파악하였다. 당시의 기록을 제시하며 필자가 제시한 시기에서 유성과 운석이 다량으로 발견되었으며, 그것의 기록이 현재에 비해서 상당히 구체적인 점을 예로 들며 현재와 다른 당시 상황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천문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혜성의 잦은 출현에 따른 소운석(혜성의 잔해)의 지구낙하와 이에 따른 뇌전과 대풍의 발생 등을 증명하려 노력하였다.
필자는 결국, 실록자료를 중심으로 한 소빙기 원인을 혜성 출현의 증가, 이에 따른 유성의 다량 출현, 객성 및 소혹성 등의 태양계 및 지구 대기권에로의 돌입 등 천체운행상의 특수한 조건이 근본원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필자는 지구가 큰 규모의 한 隕石群을 만나 통과하는데 약 250년이 소요되었고, 그 기간에 지구는 각종 기상이변 속에 한냉화 이상 기온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빙기 현상의 실체였던 것이다.
Ⅲ. 소빙기 세계사의 새로운 소묘 전망
필자는 소빙기 세계사를 거론하기에 앞서 조선왕조실록에 소빙기 관련기록이 충실하게 남은 것은 유교정치사상의 독특한 天道觀에서 비롯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유교의 王政은 하늘의 큰 덕 즉 천도를 “생명이 있는 것을 살아가게 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만민을 다스리는 왕은 이를 본받아 실천하는 것을 대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규범화 했다. 그리고 천변재이가 발생하면 그것은 곧 하늘이 왕의 처세에 어떤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譴告라고 풀이하여 왕은 이에 대해 “恐懼脩省”하는 자세로 자신의 정치를 더욱 근면히 해야 한다고 규율하였다. 이러한 정치사상은 天譴에 대한 관찰 자체를 소홀히 할 수 없게 했으며 관찰을 열심히 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 자체가 脩省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중국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그 기록이 충실하게 전해지지 않았다. 하나는 명대 이후 황제권의 절대적 전제화로 실록의 기록이 부실해진 점, 다른 하나는 명·청 교체로 인한 관측과 기록 전수를 부실하게 만든 점 등이다.
또 기독교 문명권은 기록의 부재로 더 이상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 않고 있다. 기독교 문명권에서 소빙기를 증명하는 수단으로는 ‘마녀사냥’에 대한 연구를 통한 방법론을 사용하였다. 기독교 문명권에서는 ‘마녀’를 악마의 사주를 받는 존재로 인식하여 당시 횡횡했던 우박, 서리, 때 아닌 눈, 강풍, 홍수 등의 재난을 그들의 소행으로 돌려 ‘마녀사냥’을 진행하였다. 마녀사냥은 예로부터 꾸준히 있어 왔지만, 소빙기라 추정되는 1580년에서 1670년 사이에 절정에 다다랐다. 이는 15세기 말(1480년대)부터 시작하여 1750년대에 잦아들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마녀사냥의 시작과 끝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되는 소빙기의 시작과 끝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추론해보면 기독교문명권 역시 조선과 거의 같은 시기에 소빙기를 겪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소빙기의 천변재이에 대한 각 문명권의 반응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소빙기의 기온강하로 극지에 빙하가 늘어남으로써 적도대에서는 해수량의 감소에 따라 강우량이 급격히 줄어 심한 한발이 연속되는 기후적 특성을 보였다고 한다. 격심한 한발은 폐농, 기근, 전염병으로 이어져 인구 감소와 도시의 황폐화를 수반하였다. 남미의 마야문명의 멸망도 시기적으로는 소빙기와 일치한다. 이 문명이 소재하고 있는 고산지역은 소빙기의 한냉화 현상 속에서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 틀림없다.
소빙기 현상의 실재와 그 원인에 대한 해명은 앞으로 세계사의 여러 의혹들을 풀어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 기대된다. 소빙기 현상은 그 자체로서는 큰 재난이었지만 재난에 대한 인간의 비상적인 대응은 새로운 역사를 여는 힘을 새로이 생성시키고 있었다.
소빙기를 통한 세계 각지문명의 비교 고찰은 global history의 가능성을 담보해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기후 결정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역사적 흐름을 타고 그를 증폭시켜 역사가 새로운 페이지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길 바랄 뿐이라고 주장했다.
맺음말
이태진 교수의 “「소빙기(1500-1750) 천변재이 연구와 ≪조선왕조실록≫」-global history의 한 장-”(이하 ‘소빙기 연구’로 통일)을 선택한 이유는 평소 자연재해와 역사연구 와의 관련적 특성을 관심 있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역사라는 장면이 생겨날 때에는 당시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이 무엇보다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 동안의 역사연구에서는 당시의 자연상황이나 민간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학도로서 이태진 교수의 ‘소빙기 연구’가 큰 관심거리로 다가왔다. 역사를 해석할 때에는 물론 당시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방법을 제외하고 가장 좋은 방법은 역사적 장면이 이루어질 당시의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모두 파악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왔다. 이런 개인적 관심사에 부합한 논문을 읽게 되어 반갑기도 하고 영광이기도 한 느낌이 든다.
이태진 교수의 ‘소빙기 연구’는 그 동안 진행되지 않았던 역사연구 방법론의 새로운 틀을 제시하여 주었다고 본다. 물론, 그의 연구 성과에 문제가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한 가지 사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시각으로 보게 될수록, 당시와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기에 상당히 반가운 연구이다. 게다가 그의 연구의 근간이 된 것이 대한민국의 자랑거리중 하나인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점은 한국인으로서 더더욱 기쁘게 다가온다. 이 논문을 읽으면서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대단한 사료이며, 그것이 이후에도 어떤 방법으로 어떤 연구자에게 연구될지 상상만 하여도 기쁜 마음이다. 해외에 우리의 것을 자랑스레 알릴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태진 교수의 연구결과를 한 가지 더 칭찬하자면, 더 이상 외국의 방법에 의지하지 않는 그의 연구정신을 들 수가 있겠다. 물론 그가 이 연구를 시작한 계기는 (논문에서도 밝혔듯이) 외국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한 것이지만, 이후의 연구에서는 외국의 것을 답습하지 않고 그만의 방식과 그만의 논조로 한결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이태진 교수가 국내외에서 이미 유명한 역사학자이더라도, 이러한 연구 자세는 후대에도 큰 귀감이 될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반면, 이 논문에는 반박해야할만한 부분도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의견과 상당히 비슷한 박성래 교수의 토론문에 주목하였다. 박성래 교수는 “이태진 교수의 「소빙기(1500-1750)의 천체 현상적 원인-≪조선왕조실록≫」의 관련 기록 분석”에서 그의 연구성과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계기로 봄과 동시에 비판하고 있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연구 결과자체에 대한 의심이다. 박성래 교수는 이태진 교수가 근거로 제시하였던 조선왕조실록의 이상현상 기록 자체를 의심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이상현상기록이라 가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운석의 충돌과 바로 연계시킬수 있는지는 확신할수 없다고 밝혓다. 이태진 교수가 제시한 시점의 실록은 붕당정치로 인한 당파싸움이 잦은 시기였기 때문에 이 시기 재이가 증가한 것으로 해석할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정치적 관점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볼 경우, 반대편 당파의 집권을 반대하기 위한 증거로 재이기록의 등재수를 늘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태진 교수의 연구 결과를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이것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1)실록의 기록이 자연현상뿐만의 기록임을 증명할 것, 2)외국의 기록에 대한 연구가 더욱 진행되어 이태진 교수의 이론을 뒷받침 해줄 것을 전제로 삼았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이태진 교수의 주장이 타당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나의 생각도 박성래 교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태진 교수의 연구 성과는 충분히 인정해야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사실이라 가정한다 하더라도 )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수많은 재이 기록들을 곧바로 운석과 지구의 충돌로 이어버리기에는 그 사이에 빠진 무엇인가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흡사 ‘논리의 비약’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조금은 무리하게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위에서 제시한 것 같은 한계점을 지니고 있지만, 이태진 교수의 ‘소빙기 연구’는 맺음말에서 처음 밝힌 것과 같이 많은 가능성 또한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역사연구 방법론에서 거시사적 연구방법에서 미시사적 연구방법으로의 전환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여기에 이태진 교수의 시각처럼 자연사적 연구방법, 또는 환경론적 연구방법이 첨가된다면 더욱 다양한 각도와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볼 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