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분단과 반분단의 시초 ②
섣달 그믐날 우리 연계소 집에는 아지매-할매들이 그런대로 많이 모였다. 뒷집 할매와 그 아랫대 며느리 두 집 중산 할매와 도동 할매, 그리고 우리 할매와 우리어머니에다 친정집으로 오신 활천 할매이다. 대소가가 모두 모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연계소 고향집에 모여서 제수를 차리고 더러 왁작 웃음꽃이 피어나는 설맞이는 아마 이 해 설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 제사는 허례를 안 한다. 그래서 차림이 매유 소박하다. 물론 집이 가난한 탓도 있지만, 떡도 사다가 쓰고 그 양도 제관이나 그날 모인 일가 여자들이 다 푸짐하게 먹을 정도만 장만했다. 그래도 이웃 음복의 세 집은 빠지지 않았다. ‘끝난 네’ 집은, 객사체와 큰대문이 남의 집으로 되어 우리와 이제는 담을 함께 하는 이웃은 아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음복 음식은 건넨다. ‘수식이네’ 집, 그리고 ‘재홍이네’ 집, 이 세 집은 우리가 연계소를 떠날 때까지는 이웃으로 늘 음복음식을 건네고 있었다.(주1) 지짐을 굽고 생선을 굽으며 기름 냄새가 오랜만에 온 집안에 퍼지고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집안에 넘쳐났다. 1948년을 맞는, 분단과 반분단이 판가리가 시작되는 그 엄중한 시대의 설날이기는 하지만. 신년제사는 할아버지가 안 계셔서 집안의 장손인 내가 제주가 되어 신년차사를 지냈다. 지방은 아재가 그 정갈한 필체로 이미 써 놓았다. 제사는 윗대 양 대와 아랫대 양 대로 나누어 차려서 두 번을 지냈다. 제관으로는 뒷집 할배가 중산 할배와 도동 할배 두 형제분을 거느리시고 오셨다. 그리고 나와 나의 숙부였다. 설 차례를 마치자 어머니와 나는 곧 구지로 가야 하지만, 그 이튿날 교동 고모도 보아야 했고, 그곳에서는 가장 어른이신 뒷집 할아버지께 가서 한나절 보내야 하기에 하루를 더 재끼고 3일에는 떠나야 했다. 그 초이튿날 어머니와 나는 터실에 계시는 뒷집 할배 집으로 갔다. 도동 할매가 차려주시는 설빔을 맛있게 먹고 나는 도동 할배의 치과 진료실에 가서 도동 할배로부터 주로 밀양의 정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도동 할배는, 그 탄압을 무릅쓰고 밀양의 애국역량은 건실하게 활동 중이라고 했으며, 이때껏 극우반동으로 치부했던 밀양의 「한국독립당」 인사들은 분단을 반대한다는 같은 입장으로써 모든 운동에서 함께 하며 밀양에서는 「민전」 조직과 결합되고 있다고 했다.(주2) 그리고 도동 할아버지는 이제 정세가 갈수록 엄중해지고 있어서 조직이 무장을 해야 할 시기가 되었고 이에 대한 문제를 토론하고 있으며 그 준비를 해야 한다는 공감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나는 거기에 대한 말은 삼갔지만 눈으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는 뒷집 할배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어머니를 보고 “엄마, 내일은 구지로 가실 거야?” 라고 했더니, “오냐, 그렇게 해야지.” 라고 대답했다. “그럼 나는 먼저 나가 여기 동무들을 좀 만나고 집으로 갈께. 좀 늦을 꺼야. 통금 전에는 돌아갈게.” 라고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 길로 강성호의 집으로 갔다. 강성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다가 결핵을 앓는 강성호에게는 감기가 가장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호에게 말했다. “성호야, 바깥 날씨가 너에게는 좀 추울 듯 한데, 감기를 조심해야지. 우리 밖에 나가지 말고 여기 네 방에서 이야기하자.” 그리고 그날은 성호의 방에서 오래도록 이야기 했다. 강성호는 그가 파악한 정세를 말했고 나는 주로 듣기만 하고 질문하는 편이이었다. 나는 구지에 있는 동안 그저 신문이나 방송으로 받은 파악만 있을 뿐 조직적인 파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 둘이 파악한 결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미제와 그 앞잡이 이승만과 친일반역자, 친미사대의 일당은 「미・소공위」를 파탄시킨 다음 남조선단독정권을 세우기 위하여, 분단을 반대하는 반분단 민주세력을 꺾어놓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미・소공위」가 성공적으로 결속 지어 남북이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갈라놓고 남조선을 강점하고 있는 미 점령군은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38선 이남을 그들의 새로운 형식의 식민지, 즉 신식민지로서 그들 통치의 대리정권을 세우고 대리정권으로 하여금 조국의 이남을 거머쥐려고 하는 미제의 욕망은 끝나고 마는 것이다. 총을 쥐고 들어온 제국주의자로서는 그 본질상 이런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미제는 「모스크바 3상회의결정」을 파탄내고 그들이 강점한 남조선에다 미제를 종주국으로 하는 예속국으로 만들어 놓으려고 예속정권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군정통치를 하면서 일제 식민지시대의 친일역적과 새로 나온 친미사대주의 세력을 결합시켜 행정-경찰기구로서 그 예속정권의 기초를 이미 군정청으로써 만들어 놓고 있다. 이것을 토대로 하여 미제는 조국의 38도선 이남을 전후 식민지통치의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신식민지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러한 미제의 가장 유력한 방해꾼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그것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에 일제의 식민지잔재를 청산하고, 그 토대 위에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평등한 민주주의의 나라를 만들자고 주창하고 있는, 민족해방 민주주의혁명의 세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미제는 지난해 일차「미・소공위」파탄의 결과 일어난 「10월인민항쟁」으로 그들의 군정통치에 엄청난 파탄을 겪은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선수를 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전에 모략적으로 먼저, ‘좌익이 「8.15 2주년기념식」을 계기로 폭동계획을 하고 있다.’고 퍼뜨렸다. 그리고 바로 미제와 그 하수인인 군정청은 8월 10일부터 대대적으로 예비 검속한다면서 일제식민지 통치체제와 열렬히 투쟁해온 민족민주인사들을 채포하고, 지방에서는 서북청년단으로 하여금 테러로써 민주세력의 핵심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남로당」과 「민전」에서 「8.15 2주년기념식」을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를 빌미로 미군정은 이를 폭동계획이라고 선전했다. 미군정은 민정장관 안재홍으로 하여금 행정명령 5호를 발동하도록 명령했는데, 모든 「8.15기념행사」는 행정관서가 주관하고 그 허가는 ‘옥내집회’로만 하도록 하여 남조선의 모든 행정기관과 정당사회단체에 그 5호 명령을 발송했다. 「남로당」과 「민전」은 「8.15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해서, 미제에게 민중의 총의로서 「미・소공위」의 파탄을 항의하는 운동으로 되도록 해서 「미・소공위」에서 피동에 몰린 미제를 더욱더 궁지에 빠지도록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행정명령 5호 때문에 도리어 큰 타격만 입게 되고 말았다. 이리 하여 민전과 그 산하의 단체들은 행정명령 5호의 철회를 요구하고 집회의 자유를 요구한다는 담화와 성명을 잇대어 발표했다. 「남로당」은 행정명령 5호로 해서 생긴 새로운 정세를 타개할 아무런 조치도 없이, 다만 ‘지방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실시하라.’, ‘공위에서 친일파를 제외하라.’ 등, 60가지나 되는 구호를 「8.15기념구호」로 해서 발표하고 이를 위해 ‘용감히 투쟁할 것’을 당원들에게 호소했고, 대중선전만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남로당」과 「민전」의 애당초 말했던 대대적인 행사계획은 그만 말싸움으로 끝나고 말았다. 「남로당」과 「민전」의 대대적인 「8.15 2주년행사계획」은 결과적으로 8월 10일부터 시작된 군정의 대대적인 검거선풍만 불러일으키도록 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남로당」과 「민전」은 「미・소공위」 촉진을 위한 군중투쟁은 더는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결국 「남로당」과 「민전」은 많은 간부들이 채포 당하여 조직이 거의 마비상태로 몰리고 말았다. 「미・소공위」가 파탄 나고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소진되자 말자, 미제는 ‘바로 이때다.’하고 전후문제 처리인 ‘조선문제’를 유엔에다 상정시켜버렸다. 이는 명백히 「유엔헌장」에 위배된다. 그러나 미제는 바로 「조선의 독립문제」라고 하면서 유엔총회의 의제로 상정할 것을 요구 했고, 「유엔운영위원회」는 당시 유엔에서 패권을 쥐고 있던 미국의 요구대로 이를 가결시켜주었다. 「유엔」이라는 것이 이로써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을 미제에 의한 나라의 분단을 「유엔헌장」을 위배하면서까지 지지한 셈이다. 이리하여 미제와 유엔은 남과 북의 우리민족을 이 분단을 반대하는 「반분단운동」, 즉 「민족통일운동」으로 이어지게 되도록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소련 측은 미제의 이 처리는 「유엔헌장」에 배치되는 문제인 동시에, 「미・소공동위원회」의 조직을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결정’을 정면으로 짓밟는 폭거라고 주장했고, 「조선문제처리안」으로서 ‘1948년 연초에 미소양군이 동시 철퇴하자.’는 안을 내어놓게 된 것이다. 이로써 우리민족은 미제가 「조선문제」를 유엔에 상정함으로써 2차세계대전 이후 전후문제로서의 「조선문제」가 그 결과 분단문제를 일으켰고, 이에 대해 반만년을 하나의 민족으로 하나의 강토에서 살았고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살아온 단일민족인 우리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그로부터 하나의 민족국가로 아울러야 한다는 반분단의 문제, 즉 「민족통일문제」를 민족지상의 과제로 받아 안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둘이 이런 토론을 하는 동안 성호 어머니는 밖에 나가시어 새참으로 인절미와 각 가지 곡식으로 만든 강정 그리고 단술도 사 오셨다. 점심때가 되자 간단한 찬이지만 맛깔스러운 찬과 정성스레 끓인 소고기를 넣은 미역국으로 점심상을 차려주셨다. 토론은 오후 한낮까지에서 끝났고 우리들의 연락방식은 전번에 결정한 것을 다시 확인하고 헤어졌다. 연계소 집으로 돌아왔더니 방안에서 귀에 익은 여자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나 밝고 명랑했다. 우리 집은 살림은 가난하지만 명절 때는 늘 저래 넉넉한 말소리로 가득했다. 한참 밖에서 듣고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교동고모하고, 존고모 활천 할매 그리고 종고모 수환이 아지매, 모두 여자만 있다. 모두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아마 아재는 밖에 ‘나갔는가?’ 했더니 골방 미닫이를 열고 나온다. 존고모인 활천 할매가, “성호 집에 가서 너와 함께 오려했더니 한참 이야기 중이라서.....”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텅 빈 듯 했다. 그래 바로 할배가 안계시다. 저녁상은 어머니와 고모가 부엌에서, 고모가 가지고 온 찬거리와 제사 음복 후 남은 것으로 상을 차렸다. 저녁상을 물리고난 다음에 좀 놀다가 당시 있었던 10시 통행금지 때문에 8시쯤에서 고모가 시댁 교동으로 돌아가셨다. 아재가 데려다 주었다. 활천 할매는 수환이 아지매를 데리고 갔다. 나는 내 가방에서 지금 막 보기 시작한 「구면삼각」 책을 내어놓고 공부를 시작했다. 수학공부는 언제나 종이와 연필이 필수이고, 종이 위에서 연필로서 수학과 말을 해야 하는 공부다. 아재는 통행금지 30분전에 울리는 예비 사이렌이 울고 나자 곧 돌아왔다. 나와 어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큰방에서 자고 아재는 큰방에 붙어있는 골방, 아재 방에서 잤다. 나는 공부하다가 어머니와 할매 사이를 파고들어 그 사이에 끼어 잤다.
--------------------- <주>
(1) ‘끝난 네’ 집, ‘수식이네’ 집, 그리고 ‘재홍이네’ 집 이야기는 필자가 쓴 어릴 때의 자서잔 「할배 왜놈 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돌베개 1997년)에서 [이야기 하나]의 ⟪내 고향집 밀양유림연계소⟫장의 ⟨가족과 이웃들⟩절에 자세히 씌어 있다.
(2) 1947년 11월 4일, 「한국독립당」이 여러 민족주의 정당 12개 정당과 함께 「남조선단독선거」,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미소양군철수와 우리민족에게 모든 권한을 이양하라는 등의 요구를 내걸고 공동원칙과 방략을 발표했다. 이에 대하여 「민전」에서는 이를 적극 환영하고 공동투쟁을 제의했으며, 이때부터 「남조선 반동 이승만, 김구」라는 말은 없어졌고 그 대신 「이승만, 김성수」라는 말로 바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