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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3장
직분자의 자격, 영광, 담대함
(찬송 289장)
2021-9-20, 월
맥락과 의미
고린도 교회는 위대한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운 교회였습니다. 더구나 그가 1년 반, 꽤 오랫동안 목회한 지역입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사도로서 제대로 자격이 있는가 하고 비난했습니다. 사도는 “나는 너희들이 비난해도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도의 자격이 있다고 변호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개인적 명예보다 그가 전하는 복음의 권위가 문제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가 한 책망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는 한 성도가 아버지의 첩과 동거했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런 사람을 관용하고 남겨두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을 바로잡으라고 했습니다. 또 교인 중에는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유식한 말을 하고 듣기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표현력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을 반대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그들에게 바울이 동의하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그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둘째, 교회 전체가 그 사람의 악에 빠져듭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자격 있는 사도라고 주장합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 같아 이상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직분의 권위를 세웁니다.
우리 시대에도 직분과 목사에 대해 쉽게 비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사의 직분을 잘 배웁시다. 우리 모두는 부모로서 가정의 직분자입니다. 자녀들이 비난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배웁시다.
1-6절, 사도의 직분, 목사의 직분, 부모의 직분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7-11절, 직분은 영광스럽습니다.
12-18절, 이 직분이 있기 때문에 담대히 하나님께 나갑니다.
1. 직분은 하나님이 주신 것(1-6절)
1-2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혹은 다른 사람이나 너희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야 하겠느냐?” 추천서는 직분자의 자격이 있다고 추천하는 증서를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것이 바울에게는 추천서와 마찬가지입니다.
첫째, 고린도 교인들의 “육의 마음판”에 쓰였습니다(3절). 즉 ‘육의 비석’을 말합니다. 여기서 육은 ‘육신적’, 곧 나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 존재 그 자체, 깊은 내면에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말합니다.
둘째, 2절 “우리 마음”, 곧 직분자의 마음으로 썼습니다.
셋째, 3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썼습니다. 사도가 도구가 되었지만, 실제로 쓰신 분은 성령님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삶이 변화하고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 사도의 자격에 대한 증거입니다. 넷째, 복음 말씀으로 썼습니다(4:2,3).
4절, 사도에게는 이와 같은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만족은 충분한 ‘자격’, 곧 ‘능’이 있다는 말입니다. 5절, 사도로서의 충분한 자격은 바울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사도의 직분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사도직은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6절). 하나님과 백성이 언약의 사랑 가운데 하나 되게 하는 직무입니다. 그 방법은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6절) 입니다. 가령,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 조문만 전한다면 “죽이는 것이”(6절) 될 뿐이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배워도 자기 힘으로 미워하는 마음을 없앨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보고 마음의 고통만 있습니다. 또한 율법은 죄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선언합니다. 율법을 잘 배워 알수록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전합니다.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6절). 그 복음과 함께 성령님께서 일하십니다. 복음을 사용하여 성도에게 생명을 일으키십니다. 복음을 통해 고린도 교인들이 언약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일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성도의 삶을 살리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에서 그가 사도로서 자격이 있음이 증명됩니다.
지금도 어떤 목사가 자격이 있다, 없다는 것은 어떤 주관적인 느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 관계를 중심으로 목사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어떤 교인은 목사가 자신에게 잘 해주면 “목사가 좋다”, “우리 교회가 좋다”고 합니다. 책망하면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 목사를 통해 교회 전체를 세우고 있으면 하나님이 충분한 능력을 주시는 목사입니다.
원래 목장에는 병든 양, 화난 양들이 있습니다. 바른 목자가 있는 데도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목회할 때도 12명 중 한 명은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반대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자격 없는 목자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말씀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면,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자격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도도 인정해야 하고, 목사도 그것 때문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한두 명의 성도 문제 때문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부모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춘기의 자녀들은 흔히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어요? 엄마 아빠가 자격이 있어요?” 하고 따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로서도 마음이 눌립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녀를 낳았다는 그 자체가 자격입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교회에 인도하고 가정 경건회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자격입니다. 위축되지 말고 말씀으로 자녀를 잘 양육해야 합니다.
2. 직분의 영광(7-11절)
7절부터는 사도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말합니다. 모세의 직분과 사도의 직분을 대조합니다. 구약의 모세의 직분은 율법을 주는 직분이었고, 사도의 직분은 복음을 전하는 직분입니다. 실제로는 모세도 율법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제사 제도를 통해 죄를 용서하는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또 사도들이 전한 십자가로 죄 용서받는 그 복음 안에 “성령님을 통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로마서 8:1-4) 율법의 완성에 대한 복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율법과 복음의 중심적인 것을 비교하여 말합니다.
구약의 율법을 가르칠 때 율법은 사람의 양심을 정죄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지키는 일에 얼마나 부족한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도록 합니다. 율법은 그 죄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했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 죄 용서의 복음을 사도는 전합니다.
시내산 밑에서 모세는 백성 가운데서 천막을 치고 그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밖으로 나와서 백성을 만났습니다. 그가 천막에서 나올 때 모세의 얼굴에 찬란한 영광이 비쳤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그의 얼굴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서 그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7절, 출 34:30).
죄를 드러내고 심판을 선언하는 ‘정죄의 직분’이 이렇게 영광스럽습니다. 하물며 죄인을 의롭다 하고(9절), 죽은 영혼을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살리는(6절) 사도의 직분은 더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지금도 이 영광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목사직은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복음 자체도 세상적으로 보기에 지혜롭거나 힘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복음 말씀을 전하는 자도 세상적으로 힘이 있거나 영광스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목사의 섬김을 통해 복음과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에 목사의 직분은 영광스럽습니다.
모든 성도는 복음을 받았으므로 복음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복음의 증인이기 때문에 ‘의롭다 하는 직분’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직분은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부모의 직분을 자녀가 인정하고 존경해주지 않는 경우가 있어도 부모라는 직분은 영광스럽습니다.
3. 직분자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서 영광스럽게 변화함(12-18절)
1) 마음을 덮은 어두운 수건(13-15절)
a) 모세의 수건이 없어지고 복음이 비치는 새로운 시대(13절): 직분자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서 영광스럽게 변화합니다.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12절). 출애굽기 34장에 보면, 모세는 회막에서 하나님과 말한 다음에 백성에게 나왔습니다. 그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남아 있었습니다. 백성이 모세의 얼굴 보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백성 앞에서는 그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하나님께 나갈 때는 수건을 벗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있던 영광은 구약의 율법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구약의 언약을 상징합니다. 구약 언약의 영광은 사라질 영광입니다. 영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희미해집니다. 구약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얼굴을 덮은 수건(구약 언약, 율법의 정죄하는 것, 13절)은 이제 없애주셨습니다.
b) 아직도 그리스도 없이 구약을 읽는 사람들의 수건(14절): 율법이 복음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구원 역사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스스로 수건을 쓰고 읽습니다(14절). 정죄하는 율법에 매여서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해주시는 복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눈에 수건을 덮고 구약을 읽습니다.
c) 아직도 마음에 어두운 수건이 덮여있기 때문에(15절):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구약의 율법을 읽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덮였기 때문입니다(15절). 얼굴에 수건이 덮여서 마음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의 형식적인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없이 성경 지식만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기 죄를 정죄 받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스도를 보지 못합니다.
2) 어두움과 죄의 수건을 벗고 주님께로 돌아감(16-18절)
그러나 누구든지 주님께 돌아가면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이 벗겨집니다(16절). 모세는 천막 밖에서는 수건을 덮었지만, 천막안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갈 때는 수건을 벗었습니다. 이것은 비유와 같습니다. 우리도 주 예수님께 돌아갈 때 어두움의 수건, 죄와 그에 대한 정죄 때문에 두려워하는 수건이 벗겨집니다. 주 예수님의 성령님께서 복음 말씀을 들려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게 합니다(17절). 그 은혜가 왔을 때 죄와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자유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이 수건(율법의 짐)을 벗겨주시기 때문에 우리도 율법의 짐을 벗어버립니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봅니다”(18절). 성경 말씀을 복음 말씀으로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그 죄 용서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복음을 통해서 사도에게 비칩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18절). 사도 바울은 주의 영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의 생명 현상, 곧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이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순수하게 전할 때,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복음 전파자가 아주 심한 병이나 고통 가운데서 복음을 전해도, 복음은 객관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멋있는 말로 복음을 포장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가 어려움 가운데 있다고 해서 그를 업신여기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눈에 아직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사도가 가진 영광은 지금도 복음을 전파하는 말씀 사역자에게 우선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목사가 이 영광의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으로 충만합니다.
목사뿐 아니라 모든 성도도 같은 영광을 누립니다. 성도가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복음에 순종하여 살 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누립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합니다.
믿고 복종할 일
첫째, 목사직이나 남편, 부모의 직분은 하나님이 주신 직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하기 때문에 그 직분에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직분이 영광스럽다는 것을 압시다. 셋째, 담대히 하나님께 나갑시다. 직분은 하나님이 주신 영광스러운 것임을 알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담대히 하나님께 나갑시다. 그럴 때 교회가 세워지고 가정이 세워집니다.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은혜로 믿음을 일으키시는 성령님, 은혜의 방편(수단)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마음으로) 썼고 … 3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어떻게 주시는가를 말합니다. 이 은혜를 전달하는 주체는 성령님입니다(하나님의 영).
성령님이 은혜를 줄 때 사용하시는 수단(방편)이 있습니다.
첫째, 복음 말씀을 사용하십니다(4:2,3에서 말하는 복음 진리). 복음 말씀은 은혜의 외적 수단입니다. 말씀과 함께 성례(세례와 성찬)가 외적인 수단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전해주십니다. 말씀과 성례를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기도가 또 다른 외적 수단입니다. 찬양할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엡 5:18,19).
둘째, 복음을 전하는 직분자를 사용하십니다(우리, 즉 사도의 마음으로). 그래서 칼빈은 목사를 은혜의 기관(organ)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성령님께서 복음을 듣는 성도의 마음에 일으키시는 믿음이 은혜의 수단입니다(너희의 육의 마음판). 믿음은 은혜의 내적 수단입니다.
성령님이 이 외적 수단을 쓰시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성령님의 은혜는 우리를 게으르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목사를 통해 예배 가운데 주시는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성례를 귀하게 받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성경을 부지런히 읽읍시다. 말씀과 성례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주실 때, 감사 찬양합시다. 더 풍성한 은혜를 간구합시다. 복음 약속을 우리에게 주실 때 믿음으로 화답합시다(히 4:2).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인들에게 유익한 말씀을 전해야지, 교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참고> 말씀을 전하는 자의 자세
목사는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빛을 교회에 비춰야 합니다. 목사가 교인의 얼굴을 바라본다면 그들의 얼굴에 있는 연약함을 비칠 것입니다. 담대히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복음 말씀을 통해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남을 정죄하고 불평하는 교인도 변화됩니다.
교인은 목사가 전하는 복음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면 의롭다 하시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 눈에 뭐가 씌어 있습니다. 율법의 수건, 정죄하는 수건이 덮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지 못하고 자기가 율법의 위치에 올라가,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우리 모두의 직분은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와 장로가 성도의 잘못을 책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권징의 직분’을 행하는 것입니다. 권징은 정죄가 아닙니다. 회개하고 죄 용서와 새 생명의 복음 안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사랑의 초대입니다. 복음을 통해 회개할 때 성령님 안에 참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담대히 복음 말씀을 의지하여 그리스도께 나갑시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을 비춥시다. 그러할 때 가족이 복음의 권위 아래 복종합니다. 복음에 순종하여 살아갈 때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세상에 비칩니다(마태복음 5:14-16). 복음과 함께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님께서 직장에서도 악한 영향을 누를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인간적인 것을 보지 않습니다. 자기의 행동이 선하다는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영광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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