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1) 김대건 태어나다
순교자 집안서 일찍이 신앙교육… 가문에 대한 자부심 컸다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하느님의 종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우리나라 첫 신학생이자 첫 사제로서, 피의 순교와 땀의 순교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들의 사목 생애에는 단순히 영웅적인 측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도 존재한다. 인간적인 탄생과 성장, 신앙의 성숙, 좌절과 역경, 희망 등을 모두 담고 있었고, 그 수많은 시간들의 결실이 순교로 빛날 수 있었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이들이 살아간 그 시간을 걸으며 오늘날 우리 신앙을 돌아본다.
성가정이 뿌린 신앙의 씨앗
1821년 8월 21일 태어난 갓난아기 김대건의 시간을 걸으려면 먼저 그의 가족을 바라봐야 한다. 김대건에게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해 준 것이 바로 그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김대건의 종조부 김종현이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집안 전체에 신앙이 전해졌다. 김종현의 전교로 김대건의 증조부 복자 김진후(비오)도 입교했고, 일가 전체가 천주교를 믿게 됐다. 특히 김대건의 조부 김택현은 김대건 집안에 천주교 교리를 전한 장본인이자 내포의 사도로 유명한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딸 멜라니아와 결혼해 성 김제준(이냐시오)을 낳았다.
한국교회 초기부터 신앙을 이어온 김대건의 집안이 얼마나 신심 깊었는지는 집안에서 순교자들이 많이 나왔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미 김대건의 순교 이전에 증조부 김진후를 비롯해 숙조부 복자 김종한(안드레아), 부친 김제준 등이 순교했다. 김대건의 순교 이후로도 여러 순교자가 나왔다.
김대건의 조부 김택현은 1827년 정해박해 즈음 난리를 피해 서울 청파동으로 갔다가 용인 한덕골에 자리를 잡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대건의 가족은 마을 근처 골짜기에 들어가 나무에 칡을 얽고 그 위에 억새를 덮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한덕골과 인근 신자들이 모인 굴암 공소 회장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김대건 성인 일가 족보에 따르면 성인의 조부 김택현과 숙부 김제철의 묘가 한덕동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김대건의 일가가 박해를 피해 가산을 모두 버리고 낯선 산골에서 궁핍하게 생활해야 했음에도 신앙생활만은 이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대건은 이런 집안 풍토 안에서 어려서부터 신앙교육을 받아왔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신앙교육은 단순히 말이나 지식에 그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찾는 실천으로 보여주는 교육이었다.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에서 이 베드로와 김 프란치스코 등의 증언에 따르면, 김대건은 태중교우로서 어려서부터 이미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김대건이 1836년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러 교회사학자들은 김대건 집안의 신앙을 고려했을 때 김대건이 1836년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유아세례를 받고 사제에게 보례(補禮)를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고(故) 이원순(에우세비오) 교수는 「김대건 가문의 신앙 내력과 순교 전통」에서 “김대건의 가문이 천주 신앙의 성가정의 분위기였기에 어린 소년 대건은 성소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결단을 내려 천주의 부름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라며 “또한 그의 부모는 선뜻 어린 자식을 천주께 봉헌하기로 하고 만리 타향 이국 땅으로 유학 길에 나서게 했던 것”이라고 김대건 집안의 신앙을 평가했다.
- 한국 103위 순교 성인 초상화 중 성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성인화.
선대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여긴 김대건
김대건이 가족들에게 신앙을 물려받았음은 김대건이 평소 선대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고틀랑 신부는 1845년 7월 8일 예수회 장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대건이 선교사들을 영접하러 상하이로 갈 때 그의 아버지를 비롯해서 조상 3명의 순교자들의 보호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김대건이 자기 집안의 순교자에 관해 고틀랑 신부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또 김대건은 신학교 스승 신부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발신인을 ‘김해 김 안드레아’ 또는 ‘김해 김 조선인 부제’라고 적는 일이 많았다. 자신이 ‘김해 김씨’의 후손임을 특별히 드러냈던 것이다. 이렇게 발신인에 본관을 적은 편지는 현재 남아 있는 김대건의 편지 19통 중 9통이나 된다.
전주대 서종태(스테파노) 교수는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에 대한 연구」에서 “김대건 신부는 신학교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의 끝부분에서 ‘김해’라는 본관을 특별히 밝혀 자기 집안의 유서 깊은 신앙과 순교 전통을 자랑스럽게 드러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이런 정황들을 살피며 김대건의 체포 당시 발견된 소지품에 있었다고 하는 ‘반이 삭았으나 길지 않았던 흔적이 있는 두발’과 ‘명주 조각’을 김대건 집안 순교자의 유해와 유품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서 교수는 “아마도 그는 집안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공경하면서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간구하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추측했다.
김대건이 선대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은 단순히 자신에게 신앙을 알려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순교자가 나올 만큼, 열심히 신앙을 실천했던 가족들의 삶을 직접 보고 들으며 자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학렬 신부(수원교구 원로사목자)는 “김대건 신부님 집안은 신앙의 대물림이 확실하게 이뤄진 집안으로, 초기교회 때부터 신앙생활이 김대건 신부님 집안에 그대로 흘러내려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 순교자들은 항상 신앙이 가장 완전한 행복임을 염두에 두고 꾸준히 실천하셨고, 그런 행복한 신앙을 물려주는 것이 가장 큰 사랑임을 알고 계셨다”며 “눈앞에 보이는 감각적 행복만을 추구하고 신앙에서 멀어지는 현대인들이 이런 성인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솔뫼성지 내 성 김대건 신부 생가 터. 1821년 8월 21일 태어난 김대건 성인은 신심 깊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아온 것으로 보인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김대건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솔뫼성지
솔뫼성지(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 132)는 김대건 일가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내포 지역 신앙의 못자리로 거듭난 곳이다. 솔뫼는 ‘소나무로 이뤄진 산’이라는 의미의 지명이다. 포구가 발달된 충청도 내포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일찍부터 ‘서학’의 형태로 천주교 교리를 접해 온 곳이기도 하다. 또한 여러 문헌들에 따르면 김대건은 솔뫼 또는 용인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주로 교회 측 문헌들이 김대건을 솔뫼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솔뫼를 김대건의 출생지로 보고 있다.
대전교구는 2004년 솔뫼에 김대건의 생가를 복원했고, 2005년에는 김대건 신부 기념관을 완공했다. 이곳은 1998년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제146호로, 2014년 국가 사적지 제529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2014년에는 아시아청년대회·한국청년대회가 열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기도 했다. 이에 대전교구는 해마다 8월 14~15일 솔뫼성지에서 프란치스코 데이(Francisco Day) 행사를 열고 있다.
[가톨릭신문, 2021년 1월 10일, 이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