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15장
열매 맺지 않는 포도나무를 불에 던져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심
(찬송 2장)
2023-7-15, 토
맥락과 의미
에스겔 선지자는 8-11장에서 성전의 우상 숭배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12-24장에서 다가오는 여호와의 진노가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을 불태울 것을 예언합니다(예루살렘에 대한 바벨론의 공격, 주전 605, 597, 586년. 에스겔은 주전 592년 경에 예언하고 있습니다. 6년 후면 곧 일어날 일입니다.)
12,24장의 행동 예언(포로의 여행 보따리를 가지고 성을 나감, 아내의 죽음에도 에스겔은 울지 않음)의 사이에 보통의 말로 하는 예언이 있습니다. 13장은 거짓 선지자의 죄와 심판에 대해 말했습니다. 14장은 심판의 전체적 모습(칼, 기근, 사나운 짐승, 질병)을 보여 줍니다. 15장은 그 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비유로 설명합니다.
14장에서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이다(15,16절, 8절의 ‘놀라움’도 황폐함과 어원이 같음)고 했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통해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8절) 15장의 끝 절도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됨을 통해서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8절)라고 합니다.
14:21에서 “더욱 심하지”와 15:5의 “하물며”(아프 키)는 원래 같은 말입니다. 14:13의 범죄(마알)도 15:8의 “범법”에서 정확히 반복됩니다.
15장은 14장의 심판에 대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포도나무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과,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은 “전적으로 부패”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그들을 다시 회복하여 다시 언약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양과 거룩한 말로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1. 그림 계시: 한 부분이 불타서 더 쓸모 없어진 포도나무 가지(1-5절)
2. 해석: 타나 남은 포도나무 예루살렘 시민을 다 불태움(6-8절)
1. 그림 계시: 한 부분이 불타서 더 쓸모 없어진 포도나무 가지(1-5절)
여호와의 말씀이 왔습니다. “인자야”로 시작합니다. “포도나무가 숲 속의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특별한 포도나무로 삼았다는 것은 이사야 5장, 에레미야 2:21에서도 사용된 비유입니다. 포도나무는 나무라기 보다 한갓 줄기에 불과한 아주 약한 나무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은혜로 돌보셔서 거룩과 의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 자체는 어떤 그릇을 만들 수 없습니다. 나무 못으로도 만들 수 없습니다. 그 초라한 나무의 가지의 한 부분이 불에 태웠으면 더 쓸모가 없습니다.
2. 해석: 타나 남은 포도나무 예루살렘 시민을 다 불태움(6-8절)
”그러므로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로 해석을 시작합니다. “타다 남은 쓸모없는 포도나무 가지처럼 예루살렘을 불태워 버리겠다. 그들이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
주전 597년에 바벨론을 통해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시민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아 왔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자기들은 불에서 건져내 졌다고 자만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주전 586년에 바벨론 군대를 보내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불태울 것입니다. 남은 자들을 바벨론 포로로 잡아갈 것입니다.
이 심판의 목적은 “너희가 나를 알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고 언약을 맺을 때 말하신 내용을 그대로 집행하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특히 하나님이 성막의 기구들을 원래 위치에 두는 데 사용한 “준다, 둔다”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합니다(아래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성막을 거룩하게 만드신 하나님은 이제 그분의 성전과 그분의 백성의 도시를 파괴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믿고 복종할 일
왜 하나님이 포도 나무를 불태웠을까요? 포도나무는 줄기는 약하고 아무데 쓸모가 없습니다. 그처럼 약하고 무능한 사람들, 저 이집트의 노예들을 하나님은 은혜로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 백성을 왕궁의 과수원 포도원처럼 잘 가꾸셨습니다.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고 서로 사랑하며 거룩한 나라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거룩의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를 즐겼습니다. 우상은 탐욕도 축복해 주고 짜릿하게 종교 감정을 채워 주기 때문입니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자의 재산을 빼앗고, 음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신실함으로 돌아와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계속 가르쳤습니다. 제사장들이 가르쳤습니다. 제사장들이 타락하자 이사야, 에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경건한 선지자를 통해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불순종하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범죄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성전도, 예루살렘 도시도 파괴하고 불태우셨습니다.
바벨론 포로의 고난을 통해 정화하셨습니다. 마침내 돌아와서 유대인 총독 스룹바벨, 제사장 여호수아,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지도로 예배와 삶을 회복했습니다. 그 후 제사장 에스라와 유대인 총독 느헤미야를 통해 계속 회복해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은 다시 계속되었고 외국 나라의 식민지로서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영적으로 바벨론 포로가 계속되고 있을 때에,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포로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마 1:21)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제물과 제사장과 성전 삼으셔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듣고 믿도록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제 신약의 교회와 성도에 대해서도 거룩의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 15:1,2,5)
그리스도를 더욱 신뢰하여 참 예배와 사랑의 멸매를 맺읍시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7:19)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심은 우리가 그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불심판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에 대에서는 이 땅에서 매를 들고 벌하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매를 맞고 거룩하게 살겠습니까?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매를 드실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와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더욱 성령님을 의지하여 매일 회개하고 거룩하게 살아갑시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에스겔 15-24장의 짜임새 있는 구조
에스겔서 15-24장은 아주 잘 짜여져 있습니다.
15장에 이어 17장도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면서 바벨론은 독수리에 비유합니다. 그 사이 16장은 음란한 여인으로 비유합니다. 음란한 여인의 비유를 23장에 사용하여, 16장과 23장이 수미 쌍관으로서 그 가운데를 하나의 주제로 만듭니다. 15,17장의 포도나무의 비유가 작은 수미 쌍관이 되면서 시작 부분을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음란한 여인의 비유인 16장과 23장의 가운데 부분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17,19,21장 홀수장들은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합니다. 18,20,22장 짝수장들은 유다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참고>성전의 기구들을 넣을 때와 반대로 거룩한 백성과 성전을 불태우심을 나타내는 두 단어(6-8절)
여기서 중요한 두 단어는 성막의 기구들을 정한 자리에 배치하는 데 쓴 단어들입니다.
“준다”(나탄): 불에 “던진다”(6절에 두 번), “대적(얼굴을 대항해 준다, 7절)”, ‘황무케 하리라”(황무함을 준다, 이 단어는 출애굽기 40장에 성전 기구들을 두는 것에 12번 사용되었습니다(출 40:5,6,7, 18,18, 20, 20, 22,30,33).
“둔다”(숨): “대적할 때에”(얼굴을 둔다). 이 단어도 출애굽기 40장에서 성전 기구를 두는 것에 12번 사용되었습니다(출 40:3,5,8,18,19,20,21,24,26,2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