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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하나님 집의 푸른 감람나무
(다윗의 마스길,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
1.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4.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7.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8.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시편 52편은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고자질하던 때를 상기하면서 지은 시다.
시편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지만 역사적 순서대로 나열된 것이 아니다. 51편은 왕이 된 다음에 일어난 일이고 52편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사울왕을 피해 다닐 때 일어난 일이다.
이스라엘은 가장 약한 민족이었기에 인간이 겪는 모든 과정을 드러내게 되었고, 구제 불능의 민족이었기에 그리스도가 오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을 열었다. 이 시편은 사무엘상 21-22장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수님은 다윗이 배가 고플 때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 먹지 못하는 떡을 제사장에게 달라 해서 먹었다고 하셨다. “다윗도 그러지 않았느냐. 배고파서 먹은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 하시며 율법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말하기 위해서 그 사건을 인용하셨다.
그 사건이 시편 52편과 관계가 있다. 사무엘상 21-22장을 보면 그 일로 말미암아 다윗에게 떡을 준 제사장 85명이 죽임을 당했고 그 땅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어린아이까지 죽임을 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거기 연루된 사람이 에돔 사람 도엑이다.
에돔 사람 도엑
도엑은 이방인으로서 사울의 목자장이 될 만큼 이스라엘 중에서 출세한 사람이었다. 에돔 사람은 에서의 후손으로 출애굽하는 광야길을 방해했고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인 족속이다. 그 족속에서 사울 왕 밑에 들어와서 목자장이 되었던 것이다. 가축을 관리하는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출세를 한 셈이다. 능력이 있었거나, 사울의 눈에 잘 보였거나, 어떤 이유에서건 이스라엘이 멸시하는 이방인으로서 그만큼 자리잡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서 다급히 도망하던 중에 놉 지역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제사장 외에 먹을 수 없었던 진설병과 달라 해서 먹고 골리앗의 칼을 얻어 나올 때 거기 있었다. 그 상황은 사울이 다윗을 미워해서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다 아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와서 떡을 달라 하니까 아히멜렉 제사장도 곤란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히멜렉은 진설병을 주고 그곳에 보관해 두었던 골리앗 장군의 칼을 다윗에게 넘겨주었다. 그렇게 다윗을 도왔던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사람이 에돔 사람 도엑이다. 도엑이 왜 거기서 나오는가? 그는 성전에 있을 이유가 없다. 목자장으로써 가축과 함께 있어야 할 사람인데 놉 땅의 성전에까지 와서 대화를 듣고 상황을 파악했다는 것은 밀고하기 위해서 다윗을 미행했거나 아니면 우연히 발견해서 그가 무엇을 하는지 보려고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너희는 내 아들이 다윗과 약조를 맺는데도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너희가 거기서 무엇을 얻어먹으려고 그러느냐.”라며 무섭게 신하들을 질책할 때 도엑은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떡과 칼을 준 것을 일러바쳤다. 그래서 사울이 군사를 보내 아히멜렉을 불러들여 심문했고 아히멜렉이 “다윗은 당신의 사위가 아닙니까. 당신의 충성된 종이 아닙니까. 나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했지만 사울은 제사장들을 다 죽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두려워서 제사장들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대리하는 제사장을 손댄 적이 없었고 손댈 사람이 없었다. 왕의 명령이라 해도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을 죽이겠는가. 그런데 도엑이 나서서 아히멜렉과 놉땅의 제사장 85명을 죽였던 것이다. 한 장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그때로서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제사장들과 관계있는 모든 사람을 어린이까지 죽였다는 것은 삼천 년 전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아이히만이다. 2차대전 후에 이스라엘이 독립을 한 후에 땅끝까지 전범들을 찾아서 처단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전범들을 찾았다. 1961년이 되어 홀로코스트 사건의 최고 실무 책임자로 지목되었던 1급 전범 아이히만이 아르헨티아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스라엘 비밀경찰이 그를 납치해서 이스라엘 재판정에 세웠다.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든 사람이 궁금해 해서 그 재판을 전세계에 생중계했다고 한다. 그때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것이 아이히만이 너무나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이어서 다른 법정에 세웠으면 죄를 찾기 힘든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일관된 주장은 “나는 나치 독일의 공무원이었습니다. 공무원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명령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나는 유대인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단지 나의 직무가 그러 해서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수용소에 보내는 일을 맡아서 했을 뿐입니다.”라는 것이었다. 홀로코스트의 총 책임자로 지목된 사람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는 독일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공무원으로서 정부의 명령을 따라 일했을 뿐이고 자기에게 업무 요청이 온 것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그는 “만약 내가 이 일을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게을리 했거나 하지 않았다면 나는 독일에서 죄인입니다. 마땅히 독일에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독일 공무원으로서 내 할 일을 했습니다.”라고 변명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쓴 작가가 이 재판을 취재하면서 놀란 것은 600만을 학살한 악이 아니라 성실하게 공무를 집행했을 뿐인 평범성이었다고 했다. 정신과 의사도 감정을 하고 “그는 나보다 정상적인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라고 결론을 내렸고 성직자도 면담을 해 보고 “이 사람은 아주 좋은 이웃이고 성실한 사람이고 어디에서도 잘 살 사람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뭐가 문제인가?’하고 제기되는 의문에 대해 작가는 자기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의 문제를 지적했다. 공무를 집행했다고 하지만 그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자기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의 문제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고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 그것은 어떤 악이 저질러져도 결과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있고 우리도 그럴 사람일 수 있다고 했다. 이 글이 비판도 많지만 아이히만이 가진 문제라고 한 가지 지적하는 것은 명령대로 성실하게 일한 결과로 600만 명이 죽었음에도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다. 내 책임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뿌리가 뽑힌 사람
도엑은 자기 살 길을 찾아 출세를 꿈꾸며 성실하게 산 사람일 수 있다. 사울 왕 밑에서 사울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울에게는 반역자인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한 일이 결과적으로는 이스라엘 역사상 제사장을 85명이나 죽여 버리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졌고 가족과 친척들까지 다 죽이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다윗은 이 사람에 대해 악한 계획을 가진 자, 날카로운 칼 같은 간사한 혀를 가진 자라고 했다(5절). 이 정도 되면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일급전범으로 잡아서 처벌할 블랙리스트 1순위가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그 뒤에 다윗은 이 사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그를 찾아내라고 한 적도 없고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다는 말도 없다.
왜 그런가? 다윗의 특징 중 하나가 적을 포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윗이 뒤끝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만 말하고 시편 52편에서 더 이상 언급이 없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 이 사람을 그냥 올려놓은 것이다. 5절에는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라며 저주를 퍼부었지만 하나님이 합당하게 하실 것이라고만 했지 자기 손을 들어서 이 사람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윗은 이 사람에 대해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뿌리가 뽑힌 사람이라고 말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라고 말씀했다. 하나님 앞에 서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다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난다. 그 앞에 세우면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숨어 있는 사람, 땅끝에 있는 사람을 찾아서 예루살렘 법정에 세웠듯이 이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면 끝나는 일이다. 벌거벗은 것 같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분 앞에서 다 드러나게 하시는 분 앞에 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서면 모든 일은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문제다. 하나님의 판단 앞에 그 사람을 올려놓으면 어떤 일이라도 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감정과 연루된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것 때문에 내 감정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나온다.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니까 베드로는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예수께서 “내 양을 먹이라.” 하고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며 죽음을 예감하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를 가리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물었다.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끌려간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 “너와 무슨 상관이냐.” 이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대화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복음을 외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다음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만났다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어쩌면 베드로는 그때 그 상태대로 요한이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하는지 전혀 몰랐을 수도 있고 요한은 베드로의 사정을 전혀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안에서 베드로나 요한이나 한 사람이다. 두 팔을 벌리고 원치 않는 데로 끌려간 베드로나 에베소와 밧모 섬 한 곳에 머물던 요한이나 한 예수를 증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베드로는 요한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위치고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의미인지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으로 두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이 행한 일은 그 사람의 문제로 놓아 두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로서는 해 줄 말도 없고 답이 없는 상황이 많다. 캐나다에 있을 때 새로운 분이 찾아 오셨는데 누가 김치현 형제에게 가 보라고 했다고 한다. 자기 남편이 결혼하자마자 바람을 피우고 도박을 하고 알콜 중독이 되어 집에 오기만 하면 폭력을 휘두른다며 어찌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내가 살라 할 수도 없고 살지 말라 할 수도 없고, 사정도 모르고 막막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느냐?’ 이 문제는 내가 말할 수 있다.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힐 때 내가 그것을 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대로 하나님 앞에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찾아서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편이 이렇고 저렇고 한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종국적으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문제다. 물론 나도 피곤하고 힘든 것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날 때 그 사람의 일이다. 자식 문제도 마찬가지고 부모도 어찌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은혜의 쟁반 위에 올려놓습니다. 당신의 긍휼 앞에 내놓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다행히 오지랖이 넓지 못하고 에너지 레벨이 낮기 때문에 남의 일에 개입하지 못하고 낮은 에너지로 근근히 살아가야 한다. 어떤 형제는 오지랖이 넓어서 사방을 다니지만 나는 방 안에서 책상을 치우는 것밖에 생각을 못한다. 나는 요만큼밖에 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이 은혜가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주를 따르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인생이 넉넉한 은혜고 축복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지으신 이 앞에 서면 모든 것을 드러내고 벌거벗은 것 같이 서게 된다. 우리 중에는 악인도 있고 선인도 있다. 잘하는 사람도 있고 잘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 서면 그 사람 자신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람이 피조물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한 판단마저도 최종적이라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의 주체가 아닙니다. 나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로 표현했다.
도엑은 그런 사람일지라도 나는 어디에 있는가? 다윗은 도엑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있는 사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이다. 그러했기에 사람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찬송할 때나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와서 죽은 개나 벼룩 같이 되었을 때나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으로 살았던 것이다.
이현래 목사님이 “누가 나를 높여도 나는 올라갈 수도 없고 누가 나를 끌어내린다 해도 더 내려갈 데가 없다. 나는 사람이다. 나는 피조물일 뿐이다.”라고 하셨다. 그 말이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우리는 다 우리를 지으신 자 앞에서 피조물이고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 같아야 사람이지.”라는 속담이 있다. ‘사람’을 네 번 썼는데 단어는 같아도 다 의미가 다르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사람은 무슨 사람인가?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 하나님이 규정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너는 누구다.”라고 규정한 그 사람을 우리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은 스스로 있고 싶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눈을 떠보니까 주어져 있는 것이 피조물이다. 내 의식이 있고 보니까 내 삶이 이렇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지으신 자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규정이 된다면, 그런 사람으로 나를 안다면 내가 그동안 내 것인 줄 알고 붙잡고 씨름하고 고민하던 모든 문제를 다 내려놓지 않겠는가. ‘아,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구나. 주인이 있구나. 나는 피조물로서 그분 앞에 있구나.’ 이것만 확실히 알아도 모든 고민에서 해방될 수 있고 인생의 풀리지 않던 모든 문제가 구슬이 꿰어지듯이 꿰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람, 하나님이 규정하신 사람,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의 자리로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왜 예수와 동일시되려 하는가. 예수 안에 포함되려 하는가? 예수 안에 포함되고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으로 동일시되는 것이 왜 필요한가? 세상 사람들은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 예수님이 이래서 우리가 동일시 되었다고 하면 “왜 동일시되어야 하는데?”라고 물을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 포함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 지은 그 사람,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하신 그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보고 심히 좋다 하셨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심히 좋다 하셨는지 몰랐는데 예수를 보니 아버지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하신 분이다. 그분을 보니까 ‘하나님이 심히 좋다 하신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라고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분에 대한 갈망이 생긴 것이다. 나도 그분 안에 있기를 원하는 갈망이 생긴 것이다. 그가 아버지 앞에 있는 사람, 연합한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으로 살았다.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라고 여인들이 찬송할 때에,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 올 때도, 그는 하나님 앞의 한 사람으로 있었다. 우리는 지으신 이 앞에서 피조물이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다. 우리가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 하나님이 규정하신 사람’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 포함되고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으로 동일시 되는 것은, 그가 아버지 앞에 있는 사람, 아버지와 연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 사람을 보았다.
5절에는 도엑을 말하면서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라고 하였다. 뿌리가 뽑힐 것이라고 한 것이다. 도엑만이 아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다는 것, 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뿌리뽑힌 것이다. 지나가다 잡초를 뽑아서 던져놓으면 뿌리 뽑힌 식물은 잠시는 푸르지만 죽은 것이다. 뿌리가 뽑혔다는 것은 곧 죽음을 말한 것이다.
아담에게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지만 아담은 그 뒤로 아들 딸을 낳고 수백 년을 더 살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뿌리가 뽑힌 잡초가 잠시 푸른 상태로 있던 것에 불과하다. 뿌리가 뽑힌 그 순간 이미 정녕 죽은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죽은 사람이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예수는 세상에 대해 죽었지만 하나님에 대해 산 사람이라 했고 그와 같이 너희도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 하였다. 예수 안에서 함께 침례받은 사람이면 죄와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 하나님에 대해 산 자로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살았다고 하고 죽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심장이 멎거나 뇌가 죽은 것처럼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살았느냐 죽었느냐의 문제다. 계시록 3장 1절에는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하셨다.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살아 있는 것이 산 사람이다. 그 사람이 부활생명을 누린다.
아담 안에서 사람은 모두 뿌리가 뽑힌 존재였다.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하나님의 피리 소리에 함께 춤추고, 하나님의 애통함에 함께 근심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다.
8절에는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라고 하였다.
푸른 감람나무, 이 말은 도엑을 말하면서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무성하게 자란 한 나무를 본다는 것이다. 시편 1편 3절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 하였다. 물가에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는 가뭄이 오거나 비바람이 불어도 그것과 상관없이 푸르다. 비바람, 메마름, 뜨거운 햇빛……, 이러한 외부의 사정과 관계없는 이 상태를 여호와의 집에 심기운 푸른 감람나무라고 한 것이다.
지성소는 세 겹의 덮개로 덮여 있다. 실로 짠 천으로 한 겹, 염소 털로 짠 양장으로 한 겹, 그 다음에 수양의 가죽으로 한 겹, 이렇게 세 겹으로 성소와 지성소가 덮여 있다. 바깥에는 햇빛이 비치고 비바람의 영향도 받고 성소 안에는 촛불로 보는 세계, 지성소에 들어가면 아무 빛도 없는 캄캄한 가운데 있게 된다. 외부의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곳, 빛도 없고 비바람도 들어올 수 없는 그 자리가 지성소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사람의 자리가 그런 자리다.
우리가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 하나님이 전제된 사람이다. 당신의 목적과 계획안에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이니까 그 앞에 설 때 내가 누구인지가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것을 형상화 해놓은 것이 지성소다. 그분 앞에서 어떤 것도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원수가 발붙이지 못한다고 하셨다. 원수가 발붙이지 못하는 땅이 어디인가? 그런 땅은 없었다. 물론 예루살렘은 적이 쉽게 쳐들어올 수 없는 요새였지만 결국 예루살렘 성도 패망했고 원수가 발붙이지 못할 땅이라 했던 가나안도 사라졌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오게 된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 안에 있는 이 사람 안에는 원수가 발붙일 수 없다.” 하는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대적이 발붙일 수 없는 자리, 그 자리에서 다윗은 “나는 여호와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다.”고 고백한 것이다.
시편 27편 3절에는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라고 하였다. 대적이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누구를 두려워하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쫓겨다닐 때 지은 시다. 사방으로 에워싸여 있는데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니까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이 없다.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평안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이럴 것 같고 저것을 보면 저럴 것 같고, 바람에 흔들리며 살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 바람이 불면 부는 것으로 일하시고 고요하면 고요함으로 일하신다.
즐겨 부르던 찬송 중 하나가 ‘고요한 바다로’다.
“고요한 바다로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내 쉬지 못하되 이 풍량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 당신이 하는 일을 보는 사람의 고백이다.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가다가 풍랑을 보니까 두려움이 몰려와서 물에 빠졌다. 무슨 사건인지 모르지만 실제로 우리가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내 인생을 이끄시고 교회를 이끄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사람은 그리로 갈 수 있는데 풍랑을 보면 빠질 수밖에 없다. 도엑 때문에 한 마을이 멸절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몰살당한 사건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은 사람이라는 고백을 한 것이다.
그 뒤로 거기서 살아나온 한 사람이 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다. 다윗은 자기가 아히멜렉에게 떡과 칼을 얻을 때 도엑이 거기 있었음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반드시 고자질할 줄 알았다. 이 일은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다. 너를 죽이려 한 자가 나를 죽이려 한 것이다.”라며 “나와 함께 있자.”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점점 몰리는 다윗의 마음을 보면서 더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으로, 자신의 위치가 분명한 한 사람을 보게 된다.
관계의 축복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 이 사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이 사람 안에 있고 이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이 된 것은 이천 년 뒤에 지구 반대편에 있을 우리를 알아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일을 해서도 아니다.
죽으심도 근본적으로 보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우리에게 구원이 된 것이다. 왜 그의 죽음을 보고 그가 나의 구원이라고 고백하는가?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올바른 관계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로마서 3장에 예수 안에서 한 새로운 의가 나타났다고 했는데 21절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다.”(롬3:21, 공동번역)라고 말했다. 이것이 문맥상 정확한 번역이다. 무엇이 의인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한 새로운 의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라고 한 것이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인간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보여 졌기 때문에 이 죽음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었고 그래서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인 사람이다.
나 혼자 독야청청한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나는 마이크를 써서 내 작은 소리를 많은 사람이 듣게 하는데 이 마이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연결되었는지 모른다. 전기를 발명한 사람, 공장에서 이 마이크를 만든 사람, 부품 공장의 직원들, 이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 설치한 사람들, 일요일마다 조정하는 방송실 형제들까지 그냥 있는 일이 아니다. 무엇 하나를 들여다보아도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내가 그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지구상에 있는 어떤 생명도 다른 생명의 도움을 받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생명은 없다. 모든 것이 관계로 이루어진다.
이 관계의 근원이 내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임을 자각하는 데서 첫 단추가 끼워지고 거기서 모든 올바른 관계에 놓여 지게 되는 것이다. 그때 인생에 허락된 모든 관계가 은혜 아닌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첫 단추를 내 중심으로 끼우면, “내가”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내 목적이 첫 단추가 되면 모든 단추들이 어그러지게 된다.
우리 인생의 첫 단추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으로 끼울 때 다른 단추들이 다 정상적으로 끼워지게 되고 그때 다윗의 찬송대로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라는 찬송을 하게 된다. 올바른 관계가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근원적인 축복이다.
모세는 40년 광야 길을 돌아보면서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하였다(신1:33). 돌아보니 그러했다는 것이다. 물이 없어서, 떡이 없어서, 피곤해서 원망했던 사람들인데 돌아보니까 하나님이 항상 앞서 가셨다는 것이다. 다 계획이 있고 준비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모르는 길을 갔는데 하나님은 아시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지나온 날을 돌아볼 때 이스라엘 백성도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겠는가. “지나온 사십 년 우리는 주의 손에 이끌렸습니다. 어느 한 순간도 우리가 당신의 계획안에 있지 않은 순간이 없습니다.”
나도 돌아보면 왜 집안이 빚더미 위에 앉았는지, 왜 돈을 벌러 나가야 했는지 도무지 몰랐다. 돈을 벌러 나갔는데 입에 거품을 물고 자기 교회를 자랑하는 분이 있어서 그분에게 마음이 끌릴 줄 알았겠는가. 지금 와 보면 왜 그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서른 살에 내 인생이 꺾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제부터 내가 뭘 해야 할 시점에 ‘나는 다 된 것이 아닌가. 폐인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리로 가야 했는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까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이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나를 그때 꺾지 않았으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겠는가. 헛된 일을 도모하고, 나를 도모하고 살지 않겠는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모든 사람 앞에서 주의 이름을 사모하고 살 뿐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내 일생의 모든 일이 나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있었던 것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당신에 의해 빚어진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 집의 푸른 감람나무처럼 살게 하시려고 나를 부르신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그분이 하신 일을 영원히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 기 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우리 인생에 일어난 일을 다 모르고 또 우리 주위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 다 모르지만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대로 주님을 따르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어서 하나님 앞에 피조물로, 당신의 형상으로,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서기를 원합니다. 인생의 이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인 줄 알고 붙잡으려 했던 수 많은 일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피조물로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당신의 계획안에 있는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우리 인생을 이끄셔서 당신 앞에 있게 하시고 당신의 형상으로, 당신의 모양으로 이 세상 앞에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