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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대 철학」,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 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pp. 343-457. (P. ).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시기를 헬레니즘이라 한다. 다른 앙글로 색슨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 학파로서 여기지 않는다. 나는 이런 헬레니즘이란 명칭이 우리나라에 전염된 것은 일제잔재라고 여긴다. 일본이 영국 독일을 빌러왔고 해방후에는 미국이 그러하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과 실증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보라. / 나로서는 이상한 개념 두 가지 언급하자. 왜 이시대의 천문학(astrologie)가 점성술이 되고 나중에 천문학(astronimie) 철자 속에 로고스가 들어 있지 않음에도 학문이 되었는가? 그리고 연금술(alchemie)에서 알짜가 빠지면 화학(chenmie)가 되는 것은 카이로를 중심으로 하는 북아프리카를 배척하는 백인이데올로기 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이데올로기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염되었다. (50NMD)
**미리 하는 이야기 이지만 알렉산드리아의 마지막 사상가는 플로티노스이다. 그의 중심을 누스(Nous)로 둔 것은 어쩌면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전통에서 이뭣꼬의 중심일 것이다. 이것을 로고스(Logos) 바꾼 것은 크리스트교일 것이고, 그 로고스를 말씀으로 바꾼 유태-크리스트교가 정태적 종교의 근원일 것이다. 동태적 종교는 누스가 생명 또는 영혼이며 불일 것이다. / 중심 불에서 원주 처럼 주위에 흩어져 있는 것이 개별적 영혼(생명)이다. 이 생명들을 모두 합한다고 중심 불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불의 티끌들 먼지들이 불의 모습의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왜 '이뭣꼬'를 생명이라 하지 못했을까? 실증이 약했기 대문일 것이다. 그 생명의 기억을 총체를 해명하는 19세기에서 다른 사유가 등장할 것이다. / 땅(지구)의 기억도 있다. 그런데 고고학은 땅의 추억들과 사실들 사이의 접합을 실증적으로 보는 것도 19세기 전반이 아닌가? 이제 그 추억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기억현상과 비슷하게 여길 때 들뢰즈의 “만년전”이야기도 나올 것이다. (50N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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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고대편 33-457
제1부 소크라테스 이전 35-145
제2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147-342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대철학을 헬레니즘이라기보다 알렉산드리아학파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북아프리카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마케도니아의 계승이며, 파라오와 관계없다. (50MME)]
제3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대 철학 343-457
제25장 헬레니즘 세계 345-358
[왜 알렉산드리아 시대라고 하지 않을까? 아테네가 중심이 아니고 알렉산드리아가 중심인데 말이다. 그 알렉산드리아가 얼마나 융성했으며, 팔루스 신앙이 강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글을 읽었다. 아마도 시대 비교 상 한나라 수도 장안(전202-후9년: 전한)보다 더 융성하며, 문물의 교역상 당나라 수도 장안(618년-904년)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50nmb)]]
고대 그리스어를 사용한 지역의 역사는 세 시기로 나누어서 구분할 수 있다. 처음은 자유도시국가시대 .. 다음은 마케도니아 퉁치시대[알렉산드리아 시대] ... 로마제국 시대이다. 이 세 시기 가운데 첫째 시기의 특질은 자유와 무질서이며, 둘째 시기는 그 굴종과 무질서이고, 셋째 시기는 굴종과 질서이다. (345) [러셀의 견해는 로마의 제국이 질서라고 본 것인데 무리하다. 일반적으로 사유의 다양성, 일의성의 사유, 실용의 사고로 나눌 수도 있다. 일의성은 보편성이란 의미보다 방향에 대한 일의성이다. (50NMC)]
철학에서 이 같은 세계주의적 견해는 스토아 철학에서 시작되었지만 실제는 이미 알렉산더부터 시작되었다. (347) [나로서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혼혈인 안티스테네스(퀴니코스학파)에서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 특히 후자는 평등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50NMC)]
알렉산더가 죽자, ... 유럽 지역[마케도니아 본토]은 결국 안티고누스(Antigonus, Ἀντίγονος)의 후손이 차지하고[왕위 계승전쟁 이후],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Πτολεμαῖος)는 이집트를 차지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셀레우쿠스(Seleucus, Σελευκος)는 여러 해 동안 전쟁을 한 끝에 아시아를 차지하였으며, .. 안티오크에 도읍하였다. (349-350)
당시 불교는 활발하게 전도를 펴 나갔다. 불교의 성자인 아소카(Asoka, 전264-228)왕은, 선교사들을 모든 마케도니아 왕들에게 보냈다. (350)
헬레니즘과 유대인 사이에 일어난 첫 충돌은 매카비 서(The Book of Maccabees)에 나와 있다. 이것은 마케도니아 제국의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재미있는 사적이다. 나는 이것을 나중에 ‘기독교 기원과 성자’에서 동시에 다루려고 한다. 그리스인은 다른 어디서도 그처럼 완강한 저항을 받지 않았다. (351)
기원전 3세기에 가장 훌륭한 성공은, 헬레니즘 문화의 측면에서 보면 알렉산드리아였다. ..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은 학문의 수호자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수학은 주로 알렉산드리아인들이 숭상하였다. (351) [러셀의 수학에 편중이다. 알렉산드리아 3학파가 공존했는데, 하나는 수학(천문학, 점성술), 다른 하나는 의학(연금술), 그리고 이집트 전통의 판관이다. 이 판관은 로마에까지 저항하다가 사라지고 문자도 사장된다. (50NMC)] [에라시스트라(fr. Erasistrate de Ceos ou Erasistrate de Julis(Ioulis), 전310경- 전250경), 별명 "l'infaillible"(화타: 다고침) 그리스 의사. 헤로피로스(Herophile)과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치하 의학 알렉산드리아 학파 창설자.]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ène, Ἐρατοσθένη, 전284-전192)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도서관 관장이었다. (352)
그들은 선배들과 달리 ... 보편적인 철학을 내세우지 못하였다. .. 유클리드(Εὐκλείδης 전330-270경), 아리스타르코스(Ἀρίσταρχος, 전310경–230), 아르키메데스(Ἀρχιμήδης, 전287경-212), 아폴로니우스 등은 저마다 수학가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철학에서는 독창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352)
이집트에서는 관개사업이나 배수사업에 있어서 놀라운 업적이 고용된 전문가들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군인, 행정가, 의사, 수학자, 철학자들이 있었으며, 아무도 혼자서는 동시에 이 모든 전문 부분을 겸하여 해낼 수 없었다. (353)
헬레니즘의 세계에서는 신전들이 은행 일을 대신하였다. 그들은 금을 보유하고, 신용 대부를 하였다. 기원전 3세기 초에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에서는 10퍼센트의 이자로 돈을 꾸어 줬다. 그 전에는 더 비싸게 받았다. (354)
그리스인들의 마음 속에 가장 깊은 인상을 주게 된 것은 바빌론과 칼데아인(Chadean)들의 종교 였다. ... 그들에게서 받아들인 것은 주로 점성술과 마술이었다. (356-357)
길버트 머레이(Gibert Murray) 교수는 .. “점성술이 그리스인들의 마음에 들게 된 것은, 마치 새로운 병이 어떤 멀리 떨어진 섬사람들에게 덮치듯이, 디오도루스가 설명한 오지만디아스(Ozymandias)의 무덤은 점성술의 상징으로 덮혀 있으며, 콤마게네에서 발굴된 안티오코스 1세의 무덤도 같은 종류의 것이다. 군주가 별이 자기를 감시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여튼 누구나 이 병균에 대해 무방비 상태였다.”(357) - 머레이(Gilbert Murray), 그리스 종교의 다섯 단계(Five Stages of Greek Religion), 177-178쪽.
그리스인은 점성술을 알렉산더 시대에 처음으로 칼데아인 베로수스라는 자에게서 배운 것 같다. 그는 코스(Coes)에서 가르쳤으며, “벨을 번역했다”. - 머레이 교수는 말하기를 “이것은 그가 ‘벨의 눈’(The Eye of Bel)이라 불린 글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글은 아수르 바니 팔(Assur-bani-pal, 전686-626)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70서판 속에 있으며, 기원전 3000년에 사르곤(Sargon) 1세를 위해 쓴 글이다.” (앞의 책, 176쪽) (357)
이 시대의 사람 메난더는 말하고 있다.
나는 많이 알고 있다. / 천성을 불량하기 않지만 / 부득이 그렇게 된 사람들
이 말은 기원전 3세기의 도덕적 특징을 요약해 보여 주고 있다. 소수의 예외는 있겠지만, 이 소수의 사람들도, 희생보다 공포를 더 느끼고 있었다. 사람의 목적은 어떤 적극적인 선을 행하기보다 불행을 피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형이상학은 뒤로 물러나고 이제는 개인 윤리가 중요성을 띠고 등장했다. 철학은 이미 용감한 몇몇 진리의 탐구자에게 앞장서는 불기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생존을 위한 투쟁의 뒤를 따르면서, 약한 자와 부상자를 주워 태우고 있는 야전 병원차이다. (358).
552 공자(孔子, 전552-전479) 성인(聖人) 유가의 창시자.
55? 노자(老子 ?-?) 도가의 창시자.
521 안회(顔回, 전521-전490)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의 현인(賢人). 아성(亞聖) 안회지락(顔回之樂)
506 증삼(曾參, 曾子, 전506-436)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유학자. 자는 자여(子輿) 효심이 강하다.
492 자사(子思 B.C. 492-432) 중국 전국 시대 노(魯)나라의 유학자. 공자의 손자, 이름은 급(伋).
478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가 죽은 다음해 공자의 옛집을 묘(廟)로 개축하여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480 묵자(墨子, BC 480-BC 390)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상현(尙賢), 상동(尙同), 겸애(兼愛), 비공(非攻) - [약간은 스토아적 발상이 있다.]
440 양주(楊朱, BC 440 ?~BC 360 ?) 중국 전국시대의 학자. 자기 혼자만이 쾌락하면 좋다는 위아설(爲我說), 즉 이기적인 쾌락설을 주장했다. -[에피큐로스적 발상이 있다.]
395 상앙(商鞅, 기원395경-338년)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 진나라의 유학자이자 법가를 대표하는 중요한 정치가였다.
372 맹자(孟子, BC 372 ?-BC 289 ?) 이름은 가(軻) - 양주와 묵자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369 장자(莊子, BC 369-BC 289?) 맹자와 거의 같은 시기이다.
343 굴원(屈原, BC 343?-BC 278?) 전국시대 초나라 정치가, 비극시인.어부사(漁父辭).
298 순자(荀子, BC 298?-BC 238?) 이름은 순황(荀況),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유학자. -
280 한비자(韓非子, 280?~BC 233) 전국(戰國)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공자(公子) -순자의 제자. - 이사(李斯:BC 280경~208)도 순자의 제자였다. ]]
제26장 견유학파(Cynics)와 회의주의학파(Sceptics)[키니코스학파와 회의주의학파] 359-357
어떤 시대에는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위에서 말한 태도를 저마다 각각 달리 취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19세기 초에 괴테(Goethe, 1749-1832)는 온건파이고, 벤담(Bentham 1748-1832)은 개혁가, 셸리(Shelley, 1797-1851)는 혁명가, [이탈리아 시인] 레오파르디(Leopardi, 1798-1837)는 염세주의자였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위대한 작가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공통된 경향이 있으니, 예컨대 영국에서 엘리자베스의 치하와 18세기에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프랑스에서는 1750년경에 혁명적이었으나, 독일에서는 1813년 이후로는 국가주의적인 책체가 짙었다. (359)
철학에서 네 가지 학파가 창설된 것은 알렉산더 시대였다. 그 중에서 유명한 두 학파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다. ... 이 장에서는 퀴니코스 학파와 회의주의 학파에 대해 논하려고 한다. (361)
[퀴니코스학파]
[444 안티스테네스(Antisthène, Ἀντισθένης / Antisthénês, 기원전 444-365)(79살) 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 제자(25살 어렸다, 플라톤보다 17살 많다), 키니코스 학파 창설자. (스토아의 제논보다 109년 즉 한 세기 앞섰다.)
견유학파[퀴니코스학파]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던 안티스테네스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디오게네스가 실질적 창시자이다. 안티스테네스는 플라톤보다 나이가 약 20세 쯤 더 많았다. 그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어느 면에서 톨스토이와 비슷한 사람이다. (361)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함’을 믿고 있었다. (362)
[413 디오게네스(Diogène le cynique, Διογένης / Diogénês, 413-327; 87살) 시노페(Sinope)출신 탄생 (소크라테스 사망시 14살) 고대철학자, 키니코스학파의 대표철학자.
알렉산더가 그(디오게네스)를 찾아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단지 나의 햇빛이 가려지지 않도록 비켜 달라’고 한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363) [이 이야기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에 전해진 이야기 인데 검증 안 된 이야기라 한다.]
이 학파에 속하는 유명한 사람 중의 하나이던 텔레스(Teles)는 ‘내 아들이나 아내가 죽었다고 해서, 살아남은 나를 소홀히 할 까닭이 어디 있으며, 또 내 재산을 간수하기를 그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말한 것이다. (364) [시지프스 설화는 죽음을 재주로 표현하다가 신들에게 벌을 받은 설화이다. 장자(莊子, 전370-300년경)는 현실의 덧없음과 죽음을 과장하지 않으려 했다. 퀴니코스는 죽음 이후를 믿음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50MMD)]
[퀴레네 학파]
[435 아리스티포스(Aristippe de Cyrène, Ἀρίστιππος, 435-356)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제자. 전399년에 퀴레네 학파를 창설했다. 이 학파는 즐김주의(l'hédonisme)를 학설의 본질로 삼는다. 그의 딸 아레테(Arété de Cyrène Ἀρετή)도 이 학파 학자이며 아들 아리스티포스(Aristippe le Jeune)도 학자이다.]
[* 회의학파]
[365 회의학파의 퓌론(Pyrrhon, Πύρρων 기원전 365-275) (90살)가 태어나다.
이 네 학파 중의 하나인 회의주의는, 처음에 피론(Pyrrhon)이 제창하였다. 그는 알렉산더의 군대에 나가 있었으며, 인도까지 진출하였다. (365)
피론의 제자인 티몬(Timon, 전325경-전235)은 그리스인의 논리적 입장에서는 답변하기 힘든 지적 논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인정한 논리는 단지 연역적인 논리였다. 그리고 모든 연역은 유크리트의 기하학과 같이 자명한 어떤 일반 원리[공리]에서 시작하여야 했다. 그런데 티몬은 그런 원리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였다. (366)
[315 아르케실라오스(Arcésilas de Pitane, Arkesilaos 전315-241) 신아카데미학파에 속하며, 아카데미의 제5대 학교장 되었다. / en.Wiki 그는 중기아카데미 창설자이다. 그는 크라테스(Crates)를 계승하여 264년경에 제6대 학장이 되었다.]
[219 카르네아데스(Carnéade Καρνεὰδης, Karneadēs, 전219-128) 신플라톤주의에 속하며, 아카데미의 제10대 학교장이 되었다. <아래와 차이를 참조하라.> / 214 카르네아데스(Carnéades 전214?- 129?) 그리스의 회의학파(懷疑學派) 철학자. 스토아 철학을 연구, 그 철학을 논박하여 진위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여하한 인식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전137년까지 아카데미아 학장으로 있었다.]
[80 아니네시데모스(Enésidème ou Ænésidème, Αἰνησίδημος / Ainêsídêmos, 전80-후10) 고대회의주의 학파. 피론주의 학파 창설자. ]
철학으로서 회의주의는 한갓 의심(doubt)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단적 의심(dogmatic doubt)이라고 할 수 있다. ... 과학자는 ‘나는 그것을 이렇게 생각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 지적 호기심을 가진 자는 ‘나는 그것이 어찌하여 그렇게 되는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아내려고 한다’고 말한다. 회의주의 철학자는 말하기를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 것도 모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366)
[카르네아데스의] 강연이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바로 원로 카토(Cato)이며 그는 대담하고 엄격하며 경직되고 잔인한 도덕규범을 주장하였고, 그리하여 로마는 이것으로 카르타고를 패배시킬 수 있었다. (369)
카르네아데스 다음으로 ‘아카데미아’의 학장이 된 사람은 하스트루발(Hasdrubal)이라는 카르타고 사람이었다. .. 자기 자신이 클레이토마코스(Clitomaque, Κλειτόμαχος 186-109)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400권이 넘는 책을 저술... (371)
클레이토마코스 이후 ‘아카데미아’는 회의주의적이 아니었다. ... 그러나 회의주의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크레타인 에네시데무스(Aenesidemus, s.d.)에 의해 다시 대두되었다. (372)
고대 세계는 회의주의자들의 논의에 대해 아무 답변도 하려고 하지 않고, 옆으로 비켜버렸다. 올림푸스의 신들이 신임을 잃게 되자 동방 종교가 침투될 길이 크게 열려 있었다. (374) [그리스가 통일된 전체(전제정)을 만들지 못하여 신들의 통합의 중심을 만들지 못했다. 로마는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 함으로서 제국의 중심 축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신앙자들은 다른 중심축을 만들 것이다. 크리스트교가 성립할 것이다. (50NMC)]
제27장 에피쿠로스 학파 375-391
[[341 에피쿠로스(Epicure, Ἐπίκουρος, Epicuros. 전341-270; 71살) 탄생 플라톤이 죽은 후 6년이 지나 태어났다. 알렉산더가 죽을 때 18살이었다.
323 에피큐로스 18살 경에 플라톤주의자 팜필(Pamphile)에게 배움 - 알렉산더가 죽는 해 아테네의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난다. [이민족의 추방도 반마케도니아 운동의 일부이다]
322? 그는 타오스에서 나우시파네스(Nausiphanes)에게 철학을 배웠다.
[데모크리토스의 학설을 배웠을 것인데 그 자신은 그런 언급이 없다고 한다]
311 에피큐로스 30살, 레스보스의 미틸렌에서 가르침; 이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함
310 에피큐로스 람프사크(Lampsaque, 고대 리디Lydie 지역, 현 터키)에서 학교를 개설하다.
306 에피큐로스 아테네에서 학교(Jardin)을 열다.
186 로마의 원로원은 186년에 피타고라스 학파의 책들을 없애버렸으며, 그러고 나서 173년과 161년에는 에피큐로스 사상도 쾌락주의와 정치적 포기를 함축하고 있다는 이유로 금지하였다. 이후 스토아학파가 중심이 되다. (스키피오 가문이 스토아를 수용한다)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 “그들(분명히 스토아학파의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에피쿠로스는 그의 모친과 함께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정화주문(淨化呪文)을 외워, 비참한 몇 푼의 돈으로 초급 교사 노릇을 하고 있는 부친을 도왔다.” (375-376) [라에르티오스가 스토아를 빌어 악평한 것이다. / 자기 사상의 정당화가 잘 안될 때, 반대파를 반대파의 반대자를 들먹여 악평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특히 도덕론자들(또는 amoraliste)이 이런 짓을 잘 한다.]
에픽테투스는 에피쿠로스에게 “먹고, 마시고, 성교하고, 배설하고, 코고는 것 – 이것을 당신이 값있는 생활이아라고 생각하는 전부였다.” - 에픽테투스 논문집 제2권 20장. (376)
그는 한 채의 집과 정원을 갖고 있었으며(이 정원은 집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곳에서 강의도 하였다. (377) - [정원(jardin, Graten) 유치원은 이 이름에서 유래한다.]
학원을 아테네로 옮긴 후 .. 제자, 친구들, 그들의 자식, 노예, 창기(娼妓)도 있었다. ... / 이 집단생활은 매우 검소하였다. .. 그들이 먹고 마신 것은 주로 빵과 물이었다. 에피쿠로스는 그것으로 완전히 만족하게 생각하였다. (377)
에피쿠로스는 한 평생 건강이 좋지 못해 시달려 오면서도 큰 인내력으로 참아나가는 것을 배웠다. 인간은 고문대 위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것은 스토아가 아니라 에피쿠로스였다. (378)
에피쿠로스가 쓴 300권의 저서가 분실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이 모자랄 수밖에 없으며, 저서 중에는 몇 장의 편지와 단편들 및 ‘기초원리’에 관한 설명문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지만 우리는 루크레티우스를 이용하여 보충할 수 있다. (379-380)
에피쿠로스 철학은 ... 첫째 목적은 마음의 평정(ataraxia)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는 쾌락을 선이라고 보았으며... “쾌락은 축복된 삶의 처음이자 나중이다” .. “모든 선의 시초요, 근원은 위의 쾌락이며 지혜와 문화까지도 이 쾌락에서 비롯된다.” (380)
에피쿠로스는 능동적 쾌락과 수동적 쾌락, 동적인 쾌락과 정적인 쾌락을 구별 .. 후자를 추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 육체가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에는 아무 고통도 일어나지 않는다. (380-381)
그러므로 실제로 적극적인 쾌락을 취하는 것보다 고통을 피하는 것을 현인의 목표로 간주했다. (381) - 베일리(Cyril Bailey), 그리스 원자론자와 에피쿠로스(The Greek Atomists and Epicurus, 1928), 249쪽
그가 공적(公的) 생활에서 떠나라고 충고한 것은 그의 원칙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말이라고 하겠다. 누구나 권력을 얻게 되면, 자연히 그를 부러워하며, 따라서 그를 해치려고 하는 자의 수도 점점 늘어갈 터이니 말이다. (381)
에피쿠로스의 이론 철학은 공포를 피하는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 공포에는 두 가지 큰 원인이 있는데, 하나는 종교이고 또 하나는 죽음이다. 이 두 원인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종교는 죽음이 불행임을 고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신이 인간사에는 간섭하지 않으며, 또 영혼은 육신과 함께 멸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형이상학을 세웠다. (383)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에서는 필연성의 개념이 종교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 원자는 무게를 갖고 있으며, 계속해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자는 때로는 자유의지[우연]와 같은 작용을 받아, 조금씩 빗나가서 직선적인 하향궤도에서 떠나게 된다[오늘날에도 에딩톤(Eddington)은 이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하여 비결정론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다른 원자와 충돌을 일으키며 여기서 점점 발전하여 와동운동(渦動運動)[clinamen]이 된다. 이것은 데모크리토스의 주장과 비슷한 것이다. (384) [데모크리토스의 선회운동(旋回運動, cyclic motion), (이 책, 129)]
영혼은 물질이다. 숨결이나 열의 분자와 같은 그런 분자들로 되어 있다(에피쿠로스는 숨결이나 바람은 신체에 있어서 공기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은 운동하고 있는 공기는 아니었다). 영혼의 원자는 신체 전반에 걸쳐서 퍼져있다. (394)
에피쿠로스는 신들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그러나 신들은 존재하지만, 인간사에 관여하여 스스로 괴롭히지는 않는다고 믿고 있다. ... 물론 점이나 전조 또는 이와 유사한 것들은 전혀 미신에 지나지 않으며, 섭리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385)
그러므로 신들의 진노를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으며, 사후(死後)에 저승에 가서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까닭도 없다. (385)
에피쿠로스는 매우 유명한 제자[계보]를 두었다. 시인 류크레티우스(Lucretius, 전99-55)가 바로 그이다. ...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고대의 도덕과 종교의 부흥을 일으켰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은 인기를 잃게 되었으며, ... (386)
에피쿠로스 철학이 ‘르네상스’ 이후 독자들에게 알려진 것은 주로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통해서였다. 독자들에게 인상적인 것은, 그의 사상이 유물론을 주장하고, 신의 섭리와 영혼 불멸을 반대하여 기독교와 상치되는 점이었다. (389) [러셀은 이 책을 쓰던 시절(전쟁시)에 이미 크리스트교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28장 스토아 철학 392-418
[[335 제논(Zenon, Ζήνων, 전335-264) 퀴프로스(Chypre (Chypre, Κύπρος,)의 키티움(Cition, gr. Κίτιον, lat. Citium) 출신,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 크라테스에게 배웠다. (아리스토텔레스 사망시 제논은 13살, 디오게네스(87살에 사망) 사망시 제논 8살 정도였다.)
312 스토아학파의 제논 아테네에 오다.
301 스토아학파 제논(34살), 회랑(Portique) 학교 세움 ]]
스토아 철학은 에피쿠로스학파와 같은 시대에 대두되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보다 그 역사는 더 길며, 그 학설도 에피쿠로스학파처럼 고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 초 이 학파의 창설자인 제논(Zenon)의 가르침은, 서기 2세기 후반기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가르침과는 같지 않다. 제논은 유물론자로서 주로 그의 학설을 퀴니코스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을 결합한 것이다. (392)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은 거의가 시리아 인들이었으며, 후기 스토아철학자들은 거의 로마인들이었다. (392)
소크라테스는 스토아 철학의 전 역사를 통하여 주요한 성자였다. 재판정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 도망가라는 권고의 거절,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침착성,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를 당하는 자보다 더 많을 해독을 스스로 받게 마련이라는 주장 등, .. 그리고 더위나 추위에 대한 그의 무관심[무감동], 음식물과 의복의 검소함, 육신의 안락을 완전히 초월한 점 등도 다 그러하다. (393)
이 학파에서 한결같이 주장해 온 주요한 학설은 우주적인 결정론(決定論)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것이다. 제논은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기의 길은 자연법칙에 의해 완전히 고정되어 있다고 보았다. 오직 불(火, 화)만이 있었고, 나중에 다른 원소들이 – 공기 물 흙 등의 순서로 – 점점 생겨난다. (394) [자연에 우연이 없다는 필연은 어쩌면 플라톤의 아낭케와 연관있을 것이다. 왜 스토아가 소크라테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느냐에 관한 점에서 아낭케가 소크라테스에서 기원인지도 모른다. 영혼이 아낭케 아닐까? / 이 결정론과 필연은 스피노자에게 이른다. (50NMD)]
신은 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으며, 바로 세계의 영혼이다. 우리는 각자가 다 각각의 신의 불(神火, 신화)의 일부분을 그 속에 지니고 있다. 만물이 모두 각각의 자연이라고 부르는 단일한 체계의 한 부분이다. 각 개인의 삶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에 선이 되며, 어느 의미에서는 모든 생활이 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395) [플라톤이 국가에서 우주발생론으로 다음에 법률로 가는데 비해, 스토아는 우주론에서 개인으로 간다.
악한 자들은 강요에 의해 신의 법에 따르긴 하지만, 자발적으로 복종하지 않는다. 클레안테스(Cleanthes)의 비유에 의하면, 그들은 마치 수레에 매어 놓은 개와 같아서, 그 수레가 가는 곳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396)
다른 사람은 다만 나의 외적(外的)인 것에 대해서만 영향력을 갖는다. 덕이야 말로 유일한 참된 선이며, 이것은 오로지 그 개인에게 [내적 필연성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저마다 지상의 욕망에서 벗어나게만 되면, 각자 완전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396) [러셀이 악의 문제를 끌어들이는데, 악은 내적 필연성에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자연의 필연성이 아니라 외적(사적) 이익에서 악(목적)이 생겨난다. ]
덕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개념에는 일종의 냉담(冷淡, apatheia)이 포함되어 있다. .. 모든 감정을 다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감정 배격]. 성자는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 우정에 대해서는 에피쿠로스가 높이 평가하고 있으나[아리스토텔레스도], 여기서는 다만 용인될 뿐이다.(397)
스토아 철학자들도 원리로서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원리는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 취했을 것이다. (398) [지혜에 대한 열망으로써 사랑, 즉 자아와 타인의 정체성을 완전성으로 향하는 열망으로써 사랑은 소크라테스의 것이다. 퀴니코스를 거쳐서 스토아로 전승된 것이다.]
제논은 신(神)을 불(火, 화)과 같은 ‘세계 정신’이라 정의 한 것 같다. 또 신은 하나의 물체이며 실체인데, 이 우주 전체가 신의 실체를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398)
제논은 신들을 위해 신전이 필요하다고 보지 않았다. “신전을 지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신전은 별로 큰 가치를 가진 것도 아니며, 거룩한 것도 못 되기 때문이다. 건축가나 기술공들이 만든 것이 그렇게 큰 가치가 있고 거룩할 수 없다.” 키케로에 의하면 제논은 별들이 어떤 신령한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399) [키케로의 해석으로 제논이 점성술을 믿었다고 하나, 점성술이라기보다 미비한 우주발생론의 관심에서 별을 불과 연관지어 생각했을 수 있다.]
제논의 후계자인 아소스의 클레안테스(Κλεάνθης, 전331경-전232)는 주로 두 가지 일로 유명하다. 첫째로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Ἀρίσταρχος, 전310경-230)가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지 않고,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본다고 해서, 그 불경건에 대하여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요. 둘째로 제우스에게 바친 그의 ‘성가’이다. .. “오 제우스[신 불]여, 운명[숙명]이여, 날 인도하소서! / 당신이 무슨 일로 날 보내시든지, 날 인도하소서, /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따르겠나이다./ 설사 의혹을 느끼더라도,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따르렵니다.” (399-400) [나로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연상하게 한다. 그는 오류가 있더라도 믿는다고 했지만 말이다. /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연관있는 학자들이 천문학과 기하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덕분이 아닌가 한다. ]
클레안테스의 뒤를 물려받은 크리시포스(Chrysippos)는 705권이나 되는 많은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 스토아 철학을 조직적으로 또 현학적(衒學的)으로 만들었다. 그에 의하면, 제우스, 즉 “최고의 불(Supreme Fire)만이 불멸이며, 다른 신들은 해와 달도 포함하여,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이라고 한다. (400)
인간이 죽은 후에도 영혼이 살아남아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었다. 클레안테스는 모든 영혼이 다음에 오는 대화재(大火災) 때까지 살아남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크리시포스는 이것은 단지 현인의 영혼에 대해서만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400)
크리시포스는 실상 논리학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가언적(假言的) 삼단논법과 선언적(選言的) 삼단논법은 ‘선언(選言)’이라는 말과 함께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문법에 대한 연구와 명사 변화의 ‘격’[declinaison]을 알아낸 것도 그들이었다. (400)
[크리시포스(또는 제논)에 의하면] 철학을 한 과수원이라고 본다면, 논리학은 그 과수원의 울타리 같고, 자연학은 과수원과 같으며, 윤리학은 열매와 같다고 한다. 철학을 계란에 비유하면, 논리학은 계란의 껍질과 같고, 자연학은 흰자와 같으며, 윤리학은 노른자 격이라고 한다(바르트, 앞의 책). (401)
[안티파트로스(Antipatros ou Antipater de Tarse, Ἀντίπατρος, 전성기 전150-129) 스토아 철학자. 창시자 제논의 사상을 잘 표현하고자 시도한 자. 디오게네스 드 바빌론(Diogène de Babylone)의 제자, 파네티오스(Panétios de Rhodes)의 스승, 카르네아드(un adversaire de Carnéade)의 반대자. 세계에 관하여(Sur le Monde (7 livres), 존재에 관하여(Sur l'être), 영혼에 대하여(De l'Âme) [스토아 4대학당장] ]] [(레셀이 빠뜨린 인물이다.)] [여기까지 전기 스토아]
크리시포스 이후에 스토아 철학은 두 중요한 인물, 즉 파네티우스와 포시도니우스에 의해 상당히 변모되었다. 파네티우스는 플라톤주의의 요소들을 많이 도입하고 유물론을 버렸다. 그는 스키피오의 친구로서, 키케로에게 영향을 끼쳤다. 스토아 철학은 즈로 키케로를 통하여 로마인들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키케로는 로도스에서 포시도니우스로부터 철학을 공부했으며, .. 포시도니우스는 파네티우스에게 배우고.. (401) [이로부터 중기 스토아 철학이라 부른다.]
포시도니우스(Ποσειδώνιος, 전135-전51)는 시리아의 그리스인이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이 멸망했을 때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서방지역으로 여행 .. (401) / ... 태양의 거리에 대한 그의 추산은 고대에서 가장 정확한 것이었다. ... (402) / 그는 역사가 이기도 하였으며, 폴리비오스(Polybios)의 역사를 계속해서 써 나갔다. (402)
영혼과 사후의 삶에 대한 .. 파네티우스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흔히 주장하듯이 영혼은 신체와 함께 소멸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포시도니우스는 이와 반대로 영혼은 계속해서 공중에서 생존한다고 하였다. 영혼은 대체로 세계의 다음번 대화재 때까지 하늘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402)
비반(Bevan)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오르페우스교 개념의 이런 재생이나 신피타고라스주의(Neo-Pythagorean) 신앙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포시도니우스는 그노시스주의(Gnosticism)에 대한 길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402-403)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철학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초기의 스토아철학자들 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세 사람이 있다. ... 세네카, 에픽테투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들이다. 한 사람은 관리이고 다른 한사람은 [해방]노예이며, 또 한 사람은 황제였다. (403)
[[65 네로의 스승 세네카(Sénèque, Lucius Annaeus Seneca, av. 4.-ap. 65)와 세네카의 조카 루칸(Lucain, 39-65) 처형.
50 노예출신 에픽테토스(Epictète, Ἐπίκτητος, 50-125/30) 노예출신 스토아 철학자. 그의 제자 아리아노스(Arrien, en lat. Flavius Arrianus Xenophon, en gr. Ἀρριανός, 85경-146경)이 Les Entretiens(διατριϐαί [diatribaí]), Le Manuel d'Épictète(Ἐγχειρίδιον Επικτήτου [Enchiridion Epiktetou]) 두 권을 펴냈다.
121 아우렐리우스(Marc Aurèle,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121–180), 로마 황제, 스토아철학자. 재위(161-180)]]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공적(公的)으로는 부(富)를 멸시하였지만, 많은 재물을 모았다. .. 그는 이 돈을 다 영국에서 고리대금으로 벌었던 것이다. 디오(Dio)에 의하면 그가 받아들인 비싼 이자가 그 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403)
시인인 그의 조카도 함께 같은 죽음을 당하였는데, [네로의 스승인] 그도 자기의 시를 읊으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404)
에픽테토스(Epictetus, 후60?-100?) .. 그는 에파프로디토스의 노예였으며, 후에 네로의 자유인이 되어 장관까지 지냈다. .. 그 후에 도미티나투스 황제는 지식인을 싫어하고 철학자는 모조리 귀양을 보냈다. 그리하여 에픽테토스는 에피루스의 니코폴리스에 숨어 살면서, ... (40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 .. 그의 치세하에는 많은 재난, 즉 지진, 유행병, 어려운 전쟁, 무력 폭동 등이 계속해서 밀어닥쳤다. .. 명상록(Meditations) .. 그의 아들 코모두스(Commodus)는 최악의 황제 중의 한 사람이었다. (405)
스토아의 윤리는 에픽테투스나 마르쿠스 아우렐레우스의 시대에 적합하였다. 그 이유는 이 철학이 가르치는 복음은 희망의 복음이라기 보다 인내(忍耐)의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406-407)
그리스와 로마 문명은 농촌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도시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런데 도시에도 심한 빈곤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빈민들이 있었으며, 거기에느 거대한 노예 계급도 있었다. (407)
에픽테투스는 “너는 시체를 메고 다니는 한 작은 영혼이다. (407)
에픽테투스의 가르침을 기록한 글에서 우리는 진지함과 동시에 단순성을 찾아볼 수 있다. (410)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의 신의 도성은 부분적으로 이교도인의 황제[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411)
스토아 철학자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한가지 난점이 있다. 그것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를 융화시키는 문제이다. ..// 우주는 결정론인 하나의 전체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 앞에 생긴 원인들의 결과이다. 그러나 한편 개인의 의지는 자율적이다. 따라서 아무도 외적 원인에 강요되어 죄를 범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412)
그는 아래와 같이 답변하였을 것이다. 우주는 하나의 단일한 생명체이다. 그리하여 한 영혼을 갖고 있으며, 이것을 또한 한 이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존재자는 전체로서는 자유롭고, 신은 처음부터 그 자신이 고정된 일반법칙에 따라서 행동하도록 결정해 놓았다. .. 인간의 한 부분은 불(火)이고 또 한 부분은 보다 낮은 단계에 있는 흙이다. 그가 불의 상태에 있을 때 그는 신의 부분이다. .. 신의 의지는 자유로우므로, 그 경우에는 인간의 의지도 자유로운 것이다. (413)
우리는 이제 둘째 모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스토아 철학자는 한편으로 남에게 은혜를 베풀 것을 주장하면서 이론적으로는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두드러진 모순으로, 또한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일종의 기독교 도덕주의자까지도 포함하여) 독특한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은 그들이 두 가지 체계의 윤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을 위한 최상의 윤리와 ‘율법 없는 비천한 자’들을 위한 저급한 윤리가 그것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기 자신을 위주로 생각할 때에는, 행복이나 그 밖의 세속적인 선(善)은 무가치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행복을 원하는 것은 자연에 위배될뿐더러, 신의 뜻에 복종치 않음을 뜻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415) [러셀뿐만 아니라 크리스트교인들의 견해인 것 같다. 스토아에게 자연에 따르는 것은 선과 악의 구별이 있기 이전이다. 즉 행위자체에 선악이 없다. 선과 악은 개별적 이해관계에서 생기는 것이다. 베푸거나 은총은 자연의 자기 법칙에 맞는 것이며, 자연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 스토아의 행복(지고지선)이다. / 종교적 의미에서 지성적 사고에 대해 자연적(본능적) 사유가 인성을 창발하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자연적 사유의 일부이다. (50NME)]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소중한 것은 주로 윤리문제였지만, 다른 분야에서 그들의 가르침이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식론(認識論)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법과 자연권(natural right)에 관한 학설이다.
인식론에서, 플라톤과 반대로[전복(顚覆)], 그들은 지각을 용인하였다. (416)
제논의 직접 제자이던 스토아 철학자 스페루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왕이 베푸는 연회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왕은 그 학설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초로 만든 석류를 내놓았다. 그러자 그 철학자가 그것을 집어먹으려고 하였다. 왕이 이것을 보고 껄껄 웃자, 이 철학자는 대답하기를, 자기는 그것이 참된 석류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런 궁중에서 베푸는 식탁에 먹을 수 없는 것은 놓여 있지 않으리라고 생각 했다. (416-417)
그들의 인식론에는 또 한 가지 주장이 있다. .. 그것은 본유(本有)관념과 본유원리에 대한 그들의 신조이다. 그리스 논리학은 완전히 연역적이었다. 거기서 첫째 전제가 언제나 문제된다. 이 전제는 적으로 부분적으로는 일반적이어야 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스토아철학자들은 자명한 것이며, 누구나가 다 인정하고 있는 어떤 원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417) [생명의 원리 같은 것이다. / 스토아학파는 직관주의 수학의 공리같은 일반성 또는 원리가 있다고 보았다.]
자연법(Jus naturale)과 인간법(Jus gentium)을 구별하게 된 것은 스토아 철학자들이었다. 자연법은 모든 일반적인 지식의 기초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는 제일원리에서 파생된 것이다. (417)
(13:19 50NME) (13:37, 50NMF, NM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