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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론들에 관한 과목(Leçon sur les théories de l’âme, 1894)
벩송, in 벩송 강의록3(Bergson Cours III, 1995 앙리4세 고등학교, 1894, pp 199-251.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lat.. Plotinus 205-270) 이집트 리코폴리스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리아 학파. 작품으로 엔네아데스(Les Ennéades, Ἐννεάδες, 254-270). 그는 세계에 대한 이해로서 세 가지 기저(trois « hypostases »)를 깨닫게 되었다. 일자(L'Un, ἐν), 지성(L'Intelligence, l'Intellect, νοῦς), 영혼 (L'Âme, ψυχη) / [이 말로 보면 상층의 일자, 중간에 점으로서 지성, 심층의 영혼이다. / 학설상 일자에서 누스로 그리고 영혼으로 연결되면 누스는 자연 자체가 된다. 누스 다음에 로고스를 넣으면 지식일반 그리고 영혼이 인간 인식(과학)이 될 것이다]]
[그의 스승은 암모니오스 사카스(Ammonios Sakkas, Ἀμμώνιος Σακκᾶς; 175경-242),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신(新)플라톤주의를 제창한 플로티노스의 스승이다. 사카스란 짐꾼(un portefaix) 같은(짐꾼 출신)[바랑을 맨] 걸승(« Porteur-de-sacs » (Sakkas, pour sakkoforos σακκοφόρος)의 의미이다. / 제베르크(Erich Seeberg, 1888-1945)는 그가 인도의 사키야("Śākyas" 갈대)족, 즉 싯달다의 종족에서 왔을 것이라고 한다. - 제베르크(Erich Seeberg, 1888-1945) 독일 복음신학자. 교회이론가.]
제3과 플로티노스의 영혼론 §3 La théorie de l’âme chez Plotin 213-218
정신적 영혼의 용어를, 다시 말하면 물질로부터 구별된 비너비의 원리의 용어를 그리스 철학에서 재발견하기 위하여, [우리는]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을 건너 뛰어야 하고,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단번에 옮겨가야 한다.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Les Ennéades, Ἐννεάδες, 254-270) 4권에서, 신체와 영혼의 구별이 마지막으로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정확성을 표현하고 있다]. 우선[첫째로] 생명과 사유의 원리인 영혼은 신체와 동일한 자연(nature 본성)일 수 있을까? 아니오, 왜냐하면 신체의 자연[본성] 자체는 단순성(la simplicité)을 배제하기 때문이고, 영혼은 필연적으로 단순(simple)하기 때문이다. 원자들로 형성된 영혼을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사유의 단위(l’unité), [즉] 신체의 삶의 단위 자체는 설명될 수 없게 된다.
더하여[둘째로], 만일 영혼이 신체와 동일한 본성이라면, 영혼은 신체처럼 항상 운동 중에 있고, 또 항상 영혼은 흘러간다. [그러면] 기억은 무엇이 되는가? 결국 셋째로 영혼이 신체의 자연으로부터 있었다고 한다면, 지성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는데, 왜냐하면 지성은 비형체적 사물들의 직관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도, 기억도, 지성도 물질의 성질들로 환원할 수 없다.
사람들은 영혼이 조화(une harmonie)이며, 신체의 조화이라고 말할 것인가? 플로티노스가 말하기를 이 경우에 영혼은 결과이지 원인이 더 이상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것(영혼)은 하나의 원인이고, 그 때에 그것은 오직 신체 운동들의 원인일 것이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이렇게도 말할 것인가? 즉 영혼이란 잠재태로 생명을 지닌, 유기체화된 신체의 완전태(l’entéléchie)이라고?. 그러나 영혼이 신체의 작동이라면, 신체 속에서 표상되는 능력(faculté)을 가지지 못하리라.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기관들의 모든 능력들을, 어떻게 영혼이 [즉] 회상[추억]하고, 추론하고, 사유할 수 있을 것인가? 플로티노스가 말하기를 이러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만큼] 그 만큼이나 진실하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체의 완전태인 영혼에다가 불멸의 사유, 누스(un νοῦς)를 결합시켜야만 한다고 한다. 신체와 구별된 누스는 밖으로부터 신체에게 오고, 불가사의하게 신체에 도입된다.
이때부터 하나의 결론이 가능하게 된다. 영혼은 불가분의 본질(une essence)이고, 신체 속에 현재하고 있고, 심지어 신체의 각 부분 속에 현재하며, 게다가 부분들의 각각 속에 완전히[전체로서] 있다는 것이다. 플로티노스가 말하기를, 전체 속에 부분처럼, 실체 속에 성질처럼도, 심지어는 질료 속에 형상처럼, [그렇게] 영혼은 신체 속에 있지 않다. 감각적 질서에서 빌려온 어떠한 이미지도 어떠한 비유(métaphore)도 영혼과 신체의 연관을 해명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사람들은, 신체 속에 영혼이 아니라 영혼 속에 신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영혼 속에 신체 있음]
우리는 이 마지막 관점에서 멈추자. 이 관점이 중심이며, 이것이 아마도 영혼에 관한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의 학설의 중요한 생각이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온선(le Bien)은, 그가 말한 대로, 일자(l’Un)은 지성과 더불어 관념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며, 지성은 관념들의 자리(le siège, 본거지)이라는 것을 [우리가] 상기해야한다. 또한 지성은 자기 차례가 되어서는 세계의 영혼을 생겨나게, 이 영혼은 생명의 원리이자 활동성의 원리이며 전 자연의 원리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다른 말로하면, 제일 원리는 온일자(l’Un), 절대적으로 단순하다(simple).
절대적으로 단순한 온일자로부터 사람들이 다양한 일자(l’Un multiple)라 부를 수 있을 것이, 즉 관념들의 세계가 도출된다. 그러나 순수 관념들의 본거지인 지성[누스]은, 그 사물들로부터 아직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감각적 사물들을 직접적으로 생겨나게 할수 없다. 매개자가 필요하다. 즉 감각적 세계에 전달할 또는 오히려 지성적 빛을 감각적 사물들로 밝게 할 제3의 원리가 필요하다. 다른 말로하면 원리의 꼭대기는 아직 지성적이지만 그것 토대에는 물질성으로 되어 있는 하나의 원리가 필요하다. 이 원리는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세계의 영혼이라 불렀던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 즉 누스(le νοῦς)가 다수의[다양한] 관념들로 빛나게 되는(s’épanouir, 펼져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처럼 그 영혼은 나누어지지 않고서 다양한 개별적 영혼들로 굴절 된다. 저 끝에서 모든 영혼들 각각은 보편적 영혼 안에서 수렴하고 동일화되러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들은 보편 영혼으로부터 구별된 채 있으며, 또한 영혼들 서로 서로도 구별된 채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다양성[다양체]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 그것들의 다양성은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보편적 영혼의 동일한 본질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다. 이 보편 영혼은 자기의 풍부성 때문에, 마치 지성이 관념들로 빛나게 되듯이, 다수의 영혼들로 마땅히 빛나게 된다. 플로티노스처럼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치 [퍼져나가는] 빛살들처럼 개별영혼들을 표상하게 되는데, 빛살들이 초점[중심]에서는 뒤섞여 있으면서 멀어짐에 따라 구별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보편 영혼의 유출들(des émanations)이다. 유출은 보편영혼에 의해 생겨나지만, 유출은 보편영혼보다 뒤에 있는 것이 아니며, 마치 빛의 갈래[빛살]들은 빛의 근원보다 뒤에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유출들[펼침들]이 구별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유출하는[넘쳐나는] 초점 없이는 그 유출들이 현존하지 않을 것이며, 존속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든 빛의 근원인 빛의 초점으로부터 멀어짐에 따라서, 빛살들이 갈라짐에 따라서, 그것들의 섬광은 감소하고, 생겨나는 어둠(그림자)이 이것들 사이에 끼어든다. 결국 빛살들은 암흑(les ténèbres)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 밤, 이 어둠, 원초적 현존도 아니고 빛의 부정인 한에서만 있는 이 칠흑(ctte obscurité), 이것이 물질(la matière)[ὕλη]이다.
이미 플라톤이 말했듯이, 물질은 비존재(le non-etre, τό μή ὄν)이며, 순수하게 비결정된 것(le pur indéterminé)이며, 관념과 대조에 의해서 즉 관념과 대립(반대)에 의해서만 있는 무엇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생각을 좀 더 깊이 파고들면서, 물질(la matière)을 순수 잠재태(la pure puissance)라고 정의했다.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은 순수물질 속에서 현실적으로도 잠재적으로도 형상을 수유하지 않는 어떤 순수 권능(une pure puissance)을 보았다. 왜냐하면 존재는 자기의 규정들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고, 순수 비결정인 물질은 진실로 있지 않음(non être)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물이 [빛의] 있음(être, 존재)이 모자라는 만큼이나, 그만큼 더 물체적이거나 물질적이다. 그것의 물질성은 그것이 있음의 결핍을 표상하고 측정한다. 그리고 만일 사람들이, 갈라지고 약화되면서 마침내는 칠흑 속에 사라지는 빛살들처럼, 개별 영혼들을 표상한다면, 사람들은 이 칠흑이 사물들의 증가하는 물질성에 정확하게 응답한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물질성 속에 개별 영혼들은 점점 사라져 간다.
여기에서 어떤 의미(sens)에서 플로티노스는 신체가 영혼 속에 있고, 영혼 속에 신체가 있지 않기를 바랐는가? 따라서 실재적으로 현존하는 영혼이 있고, 그러한 한에서 영혼은, 일자로부터 넘쳐 나온 지성 그 자체, 즉 누스(le νοῦς)의 늘임(延長, 연장)인 셈이다. 영혼은 실재적으로 현존하며, 오히려 신체는 그자신의 모든 권능들을 실현하기위하여 영혼을 갈망하는 그 무엇을 재현한다.
덧붙여야 할 것이 있는데, 플로티노스는 도처에서 똑같은 투로 매끈하게(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지 못하였다. 그리고 심지어는 영혼과 구별되는 어떤 것이라는 방식으로 영혼에 대하여 신체를 유기체화하는 것이라고 매우 자주 말했다. 영혼은, 화가가 자기 작품을 제작하듯이, 자기 신체를 다룬다고 한다. 그럼에도 차이가 있는데, 영혼이 노력도, 더듬기도, 저항도 알지 못하지만, 물질이 예술가에 저항하듯이 물질은 영혼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플로티노스는 신화적[우화적] 형식으로 제시할 것인데, 영혼들이 하늘로부터 물질 속으로 던져지고[들어가서], 거기에 다소 깊숙이 자리 잡게 되며, 어떤 영혼들은 표면에 남아서 하늘로 되돌아 올라가려고 하고[상향], 다른 영혼들은 물질의 내밀한 침투에 의해서 두터워지고 무거워 진다[하향].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생각들이 영혼의 학설을 지배하고 있다. 전자는 보편[우주]영혼인 세계영혼과 개별영혼들의 내밀한 통합(l’union)이다. 후자는 영혼과 신체의 그런대로 내밀한 혼합이지만, 마치 칠흑이 있어 빛을 완성시키듯이 신체는 영혼의 보충[물]이며, 또한 신체는 보편[우주]영혼의 마지막 빛살이 밤[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영역이다.
이 학설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정신적 영혼에 관한 고대인들의 생각들을 정확하고 강하게 요약한 것이다. 이 학설은 고대인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리고 정신에 대하여 고대인들이 근대 이론들과 구별되는 것이 무엇인지 라는 특별한 관점을 우리에게 이해하게 해준다.
1) 첫째로 정신을 다시 말하면 개별적 형식 하에서 활동성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고대인들이 겪었던 극단적 어려움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초기 사상가들에서,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에게서, 심지어는 스토아학자들에게서, 즉 정신 속에는 물질적 실체를 보았던 좀 더 호기심 많은 철학자들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의 영혼에 대해서 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적인 영혼을 정의하고 고립시키기 위하여 아마도 노력했었다. 그러나 이 개별성을, 즉 한 특별한 영혼을 다른 특별한 영혼과 따로 놓는 이 특성을 그는 형체적 용어로 표현했다. 다른 말로 하면 영혼은 개별화되어 있는데, 그 영혼이 유기화된 신체의 현실태인 한에서 그러하다. 또한 이 영혼에게 조직화의 성격들 보다 상위 성격[특성]들을, 결과적으로 물질의 성격들보다 상위 성격들을 부여할 필요가 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선 연구자들과 계승자들과 마찬가지로, 비인격적 누스(un νοῦς)에게 의탁 해야만 했다. 이 비인격적 누스에게 개별적 영혼들이 참여하고(분유하고), 이 비인격 누스 속에서 개별적 영혼들이 자신들의 상위적(우월적) 형식을 실현한다. 이리하여 세계영혼의 관념[에이도스] 즉 비인격적 사유의 관념은 탁월하게 정신이 되고, 고대의 철학자들에게 공통이 된다. 깊은 속내에서 보아, 그 이유는 고대인들이 영혼을 대상적으로[객관적으로], 그리고 영혼이 자연을 활성화(생명화)하는 한에서 연구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대철학자들이 심리학적 의식과 도덕적 의식이라는 이중적 관점에 위치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내부의 직관의 능력(faculté)인 의식은 인격이 되며, 존재가 된다. 이 존재[현존]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떤 표시에 의해, 그리고 모든 다른 존재들[존재자들]로부터 구별된다. 다른 한편 이 지각의 능력(faculté)인 의식은 인격적 활동성을, 실재적적 개체성을, 한마디도 자유를 요구하며 가정한다. 이 두 관점을 고대인들은 틀림없이 무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둘로 하여금 관찰의 중심들로 결코 삼지 않았다. 그들은 정신을 자연의 방식에 따라, 오히려 바깥(le dehors)을 통해서 연구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언어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무엇]을, 모든 인간들 각각에게 공통되는 것을, 비인격적인 무엇을 특히 주목했었다. 단어 로고스(λόγος)는 의미심장하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단어는 정신 속에 본질적인 무엇을, 동시에 또한 언어를 지칭한다.
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근대 철학은 감성과 지성의 내밀한 침투를 인정한다. 그래서 우리의 관념들은 일반적인 어떤 것들이기도 하고 관념들이 될 수 있는 어떤 비인격적인 것이기도 하며, 이것들은 항상 뒤섞여 있고, 감각적 요소들이 스며들어 있다. 여기서부터 [한편으로] 우리 사유의 개체성(l‘individualité)이, 또한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인격성(personnalité)이 나온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고대철학자들이 감성과 지성을 반대로 보아 따로 떼어 놓았다. 왜냐하면 감성의 모든 요소와 일단 분리된 지성이 인간들에게 있어서 실재로는 동일한 것이며, 하나이자 불가분이기 때문이다. 순수 관념인 한에서 하나의 관념(une idée)은 다양한 정신들[인격들] 속에서 실체로서 동일한 것[동일자]이다. 다른 말로하면, 만일 이 표시들이 똑같은 사물을 표상한다고 하더라도, 삐에르와 뽈에게서 표시를 구별하게 해주는 관념에 내재하는 어떠한 표시(aucune marque)도 현존[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성을 지성이 수반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따로 떼어내 보라. 그러면 비인격적 지성만이 남을 것이고, 그때에 [당신은] 개별적 영혼들 속에서 이 지성으로부터 표면적 굴절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만일 사람들이 내적 관찰의 관점에 서게되면, 하나의 사유(une pensée)는 더 이상 없고, 오히려 감성들로부터 온갖 것이 침투된 사유들(des pensées)이 있으며, 모든 개별화된 것들의 사유들이 있다.
2) 둘째로 만일 고대인들이 영혼이라는 능동적 원리와 이를 활성화[생명화]하는 신체를 종종 아주 선명하게 구별했다면, 그들은 영혼이 신체에 미치는 또는 신체가 영혼에 미치는 행위의 매카니즘을 설명하려고 결코 애쓰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그들은 거기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근대철학자들이 나중에 이렇게 했던 것처럼, 작용(l’action)의 관념, 영향의 관념, 보다 일반적으로 인과성의 관념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과적 연관에서 우선 계속(succession)이라는 연관이 있는데, 즉 결과B는 원인A를 계속 이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더하여 포함(inclusion)이라는 연관이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는 알 수 있는 것이 될 결과는 하나의 방식으로든 다른 방식으로든 원인 속에 포함되고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잘했건 잘못했건 간에, 원인성(인과성)의 연관은, 사유가 사유를 생성하고 운동이 운동을 생성한다는 동일 종류의 항들 사이에서만, 분명하게 지성적으로 알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다른 종류들로 된 항들 사이에 겉보기로 나타나는 모든 연관은, 하물며 예를 들어 너비인 것과 비너비인 것처럼, 반대되는 종류들로 된 항들의 사이에 나타나는 모든 연관은, 우리가 보기에 밝혀지기가 요구되는 불가사의를 감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가사의는 정확한 형식 아래서 보면 작용, 영향, 원인 연관을 표상하는 자들에게서만 현존하고 또 문제가 제기될 뿐이다. 반대로 우리는 고대인들이 이러한 견해에 문제를 제기함이 없이 영혼이 신체에, 또는 상호적으로 미치는 작용을 종종 확인하는데 그쳤다고 본다. 게다가 사람들이 보게될 것인데, 이 문제의 분명한 제기는 연역을 의미하는 설명 즉 근대의 개념화 작업이라는 설명 일반의 어떤 개념화작업을 함축하고 있다. 영혼과 신체의 연관은, 그리고 이것들의 상호 작용은, 예를 들어 사람들이 신체와 그 신체가 영혼의 본성을 감당하는 변양들 사이에 상호관계를 연역할 수 있다면, 근대인들에게서는 지성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중요 점들인데, 데카르트 이래로 우리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근대철학자들의 주의를 끌고 논증을 한 것은 바로 이런 중요 점들에 근거한다. (51TKC) (6:27, 51TK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