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땅 중동(中東/Middle East)<4>
7. 이란(Iran)과 아랍에미리트(UAE)의 관계
2010년 12월, 우리나라는 아랍에미리트의 요구로 국군을 파견하였다.
이웃 나라들과 잦은 마찰로 위기감을 느낀 아랍에미리트 정부에서 우호관계가 깊던 우리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아랍에미리트(UAE: United Arab Emirate)는 면적이 8만㎢, 인구가 580만 정도이니 매우 작은 나라다. 이 나라는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다가 1971년 독립하는데 조그마한 7개의 토후국(土侯國)이 연방(聯邦)으로 구성된 나라로, 토후국들은 ①아부다비(Abu Dhabi) ②두바이(Dubai) ③샤르자(Sharjah) ④라스 알 카이마 (Ra's al-Khaymah) ⑤아즈만(Ajman) ⑥움 알 콰인(Umm Al Quwain) ⑦후자이라(Fujairah)라고 한다.
아랍에미리트(UAE)는 페르시아만을 사이에 두고 이란(Iran)과 마주 보는 국가인데 페르시아만에 있는 작은 섬이 문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섬들은 매우 작아서 그다지 쓸모가 없는 섬이지만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였는데 그렇게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섬의 이름은 아부무사(Abu Musa) 섬과 큰 턴브(大 Tunb) 섬과 작은 턴브(小 Tunb) 섬이다.
그런데 올해(2023), 우리나라 윤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하였는데 두 나라의 분쟁을 우리나라와 북한의 대립에 비유하여 이란(Iran)이 적국(敵國)이라고 말한 것이 조금 문제가 되기도 했다.
8. 중동(中東/M. East)의 비극
미국-이라크전(바그다드) / 미군의 공격 / 무장조직 알카에다 / 오사마 빈 라덴
세계 2차 대전 후, 국제연합(UN)은 이 지역(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이스라엘) 수립을 승인하자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의 거센 반발로 전쟁이 발발하는데 1948년에 시작하여 1967년에 끝났으니 근 30년간이나 벌어졌던 전쟁이다.
유대민족의 아픈 역사를 잠시 되짚어 보면, 우선 400여 년간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인데, 그 기록이 구약성서의 ‘출애굽기(Exodus)’이다. 그 후에도 아시리아(Assyria)와 바빌로니아(Babylonia)에 나라를 빼앗기고 노예 생활, 로마제국의 침공으로 결국 나라가 없어지고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2천여 년간 유랑과 핍박의 생활을 해야 했다.
그 중에도 독일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히틀러에 의하여 400여만 명이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에서 독가스로 집단 참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한다.
비록 나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유대인들은 명석한 두뇌 덕분인지 세계 경제를 뒤흔들 만한 능력이 있었는데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세계를 제패하려고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키자 이들을 격파하고자 결성된 국제연합(UN)이 유대인들에게 유엔에 협조하면 국가를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하자 그들은 가진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전쟁에 참여한다. 일례로,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이 유명강사의 강의를 들으려 모였는데 강단에 올라온 강사가 눈물을 찍어내며....
‘나는 유대인이다. 곧 유대인의 나라를 세워준다니 나는 전쟁에 참여해야겠다. 미안하지만 나는 오늘 강의를 할 수 없다.
바로 나는 군인이 되어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강단을 떠났다고 한다. 결국, 세계 제2차 대전에서 연합군(UN)이 승리하자 약속대로 중동지방 옛 유대인들이 살던 곳에 국가를 세우도록 허락했는데 당시, 그곳은 황무지와 다름없던 불모지(不毛地)로 소수의 아랍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곳이 살던 사람들은 너무 살기 어렵다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를 기다리던 아랍인들이었는데 이스라엘(Israel)이라는 유대인 기독교 국가(Christendom)가 들어선다는 소리를 듣고 거센 반발을 한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환호하며 배를 타고 연달아 항구로 들어오자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19세기 후반, 시오니즘(Zionism)이 확산되는데, 시오니즘이란 성서에서 약속의 땅인 시온(Zion) 산으로 돌아가자는 유대인들의 소망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민족 국가로 만들기 위한 정치적 운동이었다.
1948년, 마침내 이스라엘이 건국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 아랍인들의 반발로 곧이어 아랍-이스라엘전쟁(Arab-Israeli Wars)이 연이어 일어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고 불모지를 개간하여 오늘의 이스라엘을 건설한다.
1967년에는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 발발하는데 주변에는 광대한 영토와 많은 국민을 보유한 아랍 국가들도 많았지만, 시오니즘(Zionism)으로 뭉친 이스라엘은 수십 배의 병력을 보유한 아랍연맹을 6일 만에 깨뜨리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6일 전쟁’이다.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끊임없는 분쟁들이 계속되는데 유대인들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땅이라며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꿋꿋이 지켜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밖에도 제1, 2차 오일쇼크, 1991년에는 미국과 이라크의 걸프(Gulf) 전쟁 등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 이곳이다. 2003년에도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인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는데 우리나라는 미국에 공병지원단(工兵支援團), 의료지원단(醫療支援團) 등을 파견하여 지원하였고, 전쟁으로 인하여 우리나라 중동지역 노동자들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이슬람 과격파들에 의하여 노동자로 일하던 우리나라 김만수, 곽경해 피살, 2004년 6월에는 김선일 선교사도 피살되는데 마침내 한국은 전투병(자이툰 부대) 3,000명을 파견하여 이라크 전쟁에 동참한다.
그 이후 최악의 참사는 2001년 이라크의 이슬람 근본주의자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 뉴욕 쌍둥이 빌딩을 공격한 ‘911 테러’라고 하겠다.
지난 8월 15일,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 탈레반(Taleban)은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이던 아슈라프 가니(Ashraf Ghani)가 한마디 말도 없이 몰래 국외로 도주하자, 물라 모하마드 하산 아쿤드(Mulla Mohammad Hassan Akhund)을 앞세워 곧바로 정권을 잡게 된다. *스탄 (Stan)은 ‘땅’이라는 의미
아프가니스탄 지도 / 도주한 대통령 가니 / 탈레반 군사들
아프가니스탄은 서쪽으로 이란(Iran)과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 북쪽은 타지키스탄(Tajikistan),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남쪽과 동쪽은 파키스탄(Pakistan)으로 둘러싸인 중동(中東)국가로, 인구는 3천 8백만 명, 면적은 65만 ㎢, 수도(首都)는 카불(Kabul)이고, 우리나라보다 거의 7배나 되는 넓이이다.
9. 유대인의 비극 ‘마사다(Masada) 요새(마사다/히브리어 מצדה-요새라는 뜻)
마사다를 공격하는 로마군 / 마사다(Masada) 요새(이스라엘 ) 1, 2
바위 절벽 위에 감추어진 마사다 요새는 이스라엘 남쪽, 사해(死海) 인근의 사막 동쪽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절벽 위에 있던 고대(古代) 유대의 왕궁이자 요새(要塞, Fortress)이다.
1842년에 최초로 그 존재가 알려졌고,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발굴되었는데 2,000여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고 철저히 숨겨졌던 곳이었다.
마사다의 절벽은 동쪽이 가장 높아서 400m에 이르고 가장 낮은 서쪽도 높이도 90m 정도이며 절벽의 정상은 비교적 평평한 마름모꼴로 남북이 550m 동서로 270m 정도의 크기라고 한다.
절벽 테두리를 따라 세워진 성곽(城郭)의 둘레는 1,300m에 달하고, 곳곳에 사방을 감시할 수 있는 감시탑이 서 있었다.
마사다의 동쪽과 서쪽에는 아래에서 위로 각각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있는데 동쪽은 본래 있던 뱀 길(Snake Path)이라고 하는 이리저리 휘돌아가는 길인데 엄청나게 길고 가파르다고 한다.
마사다에 관한 기록은 1세기 유대계 로마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가 쓴 ‘유대 전쟁사(戰爭史)’에 기록되어 있는데 요세푸스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갈릴리(Galilee)지역의 유대 장수였지만 뒷날 로마에 투항하여 역사가(歷史家)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당시 유대(Judea) 왕국은 헤롯왕(헤로데 1세, BC 73년~4년)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통치(統治) 기간 중 예루살렘의 두 번째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헤롯성전)’을 증축했고, ‘가이사랴(Caesarea Maritima) 항구 건축’ 및 ‘마사다(Masada) 요새’와 ‘헤로듐(Herodium) 요새’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보면, 헤롯왕은 동방박사 세 사람이 찾아와서 유대의 왕이신 구세주 예수가 태어났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왔다며 태어난 곳이 어디냐고 묻자 깜짝 놀란 유대의 왕 헤롯은 자신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혹시 찾거든 자신도 꼭 가서 경배를 드리고 싶으니 반드시 자신에게도 알려달라고 한다.
왕궁에서 나온 동방박사들은 밤이 되자 밝게 빛나는 별이 인도하여 들판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과 함께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를 뵙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며 경배를 드리는데 절대로 헤롯왕에게 알리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그냥 돌아간다.
헤롯은 아무리 기다려도 동방박사들의 소식이 없어 찾아보라고 했더니 그냥 돌아갔다고 하자 헤롯은 베들레헴을 위시하여 그 부근 마을을 샅샅이 뒤져서 2살 이하의 아기들은 모두 죽여 버리라고 한다.
그때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꿈에 아기를 데리고 빨리 애굽(Egypt)으로 피신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이미 애굽(이집트)으로 피신한 뒤였다. 이후 예수는 헤롯왕이 죽은 후 유대로 돌아온다.
당시 로마(Rome)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 AD 14)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였는데 세계정복을 꿈꾸던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헤롯왕은 BC 37~31년 사이 난공불락의 마사다 절벽 정상에 궁궐을 짓고 요새화하여 그곳으로 피신하였으며 마사다 정상을 빙 둘러 성벽을 쌓고 38개의 감시탑을 세웠다고 한다.
성벽 안에는 110개의 방이 있었고 1만 명의 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는 병기와 함께 수십 년 먹을 곡식 및 과일도 저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헤롯왕은 권력에 집착한 나머지 왕비와 자식들을 죽이는 등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예수를 죽이기 위해 수많은 어린 생명까지 앗아간 나쁜 놈이다.
그 만행의 보복인지 헤롯왕은 나쁜 병에 걸려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시달리다가 병으로 죽는데, 헤롯이 죽은 뒤 마사다 요새는 로마군에게 넘어간다.
마사다의 함락이 너무나 가슴 아픈데, 서기 70년에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진압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젤럿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마사다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남녀노소를 모두 합쳐 천명도 안 되었지만, 그들은 마사다를 근거로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로마군을 괴롭혔다.
서기 73년 5월 2일 밤, 사해(死海) 부근 마사다 요새에서 일어난 가슴 저리는 비극.....
‘내일이면 끝이다. 아내와 자식들을 적의 손에서 구하자.’
회의장에 모인 전사(戰士)들은 제비를 뽑아서 뽑힌 사람 10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집으로 돌아가 자기 손으로 자신의 처와 자식을 죽이고는 가만히 옆에 누워 기다렸다.
제비에 뽑힌 10명은 성안을 돌며 누워있는 전우들의 목숨을 거두었다.
남은 10명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명이 똑같은 방식으로 누워있는 아홉 명의 목숨을 거두고 자신은 마지막에 자살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로마군에게 점령당한 요새에는 960구의 시체만 남았을 뿐이었고, 이로 인해 마사다 함락으로 66년부터 시작된 7년간의 1차 유대 전쟁도 끝났다. 이 전쟁에 동원된 로마군은 8만여 명으로 로마가 치렀던 어떤 전쟁보다 많은 병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유대 전쟁에서 이긴 로마는 반란의 싹을 잘랐다며 개선문을 세우고 기념주화까지 만들었지만, 유대의 저항은 113년과 133년의 2, 3차 유대 전쟁으로 이어졌다.
유대인들의 끝없는 투쟁은 마사다 항전(抗戰)의 아픔이 가슴속에 살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