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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나라 중국(中國)
3. 허난성(河南省)
허난성 위치 / 허난성 각 지역 / 황허(黃河)강
<1> 어머니의 강 - 황하(黃河)
하남성(河南省)은 중국의 양대강(兩大江/黃河, 揚子) 중의 하나인 황하(黃河)와 인접하고 있으며 그 남쪽에 있어 하남(河南)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면적은 16만 7천㎢로 우리나라 남북한 넓이보다 조금 작고, 인구는 9천 7백만으로 우리나라 남한 인구의 2배가량인 거대한 성(省)이다. 이곳은 명실공히 중국의 심장부라 하여 중원(中原)이라 불렸으며 중국문화(中國文化)의 발상지로 꼽힌다.
춘추전국시대, 중원(中原/하남성)을 장악하면 천하(天下)를 얻는다고 했다던가?
하남성(河南省)은 성도(省都)인 정주(鄭州)를 중심으로 5.000년 고도(古都)인 낙양(洛陽)과 드라마 ‘포청천(包靑天)’으로 유명한 개봉부(開封府)가 있다. 또 등봉현(登封縣)의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 중국 최초의 절이라는 백마사(白馬寺), 중국 3대 석굴 중 최고라는 용문(龍門)석굴, 황하유람구 등 수많은 고대 유적지와 관광지가 있다. 그뿐 아니라 중국 문명의 발상지로, 갑골문자(甲骨文字)가 발견된 은허(殷墟)가 있고, 근래에는 이곳에서 북경원인(北京猿人)보다 더 오래된 인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중국은 오악(五嶽)이라 하여 다섯 개의 산을 꼽는데 동쪽(東)은 태산(泰山), 서쪽(西)은 화산(華山), 남쪽(南)은 형산(荊山), 북쪽(北)은 항산(項山)이며, 중악(中嶽)은 이곳 하남성의 숭산(嵩山)을 꼽는다.
또 죽어서 간다는 천하 명당 장지(葬地)인 북망산(北邙山)도 이곳에 있고, 장가계(張家界), 원가계(袁家界)와 비견된다는 운대산(雲臺山) 자연풍경구(自然風景區)도 멀지 않다.
이곳은 조선족이 거의 없고 대부분이 한족이며 극소수의 회족이 이슬람 전통을 지키면서 살고 있다.
버스 차창으로는 붉은 진흙의 계곡이 곳곳에 보이는데 진흙 절벽마다 벌집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이곳은 석기(石器)시대 원시인들이 살던(穴居) 흔적으로 지금은 주거용보다는 곡식 창고 등으로 간혹 사용되고 나머지는 버려진 채로 비어 있다고 한다. 수천 년의 역사와 애환을 간직한 실크로드의 출발점 또한 이곳 낙양(洛陽)이며, 아름다운 채색 토기인 당삼채(唐三彩)가 발전한 곳으로 거리에는 당삼채 전문 가게가 많이 눈에 띈다.
<2> 황하 유람구(黃河 遊覽區)
황제(皇帝)와 염제(炎帝)의 상(像) / 황하강변의 승마체험 / 당삼채 낙타 조상(造像)
강가에서 바라보면 황하(黃河)는 강인지, 호수인지, 흐름도 보이지 않으며 시뻘건 흙탕물이 펼쳐져 있고, 곳곳에 모래 언덕들이 이어져 있는데 희뿌연 흙먼지로 강 건너편은 보이지도 않는다.
중국인들이 어머니의 강이라고 사랑한다는 황하(黃河)는 숱한 역사를 엮어내며 흘렀고, 또 상류의 흙을 실어 날라 비옥한 삼각주를 형성하여 문명을 꽃피운 중국의 젖줄이라고 불리는데 겨울의 황하는 그런 역사적 의미보다는 쓸쓸하고 처량하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희뿌연 안개 속에 강변 유람선 타는 곳으로 가는데 뒤쪽에 우뚝 솟은 돌산을 깎아서 조성한 거대한 조각상이 보이는데 중국 신화의 아버지인 황제(皇帝)와 염제(炎帝)의 두상(頭像)이라고 하며, 높이가 106m로 미국 맨해튼의 자유의 여신상보다 몇 미터나 더 높다는 가이드의 자랑이다.
사진을 몇 장 찍고는 서둘러 황하를 둘러보는 수륙양용인 호버크래프트(Hover Craft) 유람선에 올랐다.
열댓 명이 정원인 유람선은 배 밑바닥의 고무 튜브에 바람을 불어 넣더니 뒤쪽의 바람개비를 세차게 돌리며 육지에서 미끄러져 강물로 뛰어든다. 모래 언덕과 강물을 번갈아 넘나들면서 쌀쌀한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데 아득히 보이는 산언덕과 강안(江岸)은 초한지(楚漢志)의 무대로 초(楚)의 항우(項羽)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전투를 벌이던 장소라고 한다.
얼마쯤 더 달리다 모래 언덕에 올라 배를 멈추기에 내렸는데 십여 명의 말꾼들이 중국 돈 10위엔(1.200원정도)에 말을 타라며 손짓 발짓을 한다. 이 황량한 강 가운데 모래 언덕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관광객에 말을 태워주는 것을 직업으로 살고 있다니 측은한 생각이 들어 도와주는 셈 치고 말에 올랐다.
털썩거리며 10여 분 말에서 흔들리다 내려서 움집을 드려다 보았는데 모래 구덩이에 비닐로 지붕이랍시고 엉성하게 덮은 모양이 썰렁하기 이를 데 없고 이런 추운 날씨에 이런 곳에서 산다는 것이 신기하고 불쌍한 생각이 든다.
<3> 개봉부(開封府)와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
개봉부 관아(官衙)건물 /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 공연
중국 드라마 ‘포청천(包靑天)’으로 널리 알려진 개봉부(開封府)는 당시의 관아건물이 잘 복원되어 있다.
송(宋)나라 개봉부 판관(判官)이었던 포청천(이름은 포증<包拯>, 包大人)은 명판결로 유명하며, 예지력을 나타내는 이마의 초승달, 신의와 결단력을 나타내는 검은 얼굴로 묘사된다. 개봉부의 다른 판관들은 3~4개월도 임기를 채우지 못하였다는데 포청천은 1년 3개월 재임으로 가장 오랫동안 판관으로 있었다.
포청천이 사형을 집행할 때 사용하는 도구(道具)로 사용했다는 작두(斫刀)가 진열되어 있었다.
작두를 보면 일반서민용인 ‘개작두’, 귀족용 ‘범작두’, 왕족용 ‘용작두’가 전시되어 있는데 작두 머리에 각각 개(犬), 범(虎), 용(龍) 머리가 달려있는데 중국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던 사형 도구이다.
특히 왕족(王族)은 사형을 집행한 이후, 보고 하도록 하여 사전(事前)의 압력을 차단하였다고 한다.
역대 판관들의 이름이 새겨진 석판에는 포청천의 이름이 있던 곳이 움푹 파여서 읽을 수 없었는데 포청천을 흠모하는 중국 사람들이 하도 쓰다듬어 닳았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중국 사람들의 과장인지...
개봉부 관아(官衙) 관광이 끝난 후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을 둘러보았다.
청명상하원은 북송시대(北宋時代) 개봉(開封)의 거리 모습을 재현해 놓은 일종의 민속촌으로, 이 거리는 송대(宋代)의 저명화가였던 장봉단(張捧端)이 사실적으로 묘사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의 그림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 하며, 넓이는 12만 평 정도로 당시의 거리와 높은 누각은 물론 넓은 강에는 배까지 다니는데 당시의 복색을 갖춘 사람들이 살면서 공연도 하고 가게도 운영하고 있다.
첫 번째로 부호의 딸 결혼식을 재현하는 것을 관람하였는데 악기 연주가 신기하였고, 다음은 송나라 여성들의 마상(馬上) 기예와 마상격구(馬上擊毬)를 관람하였다. 화려한 옷차림과 다양한 말 다루는 솜씨, 긴 막대기로 공을 쳐서 골대에 넣는 옛날 경기(擊毬) 모습이 신기하였다.
다음은 닭싸움 경기를 보았는데 관광객들이 돈을 걸고 자기가 지정한 닭이 이기면 약 세 배의 상금을 주는 도박경기였다. 거리에서는 도끼 던져서 과녁 맞히기, 머리를 대고 물구나무를 서서 반동으로 계단 오르기, 기다란 채찍을 휘둘러 입에 물고 있는 상대편의 담뱃불 끄기 등을 구경하였고 이름 석 자를 써주면 즉흥으로 시를 지어 간단한 그림을 곁들여 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서예 솜씨와 글의 내용이 대단해 보인다. 다음은 중국 최초의 절이라는 백마사(白馬寺)를 가는 도중 철탑(鐵塔)을 돌아보았는데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전탑(塼塔-구운 벽돌)인데 오랜 세월에 색깔이 철(鐵)과 비슷하다고 철탑이라 부른단다. 13층의 좁고 높은 이 탑은 좌우로 세 바퀴씩 소원을 빌며 돌면 이루어진다고 하여 열심히 돌았다.
<4> 고대 왕국들의 도읍지 뤄양(洛陽/낙양)
관림(關林/관우 사당) / 뤄양(洛陽) 성문
중국의 가장 오래된 절이라는 백마사(白馬寺)를 둘러보는데 경전(經典)을 싣고 온 말의 노고를 생각하여 ‘백마사(白馬寺)’라 하였다는 이 절은 정문 앞에 백마 두 마리의 조각상이 있는데 실물보다 작고 통통한 모습이 볼품은 별로 없었다. 다음은 관운장(關雲長)을 모신 사당이 있는 관림(關林)을 관광하였는데 중국 사람들은 관운장을 매우 높이 받들어 모시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묘(墓)의 등급 보면 제일 아래부터 묘(墓)-총(塚)-능(陵)-림(林)의 순으로 구분하는데 황제의 묘인 능(陵)보다 관운장의 묘를 임(林)으로 더 높이 받들고 있다. 임(林)은 무장(武將)의 으뜸으로 관운장의 관림(關林), 글(문/文)의 으뜸인 공자(孔子)을 모시는 공림(孔林) 두 개뿐이라고 한다.
관림(關林)에 제를 올릴 때면 수많은 인파로 광장이 메워진다고 하고 제물로는 소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양 한 마리 등 엄청난 제물이 차려져 참배객들이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전시 사진을 보면 서양인은 물론 전 세계에서 참배객이 오는데 한국 사람까지 향을 올리는 사진이 있었다.
3일 소연(小宴)에 5일 대연(大宴)을 마다하고 오관(五關)에 참육장(斬六將)하며 유비를 찾아 불원천리(不遠千里) 떠나는 관운장의 삼국지의 장면들이 중국인들의 정서에 큰 감동을 주는 듯싶다.
사당에는 관우의 친아들(親子)인 관흥(關興), 의자(義子)인 관평(關平)과 그의 부인도 함께 모셔져 있었는데 관우를 군신(軍神)으로 모시는 데는 수긍이 가지만 중국 사람들은 재물신(財物神)으로도 모신다고 하니 신기하다.
뤄양(낙양) 성문을 보면서 우리나라 옛 판소리인 '성주풀이'가 생각난다.
'낙양성 심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누구냐 우리네인생 한번가면 저모양이 될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여~~'
◆ 천자가육 박물관(天子駕六 博物館)
천자가육 박물관 입구 / 박물관 지하 내부 모습 / 허난(河南) 박물관 관람
낙양 시내 가운데에 지하에는 발굴된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은 ‘천자가육 박물관(天子駕六 博物館)’이 있어 관광하였는데 왕족 무덤으로, 당시의 부장품을 발굴 모습 그대로 전시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원래는 훨씬 규모가 큰데 일부분만 공개하여 보여주고 있다지만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맨 앞쪽에 천자(황제)가 탔던 수레와 말 여섯 마리를, 그다음 줄부터는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와 말... 식으로 기다란 행렬인데 산 사람과 동물들을 그대로 죽여서 함께 묻었는데 화석화되어 뼈와 해골이 줄을 맞추어 있다. 박물관 입구는 말 여섯 마리가 마차를 이끄는 모습을 멋지게 동상으로 제작해 놓았는데 그 밑이 무덤(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5> 중국 최대의 석굴 륑먼석굴(龍門石窟)
용문석굴(龍門石窟) / 봉선사 대불(大佛)
용문석굴(龍門石窟)은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 산서성(山西省)의 운강석굴(雲岡石窟)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히는데 이 용문석굴이 그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용문석굴은 북위(北魏/AD 500년경) 시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고 하며, 작은 강을 사이에 두고 당대(唐代)의 대시인 백거이(白居易, 호는 樂天, 香山居士)의 사당이 있는 향산(香山)과 마주하고 있다.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용문석굴은 현재 크고 작은 1만 3천 개 정도의 석굴이 있는데 2,800여 개의 비문(碑文), 50여 개의 불탑(佛塔), 10만 개 정도의 조각상이 남아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다.
약 1km 정도 길이의 석회석 절벽에 개미집처럼 조성된 석굴은 내부는 물론이려니와 벽면까지 빼곡히 부처상이 조각되어 있다. 용문(龍門) 봉선사(奉先寺)의 거대한 불상에서부터 손톱크기의 불상까지 다양한 크기의 부처가 온전한 불상(佛像)으로, 혹은 바위벽에 부조(浮彫)로 모셔져 있는데 온화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이 특징이라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돌부처의 머리나 신체의 일부분을 집에 모시면 좋다고 하여 훼손을 부채질하였다고 하는데 부처상에서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았다. 용문석굴이 처음 조성되기 시작한 것이 북위(北魏)시대로, 당대(唐代)에 와서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 많이 조성되었고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봉선사의 3존위(三尊位) 불상도 측천무후 때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 봉선사에 모셔진 불상 가운데 가장 큰 부처인 봉선사 대불은 측천무후 자신의 모습과 부처의 모습을 섞어 조각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낙양이 고향인 백거이(白居易/樂天)는 용문석굴을 사랑하여 생전에 많은 수리비용을 내놓았고 사후(死後)에도 용문석굴을 바라볼 수 있는 강 건너편의 향산(香山)에 자신의 묘실(墓室)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저녁 식사는 호텔식 대신 낙양의 전통 요리인 수석(水席) 요리를 맛보았다. 1인당 우리 돈 1만 원인 수석 요리는 총 24가지의 요리가 ‘물 흐르듯이 나온다, 또는 탕(湯) 요리가 많다.’하여 수석(水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8가지의 찬 음식이 나온 후 따뜻한 요리 16가지가 나오는데 맛은 별로였다는 느낌이다.
<6> 무림(武林)의 본산(本山) - 숭산 사오린쓰(嵩山 少林寺)
중국 무림의 총 본산인 소림사는 낙양에서 1시간 30분가량 떨어진 등봉현(登封縣)에 있는 숭산의 소실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중국의 오악(五嶽) 중 중악(中嶽)인 숭산은 태실 36, 소실 36, 총 72개 봉우리를 가진 산으로 묘사되고 있다.
1.500여 년 전 북위(北魏) 때 창건되었다고 하는 소림사는 인도의 승려 달마대사에 의하여 이름을 날리게 되고 또한 달마는 중국 무술의 창시자로도 숭상되고 있다. 등봉현에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무술학교들이 도로 옆을 따라 늘어서 있었는데 소림사 주변에만 50여 개의 무술학교가 있다고 한다.
인도에서 구법(求法)을 위하여 중국으로 온 보리달마(菩提達磨)는 제일 먼저 광저우에 도착하여 혜가(慧可) 스님에게 구법하게 되는데 수백 번의 간청에도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이곳 숭산으로 와서 소실봉 중턱의 바위동굴에서 9년 동안 면벽정진(面壁精進) 수도하여 크게 깨달음을 얻고 선종(禪宗)의 창시자가 된다. 이야기로는 달마가 9년 동안 마주보고 앉았던 동굴 벽면에 달마의 그림자가 새겨졌다고 한다. 후일 혜가스님이 오히려 달마를 찾아와 구법을 하게 되는데 마침 겨울이라 흰 눈이 내리는데 달마가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지 않는 한 안 된다.’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혜가스님은 칼을 들어 자신의 왼팔을 내리쳐 자르고 그 피를 뿌려 눈을 붉게 물들게 하였다고 한다. 깜짝 놀란 달마가 달려 내려가 옷을 벗어 왼쪽 어깨를 감쌌는데 온통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때부터 소림사 스님들은 붉은 장삼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합장할 때 두 손으로 하지 않고 오른손바닥 하나만 세우는 전통이 생겼다고 한다. 소림무술은 소림사에 있는 승려들의 체력이 너무 약한 것을 보고 달마선사가 다섯 가지 동물의 움직임에 창안하여 권법을 만들어 훈련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소림사가 크게 일어나기는 당 태종의 아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열세 명의 소림사 승려들이 구해내어 당태종으로부터 크게 상급을 받아 번창 하였다고 하는데 가장 번창하였을 때는 승려만 3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제일 먼저 실내 공연장에 들어가 소림사 고수들의 무술 시범을 관람하였다. 약 30여 분 계속된 공연에서는 18가지 무기를 이용한 무술(十八班武藝), 격파술, 7~8세가량의 동자공(童子功)이 보여주는 서커스에 가까운 유연한 몸놀림 등이 돋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바늘을 던져 유리판을 뚫는 무술이었는데 눈을 의심할 정도다. 무술 고수인 스님이 바늘을 던져 유리판을 뚫고나가 반대편의 풍선을 터뜨리는 무술인데 뚫린 유리판 구멍을 들고 관람석을 한 바퀴 돌며 직접 확인시켜 준다.
설마 스님들이 사기(詐欺)를 치는 것은 아니겠지?
소림무술 시범 / 탑림(塔林)
또 경내에 있는 아름드리 은행나무에는 스님들이 일지(一指), 이지(二指) 관수(貫手/손가락 훈련)를 훈련하여 껍질에 수백 개의 3~4cm깊이의 지공(指孔)이 뚫린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1.000년 이상 되었다는, 일반 가마솥의 서너 배 크기의 가마솥이 있는데 채(菜/나물)를 볶을 때 썼다고 하며 무술연마를 위하여 공중에 가로지른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볶았다고 한다.
그 옆에는 엄청나게 큰 맷돌이 있었는데 돌리는 손잡이가 없고 세 사람이 손가락 두개를 넣어 돌리도록 구멍이 나 있었는데 그 크기로 봐서는 소나 말로 끌어야만 돌릴 수 있을 듯하였다.
60년마다 얼굴 방향이 바뀐다는 오백나한 그림 / 오백나한을 모신 입설정(立雪亭)
절의 가장 안쪽 별채인 입설정(立雪亭)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뒤의 벽에는 아주 오래된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가 있는데 이상한 신통력을 보여 60년마다 얼굴 모습과 방향이 바뀐다고 한다.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부처님의 제자를 아라한(阿羅漢), 또는 나한(羅漢)이라 하니 오백나한은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직접 가르친 오백 명의 수제자들인 셈이다. 그림의 신통력 여부를 확인하려면 사진을 찍어 60년 후에 다시 와서 비교하여 보아야 하는데 내 가 120살까지 살 수 있으려나...
수많은 관광객이 경내를 돌아다니고 있고 또 무슨 촬영 팀인지 스님 여남은 명을 데리고 절 뜨락에서 뛰어오르고 발차기하는 모습 등을 비디오로 찍고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조용한 사찰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현재의 주지스님은 33대째인데 미국에서 공부한 분으로 경영의 고수(무술이 아닌)로 엄청난 부를 창출한다고 하고 주식상장(株式上場) 운운의 소문도 있다고 하니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소림사의 뒤쪽으로 10여 분 올라가면 탑립(塔林)이 있다. 그야말로 탑의 숲으로, 소림사의 주지스님을 비롯한 고승들의 사리탑인데 240여 개나 된다고 한다. 스님의 지위에 따라 탑의 높이와 장식이 모두 조금씩 달랐는데 32대 주지스님의 사리탑이 가장 잘 꾸며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탑을 돌아가면서 사방 벽면에 스님이 평생에 사용하였던 물건들을 부조로 새겨 놓았는데 거기에는 비행기, 컴퓨터, 비디오카메라, 탱크, 승용차 등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들이 총 망라되어 있어서 실소를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