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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48권
5. 변수면품 ④
2.2. 유루연(有漏緣)과 무루연(無漏緣)
1) 6무루연혹
98수면 가운데 몇 가지가 유루를 반연하는 것이며, 몇 가지가 무루를 반연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멸ㆍ견도소단의
사견과 의(疑)와, 상응 및
불공 무명의 여섯 가지는
능히 무루를 반연한다.
이 중에 멸제를 반연하는 것은
오로지 자지의 멸제만을 반연하며
도제를 반연하는 것은 6지와 9지의 그것을 반연하니
대치는 다르지만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탐ㆍ진ㆍ만과 두 가지 취(取)는
다 같이 무루를 반연하지 않으니
[무루는] 마땅히 떠난 것이고, 경계에 대해 원한이 없으며
고요하고 청정하고 뛰어난 성질이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견멸ㆍ견도소단의 각기 세 가지, 즉 사견(邪見)과 의(疑)와,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이나 불공의 무명 등 여섯 가지는 능히 무루를 반연한다.33) 즉 견멸ㆍ견도소단의 두 가지 사견과 두 가지 ‘의’와, 상응무명―그것의 불공을 포섭하여―에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도합 여섯 가지가 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여섯 종류는 온갖 계(界)ㆍ지(地) 중에서 능히 멸제와 도제를 반연하기 때문에 ‘무루를 반연한다’고 일컬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수면은 유루를 반연한다”고 하는 사실은 굳이 설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이루어진 셈이다.
(1) 무명의 소연에 관한 제 논란 비판
그런데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명에는 소연이 없기 때문에 무루를 반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연유에서 이것이 결정코 소연을 갖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인가?
지(智)를 갖지 않는 것[無智性]이기 때문이다. ‘지’를 갖지 않는 것은 경계대상을 반연한다고 말할 수 없으니, 비유하자면 세간에서 무지[非智]를 ‘외적인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즉 외적인 어두움은 견(見)의 공능을 손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능히 경계대상을 취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무지도 역시 그러하여 경계대상을 아는 지[解境智]를 장애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연의 경계를 갖는] ‘지’와 함께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무명)이 결정코 소연을 갖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34)
[무명에는] 결정코 소연이 존재하니,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으로, 무명이 실유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성립시켰다.35) 만약 “무명 자체는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비유하자면 외적인 어두움처럼 심ㆍ심소를 장애하여 능히 경계대상을 취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고 한다면, 심ㆍ심소는 마땅히 영원히 생겨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상속 중에 항상 바로 존재[現有]하고 있기 때문으로, 무심정(無心定)이나 무상(無想)의 이숙[이 상속 중에 바로 존재할 때 심ㆍ심소가 생겨나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마땅히 그것을 설하여 ‘소연에 미혹한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또한] 외적인 캄캄한 어두움도 심ㆍ심소를 장애하여 온갖 경계대상에 대해 생겨날 수 없게 하는 것은 아니니, 색처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안식의 경계대상이 되기 때문으로, 그것은 다만 그 밖의 다른 경계대상에 대한 견(見)의 공능을 손상시키는 것일 뿐이다. 무명도 역시 그러하여 다만 고(苦) 등의 4성제의 이치에 대한 참된 ‘견’이 생겨나는 것을 장애하는 것일 뿐, 경계대상 중에서 아견 등이 [생겨나는] 것을 장애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일체의 ‘견’이 생겨나는 것을 능히 장애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에 무명도 소연의 경계를 갖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잠 자체도 소연을 갖는 것과 같다. 즉 잠은 다만 능히 지(智)의 작용을 감손 은폐[損覆]시키는 것일 뿐 ‘지’와 더불어 경계대상에서 함께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잠도 역시 경계대상을 취하는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 즉 [잠은] 소연에 대해 마음을 어둡고 무디게[昧鈍]하는 것으로, 무명도 역시 그러하여 소연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닌데, 어떠한 까닭에서 견멸ㆍ견도소단을 반연하는 일이 없다는 것인가?
“견멸ㆍ견도소단의 불공무명은 고제와 집제를 관찰할 때, 그 모두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견취(見取)가 인과 갈래[門]의 즐거움과 청정함의 행상 등으로 말미암아 온갖 유루법에서 일어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견취로서 비록 역시 견멸ㆍ견도소단을 능히 반연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진실로 고제와 집제를 관찰할 때 일체[의 견취]는 영원히 끊어지니, 인과의 이치에 미혹함을 대치하는 도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능히 여덟 행상(고ㆍ집제 각각의 네 행상)의 앎[覺]이 생겨나는 것을 장애하는 불공무명도 고제와 집제를 현관할 때 대치도가 생겨나기 때문에 일체가 다 끊어지니, 이를 제외한 그 밖의 다른 견소단의 제법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불공무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것이 저 견취의 경우와 같다고 하지 않겠는가?”
저 [견취의] 행상(行相)의 차별과 전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유루에 대해 견취가 생겨날 때 행상의 대부분은 미혹되어 일어난 것으로,―관행(觀行)을 닦는 자는 고제와 집제를 관찰할 때, 견멸ㆍ견도소단의 제법에 대해서도 고(苦) 등으로 관찰한다―, 비록 이미 [괴롭고 부정한 것 등을] 즐겁고 청정한 것 등으로 능히 그릇되게 계탁하여 인과의 행상에 미혹하였을지라도 견멸ㆍ견도소단에 대해서는 공덕으로 관찰한 것이니, 그 밖의 다른 가장 수승한 행에 존재하는 견취(견멸ㆍ견도소단의 견취)는 능히 그릇되게 [계탁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고ㆍ집의 2제에 대해 이미 현관을 획득하였을지라도 여전히 견멸ㆍ견도소단의 견취로서 아직 제거되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불공무명은 별도의 행상을 갖지 않는다. 오로지 혼미하고 둔중[惛重]하여 행상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즉 그것은 4성제 각각에 대해 직접적으로 미혹한 번뇌[親迷惑]로서, 이를 제외하고서 더 이상 그 밖의 다른 별도의 행상을 갖지 않는다. [견멸ㆍ견도소단의 불공무명은] 견소단을 반연하는 것이지만, 고제와 집제에 미혹한 것이 아니거늘, 어찌 그토록 견고하게 ‘불공무명은 견멸ㆍ견도소단을 반연하는 별도의 행상을 갖는 것으로, 견멸ㆍ견도소단의 경우 견취와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이 중에 견소단을 반연하여 일어난 일체의 불공무명은 고제와 집제를 관찰할 때 그 모두가 영원히 끊어지지만, 수소단을 반연하여 일어난 불공무명은 고제와 집제를 관찰할 때 일체가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거듭하여 그 연유를 따져서는 안 될 것이니, 불공무명으로서 수소단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자라면, 그는 필시 마땅히 고ㆍ집의 두 성제(聖諦)의 이치에 미혹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능히 수소단의 법을 반연하는 불공무명이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으로, 이러한 무명이 견소단의 법이나 무루법을 반연한다고 설하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필시 마땅히 성자가 [정]법을 사유할 때, 염오한 진에와 고거(高擧, 즉 慢)를 떠날지라도 염오한 장애를 갖는다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가 정법관(正法觀)을 수습할 때, 마치 잠의 혼미하고 어두운 성질[惛昧]이 그의 마음을 장애하고 은폐하는 것처럼 마땅히 혼미(惛迷)하여 행상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으니, 불공무명이 바로 수소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에게 집지(集智)가 이미 생겨났을지라도 여전히 오로지 수소단의 법을 반연하는, 정법을 사유하는 것을 장애하는 불공무명이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고제와 집제를 관찰할 때, 이것(수소단의 불공무명)은 어째서 끊어지지 않는 것인가?
이러한 무명은 바로 지(智)에 의해 해손(害損)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온갖 인(忍)은 그것의 대치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고ㆍ집 2제의 이치에 미혹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직접적으로 진리의 이치에 미혹한 법을 반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멸제를 비방하는 사견은 멸제를 관찰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멸제를 관찰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멸제를 관찰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멸제를 관찰하고서도 ‘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방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멸제를 관찰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무루연(無漏緣)의 번뇌라고 하겠는가? 또한 어떻게 ‘이러한 멸제[物]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마땅히 멸제를 관찰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다만 교법을 살펴본[尋敎] 견(見, 즉 염오혜)이 바로 이와 같이 설해진 멸제를 비방하여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거늘, 어찌 이러한 ‘견’이 직접적으로 멸제를 능히 반연한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어째서 이같이 [직접적으로 관찰한] 멸제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는 마치 눈을 가진 자라고 하더라도 멀리서 나무 그루터기가 많이 있는 곳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고서는 이를 부정하여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비록 직접적으로 사람을 반연하였다고 할지라도 [‘저기에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어떤 이가 멸제를 관찰하였을지라도 이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한 멸제와 도제를 비방하는 혜(慧, 즉 사견이라는 염오혜)가 다 견멸ㆍ견도소단은 아니다. 즉 만약 [소연(즉 멸ㆍ도제)을] 자세히 관찰하여 생겨난 것이 아닌 ‘혜’가 멸제와 도제에 대해 설한 것을 듣고서 [그것을] 비방하였을 경우, 이는 오로지 말[名]을 반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관찰하는 것에 의해 끊어지는 것(즉 견멸ㆍ견도소단)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경계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자세히 살피고 헤아림[尋伺推度]으로써 생겨난 ‘혜’가 설교되어진 멸제와 도제를 결정적으로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면, 이는 바야흐로 그것을 관찰하는 것에 의해 끊어지는 것(즉 견멸ㆍ견도소단)이라고 할 수 있으니, [세존께서] 이계(離繫)를 위해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바람이 물로 인해 진정된다는 사실을 능히 안다면, 심사(尋伺)에 의해 인기된 온갖 견(見)도 그 생기를 멈추게 할 수 있음을 바로 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2) 무루연혹의 계지(界地) 관계
이러한 무루연의 수면은 각각의 지(地)에서 각기 몇 가지 지의 멸제와 도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인가?
멸제(滅諦)를 반연하는 온갖 수면(즉 사견ㆍ의ㆍ무명)은 자지(自地)의 멸제만을 반연하는 것으로,36)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멸제를 반연하는 수면은 오로지 욕계 제행(諸行)의 택멸(擇滅)만을 반연하며,37) 나아가 유정지(有頂地)의 멸제를 반연하는 수면은 오로지 유정지의 제행의 택멸만을 반연한다.
그리고 도제(道諦)를 반연하는 온갖 수면은 6지(地)와 9지의 도제를 반연한다. 즉 욕계에 계속되는 도제를 반연하는 수면은 오로지 6지의 법지품(法智品)의 도제만을 반연하니, 욕계의 혹(惑)을 대치하는 것이든 혹은 그 밖의 다른 [상계(上界)의] 혹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든 온갖 법지품을 모두 다 능히 반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38) 또한 색ㆍ무색계의 8지에 존재하는 도제를 반연하는 수면은 각기 오로지 9지의 유지품(類智品)의 도제만을 반연하니, 자지를 대치하는 것이든 혹은 능히 그 밖의 다른 [욕계의] 혹을 대치하는 것이든 온갖 유지품을 모두 다 능히 반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39)
어떠한 이유에서 고제를 비방하고 집제를 비방하는 사견으로서 욕계에 계속되는 것은 능히 9지를 반연하고, 초정려에 계속되는 것은 능히 8지를 반연하며, 나아가 유정지에 계속되는 것은 오로지 그 지(즉 유정지)만을 반연하는 것임에도, 멸제를 비방하는 사견은 9지 중에서 각기 오로지 자지(自地)의 멸제만을 반연하는 것인가?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를테면 만약 어떤 법으로서 이러한 지(地)의 애(愛)에 의해 윤택되는 것이라면, 이러한 지의 유신견은 그것을 아ㆍ아소라고 주장하며, 그러한 제법의 멸(滅)은 다시 이러한 지의 견멸소단의 사견의 소연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올바른 해명이 아니니, 아직 의심을 해소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떠한 이치에서 사견으로서 멸제를 반연하는 것은 고ㆍ집제를 반연하는 사견처럼 자지와 타지를 모두 반연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혹은 온갖 [지의] 사견으로서 고ㆍ집제를 반연하는 것은 어째서 멸제를 반연하는 사견처럼 다만 자지만을 반연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따라서 앞서 언급한 이유는 이러한 의심을 아직 해소시키지 못한 것이다.
아직 의심을 해소시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즉 앞서 언급한 말 중에 그 뜻이 드러나 있다. 만약 제행에 대해 이러한 지(地)의 아애와 아견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이러한 지의 행(行)에 탐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지의 행이 멸하였다는 사실을 들었을 경우, 바로 이러한 지의 사견을 일으켜 [그러한 멸제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상계의 행 중에는 하계에 대한 탐착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하계의 사견이 그러한 [상계의] 멸제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비록 [상하의] 계ㆍ지는 서로에 대해 인과가 격절(隔絶)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9지의 고ㆍ집제는 전전하며 서로를 견인할 뿐더러, 또한 생인(生因)과 의인(依因)과 입인(立因)으로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기 때문에,40) 어떤 한 지의 사견도 여러 [지의] 멸제를 반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멸제를 비방하는 사견은 서로를 견인하거나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될 만한 이치도 없기 때문에 오로지 자지의 멸제만을 반연할 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사견이 아닌] 선지(善智)가 멸제를 반연할 때에도 멸제를 비방하는 [사]견처럼 마땅히 분제(分齊)하여 반연한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일 찰나의 지(智)가 여러 지의 멸제를 단박에 반연[頓緣]한다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니, 이러한 두 가지(멸제에 대한 선지와 그것을 비방하는 사견)가 반연하는 바는 이치상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선지는 1지의 멸제만을 반연하는 경우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이치로 볼 때 사견과는 달리 여러 지의 멸제를 단박에 반연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즉 만약 제행에 대해 탐착하는 자가 이러한 [지의] 행이 멸하였다는 사실을 들었을 경우, 바로 이러한 지의 사견을 일으켜 [그러한 멸제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상계의 행 중에는 하계에 대한 탐착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하계의 사견이 그러한 [상계의] 멸제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그렇지만] 선지(善智)는 탐착으로 말미암아 인기된 것이 아닌데, 여러 지의 멸제를 반연한다고 하는 것이 이치상 무슨 어긋남이 있을 것인가? 즉 선지는 제행의 허물을 관찰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제행의] 허물을 자세히 관찰하고서 그것의 멸을 희구하기 때문에 1지의 [선]지도 여러 지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니, 마치 난법(煖法) 등이 모든 행상으로써 제행의 허물을 관찰하고서 그것의 멸을 흔구(欣求)하는 것과 같다.41) [따라서] 그것(선지)이 사견과 마찬가지로 소연의 경계를 분한(分限)하여 반연하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미혹(즉 사견)과 깨달음(즉 선지)은 그 이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예(例)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관행을 닦는 자는 자지(自地) 중에 [존재하는 제행의] 과실에 뇌란되는 것을 관찰하고서 자지의 [제행의] 멸을 흔구하며, 이에 따라 타지(他地)에 존재하는 제행과 그것의 출리의 과실과 공덕도 역시 능히 관찰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가 일어나면 [자지와 타지의] 경계를 깨닫게 되므로 이치상 여러 지에 존재하는 제행의 멸을 단박에 반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온갖 사견은 경계에 미혹하여 일어날뿐더러 완고한 집착으로 인해 [상ㆍ하지가] 격절되어 [여러 지에 존재하는 제행의 멸을] 모두 반연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사견이 고ㆍ집제와 멸제를 반연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상계ㆍ상지와] 통하고, 오로지 차별된다고 하면서, 도제를 반연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인가?42)
대치는 다르지만 서로에 대해 원인(동류인)이 되기 때문이다.43) 이를테면 소연이 되는 도제는 비록 온갖 지의 차별이 있을지라도 전전 상속(相屬)하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인과 결과가 되기 때문으로, 이에 따라 사견은 6지와 9지의 그것(도제)을 모두 반연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지(諸地)의] 멸제는 서로의 원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비방하는 사견은] 오로지 자지의 멸제만을 반연할 뿐이다.
법지품과 유지품의 도제 역시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므로 하계와 상계의 사견은, 예컨대 고ㆍ집제를 반연하는 사견이 온갖 지(地)에 가로막히는 일이 없는 것처럼 마땅히 법지품과 유지품의 도제를 다 같이 능히 반연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책망은 옳지 않으니, 대치하지 않기 때문이다.4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6지(地)의 법지품의 도제도 마땅히 욕계의 사견이 모두 반연하는 바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위의 5지(중간정과 4근본정) 중의 법지품의 도제는 욕계의 법을 대치하지 않기 때문이며, 미지지(未至地)의 도제 역시 [욕계의 사견이] 모두 반연하는 바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상지에 계속되는 수면은 욕계의 법을 대치하지 않기 때문이며, 욕계를 대치하는 것(즉 법지) 역시 [욕계의 사견이] 모두 반연하는 바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사견은 오로지 [법지]인(法智忍)에 의해 대치되기 때문이다. 또한 색ㆍ무색계의 도제를 비방하는 사견 역시 법지품(즉 욕계)의 도제를 반연한다고 해야 할 것이니, 법지품의 도제도 색ㆍ무색계의 수면을 대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법지는 그러한 [욕계의 사견을] 전부 대치하는 것이 아니니, 고ㆍ집의 법지품(고법지와 집법지)은 그것의 대치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역시 또한 색ㆍ무색계의 [사견을] 모두 대치하는 것도 아니니, 그러한 [상계의] 견소단을 능히 대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45) 즉 초품(初品)의 법지(고법지)는 그러한 [상계의] 초품의 번뇌를 능히 대치하지 못하니, 이것에 의해 대치되지 않기 때문으로, 법지품은 그러한 [상계의 사견의] 소연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색ㆍ무색계의 사견은 능히 9지의 유지품(類智品)을 모두 반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니, 유지품은 상(上) 2계 중에 존재하는 온갖 번뇌를 모두 능히 대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제2정려지 등의 유지품의 도제 역시 능히 초정려지 등의 번뇌의 대치도가 되지 않으며, 초정려 등도 역시 [색ㆍ무색계의 사견이] 모두 [반연하는 바가] 아니니, 양쪽으로 따져 보자면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또한 도제를 반연하는 3계의 수면은 고(苦)ㆍ집(集)ㆍ멸지인(滅智忍)에 의해 대치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도제를 비방하는 [사]견은 이치상 마땅히 하계와 상계의 6지와 9지의 도제를 모두 반연하는 일이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실의 그물[過網]은,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모두 존재하지 않으니, 법지와 유지를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며, 법지품과 유지품이 대치하는 [번뇌의]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며,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 서로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법지품의 도제(즉 도법지)는 다 같이 바로 욕계 중의 ‘도제를 반연하는 번뇌[緣道諦惑]’를 대치하는 종류이지만, 이와 동일한 종류의 도도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고 서로를 반연하기 때문에, 설혹 대치는 그렇지 않다고(동일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역시 욕계의 도제를 반연하는 번뇌의 소연이 된다. 그러나 유지품의 도제(즉 도류지)는 법지품의 그것과 비록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된다고 할지라도, 대치하는 갈래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반연하지 않으며, 따라서 욕계의 도제를 반연하는 번뇌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볼 때, 색ㆍ무색계의 도제를 반연하는 번뇌 역시 마땅히 색ㆍ무색계의 번뇌(수혹)를 대치하는 법지품을 반연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허물을 이미 막은 셈이다. 즉 여기에 비록 능히 상계의 일부의 번뇌(수혹)를 대치하고 역시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는 일부 법지품의 도제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대치하는 갈래[門]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유지품과 더불어 서로를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상계의 도제를 반연하는 번뇌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유지품의 도제는 9지 중에서 동일한 종류로서 전전하여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될뿐더러 또한 서로를 반연하고 대치하는 [번뇌의]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에, 비록 대치는 그렇지 않다고(동일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 모두는 상(上) 8지 중의 도제를 반연하는 번뇌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송에서 설한 [“도제를 반연하는 것은 6지와 9지의 그것을 반연한다”고 하는 사실은] 이치상 지극히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3) 탐 등이 무루를 반연하지 않는 이유
어떠한 이유에서 ‘탐’과 ‘진’과 ‘만’과 두 가지 취견(取見, 즉 계금취와 견취)은 무루단(無漏斷)이면서 무루를 반연하지 않는 것인가?46)
진실의 해탈을 흔구(欣求)하는 모든 이는 결정코 마땅히 탐번뇌를 사리(捨離)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탐번뇌가] 무루를 반연한다면, 그것은 선법에 대한 욕망[善法欲]이 열반이나 성도를 희구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해탈을 흔구하는 자는 마땅히 이러한 탐을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만약 탐번뇌가 무루를 반연한다면,] 멸ㆍ도제도 마땅히 끊어져야 할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이탐(離貪)의 경계를 설하여 ‘끊어졌다[斷]’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경에서 설하기를 “그대가 만약 능히 색에 대한 탐을 끊는다면, 색도 역시 끊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하였던 것이다.
또한 탐의 경계에 대한 과실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탐에서 떠날 수 있는 것으로, 만약 탐이 무루를 반연하는 경우가 있다고 인정할 것 같으면, 마땅히 멸ㆍ도제에 대한 과실을 관찰할 때 비로소 탐에서 떠날 수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관찰은 청정한 것이 아닌데, 어찌 [이것으로] 능히 번뇌[惑]를 다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탐의 경계에 대한 공덕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탐은 생겨날 수 있는 것으로, 만약 탐이 무루를 반연하는 경우가 있다고 인정할 것 같으면, 멸(滅)ㆍ정(靜) 등의 행상으로 무루를 관찰할 때 탐은 마땅히 증장해야 할 것이다.47) 그러니 어떻게 이러한 관찰에 의해 온갖 번뇌를 능히 다할 수 있을 것인가? [탐의 경계에 대한 과실을 관찰하든 공덕을 관찰하든 탐이 무루를 반연한다고 할 경우] 다 같이 번뇌를 다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생사도 마땅히 다함이 없다고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탐은 무루를 반연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진’은 원망과 해코지의 경계[怨害事]를 반연하여 비로소 생겨날 수 있는 것이지만, 무루의 경계(즉 멸ㆍ도제)는 원망과 해코지의 상(相)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다시 말해 원망하거나 해코지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루를 반연하는 경우 진수면은 필시 생겨나지 않는다. 또한 진수면은 그 상이 거칠고 더럽지만, 모든 무루법은 지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진’이 그것에 대해 작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온갖 만수면은 거들먹거리고 잘난 체함[高擧]을 특성으로 하기 때문에 그 성질이 고요[寂靜]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무루법은 지극히 고요한 것이기 때문에 거들먹거리고 잘난 체하는 마음을 낳지 않는다. 또한 ‘만’을 낳은 자는 “나는 이러한 법을 획득하였다”고 생각하고 말하지만, 능히 무루법의 힘을 반연하는 경우에는 이와 같은 ‘만’이 일어나지 않으니, 무루법은 능히 ‘만’을 대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가지 취(取)가 만약 능히 무루를 반연하는 것이라면, 이는 바로 정견(正見)의 상과 동일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무루는 진실 되고 청정하며 뛰어난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가지 ‘취’에 이미 전도됨이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견소단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취’는 무루연의 번뇌가 아닌 것이다.48)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이가 열반을 비방하는 자의 사견 등에 대해 진수면을 일으켰을 경우, 소연(즉 열반을 비방하는 자의 사견 등)으로 헤아려 보건대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니, 허물이 있는 법에 대해 미워하고 등지려는 마음[憎背心]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법도[儀]에 부합할 뿐더러 [그 같은 사견 등은] 마땅히 멀리 떠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즉 이때 진에(瞋恚)는 마땅히 견멸소단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멸제의 상(相)에 대해 어리석은 자만이 능히 [열반을] 비방하는 자에 대해 바야흐로 ‘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49) 이를테면 그는 열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참된] 해탈이라 주장하고 나서 참된 해탈을 비방하는 것에 대해 바야흐로 참지 못하는 마음[不忍心]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컨대 참된 멸제의 상에 대해 어리석은 자 만이 비로소 멸제를 비방하는 사견 등에 대해 지극히 미워하고 등지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 멸제를 관찰할 때 ‘진’을 끊게 된다. 그렇지만 온갖 유정으로서 참된 멸제의 상에 대해 어리석지 않은 자가 능히 멸제를 비방하는 사견 등에 대해 미워하고 등지려는 마음을 낳았다면, 그것은 진수면이 아니라 바로 무탐(無貪) 선근에 포섭된다.
또한 예컨대 뱃속에 많은 병을 지닌 자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비록 맛있는 음식을 먹을지라도 병과 뒤섞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신체를] 쇠퇴시키고 손상시키지만, 뱃속에 병이 없는 자가 먹은 음식은 모두 신체를 이익 되게 하지 손상되게 하는 일은 결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멸(滅, 즉 열반)이 아닌 것에 대해 그릇되게 ‘이는 바로 멸이다’고 하여 탐애(貪愛)를 낳은 자라면, 상속이 더럽기 때문에 [열반을 비방하는] 사견 등에 대해 일으킨 미워하고 혐오하는 마음을 모두 설하여 ‘견멸소단을 반연하는 사견 등의 법에 의해 일어난 진에’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참다운 진실의 멸에 대해 바로 진실의 멸임을 알아 탐애가 없는 자라면, 상속이 청정하기 때문에 능히 멸제를 비방하는 사견 등에 대해 생겨난 미워하고 등지려는 모든 마음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만약 ‘열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정견에 대해 일으킨 진에라면, 이것은 무엇을 관찰하여야 끊어지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 책망해서는 안 될 것이니, 견소단의 진(瞋)은 이치상 필시 선법(즉 무루법)을 반연하는 일이 없기 때문으로, 정견을 반연하는 이러한 진에는 결정코 수소단이다. 그렇지만 이미 진리[諦]를 관찰한 자에게 이것은 더 이상 현행하지 않으니, ‘멸제를 비방하는 [사]견을 반연하는 탐’이 이미 영원히 끊어졌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무루를 반연하는 ‘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인가? 어찌 이러한 ‘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세간에서 바로 알 수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어떤 외도는 말하기를 “열반 중에서는 온갖 감관[根]이 영원히 소멸하니, 이는 바로 [신체를] 크게 쇠퇴시키고 손상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결정코 이를 흔구(欣求)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애당초 진(瞋)이 아니니, 바로 사견이기 때문이다. 본론(本論)에서도 설하기를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견멸소단의 사견에 포섭된다”고 하였다. 이치상으로도 필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일체의 괴로움은 극락처(極樂處)에 이를 때 비로소 그것의 영원한 소멸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극락처란 오로지 진실의 열반으로, 이 같은 ‘극락’이라는 말은 승의(勝義)의 즐거움을 의미한다.
즉 그 외도는 바로 이러한 즐거움의 상을 능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또한 생사의 과실을 능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온갖 존재에 대해 탐착하여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견을 일으켜 열반을 비난하고 부정하였던 것이거늘, 어찌 이를 멸제를 반연하는 진에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1) 무루연혹에 관한 상좌 설 비판
그런데 상좌(上座)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견과 의(疑)와 두 가지 무명이 무루를 반연하는 번뇌라고 인정한다면, 마땅히 멸ㆍ도제는 다 같이 유루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멸ㆍ도제는 번뇌[惑]에 의해 미혹[魅]되지 않으며, 요컨대 유루의 소연[有漏事]만이 번뇌에 미혹된다’고 한다면,50) 이는 바로 어떤 이가 그러한 [유루의] 소연에 대해 구득(求得)하려는 바가 있어야 번뇌를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이다.”
결정코 멸ㆍ도제가 유루를 성취하는 과실은 없으니, 그것은 유루의 상(相)을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유루는 오로지 바로 애착하고 미워하는 것[愛恚事]이다”고 설하였으니, 멸ㆍ도제는 이미 애착하고 미워하는 것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멸ㆍ도제가] 비록 사견 등의 소연이 된다고 할지라도 결정코 유루를 성취하는 과실은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탐과 진수면이 바로 공상혹(共相惑)이라는 사실은 인정되지 않으니, 일체의 경계대상이 모두 ‘탐’과 ‘진’에 의해 계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으로, 마땅히 유루의 소연도 역시 무루를 성취하는 과실을 갖게 될 것이다.”
그는 결정코 대법(對法)의 종의를 알지 못하니, [대법의 종의에서는] 미래의 자상번뇌(즉 自相惑)도 결정코 능히 온갖 유루의 소연을 계박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멸ㆍ도제는 삼세에 걸친 탐ㆍ진수면의 소의도 경계대상도 되지 않기 때문에 그 같은 [유루의] 소연[事]과 동일한 예(例)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어찌 세간의 모든 외도들은 지금 바로 무루에 대해 역시 진(瞋)수면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현[견]하건대, 다른 이(즉 불교)가 설한 정견(正見) 등의 참된 열반도와 열반에 대해 지극히 미워하고 혐오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으며, 계경 중의 여러 곳에서도 역시 멸ㆍ도제를 미워하는 자에 대해 널리 설한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모든 번뇌를 전체적인 특성[總相]에 근거하여 설할 경우, 그것들은 모두 ‘탐’과 ‘진’의 두 품류에 포섭될 수 있기 때문으로,51) 예컨대 세 가지 수면을 설하고서 다시 일곱 가지 수면을 설하였으며, 어떤 이는 3결(結)을 설하고서 다시 9결을 설한 것과 같으니, 세 가지 수면은 일곱 가지 수면을 포섭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3결은 9결을 포섭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예컨대 경에서 ‘큰 병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설하였는데, 어찌 유신견 등이 [세 가지] 큰 병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만약 그러한 품류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역시 큰 병이라고 말할 수 있듯이, 탐ㆍ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여 [일체의 번뇌를] 모두 포섭한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이를테면 ‘탐’은 즐거움[樂]과 상응하는 번뇌를 모두 포섭하며, ‘진’은 다시 괴로움[苦]과 상응하는 번뇌를 모두 포섭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견과 의(疑)와 두 가지 무명이 능히 멸ㆍ도제(즉 무루)를 반연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마땅히 멸ㆍ도제 역시 ‘진’의 소연이 되어 유루의 과실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은 이치상 모두 옳지 않다.
바야흐로 처음에 “모든 외도들은 지금 바로 무루에 대해 진(瞋)수면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고 설하였지만, 그는 무루의 상에 대해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외도들은] 다만 [무루에 대해] 좋아함[樂欲]을 결여하였을 뿐으로, ‘진을 일으킨다’고 해서는 안 된다. 즉 그들은 마음속 깊이 생사(즉 유루)에 즐거이 탐착하여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에 사견을 일으키게 된 것이지 멸ㆍ도제를 비방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어찌 그것을 ‘진’이라 하겠는가?
즉 그들은 [멸ㆍ도제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혹은 허물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오로지 무루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을 바로 ‘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불(佛) 제자가 외도에게 자성(自性)ㆍ사부(士夫)ㆍ시간ㆍ방위ㆍ자아 등에 대해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고 설한 것과 같으니,52) 어찌 이를 바로 ‘진’이라 하겠는가?
또한 그는 “전체적인 특성[總相]에 근거하여 설할 경우, ‘탐’과 ‘진’은 일체의 번뇌를 모두 포섭한다. 그리고 사견 등은 능히 멸ㆍ도제(즉 무루)를 반연하기 때문에, 멸ㆍ도제는 마땅히 ‘진’의 소연[事]에 포섭되어 유루[의 과실]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상좌] 자신의 뜻과 어긋나기 때문이며, 크나큰 과실이 있기 때문이며, 결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마땅히 다르게 설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저 상좌는 곳곳에서 스스로 말하기를 “세존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릇되게 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만약 부처님께서 여기서 다만 탐ㆍ진만을 언급하여 일체의 번뇌를 모두 포섭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이러한 말이 지극히 그릇된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혹 만약 두 가지 번뇌만을 언급하여 그 밖의 다른 번뇌를 능히 포섭하였다면, 후에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설한 것은 아무런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설한 바는 자신의 뜻과도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
어째서 그의 말에 크나큰 과실이 있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앞서 이미 “‘탐’과 ‘진’과 ‘만’과 두 가지 취(取, 즉 계금취와 견취)는 멸ㆍ도제를 반연하지 않는다”고 해석하였는데, 그 이치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極成]이다. 그러나 그대가 말한 바에 준할 경우, 마땅히 [멸ㆍ도제를] 반연한다는 뜻을 갖는다고 해야 할 것이니, 사견도 즐거움과 상응하는 경우가 있기에 멸ㆍ도제 역시 마땅히 탐의 소연[貪事]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53)
혹은 비록 두 가지 번뇌(탐ㆍ진)가 온갖 번뇌를 모두 포섭한다고 인정할지라도 모든 번뇌가 능히 멸ㆍ도제를 반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오로지 사견 등이 [멸ㆍ도제를] 반연한다는 사실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니, ‘진’이 원망의 상[怨相]을 떠난 것이라고 인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54)
또한 그 밖의 다른 뜻에 근거하더라도 크나큰 과실이 발견된다. 즉 [그는] 마땅히 다만 “큰 병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설했어야 할 것이니, 탐ㆍ진이 온갖 번뇌를 모두 포섭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럴 경우] 업을 불러일으키는[集] 인연에도 마땅히 세 가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니,55) 이와 같은 등의 [번뇌의] 갈래에서 그 수(數)는 마땅히 감소해야 하는 것이다.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고 함은 [이러하다]. 즉 그가 말한 바는 오로지 “탐ㆍ진은 모든 번뇌를 능히 포섭하는 것으로, 수면 등의 경우 적은 수는 능히 많은 수를 포섭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지만, 이는 결정적으로 그러한 것은 아니니, 어떤 곳에서는 적은 수의 법을 설하였더라도 오로지 그 명칭과 상응하는 법만을 포섭할 뿐 그 밖의 다른 법은 포섭하지 않기 때문이며, 어떤 곳에서는 총명(總名)을 설하여 개별적인 법을 포섭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기 때문으로, 연기를 설하는 곳에서 “애(愛)를 연으로 하여 취(取)가 있다”고 설한 것과 같다.56)
즉 그러한 [연기의] 종의에서는 오로지 “‘애(탐의 본질)’는 ‘취’의 연이 된다”는 사실만을 인정하였을 뿐, 그 밖의 즐거움과 상응하는 번뇌를 포섭하지 않았으며, ‘취’라는 말이 비록 총명이라 할지라도 오로지 ‘애(탐)’를 포섭한다고 인정하였을 뿐이다.57)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나는 마땅히 그대들을 위하여 온갖 갈애의 그물[愛網]에 대해 설하리라”고 하였으니, 여기서는 오로지 탐구(貪求)의 상을 설하였을 뿐이기 때문에 ‘애’를 포섭하고 그 밖의 다른 법은 포섭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다른 경을 살펴보더라도 전체적으로 번뇌에 대해 설하면서도 ‘견’을 포섭하지 않았으니, 5탁(濁) 중에서 [5탁의] 개별적인 명칭을 언급하면서 번뇌를 전체적으로 포섭하고 있는 것과 같으며,58) 계경에서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고 설한 것과 같다.59) 또한 여기서 [언급한] 세 가지 수면 등에 대해서도 역시 그것이 일체[의 번뇌]를 포섭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마땅히 다르게 설했어야 하였다’고 함은 [이러하다]. 만약 세존께서 전체적인 특성[總相]에 근거하여 온갖 번뇌를 설하고자 하였다면, 여기서 ‘탐’과 ‘진’이라고 설해서는 안 될 것이며, 다만 마땅히 ‘무명’이라고 설했어야 하는 것으로,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고 한 것과 같다. 이러한 [무명은] 능히 일체의 번뇌를 모두 포섭하니, 모든 번뇌와 서로 수행(隨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탐ㆍ진은 오로지 능히 스스로에 포섭된다고 설한다면, 그(상좌)가 앞에서 설한 “이는 바로 어떤 이가 그러한 [유루의] 소연에 대해 구득(求得)하려는 바가 있어야 번뇌를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이다”는 말에 무슨 뜻이 있을 것인가?
“우리의 종의에서는, 요컨대 경계대상에 대해 구득하려는 바가 있어야 비로소 번뇌를 일으킬 수 있다고 설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경계대상에 대해 능히 잘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위배됨[背]을 일으키고 추구함[求]을 일으키는 중에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설할] 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번뇌[惑]에 의해 미혹[魅]된다’는 말을 설한 것인가? 이를테면 만약 경계대상 중에서 번뇌가 자재를 획득하면, 능히 경계대상을 섭수(攝受)하며, 이에 따라 [번뇌가] 생겨나게 되고 증장하게 되는 것이지, 번뇌가 생겨날 때 경계대상을 섭취(攝取)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보배로운 장난감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미혹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다만 이러한 경계대상 중에서 번뇌가 자재를 획득하여 [그것을] 섭수함에 따라 이미 [번뇌가] 생겨나게 되었고 증장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만약 미혹되지 않은 자라면, 경계대상 중에서 비록 그것을 반연하여 번뇌가 생겨났다고 할지라도 증장하지 않으니, 이는 마치 사람이 눈을 들어 해와 달을 볼 때 능히 안근을 감손시키기도 하고 증장시키기도 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탐 등은 무루를 반연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치는 지극히 잘 이루어질 수 있을 뿐더러 멸ㆍ도제가 비록 사견 등의 경계대상이 된다고 할지라도 유루가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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