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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한단다. 저들은 사람이고 나는 하나님이다.
저는 용인 풍성한교회 백중규목사입니다. 교회를 개척한 지 벌써 2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의 동행은 놀라웠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은 때마다 일마다 함께하시며 한없는 은혜로 인도했습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하고 지금까지 22년 동안 저를 지탱하게 한 개척 초기 때 들려주신 하나님의 레마 음성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음성은 “개척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한단다.”라는 음성과 두 번째 “저들은 사람이고 나는 하나님이다.”라는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파란만장한 개척 22년의 어려운 목회 가운데 용기, 인내, 승리를 안겨줬습니다.
개척의 꿈을 꾸고 훈련받았습니다.
저는 교회 개척이 꿈이었습니다. 호남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다니며 늘 가졌던 비전은 개척이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한 저는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교회에 전임전도사로 부임했습니다. 1998년 4월 21일 서울동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사능교회 백용훈 목사님의 목회 프로그램은 다양했습니다. 개척을 꿈꾸고 있는 저에게는 훈련받기에 족한 교회였습니다.
사능교회에서 전도폭발 1, 2, 3단계 훈련을 받았으며, 1단계 강의를 맡아 전도폭발을 직접 훈련 시키는 담당 교역자였습니다. 매주 금요일이면 노방 전도팀, 아파트 전도팀과 함께 전도했으며, 두 교구를 맡아 심방하면서 성도를 관리하는 교구 담당 목사였습니다. 사능교회는 새신자들이 한 해에 100~200명이 등록하는데, 저는 새신자를 심방, 관리, 성경공부, 전도폭발을 훈련하는 사역입니다.
사능교회는 가정회복 프로그램이 많아 앞으로 다가올 한국교회의 미래를 미리 준비한 교회였습니다. 중고등부, 청년들을 위해 새로 도입된 열린 예배로 청년 그리스도인을 훈련하는, 다른 교회보다 발 빠른 목회 현장이었습니다. 축구를 통해 남성, 성도들을 원팀이 되게 했고, 교육관을 개방하여 지역사회가 각종 교육하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어린이집, 노인 대학을 운영하여 지역주민들의 영, 육을 구원하는 열정적인 교회, 참 좋은 교회였습니다.
개척을 위한 기도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고 난 후, 지금껏 꿈꿔왔던 개척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나름대로 개척을 위해 여러 가지 훈련을 받았지만, 막상 개척하려고 하니 돈이 없었습니다. 저도 없었고, 부모님도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사능교회도 땅을 매입하여 개척을 위해 지원해 줄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개척을 집중적으로 기도하던 중 물질이 없어 답답해하며 간절히 기도하는데, 수요기도회에 당시 백용훈 목사님이 다윗과 골리앗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
그 말씀이 “개척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한단다.”라고 하나님의 확실한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백용훈 목사님께 허락을 받고자, 개척의 응답을 꿈으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잠이 들어 꿈을 꿨습니다. “제가 경기도 교육청이라는 큰 건물로 갔는데 교육청에서 백중규 선생님은 발령장을 받아 용인으로 가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발령장을 받고 용인으로 가려고 하는데 작은형 백민규 집사님이 꿈에 나타나, “용인으로 가는 길은 비가 와서 질컥질컥해서 걸어가는 것이 힘드니 내가 승용차로 데려다줄게.”라고, 저를 태워 용인의 한 초등학교로 갔습니다.
초등학교 정문 현수막에 “백중규 선생님, 부임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기뻐서 차에서 내려 교문 안으로 들어가니 교장, 교감, 교무선생님이 나와서 환영했습니다. “백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저도 인사하며 학교로 들어가려는데 학생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께 묻기를 “교장 선생님, 왜 학생은 한 명도 보이지 않습니까?” “이제부터 백 선생님이 학생들을 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학교를 채워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꿈에서 깼습니다.
이 꿈이 개척하라는 하나님의 응답임을 확신하고 담임 목사님에게 개척에 대한 자초지종 세미한 음성과 꿈을 말씀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백 목사님에게 개척을 허락하시는 음성이요 꿈이니 개척하라.”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러면서 백용훈 목사님도 사능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받아 올 때 교육청에서 발령을 받은 꿈을 꿨다고 했습니다.
개척장소를 찾아다녔습니다.
개척은 확신 속에 시작됐습니다. “어디로 가서 개척해야 합니까? 하나님! 제가 개척해야 할 곳을 지명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면서 일산, 춘천, 수원, 죽전, 용인을 두루 다녀 봤습니다. 그런데 장소가 좋으면 보증금과 월세가 너무 많아 시도하기 어려웠습니다. 1999년 4월, 어느 월요일입니다. 개척장소를 찾기 위해 용인 구시가지에서 온종일 찾았습니다. 오후 6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에버랜드가 있는 용인시 포곡면(지금은 포곡읍) 길가에 아파트 단지가 보였습니다.
부동산에 가서 교회 개척장소를 찾는다고 하니 아파트 단지 안 상가 지하에 80평이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가서 보니 완전 새 건물에 교회 개척 장소로 아주 적합했습니다. 보증금 2천만 원에 월세 80만 원이라고 합니다. 준비는 안 됐지만, 이 정도는 계약할 수 있다고 믿고 하나님께 이 장소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기뻤습니다. 그래 담임 목사님에게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동의하시며 개척 준비 기간을 줬습니다. 창립 예배드릴 때까지 사례비도 꾸준히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개척장소를 계약했습니다.
1999년 5월 15일, 개척을 위해 임대 계약을 했습니다. 건물주인은 캐나다에 이민 간 최현대씨, 천주교인이면서 인격적이었습니다. “지금은 보증금 2천만 원에 월세 80만 원으로 하고 차차 교회가 성장하면 월세를 올려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계약을 하다 보니 건물주 이름이 ‘최현대’ 였습니다. 제가 준비한 교회 이름이 “현대인의교회”입니다. 용인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올 것이라는 비전 때문에 지은 이름입니다. 서로 참 기이한 일이라고 하면서 계약을 원만하게 마쳤습니다.
교회 내부 실내장식을 시작하면서 신원아파트 부녀회 임원들과 부딪쳤습니다.
부푼 마음으로 지하 80평 인테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인테리어 업자도 기쁨으로 며칠 작업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파트 입주민이라고 하면서 여성 세 분이 찾아 왔습니다. “우리는 신원아파트 부녀회 임원인데, 여기서 꼭 개척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그럼요,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장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인테리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신원아파트 주민들이 단지 상가 안에 교회가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가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말이 그 입에서 나오니 기가 막혔습니다. “부녀회 임원들이 뭐라고 교회를 나가라 말라 하십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입주민들이 싫어합니다. 입주민들이 싫어하면 개척을 해도 교회가 부흥이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계속 교회를 이곳에서 하면 우리도 아파트 주민들에게 알려서 교회 나가지 말라고 소문낼 것입니다.” 거의 협박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락하신 이 장소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철수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신원아파트 입주민 대표들과 부딪쳤습니다.
부녀회 임원들이 말해도 인테리어가 계속되고 나갈 생각을 않자, 드디어 신원아파트 입주민 대표와 동대표들이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부녀회 임원들이 입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교회가 나가 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는데 인테리어를 계속하고 있으면 안 되지요. 입주민들이 싫어하는데 여기서 개척교회가 버틸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소문내어 교회 가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입주민 대표들이 협박했습니다.
신원아파트 주민대표와 동대표들은 막무가내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파트 단지 안에서 입주민 대표를 만났는데 “목사님! 좋은 말 할 때 나가세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습니다. “대표님! 하나님이 허락해서 개척하는데 하나님이 나가라고 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입주민 대표는 목에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래요, 교회가 이기나 우리가 이기나 해봅시다.” 청천벽력같은 협박이었습니다.
신원아파트 관리사무실 소장과 직원들과 부딪쳤습니다.
입주민 대표는 아파트 관리 소장에게 “교회를 쫓아내시오, 못 쫓아내면 당신들이 사표를 내야 할 것이요.”라며 으름장을 놨습니다. 관리 소장은 시시때때로 찾아와서 “목사님, 목사님 때문에 우리 목이 달아나게 됐습니다. 다른 데로 가서 개척하면 안 됩니까? 이러다 우리 목이 잘립니다. 우리에게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습니다. 제발 우리 좀 봐 주십시오.” 관리 소장이 말하고 가면 다른 직원들이 와서 제발 나가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도 난처했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곳에 와서 개척하는데 하나님이 나가라고 하지 않는 이상 나갈 수 없습니다.”라고 대응했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관리 소장, 직원들과 극한 대립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관리 소장은 처음에는 부탁했는데 내가 나갈 수 없다고 하자 화를 내면서 소리를 높이더니 급기야 목사 새끼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서 “내가 관리 소장으로 있는 한 저 십자가 탑을 떼 버리겠다.”라고 화를 내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상가 지붕에 십자가 탑을 세울 때 아파트 주민들이 손가락질하며 욕했습니다.
내부 인테리어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상가 옥상에 십자가 탑을 세웠습니다. 십자가 탑이 세워지면 사탄이 더 거세게 공격할 수 있다는 판단에 기도를 새벽, 저녁으로 많이 했습니다. 십자가 탑이 세워지는 그날 옥상에 올라가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용인 땅을 제게 주옵소서. 이 십자가로 인하여 용인에 죽어가는 많은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여기 신원아파트 주민이 지금은 교회를 쫓아내려고 하지만 모두 예수님 믿는 자들이 될 줄 믿습니다. 성령님, 역사하시옵소서.”
눈물로 간절히 기도드린 후, 일꾼들은 십자가 탑을 한층 한층 세워갔습니다. 갑자기 아파트 라인마다 주민들이 나와서 십자가 탑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십자가 탑이 한층 한층 더 세워지자 관리소 소장, 아파트 부녀회원, 라인 반장들, 주민들, 상가의 각 점포 주인들이 나와서 십자가 탑이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수군거렸습니다. 분명 좋은 소리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조금 후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십자가가 세워진다. 십자가 떼어 내리자.”라며 소리를 지르니 여기저기서 십자가 떼어 내리자고 소리 치며 손가락질했습니다.
십자가가 세워지고 있는 옥상에서 보니,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군중 같았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예수를 못 박으라.” 이때 분위기는 옥상에서 내려가면 예수님을 잡아 죽인 유대인들처럼, 저를 붙잡아 죽일 기세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놀랬습니다. 아니 두려웠습니다.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이 지역에 주께로 돌아올 영혼들이 많구나. 그러니 이처럼 사탄의 역사가 심하지, 담대한 마음을 먹었으나 옥상에서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신원아파트 주민들이 용인시청에 현대인의 교회를 쫓아내기 위해 민원을 냈습니다.
십자가 탑이 세워지고 십자가에 불이 들어오자 아파트 주민들은 더욱 거세게 교회를 욕하고 아파트를 지나가면 목사 새끼가 간다고 욕을 했습니다. “목사 새끼.” 말로만 듣던 욕입니다. 평생 한 번도 듣지 않고 목회할 것 같았던 그 욕을 아파트를 지나가는 저에게, 아니 지나갈 때마다 했습니다. 내가 목사 새끼구나,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니 새끼 목사였습니다. 아직 목사 안수를 받은 지 1년 조금 넘었으니 새끼 목사이지 뭐, 라고 하면서 자위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현대인의교회 백중규 목사님입니까?” “네. 무슨 일입니까?” “다름 아니라 신원아파트 주민들이 민원을 냈습니다. 교회가 아파트 상가에 들어와서 소음이 나고, 십자가 탑이 세워져 아파트 미관이 좋지 않으며, 교회가 상가에서 떠났으면 좋겠다고 민원이 들어 왔습니다. 주민들과 잘 타협을 해보시죠?” 전화를 끊고 나니 기가 막혔습니다. 알아보니 아파트 주민 중 다른 교회를 다니고 있는 분이, 아파트 각 라인 게시판에 아파트 상가에 교회가 들어왔는데 민원을 내야 하니 주민들의 협조를 바란다는 취지의 글이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내용입니다. ① 교회가 상가에 들어오면 아파트값이 떨어진다. ② 교회에 사람들이 예배드리러 오가는 중에 차를 타고 오는데 오가면서 사고가 일어나 주민들이 다치면 안 된다. ③ 교회에 왔다고 하면서 아파트에 침입하여 도둑질할 가능성이 있다. ④ 교회의 기도, 찬송, 예배 소리가 교회 밖으로 나올 텐데 이것은 소음이다. ⑤ 십자가가 싫다. 이런 이유로 아파트 474세대 중 274세대가 서명을 하여 용인시청에 민원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아파트 주민들이 민원을 낸다고 할지라도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임대계약할 때에 근린시설로 등록되지 않아 교회가 들어올 수 없었는데, 계약하면서 교회 장소를 근린시설로 용도 변경을 했던 터라 간발의 차이로 주민들이 낸 민원으로는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시청 직원이, “목사님,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으니 주민들과 잘 타협하십시오. 용인시청 역사 이래 이런 민원이 들어온 것은 처음입니다. 부탁드립니다.” 그 이후 아파트 주민들과 이견을 좁히지 못했습니다.
아파트 주민대표가 수요일 저녁 8시에 아파트 관리사무실로 호출했습니다. 기가 막히고 두려움에 쌓인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교회 내부 인테리어가 끝날 즈음에 주민대표가 수요일 저녁 8시에 아파트 관리실로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내용은 뻔히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다가오자 가슴이 떨렸습니다. 아니 두려움까지 임했습니다. 아직 창립 예배도 안 드렸고, 교인으로 등록된 사람은 중풍 병든 노음전 할머니, 중 2학년 남학생, 아내, 6살 된 딸 향기, 2살 된 딸 향목이가 전부였습니다. 제게 힘을 줄 수 있는 어떤 사람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수요일 저녁 7시, 만나기로 약속한 한 시간 전이었습니다.
금식기도 하며 이 시간을 기다렸는데 시간이 다가오자 더 심장이 떨렸습니다. 그래서 강단에 올라가 배를 깔고 두 팔 벌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밤 8시에 주민대표를 만나기로 했는데 심장이 떨립니다. 아니 두렵습니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 개척하면 빌립보 지역의 루디아처럼 멋진 성도가 예비 돼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시간 종과 함께하옵소서.”
기도할수록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약속 시각이 가까워져 올수록 심장은 더 뛰었습니다. 40분쯤 기도할 즈음에 갑자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종아! 저들은 사람이고 나는 하나님이다.” 이 음성에 그만 폭포수 같은 눈물과 더불어 “아멘!”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나님께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저들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오자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제 주위에 저를 도와줄 사람은 없지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시니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담대하게 아파트 관리실로 향했습니다. 교회에서 아파트 관리실까지는 40m 거리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돼 내이며 관리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니 20명 넘는 아파트 주민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다들 큰 책상에 둘려 앉고, 저는 청문회 때, 위원들에게 질문받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주민대표, 동대표, 감사, 부녀회 임원, 관리실 소장, 각 라인 반장이 싸늘한 눈빛과 굵직한 목소리로 여기저기서 “목사님!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주민들이 교회가 신원아파트 상가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용인시청에 민원을 냈는데, 신원아파트 474세대 중 274세대가 서명했습니다. 이 정도면 이곳에서 개척해도 사람들이 교회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괜히 망하지 말고 이곳을 정리하고 떠나십시오.”
다 듣고 나서 벌떡 일어나 책상을 한번 들었다 놨다 하고 큰소리쳤습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인 나는 하나님이 떠나라 하지 않는 이상 떠날 수 없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목사가 저래,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결국, 주민대표는 선전 포고했습니다. “금주 금요일 정오에 주민들이 교회 앞에서 데모할 것입니다. 어디, 누가 이기나 봅시다.” 그 살벌한 상황에서 저는 깍듯이 주민들께 인사하고 담대히 관리실 문을 나왔습니다. 문을 닫고 교회로 오는 길에 관리소에서 고성이 들려왔습니다.
“무슨 목사가 저래, 데모해서 반드시 쫓아 내버리자.” 그 고성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다리에 힘이 빠져 후들거렸습니다. 교회로 돌아와 강단에 또 배를 깔고 하나님께 울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들이 이제는 교회를 쫓아내기 위해 데모하겠답니다. 금요일 정오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연약합니다.” 한참을 기도하는데 마음속에 “저들은 사람이고 나는 하나님이다.”라는 음성이 다시 강하게 들려왔습니다.
다시 확신을 가지고 벌떡 일어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계속 감사의 기도를 하며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일단 주민대표가 한 말이니 금요일 정오에 데모하러 올 것으로 생각하고 3일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시간이 금요일 정오가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아파트 주민들이 교회 앞에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할렐루야!
드디어 용인 현대인의교회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극심한 방해가 있었습니다.
1999년 7월 15일 오전 11시, 드디어 용인 현대인의교회 창립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오는데 엄청 많이 왔습니다. 손님을 초청해 놓고 안타까웠습니다. 오전 10시가 되니 가는 비가 내렸습니다. 다행이다 싶었는데, 한 성도가 헉헉거리며 오더니 “목사님, 아파트 정문에서 관리소 직원, 아파트 경비원들이 교회에 오는 손님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단지 상가 지하인데 정문에서 못 들어오게 하니, 결국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님들도 지지 않고 화를 내며, 경비원, 관리소 직원들과 싸움하다시피 하며 창립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창립 예배순서를 맡은 목사님들도 경비원, 관리소 직원들과 말싸움을 하고서야 들어왔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손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염려하며 창립 예배를 드리고, 많은 격려와 위로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개척 목표의 전도를 했습니다.
당시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신원아파트는 전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밖으로 나가서 동네를 돌아다니며 전도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아파트 밖에서 전도했는데, 아파트 단지 입주민들이 하나둘씩 등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 동대표 중 한 사람도 가족 전체 5명이 등록했습니다.
시청에 민원을 낼 때 유난히 앞장섰던 어느 집사 가족 5명도 등록했습니다. 저와 아내는 전도에 집중했습니다. 딸 둘 향기, 향목이를 광주광역시 친정에 한 달 동안 맡기면서까지 사명감을 가지고 전도했습니다.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주민들이 아무리 핍박을 해도 교회는 6개월 만에 장년 40명, 아동부 20명이 등록했습니다.
교회에 물난리, 불난리가 났습니다.
창립 예배를 드리고 난 후 기도와 전도에 전념하고, 2주 뒤 용인에 큰비가 왔습니다. 비가 조금 잦아들자 비 단속을 하고 아내와 함께 광주 기도원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저녁 기도시간에 웬 비가 그리 많이 온 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지하교회를 걱정하며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교회 문을 열었는데 교회 바닥이 온통 물로 덮였습니다. 집수정 모터가 고장이 나서 작동이 안 되어 그 많은 비가 지하교회로 들어왔던 것입니다. 다행히 바닥 80평에 20cm 정도만 차서 관리실 직원의 도움으로 물을 퍼낸 후 2주간 교회를 정비했습니다.
1999년 12월 25일 토요일, 개척 후 첫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첫 세례를 받을 최윤영 성도과 남편 이재영 성도에게 세례 문답을 하기 위해, 저녁 7시 목양실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개척 후 첫 세례와 성찬을 위해 용인 시내 제과점에 빵과 포도즙를 사러 갔습니다. 돌아오는데 교회가 있는 신원아파트에서 소방차가 왱왱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불이 났나! 하고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데 경비원 아저씨가 교회 차를 보고 뛰어오더니 “목사님, 교회에 불이 났습니다. 교회가 불이 났어요.” 사방에서 교회 차를 보고 불이 났다고 난리였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놀랐습니다. 어떻게 해서 불이 났지, 소방대원들이 불을 끄고 화재의 원인을 알아보니, 개척하면서 교회 비품은 모두 다 새것으로 구했는데, 난로는 중고 가전에서 중고를 샀습니다. 개척 후 처음으로 만난 겨울에 난방은 해야 하고, 돈이 없어 중고 난방기 석유 난로를 샀는데 난로의 불꽃방지를 위한 센서가 고장 나 불꽃 방지벽을 뚫고 불이 튀어나와 앞에 있는 장의자를 태우며 불이 났습니다. 불이 났다는 경비원 말을 듣고 허겁지겁 주차하고 교회로 뛰어갔습니다.
소방대원들이 불을 끄기 위해 긴 호스를 지하로 끌고 가서 불을 껐는데 순식간에 불이 진화됐습니다. 그러나 지하이기에 연기가 밖으로 나올 때는 그야말로 대구 지하철 사고를 방불케 했습니다. 교회 밖에서 불이 붙은 교회를 볼 때 가슴이 터질 듯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연기가 가득 나오는데, 지하 계단을 내려가 불을 함께 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려가는데, 소방관이 “당신 누구요? 죽으려고 내려갑니까?” “저는 이 교회 담임목사입니다.” “목사님, 지금 내려가면 죽습니다. 안됩니다. 빨리 올라가세요.”
“아닙니다. 저는 내려가야 합니다. 죽더라도 교회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죽기 살기로 내려가려는 저를 보고 진화가 거의 되어 간 것을 파악한 소방관은 저에게 물 묻은 수건을 주고 연기가 아직 자욱한데 저를 데리고 내려갔습니다. 소방관이 랜턴을 비춰 줬습니다. 화재의 발화점을 비춰주는데 바로 중고 석유 난로였습니다. 진화 후 그날 밤 교회를 둘러 보는데 천정은 검은 연기로 까맣게 그을렸고, 교회 내부 집기와 바닥은 온통 물로 젖었으며, 강단은 나가지 못한 연기 그을음으로 가득했습니다. 눈물만 나왔습니다.
화재 진압 후 불이 난 것을 알고 성도 몇 명이 교회로 왔습니다. “어디에서 불이 났어요?” “중고 석유 난로에서 불이 났네요.” 교회가 돈도 없이 개척하더니 이런 불이 났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슨 죄를 지었을까? “주님! 제가 잘못한 것 있으면 가르쳐 주세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당장 내일 있을 세례와 성찬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다행히 10평 정도 되는 교육관과 3평 정도 되는 목양실은 화재 시 그을음이 들어오지 않아 세례 문답과 세례, 성찬식을 했습니다. 현대인의교회 첫 세례자를 소개하면 매표인주 사장님 딸이었고, 그분의 어머니는 불교 여신도연합회 회장을 지낸 불심이 강한 분이었는데 그 어머니가 딸과 사위의 세례식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첫 세례자 최윤영 성도는 친정어머니도 빨리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기도하며, 저에게도 기도 부탁했습니다.
첫 세례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집례했고, 첫 성찬도 극적인 상황에서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화재 진압 후 교회 청소와 내부 손질은 중고 석유 난로 판매점에서 센서가 고장 나 생긴 것이라 인정하고 모두 배상해 주었습니다. 3주에 걸쳐 예배당을 청소하고 페인트를 칠하며, 불타지 않은 의자는 깨끗이 닦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배드렸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교회개척 시 앞장서서 교회를 핍박한 분들에게 사고가 잇따랐습니다.
창립 예배를 드리고 물난리와 불난리, 간헐적으로 신원아파트 주민이 찾아와 술 마시고 깽판을 치는 일들이 잇따랐습니다. 그때마다 진지하게 대화하고, 아파트에서 떠나라는 그들을 설득시키며 지낸 어느덧 1년이 다 된 어느 날 관리소 소장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1년 전 현대인의교회가 신원아파트에서 떠나라고 겁박했던 소장, “내가 소장으로 있는 한 저 십자가 탑을 떼 내리겠다.”라고 악담했던 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분당에서 컴퓨터 교육을 받고 돌아오다가 가로수를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원아파트 주민들은 이 사고를 단순하게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그렇게도 핍박하더니...
아파트 입주민의 성화에 못 이겨 관리소 소장 자리를 지키기 위해 교회를 핍박할 수밖에 없었는데, 주민들이 인제 와서는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소장이 세상을 떠난 후 주민들은 교회를 핍박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가끔 교회에 술 마시고 깽판 치러 오는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주민대표의 두 번에 걸쳐 생긴 자동차 사고는 교회 핍박의 종지부를 찍는 동기가 됐습니다. 주민대표는 용인에서 제일 큰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었고, 부인은 집사였습니다. 그런데 주민대표라는 완장 때문에 입주민들의 성화에 못 이겨 교회를 떠나라고 겁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창립 예배드리기 전에 교회를 쫓아내고자 저를 관리소로 소환한 사람, 주민들이 싫어하는데 교회 나가라고 앞장선 사람 “목사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주민들이 교회가 아파트 상가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용인시청 민원에 474세대 중 274세대가 서명했습니다. 이 정도면 이곳에서 개척해도 사람들이 교회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괜히 망하지 말고 이곳을 정리하고 속히 떠나십시오.”라고 했던 사람, “이번 주 금요일 정오에 주민들이 교회 앞에서 데모할 것입니다. 어디, 누가 이기나 봅시다.” 했던 사람이, 그가 다니는 회사에서 오다가 비가 많이 오는 어느 날 승용차끼리 충돌하여 사고가 났습니다.
첫 번째 사고 때 몸은 가볍게 다쳤으나 차를 폐차시킬 수밖에 없는 큰 사고를 당했고, 두 번째는 일 년 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모습의 사고를 당했습니다. 소문에 작년에 큰 사고를 당했으니 이제는 사고가 나도 몸을 다치지 않게 더 좋은 승용차를 사야겠다고 더 크고 성능이 좋은 승용차를 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년보다 더 큰 충돌 사고가 나서, 차는 이번에도 폐차를 시킬 수밖에 없었고, 몸은 차가 충돌 때 튀어 들어온 유리 파편으로 인해 주민대표의 몸에 박히는 아찔한 사고를 당해 용인의 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때 그 교회 부목사님이 신원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하루는 현대인의교회에 찾아와, 저에게 “목사님! 주민대표가 큰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분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십시오.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몰라서 그랬으니 목사님께서 마음을 푸시고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병원에 심방 한번 해 주세요.”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과일바구니를 준비해 찾아갔습니다. 문을 열고 병실에 들어가니 저를 보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런 어색한 상황에서 제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대표님, 이제 우리 잘 지냅시다.”라고 손을 붙잡으니 “제가 잘 못 했습니다. 이제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대표의 손을 잡고 지난날 주민대표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한 죄를 용서해 주시고, 빠른 쾌유를 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 주민대표는 퇴원했습니다. 신원아파트 교회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지난날 같으면 고개를 쳐들고 인상을 찌푸리고, 저를 향해 욕을 했을 텐데, 조용히 고개를 숙여 묵례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앞을 지나갔습니다. 이후 현대인의교회는 신원아파트 단지 안에 개척한 후, 2년 만에 신원아파트를 대상으로 전도했습니다.
핍박의 시기 2년이 지난 후,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주민대표와 화해하고 난 후, 본격적으로 신원아파트를 대상으로 전도했습니다. 그 당시 아파트 주민들의 소문에 “교회 건들지 마라. 교회 건들면 큰일 난다.”라고 했습니다. 이후 일주일에 3일은 전도에 전심전력했습니다. 주위에 아파트가 입주하면 작은 천막을 아파트에 설치하고 일주일 내내 전도했습니다. 아파트 주민을 위해 어버이날 대접하고, 한방 침 선교회원들을 모시고 와서 아파트와 지역주민들에게 침 선교를 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에는 교회가 마련한 빔프로젝터로 신원아파트 작은 운동장에 설치하여 같이 응원하고 대접했습니다.
초등학생들에게 풍선으로 동물 만들기, 칼 만들기, 종이로 갖가지 모양 만들기, 유아들을 위한 유모차 기도회를 만들어 일주일에 두 번씩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퇴원시간에 맞춰 교회로 오게 하여 축복기도 했습니다. 주민들에게는 차 대접, 일 년에 한 번 전도대회, 양육 1, 2, 3단계 전도폭발, 새신자 교육을 위한 양육자를 훈련하고, 내 남편을 아브라함처럼이라는 금식 프로그램을 만들어 금식하며 남자 성도들을 세우는 목회를 했습니다. 지역이 그때는 면 단위라 농촌 분위기가 많았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활용해 봄철이 되면 쑥 캐기 경연대회도 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일 년에 평균 60명씩 등록했습니다. 개척 5년이 되었을 때, 장년 제적 200명, 초등학생 70명, 중고등부 30명, 총 300명의 성도가 등록하여 은혜롭게 목회했습니다. 개척 초기를 생각하며 간증을 쓰고 있는 저는, 교회 개척 5년 동안에 파란만장한 일들이 많았지만 “개척은 돈으로 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한단다.”라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그대로 목회 현장에서 부흥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힘겹고 어려울 때마다 “저들은 사람이고 나는 하나님이다.”라는 세미한 음성을 기억하고 어려울 때마다 담대히 이겨냈습니다.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역하려고 몸부림치는 종을 책임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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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전 이야기네요....그 시절이 부럽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