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전 · 간 송 전 형 필 · ‘국보를 되찾다’ |
명가보감 · 문화재 보존으로 지켜낸 민족정신 · '간송 전형필 가문' |
간송 전형필 가문 - 1930년대 일제가 우리 문화재를 도굴해 일본으로 빼돌리던 시절, 모든 재산을 다 바쳐 우리 문화재를 사들여 보존한 간송 전형필 가문의 민족정신을 되돌아본다. |
간송 전형필 가문 - 1930년대 일제가 우리 문화재를 도굴해 일본으로 빼돌리던 시절, 모든 재산을 다 바쳐 우리 문화재를 사들여 보존한 간송 전형필 가문의 민족정신을 되돌아본다.
이탈리아에 메디치가 있다면 한국에는 간송 전형필이 있다. 르네상스 미술이 메디치 가(家)의 후원으로 발전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한국미술은 전형필의 노력으로 온전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형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진실하게 묵묵히 수행하며 사는 사람이 진짜 영웅임을 일깨워준 인물이자,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선조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편안히 유유자적 사는 대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전형필. 그는 ‘식민지 시대 조선 청년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켜내겠다고 결심한다. 그 후 자신의 재산과 젊음을 바쳐 일본으로 유출되는 그림과 도자기, 불상 등을 수집했다. 이미 일본인 손에 넘어간 문화재라도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주저 없이 현해탄을 건너가 값을 따지지 않고 되찾아왔다. 그렇게 해서 그가 지켜낸 문화재는 삼국 시대부터 근대에 걸쳐 있으며 그림과 글씨, 조각과 공예 등 조형미술의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이자 유네스코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한 <훈민정음>이 전형필의 숨은 노력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고, 섬세한 심리 묘사와 해학미가 돋보이는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 <월하정인> 등의 풍속화 또한 다시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전형필은 나라를 빼앗긴 절망의 시대에 우리의 얼을 지켜낸 문화의 수문장이자, 탁월한 심미안으로 한국미의 품격을 바로세운 선각자였다. 그가 평생을 바쳐 수집한 문화재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박물관인 보화각(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 국보가 12점, 보물이 10점이나 될 만큼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 글쓴이 박옥순은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으로 등단한 후 서평 전문잡지 <출판저널> 기자로 일했다.
|
 | SBS 스페셜 · 간송이 지켜준 보물 2014-03-23 |
간송이 지켜준 보물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단오풍정 등 간송 미술관 소장 작품들... 한번쯤 본적도 있고 누구의 작품인지도 알 것이다. 교과서에도 실린 걸작들이므로... 하지만... 이 그림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지켜준 대수장가 간송 전형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간송 미술관
성북동에 위치한 대한민국 최초 사립 미술관.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의 호를 딴 미술관. 고려청자상감운학문매병, 훈민정음 혜례본 등 국보 총 12점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오원 장승업 , 혜원 신윤복 등 조선시대 천재화가들의 위대한 걸작들을 보유한 미술관. 일 년에 봄, 가을 딱 두 번의 전시회 그리고 무료입장...
간송 전형필은 어떤 분 이었는가? 어떻게 그에 의해 이렇게 많은 소중한 문화유산이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일까? 이번 주 SBS 스페셜 [간송이 지켜준 보물]편에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조국을 사랑했고 우리문화의 정수를 지켜낸 남자, 간송 전형필
일제 강점기 조선 최고의 명문부호집에서 태어난 간송 전형필.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과의 운명적 만남은 그를 우리문화 유산 수호자의 길로 인도한다. 책 읽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청년 전형필은 일제로부터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냄으로서 자신만의 독립운동을 실천한다. 그는 언젠가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될 것을 확신했고 우리 문화의 우월성을 증명할 수 있는 위대한 작품들을 지켜내야만 해방이후 민족정신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그림 몇 점, 도자기 몇 점, 낡은 책 몇 권 사는데 다써버린 그를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지금 우리는 그를 위해한 우리문화의 수호자, 문화 독립운동가로 기억하고 있다..
간송이 지켜준 보물들, 우리는 어떻게 감상하고 무엇을 느낄 것인가?
천마리 학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을 표현한 세계최고 걸작 [고려청자상감운학문매병] 모나리자를 뛰어넘은 신비의 미소와 섬세한 표현이 돋보이는 [미인도] 조선시대 양반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풍자한 [단오풍정] [주유청강] 등 이런 작품들을 우리는 어떻게 감상하면 좋을 것인가?
“아는 만큼 보인다” 우리 조선시대 위대한 천재 예술가들의 작품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번주 SBS 스페셜 [간송이 지켜준 보물] 편에서는 우리 위대한 문화유산을 감상하는 법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가 느끼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
한국사 전 문화유산지킴이 · 'Cultural Heritage Moderators' |
 | 국보를 되찾다
문화유산 지킴이, 간송 전형필 |
|
| 조선의 청년 간송 전형필. 한평생 조선의 문화 유산에 바치다!
국보 70호 훈민정음! 고려청자의 백미 운학문매병! 조선으로의 타임머신,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한사람의 열정이 지켜낸 빛나는 문화유산들! 민족문화유산의 수문장, 간송 전형필을 만나본다.
| 한국사 · 傳 문화유산지킴이 · 간송 전형필 |
일제 36년-한민족 수난사. 문화재 수탈사!
도쿄 국립박물관의 오쿠라 컬렉션. 각종 도자기와 회화, 불상 등이 진열되어 있다. 오사카 동양 도자 박물관.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고려청자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일본에게 수탈당한 우리 문화재들이다. 한일 합방 이후, 일본에서 건너온 골동상과 도굴꾼들은 개성을 포함한 전국의 고분을 도굴. 전국토를 파헤친다. 이렇게 유출 된 우리 문화재들은, 전람회와 경매장에는 거래. 일본인들의 집안과 정원을 장식한다. 일제 치하 36년은 우리 문화유산 약탈의 36년이었다. 일본 현지에 남아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 <한국사 전>이 취재했다.
|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려자기를 소장하고 있는 일본의 도자 박물관> | <일본에 빼앗겼다 다시 찾은 경천사지10층석탑> |
| “고분의 도굴로 인해 황폐해져 가는 상황은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이고, 실로 잔인 혹심의 극치 이다. 이는 현대인의 죄악이며 땅에 덜어진 도의를 보려거든 고분 군집지를 가 보라” <대정6년도 고적조사보고서 中> |
조선부자, 전 재산을 털어 문화유산을 지키다!
10만석 지기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라난 전형필. 그의 인생은 오세창 선생을 만난 뒤 바뀌기 시작한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이자,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던 오세창 선생. 오세창 선생으로부터 문화재 보는 안목과 지식을 배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민족 문화 유산의 보호임을 자각한 전형필.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일본으로 유출되는 우리 문화유산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
간송 전형필이 있기에, 우리 곁에 있는 보물들!
한글 창제의 과학적 원리를 담고 있는 국보 70호 훈민정음, 고려 청자의 백미로 꼽히는 국보 68호 고려청자상감운학문매병, 조선 후기 대표 풍속인물화를 담고 있는 혜원 전신첩. 조선 최대의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의 글씨 등. 전형필이 없었다면 위대한 문화 유산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전형필이 지키고자 했던 우리의 문화유산! 조선 미술의 걸작들을 한국사전을 통해 다시 만나본다!
|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유네스코에 등록된 훈민정음>
|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혜원 신윤복의 연소답청>
|
전형필, 한국의 메디치를 꿈꾸다!
해방 이후, 전형필은 일체 수집활동을 중단. 교육사업과 조선 미술사의 후원에 힘쓴다. 김원용,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과 교류하는 등. 한국 미술계의 1세대를 이끈다. 전형필이 세운 보화각은 훗날 간송 미술관으로 변신. 국보 12점과 보물 10점을 포함. 수천 점의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과 민족혼을 일깨우는 요람이 되었다. 민족문화 수호의 일생을 바친 전형필. 그는 비록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지만, 그가 남긴 문화유산은 우리 모두의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전형필(全鎣弼, 1906년 7월 29일 ~ 1962년 서울 출생)은 한국의 문화재 수집, 보존, 연구가이며 교육가이다.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이다. 그가 수집한 대부분의 문화재들은 매우 가치가 높은것들이 대부분이어서 국보나 보물 등으로 지정되었다.
1942년 훈민정음 원본을 찾아내고, 간송미술관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32년 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고, 한국의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사모으기 시작한다. 1934년에는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하고 그가 33세가 되던 1938년에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保華閣)을 세운다. 이것이 확대되어 1966년에 간송미술관이 된다. 간송미술관은 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술관 중의 하나이다. 그와 관련되어, 안동에서 2000원이란 큰 돈을 주고 산 훈민정음 원본에 관한 일화와 존 개츠비의 소장품인 고려청자의 수집에 대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였으며 1945년에는 1년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다. 1960년에는 이전부터 그를 돕던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등과 함께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고고미술(考古美術)》이란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1962년 그의 사후에 문화훈장이 추서되었고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바뀌었으며 북단장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었다.
| <오원 장승업 전이 열리고 있는 간송미술관> |
|
1. 슬픔이 사람을 키운다
올 해는 간송 전형필 선생 탄생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님은 많은 분께서 알고 계시듯이 자기의 전 재산을 받쳐 일본으로 반출되는 우리 문화재를 사들여 시들어 가는 민족 문화의 위대함을 지켜낸 분이십니다. 또 어렵게 모은 문화재를 널리 많은 사람들과 같이 연구하고 알리고자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 전시실)을 설립하였습니다.
간송미술관은 그런 전형필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일년에 두 번(5월, 10월) 특별 무료 기획전시회의 개최하는데 이번 5월 전시회가 70회가 되니 기획전시를 시작한지도 벌써 35년이 되었습니다. 문화재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분들이라도 한번쯤을 들어보셨을 간송미술관 기획전은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언제나 무료관람입니다.
저개인적으로 옛 그림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바로 간송미술관 기획전을 통해서입니다.
특히 올 해는 간송 탄생 100주년 특별전으로 소장품 중 지정 문화재(국보와 보물)와 간송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대거 전시되어 전시회 첫날 개장시간 10시부터 50m 이상 입장을 위해 줄을 서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간송미술관 입구 –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 첫날> 미술관은 성북 초등학교 정문과 맞데고 있는데 (오른쪽 방향에 성북초교 정문이 있다) 그 이유는 원래 북단장 땅의 일부를 간송이 성북초등학교 부지로 기증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간송미술관에서 작품을 보거나 전시회가 열리는 보화각 건물을 다니면서 전형필 선생님과 간송미술관의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그 분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지금 이러한 모습이 가능한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조금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왜 작품만 감상하면 되었지 설립자의 삶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되묻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점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쩌면 문화재를 이해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간송미술관과 전형필 선생님의 훌륭함은 이곳에 위대한 작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전형필 선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작품들의 위대함이 밝혀졌고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삶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민족 문화에 대한 사랑과 소장 작품들의 이해의 깊이를 더 할 것이며 앞으로 우리는 우리 문화재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명확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사람을 태어나게 할 때는 그 사람이 해 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집안의 부귀나 능력의 고저에 상관없이 삶은 그 사람만의 몫이 있으며 그 몫을 다하면 하늘로 다시 불려드린다 합니다.
간송 선생님의 삶을 살펴보면 정말 이러한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어떻게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문화재 수집이란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일제시대와 6.25 전쟁 속에서 주요 미술품을 어떻게 지켜냈는지를 알게 되면 한마디로 기적이고 하늘의 뜻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기적은 어떻게 간송에게 그 많은 재산이 생기게 되었는가 입니다. 간송 전형필은 1906년 7월 26일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종로4가 일대는 ‘배우개’라는 이름으로 부렸는데 전형필이 태어난 배우개 양반댁은 종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간송의 선대는 장사를 천하게 여기던 시절 양반으로서 상업에 일찍 눈을 떠 배우개의 상권을 하나씩 넓혀나가면서 모은 재력으로 전국 각지의 농지를 계속 구입하여 간송의 증조부인 계훈 시절에 수만 석을 추수하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계훈에게는 전창렬 , 전창엽 두 아들이 있었는데 간송이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 내외는 70대 중반이었고 작은 할아버지는 69세 동갑, 부모의 나이도 40세를 넘겼으니 손위 형과 14살 터울이 있었고 작은 할아버지 양자인 명기공이 자식이 없어 절손될 위기에 놓여 있었기에 간송의 탄생이 얼마나 집안의 큰 경사였겠습니까.
간송은 탄생과 더불어 종숙부 양자로 입후되었으니 큰댁은 생가로 작은댁은 양가로 각기 그 조부모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으니 한마디로 온갖 복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완고한 할아버지는 간송에게 신식 교육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간송은 열 살 때까지 집에서 스승을 모시고 한문과 경서를 공부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열 두 살이 되어서야 어의 보통학교 (현재 효제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집안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시작으로 다음해에 양가의 할머니가 그 다음해에 양가 조부가, 두 달 뒤에 생가 조모가 돌아가시면서 3년간 곡성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 조부들의 삼년상이 끝나기 전에 또 양부가 돌아가시고, 그 후 보름도 지나기 전에 간송의 유일한 친형이요 본생가의 계승자인 형설이 불과 28세의 나이로 후사를 두지 못하고 급서하니 양부의 장례를 치르고 양조부의 대상을 막 끝낸 뒤 닷새 만에 당하는 날벼락이었습니다. 남달리 총명하고 감성이 예민했으며 거부집안의 막내손자로 온갖 사랑을 독차지 하며 자랐던 간송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추사 김정희가 9세 때부터 16세까지 연속적인 근친의 죽음을 당하거나, 공재 윤두서가 3, 4년간 근친들의 연이은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큰 인물들에게는 시련을 주어 더 큰 그릇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하늘의 안배인지 모릅니다.
>
<1925 을축년 간송생부 옥포공 회갑연시> 1925년은 여름에 을축년 홍수라고 불리우는 대규모 물난리가 났으며 이로 인해 대흉년으로 간송가도 추수를 받기는 커녕 소작인들의 기근을 구제하여야 했던 해 이다. 그래서 회갑연도 가족끼리 모여 조촐하게 치루어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 유달리 많은 관심을 보였던 이성과 감성이 둘 다 잘 발달되어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어린 간송은 슬픔이 사람을 키우듯 말수가 적어지고 생각이 많은 소년으로 변해갔습니다.
그 후 간송은 휘문보고를 입학하였고 집안의 대를 위해 18살에 결혼도 합니다. 당시 미술교사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선생을 만난 것도 그 시절이었습니다. 그 무렵 간송에게 남모르게 서적을 구입하는 취미를 갖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그냥 취미 수준이었습니다.
어째든 간송은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양가 집안 도합 10만석의 추수가 가능한 땅과 재산을 상속받을수 있는 유일한 집안 종손이 되어버린 간송은 서양화를 전공하였지만 조선에 들어와 민족문화의 말살을 안타까워 동양화로 전환한 춘곡 고희동 선생을 만나면서 그 운명적 인생의 장이 시작되었습니다.
1926년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한 간송은 곧바로 도교 와세다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 유학생활은 깊은 갈등과 절망감을 맛보는 시기였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 종로 모퉁이에서 3.1 만세 운동을 가슴 뛰며 지켜보았던 간송으로서는 항쟁의 의식이 남달랐기에 나라를 빼앗기 처지에서 대학생활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는 고뇌가 언제나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학업에 열중하는 한편 고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고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던 간송은 일본학생에게 식민지인 조선인에게도 그런 게 의미가 있느냐는 식의 조롱을 받게 되는데 그때 망국노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됩니다. 그 일이 얼마나 분했으면 나중에 그 당시 분위기를 고스란히 회고 할 만큼아픈 경험이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에 돌아온 간송은 잊을 수 없는 은사인 춘곡 고희동 선생을 만나 울분을 토하며 서로를 위안하던 중 춘곡 선생의 소개로 운명적인 인물을 만나게 되니 그가 바로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위창 오세창 입니다.
아..위창 오세창, 추사 김정희 학문의 적통을 이어받은 당대 최고의 감식안이자 서예의 대가. 간송으로서 그 와의 만남은 인생에서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는 중요한 만남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인 [근역서화징]을 보며 문화재에 대한 안목과 올바른 관점을 배우며 위창에게 직접 글씨와 서화를 배우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간송은 문화재란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주체성과 정신적 가치가 깃든 일종의 유산이기에 우리 문화재란 우리 민족의 정신이 함축된 유산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문화재가 일본에게 빼앗기는 것은 민족혼의 말살이며 민족에게 미래가 점점 없어지는 것임을확실히 알게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송은 위창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깨우쳐주셔서 감사하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데 당대 최고 노학자인 위창은 20대 초반의 간송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너무 많은 책임을 지워 미안하다고 말하며 스승과 제자를 뛰어넘는 인간적 관계를 맺게 됩니다. 당대 민족문화의 정점에 서계신 노학자와 당대 조선 최고 갑부의 아들의 만남. 어찌 우리 문화재를 보호하고자 하는 하늘의 안배가 아니라면 어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 간송은 위창을 통해 그를 도와 집사의 역할을 하면서 평생 문화재 수집에 앞장서는 도움을 주는 이순황을 소개 받았으며 우현 고유섭과 교우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또 우현을 통해 이제는 너무나 알려진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저자이자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하신 혜곡 최순우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위창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창은 간송뿐 아니라 몇몇 분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나라 고고미술의 대부인 우현 고유섭입니다. –고고미술계의 교본인 [조선 탑파의 연구]의 저자 우현 고유섭.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 현재 우리 고고학계, 미술사학계 학문적 계보의 정점에 서 계신 위창 오세창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저의 능력을 넘어서는 이야기 입니다)
<보화각 상량 기념사진> 왼쪽부터 청천 이상범, 월탄 박종화, 춘곡 고희동, 석정 안종원, 위창 오세창, 간송, 박종목, 심산 노수현, 이순황
간송이 위창을 만나 문화재 수호의 뜻을 세울 무렵 간송의 가정에는 또 한번의 슬픔이 찾아옵니다. 홀로된 형수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이렇게 해서 어른이라고는 어머니 한 분만 남아 십만 석의 재산을 상속 받은 청년가장이 됩니다. 간송집안은 부유하다고 해서 돈을 함부로 쓰는 집안이 아니 였으며 어려서부터 허튼 곳에서는 한 푼도 쓰지 않도록 교육 받아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간송은 본격적으로 문화재 공부와 수집에 몰두하는데 당대 최고의 감식안인 위창이 뒤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934년 7월 간송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에 있는 양옥과 그 주변 땅을 사들였고 그 집을 ‘북단장’ 이라 이름 붙이고 1938년 윤 7월 5일에 드디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관인 보화각을 건립하여 상량식을 치룹니다.
<보화각 전경> 건물 분위기나 주변의 모습이 지금과는 많이 다릅니다. 동경대 건축과를 나온 박길용이 보화각을 설계했습니다.
바로 북단장과 보화각이 지금 간송미술관 입니다. 1938년은 일제의 폭압정치와 민족문화 말살 정책이 극에 달할 때였고 동시에 대동아전쟁의 와중이었습니다. 양권(糧券)이 없는 사람은 밥을 굶을 정도로 어려운 시기에 보화각을 짓는 공사는 조선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간송이 보화각을 세운 것은 일제에 대한 문화적 저항의 표시였습니다.
간송미술관에 와보신 분들 중 잘 모르시는 분들은 미술관이 좀 낡고 어수선해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의 자재와 기술로도 아파트가 30년이 되면 부시고 다시 지어져야 하는데 80년이 다 되가며 전쟁을 겪었음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졌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대리석이며 전시실 바닥은 당시는 구하기 힘든 단단한 합판으로 깔았고 유물을 볼 수 있게 만든 전시함은 이태리에서 직접 수입된 것입니다. 수입가구를 사용한 이유는 당시 우리의 가구들은 이렇게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어진 가구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것 같습니다.
<간송 전형필 생전모습> 어렵게 수집한 문화재를 보면서 어떤 감회를 가지셨을까?
간송은 이곳 북단장에서 본격적인 일본과 해외로 반출될 기로에 처한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 하나하나가 운명적으로 하늘이 보살피지 않았다면 간송의 품으로 올 수가 없었던 가슴 졸이는 이야기입니다. 그 흥미 진지한 문화재 수집 이야기는 블러그 글이 너무 길어지는 관계로 다음 편으로 미루겠습니다.
| 2. 보물의 주인은 하늘이 정하고 전편에서 간송 전형필 선생의 탄생부터 보화각 (현 간송미술관) 건립까지 과정과 문화재를 수집하기 결심하게 된 과정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그 드라마틱한 과정과 일화를 중심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간송이 위창과 함께 문화재를 본격적으로 수집할 계획을 세울 무렵 아주 소중한 두 사람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한 명은 의학도 김승현이었으며 또 한 사람은 위창의 소개로 알게 된 이순황이었습니다 .
집안이 어려워 간송이 학비를 대었던 김승현은 간송보다 세 살 아래여고 이순황은 간송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평생 간송이 형제처럼 의지했던 사람들인데 특히 이순황은 평생 간송 곁에서 집사처럼 움직여준 사람입니다.
간송은 북단장과 보화각을 세운 후 이순황을 비롯한 몇몇 사람을 앞에 내세워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하는데 간송은 문화재를 구입할 때 절대 값을 깍지 않아 고서화 수장가들 사이에서 서서히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
간송이 문화재를 구입할 때 값을 깍지 않은 이유는 문화재를 값어치 있게 보는 따뜻한 시선뿐 아니라 문화재를 보는 정확한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주인이 제대로 가치를 몰라 값을 싸게 불러도 말없이 서너 배를 돈을 지불하곤 했기에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구하면 먼저 간송에게 보이려 했습니다. 간송이 수많은 일급 문화재를 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이런 면모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간송은 관훈동의 유명하고 조선 말기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고서점 중 하나인 한남서림이 새 주인을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 이순황을 통해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이곳을 창구로 문화재를 수집합니다.
간송 선생님이 수집한 문화재의 양의 비해 구입경로가 확인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본인이 문화재를 구입 후 남들처럼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입에 관여한 사람들에게도 철저히 비밀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러한 작업은 사전정보가 중요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한 치밀한 준비 그리고 문화재 구입 후 손상된 부분의 보수 및 표구 등 깔끔한 사후 처리까지 아는 사람이 많아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현재 구입동기와 전해지는 몇 가지 일화는 간송이 직접 생전에 지인들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기에 100% 진실입니다.
[청화백자철사진국화문병](국보 294호)-경성미술구락부에서의 한판승
1936년 11월 어느 날 자주 거래하던 일본인 골동상점 온고당의 주인 심보는 급하게 간송에게 당시 조선저축은행장(제일은행의 옛이름)이면서 경성 최고의 고미술품 수장가인 모리고이치의 유품들이 경성미술구락부 특별전시경매에서 처분한다는 정보를 전달합니다.
그 후 두 사람은 명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나 출품 사진들을 보며 구입할 목록을 선정하고 있었습니다. 사전에 미리 사진을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은 심보가 출품자들에게만 전해지는 정보를 얻기 위해 자기 물품을 몇 점 출품했기 때문입니다. 심보는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그 동안 간송의 사람됨에 감복하여 간송의 거간꾼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많은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본 간송은 한 장의 사진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그 후 다른 사진들은 옆으로 밀어놓고 그 사진만 묵묵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것은 청화백자에 난초와 국화, 그리고 곤충이 그려져 있는 목이 긴 병의 사진이었습니다.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채 난국초충문병 (국보294호) 높이 42.3 . 목이 길지만 풍만한 몸체가 눈부시게 하얀색이고 그 흰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진사 (붉은 색 광석에서 빼낸 안료)와 철사(장석을 주성분으로 산화철을 섞어 만든 흑갈색 물감)로 들국화가 그려져 있으며 푸른 청화 안료로 금방 날아 가버릴 듯한 나비가 새겨진 보기 드문 명품은 그렇게 우리 민족의 품에 안식을 찾은 것입니다.
“전선생. 제 뜻과 같습니다 그려” 심보는 자기의 뜻과 같다는 생각에 흥이 나서 말하면서 단연 그 백자가 경매 물품 중 최고임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드디어 경매일 11월 22일 경성미술구락부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간송과 심보가 들어서자 제법 많이 알려진 심보와 함께 들어서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희고 둥근 얼굴, 머리칼을 단정하게 뒤로 넘긴 젊은이가 누군지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심보는 경매장에서 일본에서 거물이 왔다는 소문이 누굴 말하는 건지 확인하던 중 소스라치게 놀라며 간송에게 야마나카가 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 야마나키는 당시 교토에서 골동점을 운영하며 베이징, 런던, 파리, 뉴욕 등 세게 각 곳에 지점을 두고 있는 세계적인 골동 거상이었습니다.
드디어 경매는 시작되었고 물건이 소개될 때 마다 탄성과 수군거림이 일었고 몇 사람의 경합자가 나서서 값을 점점 올려 가고 있었습니다. 보통 백자가 오백 원에서 천원 안팎에서 거래가 되었으니 당시 군수의 월급이 칠십 원 정도이고, 천원이면 웬만한 기와집 한 채를 살수 있던 시절이었기에 조그마한 그릇 하나가 천 원 안팎에서 거래되었으니 그 열기가 가희 어댔을지 짐작 가고 남습니다. 아직까지 간송과 야마나카는 단 한번의 경매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경매가 거의 종착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경매대 위에 눈처럼 흰 바탕에 국화와 난초 , 풀과 곤충이 양각된 병이 올라왔을 때 실내는 물을 뿌린 듯이 고요해졌습니다. 드디어 경매는 시작되었고 오백 원부터 시작된 가격은 단숨에 오천 원을 넘어섰습니다.
“칠천 원 또 없습니까? 를 외친 후 사회를 보던 고하라가 경락봉을 집어 드는 순간 지금까지 침묵하던 심보가 소리쳤습니다. “팔천 원” 실내는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백 원 단위로 오르던 값을 단숨에 천 원을 올린 것입니다.
팔천 원을 두 번 더 외친 고하라가 경락봉을 집으려는 순간 한쪽 구석에서 “구천 원” 하는 소리가 들렸으니 바로 야마나카 였습니다. 그 후 심보가 다시 “일만 원” 하고 외쳤습니다. 이제 경매는 단순히 경매를 넘어서서 일본과 조선의 자존심 싸움을 상징하는 분위기로 넘어갔습니다. 그 뒤로 오백 원씩 오르던 금액은 경매 사상 최고가를 넘어섰고 일만 사천 원부터는 오십 원 단위로 바뀌었습니다.
아먀나키가 지친 듯 눈을 감고 외쳤습니다 “일만 사천오백오십 원“ 심보가 다시 외쳤습니다 “일만 사천 오백육십 원” “일만 사천 오백칠십 원” 야마나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불렀으나 이미 목소리는 힘이 빠져 있었습니다. “일만 사천 오백팔십 원” 심보가 마지막 일격을 가했습니다. 그 후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고하라의 경락봉이 힘껏 내리치는 순간 경매장은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조그마한 주둥이 바로 밑에서부터 풍만하게 부풀어다가 좁아들면서 흘러내리는 어깨 선이 유난히 아름다운 높이 42 cm 의 매병. 일명 천학매병은 천 마리의 학이 날아가는 모습이 새겨진 고려시대 최고의 청자로서 신창재라는 수집가가 도굴꾼에게 4천원에 구입 후 소장하고 있다가 일본인 수집상인 마에다에 고가에 넘긴 물건 이였습니다.
매병은 서서히 입소문이 났습니다. 실물을 본 골동상인 누구나가 가히 대적할 물건이 없는 명품이라는 것을 인정했기에 일본 골동상인은 물론 조선 총독부박물관까지 1만원에 사겠다고 제의했으나 마에다가 거절했습니다. 더 값을 올리려고 마에다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보가 이러한 이야기를 간송에게 들려주자 “물건을 봅시다” 라고 짤막하게 대답하고 바로 마에다 집을 향했습니다. 간송 선생님은 심보라는 일본 골동품업자를 통해 천학매병의 이야기를 듣고 마에다를 직접 찾아갑니다. 그 집에서 작품을 이리저리 돌아보면서 간송 선생님은 이 물건을 절대 일본인에게 소장하게 할 수 없겠다고 결심합니다.
▲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 고려시대, 높이 42.1cm, 입지름 6.2cm, 밑지름 17cm, 간송미술관 소장. 상감청자 매병 중 대표작으로 풍만하면서도 유연한 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입니다. 구름 속을 나는 학이 그려진 매병으로 좁은 주둥이, 널찍한 어깨, 자르라니 미끄러져 내려와 꼭 들어갈 자리에서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그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S라인’ 몸매를 가진 일품 청자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사회책에 다음과 같은 시가 나옵니다.
푸르게 빛나는 옥은 푸른 하늘에 비치네. 한번 보는 내 눈조차 맑아지는 것 같아라.
고려 후기의 대학자 목은 이색(1328~1396)의 시이지요. 이색은 청자의 비취색을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맑아진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청자 예찬이지요.
천학매병을 구입하기 위해 판 대구지역 5천석 지기 땅이 지금의 시가로 4천억 정도 한다니 가격산정이 불가능 할만도 합니다. [훈민정음]과 더불어 영원히 해외반출이 불가한 문화유산입니다. 한가지 안타까운것은 뒷쪽 보이지 않는 부분이 조금 깨져있다는 점입니다. 도굴꾼들이 쇠꼬챙이로 땅을 찍어보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입니다.
“마에다상, 그래 어느 정도 쳐주면 되겠어요?” 마에다는 머리를 굴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불러야 하나. 이 청년은 절대로 값을 깍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흥정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닌가!’
“2만원” “뭐요! 2만원?” 마에다의 말에 놀라 소리친 사람은 간송이 아니라 심보였습니다. 쓸만한 기와집이 2천원 이였으니 10채 값을 부른 마에다를 어찌 놀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간송은 처음 그대로의 목소리로 “심보상, 고생하셨습니다. 아직 현금이 덜 준비되었으니, 오늘은 5천원을 드리고, 나머지는 열흘 안으로 치르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어음을 써드리지요.” 바로 말하고 현금을 갖다 주었다 합니다. 물론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선친이 물려주신 땅 수백 마지기를 급매물로 팔아야 했습니다.
아무튼 물건을 판 마에다는 그 다음날 일본 최대의 골동품 대가인 무라카미가 그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했지만 이미 물건은 간송에게 넘어간 후였습니다 .
무라카미는 한국에 오자마자 간송을 방문하였습니다 . 한참 동안 천학매병을 감상하더니 넘겨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묵묵부답인 간송에게 가격이라면 부르는 데로 주겠다며 산 가격의 두 배인 4만원을 제시 했습니다. 간송에게 며칠 만에 엄청난 부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간송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넘겨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무라카미상이 이 천학매병보다 더 좋은 물건을 저한테 가져다 주시고 이 매병은 원금에 가져 가시지요. 저도 대가를 남만큼 치를 용의가 있습니다.”
하하하 ...이것보다 더 좋은 물건이 있으면 너보다 돈 더 많이 주고 사겠다. 그리고 이건 원금으로 주겠다는 응수. 조센징이라면 일단 깔보고 돈으로 해결하려는 일본인에게 이렇게 호쾌한 응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괴산외사리 석조부도](보물579호) – 돌도 우리 것이다
간송은 언제나 인천항을 통해 외국으로 반출되는 문화재에 대해 정보망을 갖추어 놓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문화재 반출은 특별한 일 아니라면 조용히, 비밀리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기에 사전정보를 입수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대부분 이순황이 맡았을 것입니다. 하루는 이순황이 급히 간송을 찾아와 급히 인천을 다녀오겠다고 말합니다. “무슨 일이오? “ “충청도에 있던 고려시대 부도 하나가 일본인에게 팔려서 인천항으로 갔다고 합니다. “어서 다녀오세요. 서둘러 주시지요” 간송은 두말 않고 선뜻 현금을 주었습니다.
이순황은 아름다운 부도가 배에 실리기 직전 부두에 도착했습니다 . 그리하여 엄청난 액수를 물어주고 부도를 붙잡았습니다. 이 부도가 바로 간송미술관 야외에 서있는 괴산외사리석조부도(보물579호) 입니다. 팔각당형의 아름답고 깨끗한 형태로 연꽃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된 걸작입니다.
<괴산외사리부도> 6.25 사변 때 파손되어 또다시 각 부재가 흩어진 것을 1964년 2월 3일 간송의 대기일을 맞는 날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화강암재의 8각 원당형 부도로서 4장의 장방형 판석으로 짜여진 지대석위에 놓여졌다.
간송은 1935년에 이미 경북 문경의 한 절터에 서있던 오층석탑이 헐값에 팔려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운반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달려가서 찾아온 일이 있습니다. 상하의 비례가 아름다워 안정감이 뛰어난 전문경오층석탑(보물580호)도 지금 간송미술관에 서 있습니다.
간송은 반출되기 직전의 석조유물만 구입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일본으로 넘어간 유물도 다시 되사온 경우도 있습니다. 하루는 이순황이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이미 일본으로 팔려 나가 오사카 경매장에 나온다는 정보를 간송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간송은 두말 않고 “이번에도 수고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수고라니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지요” “가격에 구애되지 말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낙찰을 받도록 하시지요”
이순황은 경매에서 어렵게 석탑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 조국에 돌아온 삼층석탑 (서울시 유형문화재 28호)도 보화각 뒤뜰에 안식처를 얻었음은 당연지사입니다.
<삼층석탑> 앙련이 꼭 촛불같다.
3층의 옥개석 중 반전되는 일부분이 훼손되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 따뜻한 느낌을 주는 석탑이다. 상륜부는 하나의 돌로 구성된 노반과 복발만이남아 있고, 그 이상의 것은 소실된 상태이다. 이 삼층석탑은 탑신의 초층 옥신이 2층과 3층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고, 옥개받침이 3단인 점 등 양식상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느 날 가까운 친구가 간송과 함께 보화각 뜰을 산책하다가 물었습니다 . “저 삼층석탑이 일본에서 돌아온 것인가?” “그렇다네 일본의 재력가와 붙는 바람에 예상보다 돈이 많이 들었지. 그런데 막상 일본에서 실어다 놓고 보니 아주 가치 있는 것은 아니었네. 하지만 우리 석탑 하나를 되 싣고 왔으니 그것으로 된 거지 “
한번도 보지 않은 석탑을 무조건 되 사오게 했던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우리 문화재에 대해 깊게 사랑했는지 말해주는 일화입니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무심한 눈빛으로 한번씩 힐끔 쳐다보았던, 아무 설명도 치장도 없이 나무들 사이에 서있는 부도와 탑, 석불들은 그렇게 하나씩 일본인의 손에서 되찾아온 유산들인 것 입니다.
<훈민정음 원본> [훈민정음](국보 70호) – 하늘이 보우하사
1942년 늦여름 간송은 오랜만에 한남서림에 들렀습니다. 언제나 이순황이 수시로 찾아와 정보를 전해주는 터라 굳이 찾아갈 이유가 없었음에도 이상하게 그날따라 어떤 힘에 이끌리듯 한남서림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한남서림에서 창 밖을 보던 간송은 평소에 옛 서적을 거간하기로 유명한 골동상인 하나가 하얀 모시 두루마기의 나들이 옷을 입고 서둘러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순황을 시켜 무조건 그 사람을 데려 오라고 일렀습니다.
잠시 후 이순황을 따라 들어온 골동상인에게 “그리 부지런히 어디를 가는 길이오? 더위나 좀 식히고 가시구려” 간송이 웃으며 말하자 그 사람은 조금 머믓거렸지만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라고 묻는 간송의 탐문에 그만 실토를 하고 말았습니다. “실은 지금 경상도 안동에서 기막힌 물건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기막힌 물건이라… 물론 서적이겠지요? “예 아주 큰 물건입니다” “어서 이야기하시지요” 이순황이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습니다.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 합니다”
갑자기 간송은 숨이 멎는 듯 했고 머리가 갑자기 하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 찍어낸 훈민정음 원본. 존재했다는 것 만 전설처럼 내려온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니..
국보 지정 논란 때마다 국보 1호로 재지정 되어야 한다는 논란을 일으키는 훈민정음. 조선왕조신록과 더불어 세계 기록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어 있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고 국내 유일본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의 발견으로 그 사실이 증명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는데 구강 원리를 기초로 창제 되었음이 증명되었다.
당시 1942년도는 전황이 나날이 고조되어 일본이 극도로 예민한 시기였고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일제가 우리말을 금지하자 조선어학회는 서둘러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려 하다가 한글학자 33인이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고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 모임인 진단학회가 강제 해산되었던 해입니다. 그런 시절에 훈민정음이 나타나다니.. 일본인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떨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책 주인이 일천 원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돈 구하러 가는 길입니다” 간송은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말했습니다 . “나와 여러 번 거래해봐서 아시겠지만 물건은 제 값을 주고 사야지요” 그리고 선뜻 일만 일천 원을 전해주면서 “책 주인에게 일만 원을 전하세요. 그리고 일 천원은 수고 비로 받으세요”
이렇게 해서 훈민정음 (국보70호)은 일제 치하에서 무사히 보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간송이 아니었으면 그 누가 그렇게 큰 돈을 내어 투자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후 간송은 세종 때 발간한 동국정운 (국보 71호)과 거문고 악보인 금보(보물283호)등을 구입하는데 하늘이 보우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러한 유물들이 일제 치하에 살아 남았겠습니까…
이밖에도 아궁이 속에서 건져낸 혜원 신윤복의 [해악전신첩]등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너무 길어져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점점 종착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다음편에는 6.25 전란을 이겨낸 기적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왜 제가 간송의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저의 속마음을 말입니다. | 3. 별은 졌지만 별빛은 남아 지난 두 번 글에 간송의 탄생과 문화재 수집 동기 그리고 그 일화를 정리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후 간송의 동성학원 설립과 더불어 문화재가 전쟁을 견뎌낸 이야기, 그리고 간송의 죽음과 그 뒷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제는 1938년부터 조선어과목과 한문교육을 폐지하고 우리역사는 물론 말조차 정규교육에서 제외시키는 악날한 민족문화말살정책을 감행합니다. 또 1940년 2월에는 창씨개명이라는 인류역사상 전무했던 종족 개조정책을 강행하는데 소위 내선일체를 표방하는 황국식민화 교육을 강요하게 되었으니 민족문화와 역사, 민족교육은 풍전등화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었습니다.
간송은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는데 보성고보는 간송이 태어난 같은 해인 광무 10년(1906년)에 왕실과 국가재정을 총괄하던 함경도 명천출신의 이용익(1854-1907)이 <흥학교 이부국가(興學校 以扶國家)- 학교를 일으켜 나라에 도움이 되자> 라는 고종의 칙명을 받들어 설립한 사립학교입니다.
그 후 이용익이 노일전쟁 중 고종의 밀지를 받들어 대한제국의 국외중립을 기습선포하고 한일의정서 체결을 반대하다가 일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울분을 삭히다 병사한 후 보성고보는 어린 손자인 이종호가 맡게 되는데 이종호 역시 신채호, 이갑 등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하니 천도교 재단이 이를 인수해 이끌어 가지만 천도교주 손병희(1861-1921)가 3.1 운동 때 민족대표로 나서면서 보성교보 교장인 최린을 앞세워 독립선언서를 이곳에서 인쇄하는 등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으면서 일제의 탄압과 간섭으로 경영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불교재단으로 넘어갔다가 1935년 재단법인 고계학원이 인수하는데 고계학원은 원래 부실한 재단으로서 학교운영만 더욱 피폐케 해놓고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간송은 보성고보를 인수하기로 결심하는데 이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위창 오세창이 천도교재단에서 보성고보를 운영할 때 현기장의 자격으로 이를 직접 운영했으며 어의동 보통학교 3학년 시절 종로 골목에서 보성고보생들이 앞장서서 외치던 3.1 운동의 현장을 지켜보며 가슴 벅차했던 기억이 생생하였기에 보성고보를 인수하여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육성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간송은 해방 후 3.1 절 기념행사에만은 반드시 참석하여 직접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해 그날의 감격을 보성인들에게 각인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고계학원은 학교를 넘기는 과정에서 간송의 의지를 간파하고 학교를 파산시킨 부끄러움도 잊고 엄청난 청구금액뿐 아니라 부채는 부채대로 인수하길 요구했고 심지어 칠판지우개 하나까지 값을 요구했으며 금액도 나날이 달라지는 등 한마디로 돈 벌 궁리만 했습니다.
바로 고계학원이 조선일보를 세운 방응모씨 운영했던 학원으로서 초대 이사장인 방응모는 친일파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거론되는 자이니 간송 집안과는 극히 대별되는 것입니다.
<향원익청>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다. 간송. 지본담채. 염계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따온 문구. 간송은 스스로 서화가를 자처하지 않았을 뿐 그의 서화, 서예 실력은 탁월했다.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연꽃 절지화로써 색채의 대조가 자연스럽고 가시와 연꽃이 자연스럽게 어울러진 그림이다.
이처럼 간송은 일제 말 더욱 광폭해진 식민지 수탈과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몰두하는 일제에 맞서 오로지 보화각을 지키고 보성을 지키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이 시기에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는데 당시 조선총독인 남차랑이 보화각을 한번 보고 싶다는 청을 해 왔는데 이 사실을 김승현을 통해 전해들은 간송은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통독의 위치와 권한이란 지금의 대통령의 권한보다 10배는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 전 조선인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남차랑이 막상 보화각에 도착했을 때는 문은 잠겨있고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황한 김승현이 간송에게 달려가 보니 간송은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니 꼬박 30분을 보화각 앞에서 남차랑을 기다리게 한 후에야 박물관을 안내해 보이고 돌아가게 하니 그 후 그 어떤 일본인이 보화각을 방문해도 30분 이상은 기다려야 하는 관례가 생겼다고 합니다.
1945년 8.15 드디어 일본은 무리한 전쟁에서 패망하고 해방이 왔습니다. 간송은 해방 후 문화재 수집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어디에 있건 이젠 내나라 내 민족 품에 있는데 꼭 본인이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해방은 우리 민족의 힘으로 쟁취한 해방이 아니었기에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남북으로 갈리는 비운을 맞게 되는데 이는 완전한 독립을 원했던 민족의 기대가 산산이 조각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비운은 6.25 전쟁이라는 비극으로 나타나 우리 민족문화재는 36년간의 일제 통치 동안 보다 더 참담한 파괴를 당하는데 이는 보화각도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인민군이 진주했을 때 북단장은 기마부대에 징집되어 아름다운 정원은 폐허가 되었으며 보화각 소장품은 전세가 불리해 후퇴할 때 가져 가고자 큰 목통 속에 아무렇게나 포장 되어졌습니다>. 이때 인민군은 전문가 두 사람을 시켜 포장과 목록정리를 시켰는데 한 명은 소전 손재형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이 혜곡 최순우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인민군이 이 물건을 가지고 가게 하지 못하도록 매일 물건을 쌓다 풀었다는 반복하며 심지어는 손재형은 멀쩡한 다리에 붕대를 매고 다리를 다쳤다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보화각 지하실에 있던 위스키를 이용해 담당자들을 매수하여 작업을 하지 않고 버티었으니> 9.28 서울을 수복할 때까지 완전히 포장되어서 상자에 보관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결국 인민군은 빈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중국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었는데 소전과 혜곡이 포장해 놓은 그대로 미국헌병이 호송해 열차 편으로 부산으로 보내져 부산 영주동에 별장을 빌려 보관했습니다.
그때 전부 가져갈 수 없었기에 추사, 겸재, 단원, 혜원 등의 작품들과 도자기중 일급 물품만 골라 가져갈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중국서화나 중국자기, 수 만권의 장서와 골동품들은 그대로 놓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난리 와중에서도 부산으로 가기 전 덕수궁에 있는 혜곡 최순우 선생을 찾아가 박물관 물건들의 피난계획을 확인하며 걱정을 하셨으니 그 얼마나 깊은 마음이었는지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부산에 내려온 후 혜곡을 만난 간송은 그곳 고두동씨 댁에 좋은 물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찾아가는데 아무 말 없이 물건들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혜곡에게 그 물건들 전부 북단장에 있던 자기 물건들이라고 말했다고 하니 북단장에 남아있던 물건들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1953년 서울이 수복되자 간송은 아무래도 불안하다고 부산에 있던 물건을 다시 서울로 가져다 놓았는데 서울로 물건을 옮기고 열흘 후 그 별장에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이 전소가 되니 문화재를 지키고자 하는 하늘의 보살핌이 없었다고 어찌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서울로 돌아와 보니 아궁이 앞에는 당판>(唐版) 진적들이 불쏘시개 감으로 산처럼 쌓여있었고 사방 벽과 뚫어진 창문에는 고활자본과 내각판으로 도배가 되 있었으며 몇 트럭분의 고서적들이 중앙시장에 나와 쌓여 있어서 다시 사 와야 했습니다.
일제 암흑기 36년 동안 전 재산을 다 바쳐 민족문화를 보호하고자 수집했던 수많은 문화재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우리 민족의 손에서 파괴되어 버리는 광경을 목도한 간송의 심정이 어떠 했겠습니까? 아마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삼불암> 간송, 지본 삼불 김원룡에게 써준 현액
이러한 당시 상황은 삼불 김원룡의 대담에 의하면 더욱 기가 막힙니다 “6.25때 혜화동 로타리를 걸어가는데 거지가 피나오는 무릎을 이상한 종이로 닦고 있어 보니깐 고판본 찢은 종이라 놀라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보성중학교 뒤에 가면 산같이 쌓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 때는 별도리가 없었지요”
<아락서실> 혜곡이 꿈에 서재 이름을 보고 간송에게 부탁하여 서재 현액으로 받은 글씨.‘을미(1955) 가을 내 벗 혜곡이 꿈속에서 이 구절을 얻었다. 간송’ 이라는 관서를 달았다.
그 후 간송은 문화재 보존위원으로 활동하며 혜곡 최순우, 초우 황수영, 수묵 진홍섭 등과 깊이 사귀며 특히 혜곡과 초우와는 매일 만나는 사이였기에 혜곡이 간송과 가까이 있기 위해 집을 간송미술관 바로 앞에 있는 지금 [최순우 옛집]으로 이사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친우들과 함께 전국 각지로 고적조사를 다녔으니 이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혜곡, 초우, 수묵이란 아호는 모두 간송이 짓고 각인하거나 현액으로 휘호해주었으며 문패까지도 모두 써주었다고 합니다.
<최순우 옛집입구>
그 후 민족미술의 발전을 위해 [고고미술] 이란 동인지를 발간했는데 당시 보성학원 인수와 전쟁, 잃어버린 문화재를 다시 인수하는 과정에서 거의 모든 재산을 사용했기에 매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특히 보성학교가 서무과의 잘못으로 엄청난 부채를 짊었지게 되어 이를 대납하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겪었다 합니다 . 오죽했으면 아들을 유학 보내는데 단돈 $130 밖에 가져가지 못할 정도로 곤란한 처지였으나 소장한 문화재를 통해 경제적 곤란함을 피하고자 하는 생각은 한 차례도 가지시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동인지를 만들어 언제나 재정적 후원을 감당하면서도 한번도 곤란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고미술> 1960년 8월 창간. 188호(1990.12)부터 美術史學硏究 로 제호를 바꾸었다.
하지만 하늘도 간송이 해야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는지 1962년 1월 26일 간송은 급성 신우염으로 갑자기 타계합니다. 그의 죽음은 민족미술계의 전체의 크나큰 슬픔이며 민족의 슬픔이었습니다. [고고미술] 제 19.20 합집에 거의 모든 문화재 관련 인사들이 목이 메이는 슬픔으로 간송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실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간송이 돌아가시자 정부는 그의 문화재 수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62년 8. 15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추서하고 뒤이어 64년 대한민국문화훈장국민장을 다시 추서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훈장이라도 그가 살아있음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 후 1965년 고고미술동인들인 동빈 김상기, 남운 이홍직, 혜곡 최순우, 초우 황수영, 수묵 진홍섭, 삼불 김원룡 등이 발기인이 되어 북단장에 민족민술연구소를 설립하고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하기로 하여 1966년 4월에 정식으로 민족 미술연구소가 문을 열어 유물을 정리하기 시작하니 이때 혜곡 최순우 선생님의 거의 양아들과 다름없는 최완수(현 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가 연구소로 들어와 지금까지 간송의 평생사업을 계승하게 됩니다. 그 후 1968년 6월에 수만권의 장서中 2000여권의 한적을 분류, 정리하여 [간송문고한적목록]을 출간합니다.
그 후 1971년부터는 소장문화재에 대한 연구작업을 병행에 매해 봄, 가을로 기획전시를 갖기 시작하며 그때마다 연구성과물인 [간송문화]를 발간했는데 올 해 봄 전시회로 70호가 출간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은 간송미술관 주요 소장품의 주된 경향입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간송은 위창 오세창 선생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위창은 문화재를 보호하는데 어느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는가를 알아보는 게 중요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이 점을 이해해야만 간송의 문화재 수집의 방향과 특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창 오세창은 대대로 역관의 집안으로서 선대부터 중국의 신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위창의 학문과 예술은 선대로부터 8대째 내려온 역관의 가계로서 200여 년 축적된 문화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드리는 집적이요, 결과물을 철저한 고증으로서 결집한 누대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버지 역매 오경석은 청나라가 외국에 유린당하는 현실을 접하면서 조선도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을 예감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화하여 새로운 사회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북학사상을 철저히 가지신 분입니다. 이 북학사상은 나중에 개화사상으로 이어집니다.
즉 가학으로 내려온 북학사상에 영향을 크게 받아서 개화사상이 투철했으며 같은 중인계층이면서 역관이었고, 부친의 친구인 우선 이상적의 문하에서 한어, 서화, 금석문을 공부하면서 깊은 학식과 감식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상적의 소개로 중국의 금서학자들, 서화가들과 교유하면서 [삼한금석록] 이란 저서를 남기기도 합니다.
역매 오경석의 스승인 우선 이상적이 누구입니까? 바로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며 ‘세한도’ 의 주인공입니다. 세한도 오른쪽 상단을 보면 ‘우선시상’ : 우선이 보시게 라고 시작됩니다. 즉 ‘세한도’ 는 추사가 스승을 잊지 않고 보살펴주는 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보내는 편지 입니다.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였던 이상적 밑에서 공부한 역매 오경석이 어떠한 경향을 가졌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위창 오세창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이러한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학맥은 오세창에 의하여 서도금석학적인 면이 계승되어 당대 고증학의 최고봉이 될 수 있었으며 서화 및 서예의 대가, 뛰어난 감식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창 오세창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에 포함 될 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한 학자였습니다. 3.1 만세운동으로 3년간 복역한 후 석방되었을 때 일본제국주의는 조선통치정책을 이전 무력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을 꾀하는 시기였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민족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광범위한 역사왜곡사업을 전개하던 중이었습니다. 바로 식민사관을 조선민중에게 주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식민사관은 민족의 역사를 2천 년으로 제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근거로 삼국사기만이 정통 역사서로 인정하여 고대사를 제거합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고대 중국대륙을 힘차게 개척했던 역사를 거세시켜 한반도에 국한된 반도사관으로 이어지며 이는 조선 고유한 민족문화는 당초부터 존재하지 않고 중국문화의 아류로 폄하하는 방향으로 결론지어 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의도는수천 년을 우리에게 문화적 도움과 영향을 받아왔음을 부정하고 우리 민족고유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으므로서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위창은 바로 이러한 문화침략을 본질을 정확히 깨뚤어 보았습니다. 민족문화의 독창성을 증명하여 저들의 의도를 무력화 시켜야 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보화각지석> 1938년 윤 7월 5일 보화각 상량식 날 위창 오세창이 쓴 보화각지석.
[때는 무인년 윤 7월 5일 간송 전군의 보화각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북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명(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 하니, 북곽(北郭)을 굽어 본다. 만풍(萬品)이 뒤섞이어, 새집을 채웠구나. 서화 심히 아름답고, 고동(古董)은 자랑할만. 일가에 모인 것이,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의 남은 주교(舟橋)로, 고구(攷究) 검토 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길이 보존하세]
자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분들은 왜 간송미술관의 회화 소장품이 조선후기 진경산수 이후 작품에 집중되었는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위창과 간송은 가장 조선적인 화풍이 일어나 당시 동양의 최고의 문화적 독창성의 성과를 보였던 영, 정조 시대의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과 풍속화 등에 주목한 것입니다.
따라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해원 신윤복 등의 화가들에 주목했으며 옛 중국 고대 문체에 충실하면서도 조선의 독창적인 글씨인 추사체를 완성한 추사의 글씨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입니다. 또 당시 일본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회화나 서적보다는 도자기와 석조미술이였고 회화에서 진경산수와 풍속화를 비롯한 우리 그림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도 한편으론 다행스러운 점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이나 그 당시나 정선, 김홍도, 심사정, 신윤복의 그림을 대단히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지금과 그 당시의 위상을 비교해보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깨닫고 있는 겸재와 단원>, 현재, 혜원 그림의 아름다움에 대한 발견은 추사로부터 이상적, 역매 오경석, 오세창, 간송, 김원룡, 최순우로 이어져 큰 줄기를 만들었으며 그 밑에서 공부하고 영향을 받았던 현재의 수많은 미술사학자들 최완수, 정양모, 유홍준, 강우방, 오주석 등등의 전문가들이 그 장엄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간송선생님으로 출발하여 지금까지 40여 년간의 간송미술관을 지켜오며 연구해온 민족미술연구소의 공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진경시대 문화의 우수성과 고유성을 직접 확인해 내었기에 민족미술연구소를 통해 40여명의 박사를 배출했던 것입니다.
소장된 문화재뿐 아니라 간송미술관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 문화재를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현재 미술사학의 역사는 일제의 모진 탄압과 민족내부전쟁 그 이후 대부분의 뜻있는 미술사학자들이 북으로 올라 가버려 거의 초토화된 황무지속에서 일구어낸 선각자들의 피나는 고통과 노력의 결실이며 그 힘으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한국 고미술의 이해], [완당평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가 쓰여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와 문화의 연속성은 무서운 것이며 민족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으로 묶여 있는 것이고 미적 감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장 정확히 알 수 있으며 그 누구도 여기서 자유로울 없을 만큼 강력하게 우리 정신에 내재되어 있고 세계 그 어디에서도 희석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세대의 사명은 선각자들이 밝혀놓은 우리 문화에 대한 우수성을 세계인들에게 다시금 확인 시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도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한 문화재를 꼭 되찾아와야 합니다. 특히 프랑스에 있는 외규장각에 있던 의괘는 반드시 돌려받아야 하며 그 의괘를 통해 다시한번 우리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증명하여 새로운 국가 도약의 정신적 발판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간송의 삶을 되짚어보면서 저는 하늘이 뜻을 세우면 그 뜻에 걸맞은 사람을 내고 그를 통해 하늘의 뜻을 펼치게 하는 오묘한 안배가 숨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민족의 큰 별이었던 간송은 떠났지만 그 별빛은 여전히 우리들 가슴에 살아있습니다.
또한 하늘의 수많은 별빛이 반짝이듯이 수많은 문화재들이 우리가 그 아름다운 빛을 알아봐주길, 한번만이라도 애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봐주길 고대하며 반짝이고 있는것입니다.
끝으로 간송미술관 연구위원이었으나 작년에 타계하신 오주석 교수님의 저작 [한국의 美-특강] 서문의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칠까 합니다.
[문화, 그것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 특히 지금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 바로 정체성의 문제다. 문화는 축구와 달리 우리 스스로 일구어야 한다. 히딩크보다 열 배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도와주어도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은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한다. 그것은 축구처럼 2년 만에 갑자기 훌륭해질 수 없다. 문화예술은 오랜 세월 지극한 정성으로 가꾼 다음에야 비로소 꽃을 피우는 생물인 까닭이다. 그리고 한 나라의 문화는 빼어난 선수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문화인, 예술가들이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한 나라의 문화수준이란 결국 그것의 터전을 낳고 함께 즐기는 전체 국민의 안목만큼 정확히 그 눈높이 만큼 올라설 수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 훨씬 이전부터 우리는 이미 아름다운 꿈들을 줄곧 이루어왔던 겨레이기 때문이다 ”]
시리즈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제 글에 있는 내용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간송미술관을 방문하면서 느낀 점과 아래 참고 자료에 있는 내용들이며 그 중 따로 고치지 않고 직접 옮겨 놓은 부분들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참고문헌 : [간송문화] 41호- 간송선생 평전 [간송문화] 51호- 간송이 문화재 수집하던 이야기 [간송문화] 55호- 간송 전형필과 위창 오세창 [간송문화] 70호- 간송 전형필 [간송선생님이 다시찾은 우리문화유산이야기] 한상남도서출판 샘터 [위창 오세창] 이승연 도서출판 이회
글 : 금강안 · 金剛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