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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ire de la philosophie(철학사),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6권. 19세기: 체계들의 시대(1800-1850)
제13장 프랑스에서 사회철학: 샤를 푸리에 - La philosophie sociale en France: Charles Fourier 733-739
19세기의 전반 반세기는 특히 프랑스에서 사회적 개혁가들이 풍부했다. 푸리에(Fourier, 1772-1837), 상시몽(Saint-Simon 1760-1825), 꽁뜨(Comte, 1798-1857), 프루동(Proudhon, 1809-1865) 등은 각자의 자기들의 방식에 따라, 시대의 정치적 변형들의 수준에 맞는 반성적 사회사상을 창조하려고 시도했다.
제1절 푸리에 Fourier 733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는 1772년 프랑스 서부 스위스 접경인 프랑쉬 꽁테(Franche-Comté) 지방의 두브(Doube)주의 주도인 브장송(Besançon)에서, 풍족한 상업 가정에서 태어났다. 1793년 리용에서 꾐에 빠져서 자기 재산을 잃었다. 그리고 그는 1794년에서 1796년까지 군인이 되었다. 그리고 상업을 위한 여행을 한 후에, 1815년까지는 리용에서, 브장송에서 그리고 파리에서 점원 또는 출납원으로 지냈는데, “6프랑의 가치를 지닌 것을 3프랑에 사고, 3프랑의 가치를 지닌 것을 6프랑에 파는 상술”의 직업에 항상 낙담했다. 그는 자기의 계산대 뒤에서 다시 새롭게 될 인류애를 꿈꿨다. (733)
신적 섭리(la Providence divine)는 천체들의 운동들을 서로 서로 정확하게 조절하는 완전한 조화를 물질세계 속에서 이룬다. 이 세계에는 신이라는 [능동]운동원리, 물질이라는 수동원리, 마지막으로 푸리에가 정의 또는 수학이라 부르는 운동의 규제원리가 있다. 이 마지막 원리가 없다면, 천체들은 무질서하게 서로 충돌하게 되고, 상호 파괴하게 된다. 신은 목적성에 복종하는 유기체적 삶의 운동 속에다가, 그리고 본능에 복종하는 동물적 삶의 운동 속에다가, 이러한 조화를 도입했다. (733)
하나의 완전한 질서와 더불어 규칙적이 되는 세 가지 운동의 종류, 물질적, 유기적, 동물적 운동에 비추어보면, “사회적 운동”(le mouvement social)은, 다시 말하면 사회 속에서 인간들 사이의 연관들 일체는 완전히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사리에 어긋난 것(la déraison)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섭리가 이 유일한 운동에 스스로 포기했다고 믿는 것은 가능한가? 프리에의 생생한 신앙은 이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 운동을 규제하는 원리가 지금까지는 단순히 인간들을[인간의 인식들을] 회피했다. 마치 천체를 인도했던 원리가 뉴턴이 그것을 발견하고 수학적으로 정식화될 때까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것처럼. 푸리에는 [천체 세계의 뉴턴이 있듯이] 자기를 사회세계의 뉴턴이라고, 다시 말하면, 사회관계들을 규칙화하는 조화로운 원리를 발견했다고 부풀렸다. 문제를 제기하는 동일한 방식이, 마치 뉴턴이 천체운동들 사이에서 운동들로부터 정식을 구해내면서 조화[원리]를 창조하지 않았듯이, 그에게서는 사회적 질서를 창조하기 위하여 어떤 규칙을 발명하거나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생시몽도 마찬가지로 의도 상으로 공상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찾아 낸 것, 그것은, 천체운동에서 인격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 속에서 사실로서 현존하는 조화로운 원리들이었다. 거기에는 법률을 제정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현재 있는 것을 발견하는데 있다. (734)
온섭리의 신앙은, 자연이 인간에 주었던 원초적 정념들을 구속 없이 따르면서 인간이 마땅히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장해준다. 그런데 인간 사회는 도처에서 인간이 구속되는 방식으로 조직화 되어있다. 법률, 도덕, 종교는 모든 측면에서 인간을 억압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노동은 필연이며 힘든 상태인데,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스스로 면제 받고자 애쓴다. 백년마다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사회 개혁가들은 옛 규칙들 대신에 새로운 규칙들을 대체하고자 꿈꾼다. 우리의 고유한 본성에 의해 우리 자신에게 계시되는 신적 섭리와 사물들의 현재 상태 사이에는 하나의 대비가 있다. 이 대비는 신적 의지에 반대되는 진실한 별종(une anomalie)이다. 푸리에는 이 대비를 제거할 것을 제안한다. 마치 새로운 어떤 루소처럼, 그는 자연 상태로 퇴행을 원하지 않았다. 루소가 이해했던 것과 같은 퇴행은 우리의 정념의 단순화를, 즉 초보적인 정념들로 환원을 가정한다. 이 단순화는 푸리에가 원했던 것과 전혀 반대이다. 푸리에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적으로 수많은 복잡한 정념들 가지고 있다. 이 정념들은 인간의 발전하는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지, 환원하는 본성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 정념들은 악의(惡意)들과 같은 과도함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 활동의 유일한 근원들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루소는 자연에 초과로 덧붙여진 사회적 제도로서 [사적소유] 재산에 대해 적인 반면에, 푸리에는 사적소유에, 즉 활동성의 활력소에 도달하고자하는 상시몽주의자들을 강하게 비난한다. 그는 1831년에 쓰기를 “재산과 유산의 폐지를 설교하는 것, 그것은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끔찍한 짓들이다![아주 불만이다]” 푸리에가 정념에서 본 것, 그것은 노동에서 그것[정념]의 수확물(un rendemant)이며, 이 수확물은 정념으로 하여금 인간 행복의 근원이게 한다. 반면에 루소에 따르면 감정의 발전은 일종의 한가로운 관조에 이르게 한다. 푸리에가 원하는 것은 정념 그 자체로서 정념은 아니다. 그것은 노동이라는 오류 없는 정념의 결과물과 함께하는 정념이다. 게다가 정념과 노동 사이의 연결을 주장하는 것은 심리학적 분석의 결과라기보다, 푸리에가 가지고 있는 확신의 결과, 즉 온섭리가 우리 본성[자연]의 발전과 우리 현존 및 행복의 조건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확신의 결과이다. 우리 자연[본성]의 발전은 정념 속에서 있으며, 이 조건들은 노동의 생산성 안에 있다. (735)
이 시대에 질서(l'ordre)라는 단어는 ‘생산하다’ 그리고 생산하기 위하여 ‘조직화하다’는 의미이다. 생산 작업은 노동에 의존한다. 노동의 생산성을 증가하는 유일한 수단은 노동을 “매력적이게”(attrayant, 견인하는) 하는 것이다. 노동은 그것이 각각의 취향에 부합하는 경우에만 매력적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은 자유로운 집단들 속에서만 매력적일 수 있다. 이 자유로운 집단들은 충분한 인원으로 구성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한 노동들 속에서 각자가 그 취향에 따라서 노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그리고 인원이 충분하게 구성되지 못하면 그 집단은 [다른 집단과] 연합되어야 하는데, 그 연합에서는 각자가 모든 사람들과 협력하고 있다는 생생한 감정과 깔끔한 이미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푸리에의 정신 속에는 팔랑쥬(la phalange)의 관념이 생겨난다. 이것은 노동자들로 연합된 작은 집단이며, 이 집단의 인원은 1,620명 이어야 한다. 그의 기획은 이제부터 문명화된 사회 가운데서 팔랑쥬의 실험을 하는 것이다. 이 팔랑쥬는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병치된 수많은 사회적 세포들로 대체되기 때문에 “문명화된” 사회가 점점 더 사라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외부적으로 팔랑쥬는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필품을 조달할 수 있는 필수적인 직업단체들의 일체이다. 팔랑쥬는 몇 계열들(des series)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계열은 몇 소집단(des groupes, 모임)들로 구성되어 있다. 계열이란 동일직종의 사람들의 일체를 말하며, 예를 들어 농업인들과 같은 것이다. 소집단이란 계열의 내부에서 직업의 동일한 부분에 종사하는 자들이다. 예를 들어, 경작에 종사는 자 또는 곡식을 가꾸는 자, 또는 건초(꼴)를 돌보는 자 등이다. 이 노동자로부터 다른 노동자들과 그룹이 이루어지고, 모든 사람들은 한 팔랑스테르(un phalanstère)의 일체를 이루고 산다. 이들의 거주지는 모여 있지만 분리되어 있다. 푸리에의 정신 속에는 중세의 협업작업[협동조합]의 어떤 것이 되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낭만주의는 중세의 협업들의 이상화된 이미지를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말하자면 협업에서 즐거운 동지의식(camaraderie), 신체적인 상부상조 정신, 경쟁심 등이다. 혁명과 대기업이 이것들을 사라지게 했었다. 노동의 분업은 노동자를 분리시켰고, 노동자는 자기 일에서 고착되고 고독하여, 생산에 기여하는 모든 일로부터 흥미를 잃었다. 일이 연합되어서 함께하는 일에 관점을 잃지 않는 노동자는 그 일에 매력을 끄는 동기들을 갖는다. 그러면 노동자는 그가 만드는 것을 가능한 한 가장 잘 만들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는 일 전체에서 자기 부분의 역할을 보기 때문이다. 집단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집단이란 다른 집단과 경쟁한다. 결국에는 각각이 생산작업의 전체에 참여하면서도, 하나의 일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취향에 따라 취향의 변화에 따라 각자는 하나의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이행할 수 있다. 이리하여 연합된 노동에 의하여 인간의 중요한 세 가지 정념들은 만족된다. 혼합(la composite, 조성)정념, 카발라(la cabaliste, 비법)정념, 나비(la papillonne)정념이다. 혼합 정념이란 사람들이 작업하는 전체의 완전함에 기여하는 정념이다. 카발라 정념은 집단들 사이에 증오로 퇴화시키는 질시가 아니라 사람들이 부분의 일을 맡은 그 집단에게 가능한 한 잘 봉사하려는 욕망을 갖는 경쟁[경쟁정념]이다. 마지막으로 나비 정념이란 변화하려는 욕망이다. 우리 속에 취향들의 포화상태에서 그리고 다양함에서 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놀이(le jeu)와 즐거운 감정들의 묘사를 읽고서 믿었을 것이다. 이 놀이와 그 감정들이 여러 다른 상대편을 활성화시켜주고 또 이들이 만든 당들도 활성화시켜준다. 따라서 “매력적이게 하는 노동”(travail attrayant)은 놀이와 다르지 않으며, 훨씬 더 어린애같이(enfantillage, 동심같이) 나아갈 것이다. (736)
팔랑쥬(la phalange, 팔랑헤) 안에서 가정은 여전히 존속하다. 그러나 이 단어로부터 일어나는 모은 구속들과 소위 말하는 의무들은 사라진다. 어린이들의 교육은, 그들이 참여하는 작업장들의 구경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러고 나서 그들은 조금씩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이 모든 직업들의 직업훈련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적인 취향을 조금씩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부부의 정절은 의무가 아니다. 아무도 자기 취향에 맞게 나비정념을 만족시키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팔랑스테르의 여성은 생시몽주의의 여성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736)
이와 같은 (사람들이 플라톤의 견해에서 보았듯이) 유토피아들은 항상 인간의 욕망들과 자연 사이의 일치를 선 가정하고 있다. 원했던 결과를 얻기 위하여, 팔랑쥬의 구성원들의 자연적 취향은 다양한 만큼이나 그 직업들도 다양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푸리에가 시도하고 원했던 팔랑스테르의 실험에서, 그는 각자가 구별된 취향을 지닌 구성원들 1,620명을 선택하고자 원한다. 왜냐하면 그에 따르면 원초적인 정념들의 가능한 모든 조합들(les combinaisons)이 그 수만큼의 특성들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들이 그 다양한 조합의 영속성을 보증할 수 있을까? 일반적인 방식으로 푸리에는 문명에서 조화(l'harmonie)로 이행에서 생겨날 수 있는 인류애의 깊은 변형이 깊은 혁명을 동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자연 속에서와 유기체 속에서 지구의 과거를 위하여 퀴비에(Cuvier, 1769-1832)가 묘사했던 것과 유사한 것이다. 푸리에의 상상력은 과거의 우화들을 미래에 투사한 것이다. 우화들이란, 바다 동물들을 가축으로 길들이기, 새로운 기관의 형성, 특히 서른 두 개의 발에 꼬리가 하나인 것, 이 마지막의 것은 그 당시 풍자 화가들이 즐겨 이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자연은 항상 그리고 점점 더 잘, 섭리적인 조합에 의하여 만족하려는 인간의 작업들을 [미래에도] 준비 중일 것이다. (737)
이러한 것이 협회자(sociétaire)의 기계론의 원리들인데, 이 기계론의 원리들을 [크리스트교] 복음서가 탐구하고자 제안했던 것이고, 또한 뉴턴도 물질적 세계 속에서 단지 그것과 유사한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의 낯선 생산물이다. 이 시대는 소위 종교적이고 과학적인 주장에 맞추어, 모든 정치적 도덕적 문제를 제거하고서, 인류를 위한 힘든 노력 없이 경제적 생산의 최대치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대였다. (737) (47RKC) (57SKE)
제2절 푸리에주의 Le fouriérisme 737
푸리에주의는 상시몽주의자로부터 개종한 푸리에주의자인, 르슈발리에(Jules Lechevalier, 1806-1862)가 교육을 한 덕분에 특히 1832년부터 확산되었다. 푸리에의 저술들 바깥에서 이 학설은 여러 저자들의 다양한 책들로 제시되었다. 그 저자들로는 산업 절차들에 관한 개요(Aperçu sur les procédés industriels, 1824)를 쓴 뮈롱(Just Muiron, 1787-1881), 사회과학 연구 입문(Introduction à l'étude de la science sociale contenant un abrégé de la théorie sociètaire 1824)의 빠제(Amédée Paget, 1804-1841), 개종한 상시몽주의자로서 르루(P. Leroux, 1797-1871)의 백과전서지(Revue encyclopédique)에 협회 이론에 대한 글을 쓴 아벨 뜨랑송(Abel Etienne Louis Transon, 1805-1876), 연대론(Solidarité, 1836)의 르노(H. Renaud, 1803-1874), 꽁시드랑(Victor Prosper Considerant 1808-1893) 등이 있다. 꽁시드랑은 1832년부터 팔랑스테르(Le Phalanstère ou la reforme industrielle) 신문을 펴냈는데, 1835년에는 팔랑헤(La Phalange)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는 1836년에 사회적 숙명(Destinée sociale 1834)(2 vol)을 출간했다. 또한 개종한 상시몽주의자인 뻴라랑(Pellarin, 1804-1883)은 1839년에, 즉 푸리에가 죽기 3년 전에 푸리에의 전기를 출판하였다. 푸리에는 팔랑쥬를 시도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많은 구성원(le million, 백만)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그가 죽고 난 뒤에 시도되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프랑스 기즈(Guise)에 세운 고당(Jean-Baptiste André Godin, 1817-1888)의 가족협회(Familistère, 가족공동체)이다. 이것은 현 시기에도 지속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도 또한 푸리에주의 전통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738)
꽁시드랑이 1843년에 8월 1일에 선보인 평화민주제(La Démocratie Pacifique)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그는 아래와 같은 신앙을 공표했다. “우리는 믿는다. 신의 숨결을 받아서 밀고 나갔던 인류가 점점 더 강한 연합을 실현할 것을 소명으로 부름 받았다. 연합이란 인류를 형성하는 요소들인 개인들, 가족들, 계급들, 민족들, 종족들의 연합이다… 인간 가족의 거대한 연합은 완전한 통일에 이를 것이다. 말하자면 질서가 모든 인간적 요소들의 자발적 일치로부터 오는 자연적으로 자유롭게 도래할 사회 상태에 이를 것이다.” 이 푸리에주의자는 계급의 협력과 투쟁의 상태는 우발적 상황들에 기인한다고, 그리고 1789년의 대혁명의 과도기가 평화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미래는 자본, 재능, 노동의 연합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꽁시드랑은, 1843년에 정치적 정당들의 상태를 서술한 후에, 꾸장의 철학적 절충주의에 가까운 정치적 종교적 절충주의에 이르렀다. 정치적 정당들을 그는 기조(Guizot, 1787-1874)와 고급 은행가와 같은 이들의 편협한 보수주의자들(conservateurs-borne), 진보적 보수주의자들, 퇴행적 민주주의자들, 선출될 대통령의 지명과 외국 전쟁에 대한 보편 선거의 지지자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자들 등으로 나누었다. 그가 말하기를 이들이 과오를 범하는 것은 배타주의, 즉 다른 원칙들의 부정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주장하고 방어하는 원리들 속에서는 합법주의자들이다.” 또한 그가 말하기를, “프로테스탄티즘은 자유의 원리의 지킴이이며, 카톨릭주의는 위계질서의 축성-성인의 원리와 통일성의 지킴이다. 철학은 순수 이법[이성]의 지평 위에서 진행한다. 이것들 모두는 오늘날 하나로 통합될 운명에 처해 있다.” 또 다른 푸리에주의자로서 엔깡(Victor Hennequin, 1816-1854)은 게다가 1844년에야 자신의 공감을 표시했다. 그가 모호하다고 판단했던 꾸쟁의 학설에서가 아니라, 적어도 꾸쟁의 방법에서 공감을 표시하였다. (738)
그러나 또한 푸리에주의자들 가운데 라모르보네(Hippolyte de la Morvonnais, 1802-1853)와 같은 정통가톨릭교도가 있다. 그는 상말로(Saint-Malo) 지방의 시인이며, 푸리에가 가톨릭 교리와는 다른 새로운 종교에 닮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생각에 대해 저항했다. 그는 라메네(Lamennais)의 반쯤 신념으로부터, 이 새로운 종교를, 교회에서 모든 시기에 현존했던 온전한 신앙으로 이끌려고 했다. 그의 논문은 푸리에주의자이며 “진보적 종교”를 믿는 뻴땅(Eugène Pelletan, 1813-1884)에 반대하여 쓰여졌다. 왜냐하면 “인류가 스스로를 전개함에 따라, 보편적 삶의 가장 큰 집합은, 달리 말하면 신의 가장 큰 집합은, 인류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정식들과 더불어 푸리에주의는 헤겔의 역사적 범신론에 근접한다. (739)
푸리에주의자들은 1848년 혁명에서 아주 활동적인 역할을 했다. 꽁시드랑은 국민의회에서 개혁을 실천한 수단들을 요구했다. 또 동일한 시기에 미국에서는 이십만 푸리에주의자들이 있었다. 꽁시드랑은 1849년 이후에 미국 텍사스에 식민지를 건설하려 시도했다. (739) (5:18, 47RKD) (6:01, 57S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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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Bibliographie 739
I.
Ch. Fourier(1772-1837), Théorie des quatre mouvements et des destinées générales, 1808; Le Nouveau Monde industriel et sociétaire, 1829.
E. Poulat(1920-2014), Les cahiers manuscrits de Fourier, 1957.
E. Lehouck(1935-), Fourier aujourd'hui, 1966.
II.
M. Friedberg(s.d.), L'influence de Ch. Fourier sur le mouvement social contemporain en France,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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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 샤를 푸리에(François Marie Charles Fourier, 1772-1837), 프랑스 철학자. (현실)사회학파(École sociétaire)의 창설자. 맑스와 엥겔스에 의하면 공상적 비판 사회주의(socialisme critico-utopique)의 대표적 인물이며, 영국에서는 오웬(Robert Owen)이다. 4가지 운동과 일반적 숙명의 이론(Théorie des quatre mouvements et des destinées générales)(1808) 산업적 협회의 새로운 세상(Le Nouveau Monde industriel et sociétaire, 1829
1772 르웈(Emile Lehouck, 1935-), 브뤽셀 태생. 벨기에 탐구자. 푸리에 전문가. 박사논문 « Charles Fourier, penseur et écrivain 1965 »(브뤽셀 자유대학), 오늘날 푸리에(Fourier aujourd'hui, 1966)
1920 뿔라(Émile Poulat, 1920-2014) 리용출신 프랑스 역사가 사회학자. 푸리에의 수고본 노트들(Les cahiers manuscrits de Fourier, 1957).
?-? 프리드베르그(Morris Friedberg, s.d.) (1899-?, 사회학자?). 프랑스에서 오늘날 사회주의 운동에 미친 푸리에의 영향(L'influence de Ch. Fourier sur le mouvement social contemporain en France, 1926)(Paris, Marcel Giard).
(5:34, 47RKD) (6:26, 57S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