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돌의 피(El Sangre de Condor, 1969) : 볼리비아 인디오의 삶에 대한 탁월한 묘사
호르헤 산히네스(Jorge Sanjins) 감독
잉카족의 성스러운 호수 티티카카 호에서 찍은 <우카마우>는 볼리비아 최초의 장편 극영화로 기록돼 있다. 볼리비아 영화협회가 제작하고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호르헤 산히네스(1936〜)가 연출한 이 영화는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인디오의 모습을 개인적이면서도 다소 탐미적으로 담았다.
그러나 ‘우카마우’는 영화 제목이 아니라 제3세계 민중영화운동의 상징적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쿠데타로 등장한 군부정권이 정부 차원에서 제작한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하자, 호르헤 산히네스는 <우카마우>의 대중적 명성을 살려 자신의 영화 그룹에 ‘우카마우 집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카마우는 아이마라어로 ‘올바른 길’을 뜻한다. <우카마우>에서 그것이 아내를 잃은 인디오가 메스티조 상인에게 복수하는 민중투쟁의 길을 뜻하게 된다. 우카마우 집단은 그 ‘올바른 길’을 “민중영화는 민중 속에서 탄생하고, 민중적 미학을 담으며, 민중에게 보여져 그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민중노선’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콘돌의 피>는 ‘우카마우 집단’의 첫 영화다.
안데스 산지의 칸타 마을. 인디오인 이그나시오는 술에 취해 아내 파울리나를 괴롭힌다. 하나뿐인 자식을 전염병으로 잃었기 때문이다. 이그나시오는 파울리나를 때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파울리나는 남편이 자기 자신을 때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다. 그 원인을 밝혀나가던 이그나시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마을에 들어온 미국 평화봉사단(볼리비아에서는 ‘진보부대’라고 불렀다)이 자신들이 개설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은밀하게 불임시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농민들을 조직하여 ‘여성의 배에 죽음을 뿌리는’ 선교사와 병원과 평화봉사단을 습격한다.
곧이어 닥친 탄압. 간신히 생명을 건진 그는 도시에 나가 노동자가 된 동생 시스토를 찾아간다. 시스토는 자신의 뿌리를 떠나 메스티조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다. 의사는 이그나시오의 출혈이 심하기 때문에 급히 수혈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말한다. 시스토는 피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지만 헛수고다. 혈액을 가진 백인 의사들이 인디오 때문에 자신들의 사교 모임을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그나시오는 죽는다. 시스토는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을 깨닫고 인디오로서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마지막 장면은 하늘로 치솟은 총구들을 긴 정지화면으로 잡고 있다.
<콘돌의 피>는 물론 칸타 현지에서 촬영됐다. 이 영화는 비록 출연자 모두가 비전문배우인 농민이고 거의 자연광과 들고 찍기에 의존하고는 있지만, 민중적 삶의 양태를 탁월하게 담아내고 있으며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에 강렬한 동의를 표시하고 있다. 영화는 극적 맥락, 인물 구성, 음악, 리듬 등 모든 면에서 대립적인 구조로 짜여 있다. 아이들이 뛰노는 마을 잔치와 아이들의 인형을 땅에 묻는 장면, 푸쿠나(피리)를 부는 인디오 농민과 로큰롤에 맞추어 춤추는 평화봉사단, 전투적인 이그나시오와 백인 여배우의 사진을 벽에 붙여놓은 도시의 시스토와 고상한 의사들의 사교모임을 대조시키는 호르헤 산히네스의 관점은 매우 분명하다.
이야기 구성은 파울리나가 시스토에게 들려주는 회상 형식을 취한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플래시백을 자주 사용하는데, 그것이 농민들의 이해를 가로막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또한 영화는 지나치게 개인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농민들에게 왜 미국의 평화봉사단이 불임시술을 하는지 밝히지 않는다.
이런 부분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콘돌의 피>는 제3세계 전투적 민중영화운동의 이정표와 같은 작품이다. 볼리비아 정부는 1971년에 미국의 평화봉사단을 추방하는데, 이때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콘돌의 피>다.
우카마우 집단은 이후 더욱 집단적이고 전투적인 <민중의 용기>(1971), <제1의 적>(1974) 등을 발표한다. 비록 1980년대 이후의 활동은 미약해졌지만 우카마우 집단의 믿음과 실천을 간단히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ㅡ이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