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의 뉴질랜드 콩트(249회). 뉴질랜드 타임스. 27/11/2020
Te Araroa Trail
뉴질랜드 남북을 관통하는
-우와~랑기토토 섬이 바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구먼
-청명한 뉴질랜드 하늘, 11월 여름의 한가운데를 함께 걷고 있네.
-우리는 지금 뉴질랜드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트레일의 일부 구간에 서 있어.
오랜만에 걸어보는 금요일의 트레킹은 날씨 만점, 대화 풍성, 몸컨디션 만땅이다. 앞에 걷는 앤디의 장딴지가 탄탄한 카우리 나무처럼 불끈불끈하다. 뒤따르는 웨이의 팔도 황금빛으로 건실하고 우람해 힘이 넘쳐난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구간, 브라운스 베이 통과 지점. 바닷물 출렁이는 곳이라 경치도 압권이네.
-생각 같아서는 가까이 다가오는 랑기토토 섬까지 수영해서 넘어가고 싶구만.
세상은 온통 시릴 정도로 맑고 파랗다. 생동감이 넘실대는 한여름의 향연장이다. 브라운스 베이 비치에는 삼삼오오 비키니 차림의 여인들이 썬텐을 하느라 눕거나 엎드려있다. 파라솔도 없이 선글라스 하나 쓰고 온몸을 햇빛과 바다에 내 맡긴 상태다. 자연과 하나.
-오라. 여기 팻말이 보이네.
-무슨 팻말?
-테 아라로라(Te Ararora) 트레일(Trail) 팻말.
3,000 Km에 달하는 장거리 트레일. 뉴질랜드, 북섬 북쪽 끝(Cape Reinga)과 남섬 남쪽 끝(Bluff)을 연결하는 루트.
-3,000 Km? 대단한 거리네. 앤디! 자네가 몇 년에 걸쳐 종주했다는 뉴질랜드 종단 크로싱이네.
국제 은퇴지수 6위
-감회가 새롭네. 한번 종주하는데 넉 달이 걸리더구먼. 뉴질랜드 와서 25년 만에 한번 완주. 혼자 걷던 그 시간, 참 인상적이었지. 오랫동안 열심히 일한 당신, 여행을 떠나라 하면 꼭 추천하고 싶은 루트지. 한 번에 다 못 걸으니까 이어서 걸었지. 나야 10여 년 하던 비즈니스 마무리 짓고서 시작했지. 그 뒤 두 차례 더 가서 완전히 한번 종주했어. 걸으며 다음 비즈니스를 생각하고 결정했지.
뉴질랜드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장거리 트레일이다. 마오리어로 ‘긴 오솔길’. 완주하는데 4~5개월 소요되니 오랜 준비와 몸 다짐이 우선이다. 무엇보다 그럴 시간을 낸다는 게 우선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한 달짜리 트레킹도 좋지만, 몸담고 있는 터전 뉴질랜드부터 탐색해보는 것도 좋다. 내가 사는 나라를 다 밟아보는 일. 각 지방을 모두 둘러보는 일. 남북으로 관통해 나 있는 길을 걷다 보면 최종 목적지에 이르게 된다. 우리네 인생`길을 가늠하게 해준다.
-작심하고 준비한 계획이었지. 뉴질랜드 전체를 가로지르며 걷는 혼자만의 시간. 대자연이 벗해주었지. 뉴질랜드 와서 쉼 없이 일하고 중간 중간에 가진 특별 휴가였지. 나를 대면하는 시간이 참 좋았어. 텐트 치고 자다가 별에 취한 순간이라니... .
-대단해. 나도 해보고 싶지만, 엄두가 안 나네. 시간, 체력, 고독, 날씨...? 앤디!자네는 뉴질랜드 종단 후, 책도 한 권 내지 않았던가. 그 책 읽어보면서 많은 걸 느꼈는데. 어쨌든 그런 자네와 이렇게 시간 닿는 대로 한 달에 한 번씩 4시간을 걷는 이런 시간이 참 좋네.
앤디와 웨이가 이마와 목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나무 그늘 있는 벤치에 앉았다. 준비해온 과일과 음료수를 꺼내 들었다. 출렁대는 파도 소리와 지저귀는 산새들의 노래 속에 하늘은 더 푸르게 높아만 갔다. 말없이 둘이서 눈앞에 지나가는 하얀 요트를 바라봤다. 신선한 바람을 가르며 나아갔다. 쏟아낸 하얀 물보라! 맑은 하늘에 제트기 비행운 같았다.
-어젯밤, 기사를 하나 읽다가 눈이 멈춰지더구먼. 국제 은퇴지수라는 게 있데. 각 나라별로 점수 매긴 은퇴후 이상적인 국가.
-웨이! 그런 것도 다 있나? 뉴질랜드와 한국은 어떻게 나왔어?
-응. 뉴질랜드는 세계 6위. 한국은 23위로 랭크돼 있더라고. 2020년 국제은퇴지수를 찾아보면 자세히 나와 있어. 아이슬란드, 스위스, 노르웨이가 ‘톱3’을 차지했더구먼. 4위 아일랜드, 5위 네덜란드, 6위 뉴질랜드, 7위 호주, 8위 캐나다, 9위 덴마크, 10위 독일 등이 뒤를 이었고.
-톱10 중 7개국이 유럽이네. 대양주의 뉴질랜드와 호주는 모두 10위권이고.
고국의 정기를 듬뿍
-국제은퇴지수는 ‘건강, 삶의 질, 물질적 풍요, 노후 재정’ 등을 국가별로 점수화해 순위를 매긴 것이래. 은퇴를 위협하는 5대 요인으로 불황, 저금리, 국가부채, 기후변화, 경제적 불평등 등을 꼽았더구먼. 불황은 코로나 19로 인한 실업 증가, 소비 감소 등이 원인이래.
어쨌든, 은퇴 후에 살기 좋은 나라, 6위권 뉴질랜드에 산다는 것. 미국, 호주, 캐나다, 독일, 영국, 프랑스, 스페인을 앞섰으면 대단한 것 아닌가. 돈이 중요하다지만, 불편하지 않을 정도면 된다. 무엇보다도 신간이 편해야 한다. 내 가진 것에 자족하며 인간 내면의 존재감을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웨이, 연금 받으면서부턴 자연스레 일도 줄여야겠지. 뉴질랜드와 고국을 오가며 좋은 곳도 둘러보며 잔잔한 시간을 가질 거고. 고국 가면 산사 기행을 한 달정도 해보고 싶구먼.
-앤디, 듣기만 해도 좋네. 요즘은 고국도 지자체가 활성화돼서 각 지역 특성을 잘 살려놓았더구먼. 한마디로 볼거리와 먹거리 그리고 놀 거리가 풍성해. 특히 남도 지방이 참 잘해놓았데. 작년에 가본 순천만 늪지의 갈대밭은 아주 향토적이었어. 편히 며칠 쉬며 순천만 국가정원과 순천만 습지를 둘러보는 일. 그리고 순천 맛집 한정식을 드는 일. 농협 창고를 리모델링해 지은 커피 전문점은 외국을 능가하데.
-뉴질랜드의 종주 트레일은 큰 등산 백을 메고 걷는 멋. 그날그날 텐트나 허트 아니면 숙소를 찾아 보내는 유목민같은 노마드의 멋. 그에 반해 향토색 짙게 잘 개발된 고국 지자체를 2~3일씩 둘러보며 전국을 두어달 여행하는 멋도 참 좋겠어. 한국인의 밥상을 맛보는 멋이란 더욱 속을 살찌워 주겠지.
테 아라로라 트레일을 일부 걸으면서도 이렇게나 가슴이 풍성해지고 배가 부르는데. 고국의 지역 특산 명소를 들르며 바쁠 것도 없이 여유롭게 보내다 보면 고국의 정기를 듬뿍 받아올 것 같다. 앞으로의 세상은 그런저런 일로 채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속도를 내며 데본포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앤디와 웨이의 등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맺힌 땀이 등줄기 골을 트레일 삼아 아래로 흘러내렸다. 가는 세월을 묵묵히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