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팔자보다는 마음먹기에 달렸더라
옛날 중국의 어느 고을에 당대 최고의 관상가가 와서 사람들의 관상을 보고 장래의 길흉화복을 점쳐주고 있었다. 그때 한 소년이 와서 그 관상가에게 ‘제가 장래에 어른이 되면 훌륭한 정치가가 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이 소년을 찬찬히 살펴보던 관상가는 ‘아니야, 자네는 정치는 맞지 않아!’라고 짧게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들은 소년은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다음 날 다시 관상가에게 가서 ‘의술을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의원이 되어 병자들의 고통을 없애주고 싶은데 이것은 가능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당돌한 소년을 보고 한참 동안 살피던 관상가는 ‘아니야, 그대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정치가가 되어 많은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관상가는 첫날은 소년의 관상(觀相)을 보고 판단하였으나, 둘째 날은 이 소년이 자기만 잘살고 잘되려는 생각이 아니라 어떻게든 천하 백성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그 마음(心相)을 보았던 것이다.
이 소년이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훌륭한 정치가가 되어 외우내환에 시달리던 송나라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하였던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재상으로 꼽히며 범문정공(范文正公)으로 불리는 분이다.
변경에 근무하면서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장병들을 훈련시켜 정예부대로 편성하여 서하를 퇴치한 공으로 인종 황제는 그를 부재상에 임명했으며, 1043년 관리제도를 정비하여 인재를 양성하였고, 무력을 강화하는 개혁조치를 제안했다. 인종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개혁안이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된다. 이 정치개혁은 기원 1041-1048년까지에 7년간 실시되어, 이 개혁을 경력신정(慶曆新政)이라고 불렀다. 범중엄은 어렵게 자라, 출세한 뒤에도 부귀를 누릴 수 있었는데도 지독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자나 깨나 백성만을 생각했다고 전한다.
당시 사회는 워낙 부패하여 비록 범중엄의 개혁은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개혁에 자극을 받아 송나라 때의 가장 위대한 개혁가로 불리는 젊은 개혁가 왕안석(王安石, 1021년-1086년)은 그의 개혁을 이어받아 송나라 최고의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범중엄의 정치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문장으로 그 유명한 악양루기(岳陽樓記)가 있다. 범중엄의 친구인 등종량이 익주를 다스리고 있을 때 동정호 부근에 중국 강남 3대 누각의 하나인 악양루를 수리하고 기념하는 글을 범중엄에게 청하여 쓴 글인데 천하의 명문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마지막 부분의 내용인 즉
不以物喜 不以己悲 居廟堂之高 則憂其民 處江湖之遠 則憂其君 是 進亦憂 退亦憂 然則何時而樂耶 其必曰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
재물 때문에 기뻐하지 않고 자신 때문에 슬퍼하지도 않으며 조정의 고위직으로 있어도 그 백성을 근심하며, 강호에 멀리 있어도 그 임금을 걱정하니 이는 조정에 나아가도 근심이요 물러나서도 근심함이라. 그런즉 (군자는) 언제 기뻐하는가? 오로지 천하 백성의 근심에 앞서서 근심하고 천하 백성의 즐거움보다 가장 늦게 즐거워한다.
어려서부터 평생을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근심하며 바른 정치를 하였던 범중엄의 마음을 명쾌하게 표현한 글이다. 송나라는 유학(儒學)이 크게 발달한 전성기였으나 정치가 문약(文弱)에 흐르고 간신들의 횡포로 나라가 크게 쇠약했으나 범중엄을 비롯한 개혁가들이 등장한 이 시기는 어느 정도 중흥을 이루기도 하였다.
명심보감 존심편(存心篇)에 나오는 범충선공(范忠宣公, 본명 純仁)은 범중엄의 둘째 아들이다. 명심보감의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언제나 이런 훌륭한 지도자를 만날 수 있을까를 걱정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范忠宣公 戒子弟曰 人雖至愚나 責人則明하고 雖有聰明이나 恕己則昏이니 爾曹는 但常以責人之心으로 責己하고 恕己之心으로 恕人이면 則不患不到聖賢地位也니라
범충선공이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비록 매우 어리석으나 남을 꾸짖을 때는 총명하고 비록 총명함이 있어도 자기를 용서할 때는 어두우니 너희들은 항상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나를 꾸짖고, 나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면 즉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