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에 샘이 있다.
독도에 생명을 불어넣은 샘, 유일하게 민물을 구할 수 있는 곳, 그래서 물골이다.
물골은 가까이는 울릉도에서 멀리는 강원도에서 찾아온 어민들에게 생명수를 제공했다.
1954년에 독도의용수비대가 첫 주둔지로 삼았고, 1955년부터 상주경비를 시작한 독도경비대원에게 생명수를 제공했다. 1963년에 독도 최초 주민 최종덕씨(1987년 사망)가 터를 잡은 곳도 물골이었다.
독도에 담수화시설이 설치된 이후 샘으로서 기능은 하지 않고 있다.
물골의 역사는 독도침략의 역사이다. 독도를 지켜낸 민초들의 역사이다.
그러나 물골이 겪어낸 오랜 역사는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오히려 수백년의 역사가 50여년의 짧은 역사로 둔갑되고 있다.
독도에서 민물을 구할 수 있다는 기록은 일본 군함 신고호(新高號)가 러일전쟁중인 1904년 9월 25일에 작성한 행동일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행동일지는 독도의 한자표기인 '獨島'가 기록된 최초의 문헌이기도 하다.
신고호는 일본 해군이 동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울릉도와 독도에 망루를 세우기 위해 조사차 파견되었다.
▲ 신고호 행동일지 '獨島'가 기록된 최초의 문헌으로 사료적 가치가 크다.
“한인(韓人)이 그를 獨島라 쓰며” “서도의 서쪽 C지점에도 또한 맑은 물이 있다” ⓒ 김점구 독도
1905년 2월 22일, 일본은 시마네현고시를 통해 독도를 편입하였고, 어업가 나카이요오사부로는 독도에서 강치(바다사자)잡이를 하며 물골을 이용하였다. 1910년에 강제로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었고,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인에 의해 이용될 수 밖에 없었다.
▲ 1953년 6월에 일본이 세운 나무표식(출처 : '오키의 100년' 사진집)
울릉경찰서는 독도순라반을 파견하여 철거하였다.
ⓒ Kyodoshuppansha
해방 그리고 6.25전쟁으로 국내정세는 어수선 했고, 일본은 독도에 영토표식을 설치하고 한국 어부들을 조사하는 등 독도침략을 계속했다. 1953년 6월에 일본 정부는 독도에 무단 상륙하여 나무표식을 설치하고, 일본 정부의 허락 없이 출입할 수 없다는 경고판을 세웠다.
1954년 4월, 울릉도 주민들이 일본의 독도침탈을 방어하기 위한 '독도자위대'를 결성하면서 물골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독도의용수비대의 시작이다.
첫 주둔지는 물골이었다. 절해고도인 독도에 비바람을 피하고 식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물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골이 해안가에 있어서 파도를 피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북쪽 일부로 시야가 제한되어 일본 어선과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관측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물골에서 수 일을 지낸 독도의용수비대는 동도 정상으로 주둔지를 이동하였고, 식수공급원으로 계속 이용하였다.
▲ 물골에서 관측 범위, 물골에서 관측이 가능한 지역은 북쪽 일부에 불과하다.
ⓒ 김점구 독도
1954년 12월 31일, 독도의용수비대원 9명이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원으로 특채되면서 독도의용수비대는 해산되었고, 경비임무는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에 이관되었다.
1963년, 물골에 민간인이 살기 시작했다. 독도 최초 주민 최종덕씨가 주인공이다. (최종덕씨 가족은 1977년에 독도 주민으로 등록을 했다.) 최종덕씨는 물골에 터를 잡고 주거시설과 샘솟는 물을 저장하기 위한 급수시설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울릉도에서 자재를 실어 와야 하는 어려움으로 공사는 원만치 못했고, 1966년 10월부터 경상북도가 지원하여 11월 22일에 '독도어민보호시설'이 준공되었다.
▲ 독도어민보호시설 준공 표지, 계단을 통해 내부에 들어갈 수 있다. 방으로 쓰였던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 김점구 독도
독도어민보호시설기념
1. 시 설 물 : 어민보호소 6평, 선치장 7m, 급수조 1개소
2. 총공사비 : 1,200,000원
3. 공사기간 : 1966.10.5 ~ 1966.11.22
이 시설물은 독도 근해에 출어하는 대한민국 어민의 안전보호와 독도 수산자원 개발을 위하여 시설함.
경상북도지사 김 인
그러나 1967년 8월 30일자 서울신문에 물골 발견과 급수조 공사를 홍순칠씨(1986년 사망)가 했다는 인터뷰 기사가 눈길을 끈다. 기사에 따르면 홍순칠씨가 수년간의 탐색 끝에 1965년 11월 23일에 발견, TNT로 굴바닥을 터뜨려 물이 솟게 하고 급수장 시설을 설치했다고 한다.
"식수 한 방울이 피 한방울에 비겨왔던 독도에 샘이 생겼다. .....홍순칠씨가 수년간의 탐색 끝에 발견, 청동같은 바위틈에서 샘솟는 우물로 개발한 것이다. .....이 샘이 발견된 것은 65년 11월 23일쯤 그해 여름 전국적인 한발때에도 굴속에 물기가 있는 것을 발견한 홍씨(홍순칠)가 시멘트등으로 1개월 동안 시험한 끝에 TNT로 굴바닥을 터뜨려 물이 솟게 된것이다. 홍씨는 지난해 11월 경북지사에게 진정, 이 샘가에 아담한 「어민의 집」까지 세웠다. ....." <1967년 8월 30일, 서울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