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릉"(惠陵)은 제20대 "경종"(景宗)의 원비(元妃) "단의왕후"(端懿王后 : 1686~1718)의 능(陵)이다.
"단의왕후"(端懿王后)는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로 1696년 11세에 9세였던 세자(景宗)와 가례를 올렸다.
"경종"(景宗)은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이니 "세자빈"(世子嬪)은 "숙종"과 "장희빈"의 며느리인 셈이다.
그러나 "세자빈"(世子嬪)심씨의 왕실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희빈 장 씨"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왕비에서 빈(嬪)으로 강등된 직후였고,
"무고의 옥"(巫蠱─獄)으로 사약을 받았는데 이때 "세자빈"(世子嬪)의 나이 16세였다.
"무고의 옥"(巫蠱─獄)이란 이러한 일이다.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다가 1688년에 궁녀 "장 소의"(張 昭儀) 소생의 왕자 균(畇:뒤의 경종)을 얻자,
이듬해 정월에 "균"을 세자로 책봉하고 "장 소의"(張 昭儀)를 희빈(禧嬪)으로 봉했다.
그해 5월에는 "인현왕후"( 仁顯王后)를 폐하고, "희빈 장씨"(禧嬪 張氏)를 왕비(王妃)로 올렸다.
그런데 1694년 노론인 김춘택 등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숙종은 민비를 폐출한 것을 후회하고 "인현왕후"(仁顯王后)로 복위시키고, 장씨를 희빈 (禧嬪)으로 다시 내렸다.
이때 "희빈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가 "희빈"에게 보낸 편지가 발각되었는데,
여기에는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해하려는 음모가 씌어 있었다.
따라서 그 죄를 물어 장희재를 죽이려 했으나, 정권을 잡고 있는 소론들이
세자(世子)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 장희재가 화를 면하도록 했다.
그러나 1701년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원인 모를 병으로 죽었을 때 "희빈"이
"취선당"(就善堂)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놓고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저주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에 숙종은 "희빈 장씨"를 자진(自盡)하도록 하고, 장희재와 그 일파를 모두 죽였다.
또한 그 일에 관련된 궁인(宮人)과 무녀(巫女)도 모두 죽였다.
이 사건을 "무고의 옥"(巫蠱─獄)이라 한다.
이러한 풍파 속에서 "세자빈"(世子嬪)심 씨는 세자가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인
숙종 44년(1718)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이때 조선에는 "여역"(癘疫)이 창궐했고 숙종과 세자가 경덕궁(경희궁)으로
급히 옮긴 기록으로 보아 세자빈(世子嬪)의 병도 여역(癘疫)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자빈"(世子嬪)심 씨는 1720년 "경종"(景宗)이 즉위하자 "단의왕후"(端懿王后)에 추봉 되었다.
혜릉(惠陵)의 능원은 동구릉 내 17명의 유택 중 유일한 "원"(園) 형식으로 가장 작은 규모다.
능(陵)이라면 당연히 세웠어야 할 입구의 "홍살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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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역이 전반적으로 좁고 길게 자리하고 있으며 석물도 사람의 키 정도로 별로 크지 않다.
혼유석(魂遊石)앞에 장명등(長明燈)이 없다.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르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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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장 안의 봉분은 병풍석없이 난간석만 둘러졌고 난간석에는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신"(十二支神)의 12자가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 있다.
현재 보이는 정자각은 1995년 재건된 것이다.
봉분 주위에 네 마리의 석호와 네 마리의 석양이 교대로 배치되어 능을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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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주석(望柱石)은 다른 왕릉보다 작게 만들어졌는데 좌우 세호(細虎)가 특이하게 조각되어 있다.
"장명등"(長明燈)은 현재 터만 남아 있으며 조선 왕릉 1,600여 개의 석물 중
유일하게 "혜릉"(惠陵)의 "장명등"(長明燈)만 멸실된 상태다.
"무인석"(武人石)은 이목구비가 상당히 이국적으로 상당 부분을 코가 차지하는데
치아를 7개나 잔뜩 드러내놓고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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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석"(武人石)보다 약 10센티미터 작고 한 단 위에 서 있는 "문인석"(文人石)은
입을 꼭 다물었는데 주책없게 웃고 있는 무인(武人)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표정이라는 설명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