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를 단단히 잡고 한바탕 공부하라”
<5> 진소경 계임에게 보낸 대혜선사의 답장 ①-4
생명마저 버릴 각오로 공부하는데
무슨 부귀공명에 뜻이 있겠는가…
[본문] 왕왕 사대부들이 총명하고 영리한 것에 시달려서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다가 잠깐 동안 삿된 스승들에게 조용하게 앉아 있으라는 지도를 받아서 조금 힘이 덜 드는 것을 경험하고는 곧 그것으로서 만족함을 삼고 더 이상 미묘한 깨달음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만 묵묵히 있는 것으로서 궁극의 경지로 여깁니다. 나는 구업을 아끼지 아니하고 비판하여 이러한 폐단을 힘써 구제하려고 하였더니 요즘에 와서 조금씩 그것이 잘못된 줄을 아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바라노니 그대는 다만 의심을 깨뜨리지 못한 곳을 향하여 참구하십시오. 행주좌와에 놓아버리지 마시기를 빕니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물었습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화상이 말하였습니다. “없다(無)”라고 하였습니다. 이 한 글자는 곧 생사의 의심을 깨뜨리는 칼입니다. 이 칼의 칼자루는 다만 그 사람의 수중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손댈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자기 자신이 손을 대야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강설] 대혜선사는 반복해서 묵조선의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하여 선불교가 천하에 바르게 전파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화두를 드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사대부들이 묵조선에 빠져서 묵묵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까닭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조용하게 앉아 있는 것이 편안할지는 모르나 진정한 불법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간화선법의 요체는 화두를 열심히 드는데 있다. 그러므로 대혜선사는 특별히 이 무자화두를 열심히 들 것을 권한다. 이 <서장>이라는 간화선 지침서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도 선원에서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이 무자화두를 들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 무자화두는 생사의 의심을 깨트리는 칼자루다. 그리고 이 일은 오직 스스로 할 뿐이다. 결코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도 확실하게 밝혔다.
[본문] 만약 생명을 버린다면 비로소 저절로 손을 댈 수 있지만 만약 생명을 버리지 못한다면 또한 다만 의심을 깨뜨리지 못한 곳에서 밀어붙이십시오. 문득 저절로 생명을 한번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바야흐로 조용한 때가 곧 시끄러운 때며, 시끄러운 때가 곧 조용한 때며, 말할 때가 곧 묵묵할 때며, 묵묵할 때가 곧 말할 때임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아니해도 또한 자연히 삿된 스승의 어지럽게 말하는 것을 받아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지극히 빌고 지극히 빕니다.
[강설] 불교를 통해서 깨달음에 접근하는 길은 여러 가지 길이 있다. 그 중에서 화두를 들고 선을 참구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일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참선납자는 생명을 떼어놓고 공부한다고 하였다. 대혜선사도 “생명을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생명마저도 버릴 각오로 공부하는데 무슨 부귀공명에 뜻이 있겠는가? 만약 출가인으로서, 또는 참선납자로서 부귀공명에 추호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선사도 아니며 수좌도 아니다.
|
|
삽화=배종훈 |
일찍이 황벽희운(黃檗希運, ?~850) 선사는 공부인을 위해서 이런 시를 남겼다.
번뇌를 멀리 벗어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니(塵勞逈脫事非常)
화두를 단단히 잡고 한바탕 공부할지어다(緊把繩頭做一場)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不是一番寒徹骨)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爭得梅花撲鼻香)
그렇다. 간화선에서 설정한 깨달음의 경지는 반드시 생사를 돌아보지 않는 이와 같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만약 이와 같은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폐인으로 인생을 마치게 된다.
[출처 : 불교신문 2013.01.05]
☞'무비스님의 서장 강설' 목차 바로가기☜
첫댓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