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네이든’(원제 x +
y, 2014 영국)을 보고…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 안에서 특별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받으면 나는 특별해진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나의 특별함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돌보고 아껴야 한다.
-영화 ‘네이든’ 중에서
천재적인 수학적 능력을 가졌지만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던 남자아이가 있다. 그의 이름은 ‘네이든 엘리스’다.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자동차 사고를 목격하고 더 큰 정신적인 충격을 받는다. 유일하게 자신과 소통하던 분이셨던 아버지가 죽은 뒤에 그는 더욱 더 자폐적인 증상을 보인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을 더욱 살리기 위해 엄마는 그를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자신과 비슷하게 어린 시절 천재였던 수학선생님을 만난다. 그 선생님도 성격장애로 고통 중이다. 그 성격장애는 몸이 굳어져 오는 병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약물에 의지하여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나 수학을 배우고 가르친다. 그리고 7년 후에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 출전한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것이다.
거기서 네이든은 여러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리고 그 관계들 속에서 자신의 심적 고통을 이기면서 사람을 사귀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중국인 여학생 ‘장메이’다. 그들은 함께 공부도 하고 시장에도 간다. 장메이는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영재가 되어야 했던 학생이다. 어린 나이에 온 가족의 기대를 지고 산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닌가 보다. 그렇게 네이든과 장메이는 영국의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 출전한다.
시험 전날 네이든의 집에 머물던 장메이는 시험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잠을 못 이룬다. 그러다가 네이든의 방에 들어와 이야기를 하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그런데 네이든은 아직 한 번도 여학생이든 남학생이든 손을 잡아본 적이 없으며, 그렇게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둘은 잠이 든다. 그런데 아침에 다른 여학생의 시기심으로 장메이의 삼촌은 네이든 곁에 잠들어 있는 장메이를 보고 오해를 한다. 가문의 수치라는 것이다. 그 심한 책망을 들은 장메이는 결국 올림피아드대회에 출전을 포기한다.
네이든은 더욱 크게 위축되어 시험장에 들어갔으나 그를 짓누르는 기억들로 인하여 힘들어 한다. 그런 가운데 장메이와의 대화가 생각이 나서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안 된다는 확신이 들어 그는 시험장을 뛰쳐나온다. 여섯 명의 영국 대표 중 한 사람이던 그를 만류하려고 영국 대표를 관리하는 선생님이 쫓아 나오지만 네이든의 수학선생님은 그 길을 막아버리고 네이든으로 하여금 자신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네이든과 그의 어머니는 장메이를 찾으러 가야 한다는 네이든의 생각에 공감을 한다. 그리고 모자는 드디어 손을 잡고 함께 자동차에 동석하여 공동의 목표인 장메이를 찾아 나선다. 네이든은 수학 공식으로 사랑을 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학 공부를 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함수관계를 풀어내는 법을 드디어 이해한다.
수학 천재 자폐아였던 네이든에게 늘 웃음을 안겨주며 그를 평안하게 한 아버지의 사랑은 어린 네이든의 유일한 소통이었다. 그리고 그 소통의 언어는 웃음이었다. 모든 것은 수학이라는 아름다운 언어를 통해서 이해되고 소통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음악도 수학을 통해 이해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었다. 그것이 수학의 천재들이 만물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에 있어서는 웃음이야말로 서로를 이해하고 대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방에게 있는 특별한 것을 발견한 사람이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이루기에는 너무 개인적인 관계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개인적인 관계가 매우 소중하다.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의 정신병적 요인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자폐증의 요인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상처를 가지고 있기에 자신을 보호하려고 두꺼운 껍질 속으로 들어가버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게 우리는 외로워하고 살아간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법을 잊어버리고, 누군가에게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을 감아버리고. 너무 심한 경쟁 속에서, 너무 과중한 짐을 지고 살아가느라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목회자로서 교회를 섬기면서 나는 가급적 많은 사람들을 만나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틀린 것은 아니나 나는 지금 사랑이 아닌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다. 사람이 아닌 사역을 위해 애쓰다 보니 어느 새 나의 내면이 고갈된 것을 느낀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끊어지지 아니한다. 그러나 방언도 그치고 예언도 폐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을 세우는 일을 하면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된다. 이제 다시 길을 바로잡아야겠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그 초심은 “한 사람의 다리 저는 영혼이라도 보내 주시면 그 영혼을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는 것이었다.
어느 새 나는 병든 사람을 위한 의사가 아니라 나의 이론과 소신이 옳음을 증명해 줄 사람들을 찾고 있는 의사가 되었다! 너무 잘못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