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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피바람 결혼잔치>의 줄거리:
피바람이라니요? 세상에서 가장 끔직한 말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반면에 결혼잔치란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을 연상케하는 단어입니다. 가장 끔직한 단어와 가장 큰 기쁨의 단어가 한 데 붙었습니다. 피바람이 부는 한이 있어도 결혼잔치를 반드시 감행하려는 의지가 참으로 무섭고 처절합니다.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피바람 결혼잔치
(마22:1-10)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피바람 결혼잔치>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참으로 섬뜩한 제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을 내용 그대로 요약한 것이 이 제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따로 창의적으로 만들어낸 제목이 아니고 그냥 오늘은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 거예요.
그런데 ‘피바람’이라는 말, 이거 참 끔찍한 말입니다.
역사를 볼 때, 왕조나 왕이 바뀌면서 일어나는 숙청작업, 공산국가에서 생기는 숙청작업 이런 게 아닌 다음에는 도대체 피바람이 왜 결혼잔치라는 단어와 맞붙어 나오는 것입니까?
더 끔찍하고 섬뜩한 것은 결혼잔치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큰 기쁨을 표현하는 최고의 단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장소 중에서 영순위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섬뜩합니다.
참으로 끔찍한 내용이 본문에 나오고 있어요.
결혼잔치를 베푸는 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들이 결혼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결혼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사람들을 초청하게 되는데, 그 초청을 거부하게 되요.
그런데 참 특이한 이야기는 결혼잔치에 오라는 초청을 알리는 그 왕의 종들을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모욕하고 죽이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안 갈 거면 안 간다고 하면 될 것 아닙니까, 혹 말하기 민망하면 말하지 않고 안 가면 되는 건데, 당시 사회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왜 모욕하고 죽이느냐 이거예요.
그리고 또 왕의 반응도 너무나 과장되어 있는 듯합니다.
벌을 주고 싶으면 당사자들만 벌을 주면 되지, 동네를 불살라 버리는 겁니다.
너무 이야기가 비약이 심하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선을 넘어가고, 표현들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러셨겠습니까? 과장된 표현을 쓰고, 전달하시려는 내용의 효과를 극대화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를 과장되게 표현하셨겠습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피바람이 결혼잔치라고 하는 단어에 붙을 수밖에 없는 내막이 있다는 겁니다.
그 내막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는 거예요.
자, 여러분!
주님께서 천국을, 아들이 결혼적령기에 도달해서 아주 아름답고 마음에 드는 며느리감을 얻어서 결혼잔치를 벌이게 된 왕의 마음에 비유를 하는 겁니다.
천국이 왜 이렇게 결혼잔치에 비유가 될까요?
왕에게 기쁨이 되는 것 중에 아들이 최고이지요, 그런데 그 아들이 잘 성장해서 아름다운 색시를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기쁨에 기쁨을 더하는 거죠.
이 세상에서 사람이 기쁠 수 있는 중에 최고의 기쁨을 묘사한 겁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 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을 전하고 듣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천국에서 이런 기쁨이 있다는 겁니다.
이 땅 위에서 아들의 혼인잔치로만 비유될 수 있는 그러한 기쁨이 하늘에 있다는 거예요.
그 하늘의 기쁨이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기쁨입니다.
우리 앞에서 봤어요, 반복해서 나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을 향하여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기쁨이 있다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간에 천국에서 기쁨이 있는데, 이 기쁨이라는 것은 어떨 때 생기는 겁니까?
기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생깁니다.
욕구가 충족되어서 순간이나마 (기쁨이 순간에 지나지 않더라도) 마음이 더 바랄 게 없는 상태가 될 때, 그러니까 욕구가 충족된다는 것은 빈 마음의 주머니가 채워진다는 얘기죠.
빈 마음의 주머니가 채워져서 마음이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태로 충만해질 때,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이때가 기쁨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기쁨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나님아버지가 채워지고 있다는 거예요, 아들하나님이 채워지고 있다는 겁니다.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입니까?
아버지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주님을 향한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 아들로 마음이 채워지고 계신다는 얘깁니다.
또, 주님의 기쁨은 아버지로 마음이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죠.
자, 아버지가 곧 아들하나님은 아닙니다, 두 분이 서로 다른 위격이 있어요.
그런데 채워집니다, 채워지는 내용이 바로 성령이라는 거예요.
이런 거죠, 제가 제 아들을 봅니다, 아들은 제 바깥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아들이 있고, 내 바깥에 있는 실제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실제 아들을 대하는 것 같아도 실지로는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아들을 대하게 돼요.
그래서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아들과 밖에 있는 아들이 일치돼서, 정말 내 마음에 충만해질 때 기쁨이 되는 거죠.
자, 하나님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바라보십니다.
아버지 바깥에 예수님이 계세요, 그런데 그 바깥에 계시는 예수님이 마음 안에도 들어있습니다, 그 마음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이 성령님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도 예수님 바깥에 하나님이 계세요, 아버지하나님은 예수님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아버지하나님이 예수님의 마음에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님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아버지가 성령님이라는 겁니다.
성령을 통한 교통이라는 게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충만한 기쁨의 자리에 있을 때 아버지하나님과 아들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이 기쁨을 우리만 누릴 수가 있느냐? 이 기쁨에 참여할 인격체를 만들자!’ 해서 만들어진 사역이 창조의 사역입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진 이유, 인간 때문에 만들어진 거예요.
인간이 피조세계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이 피조세계의 중심에 인간이 왜 만들어졌느냐?
애초에 만들어진 이유가 바로 하늘에 있는 아버지하나님과 아들하나님 간에 생긴 그 기쁨에 동참하도록 만든 겁니다.
왜냐하면 기쁨이라는 것은 동참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기쁨이 커지는 것이니까.
아무리 기쁜 일이 생겼더라도 동참하는 자가 없으면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이게 참 희한한 거예요,
결혼식을 하는데, 우리나라 문화권 안에서 결혼식을 둘만 외롭게 올린다, 이건 기쁨이 아니라 쓸쓸한 게 돼요, 결혼을 하기는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기쁨이 슬픔의 먹구름에 덮여버릴 수가 있습니다.
천애고아가 서울대학을 수석합격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합격을 축하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기쁨의 날이 슬픔이 돼버리는 거예요, 바로 그런 심정이 되었다는 얘기에요.
이 세상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피조물이 존재하는 이유는 원래가 하나님아버지와 아들하나님 간에 성령을 통하여 생긴 충만한 기쁨에 참여시키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 기쁨을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어떻게 비유적으로 표현하시느냐 하면 천국에 있는 기쁨을 표현할 길은 왕이 아들 혼인시킬 때 혼인잔치에서 느끼는 기쁨으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게 피바람의 결혼잔치가 되어버립니까?
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생기고 심판하는 일이 생겨버렸습니까?
인간이 만들어진 이유가 천국에서 지금도 진행되고 생성되어지고 발생하고 있는 그 하나님과의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도모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보니까, 그 결혼잔치의 초청에 거절하는 이유가 한 사람은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사업하러 갔다는 거예요.
한 마디로 내가 생겨난 이유는 그 천국 기쁨에 참여하라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 나름대로 내 생활영역과 내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영역을 갖고 있는 거예요.
밭에 가서 일하고, 내 사업하고, 내 가족과 내 직장 등 내 영역을 따로 갖는 겁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하늘에서 일어난 기쁨에 참여하는 일 말고, 따로 자기 나름대로의 기쁨의 영역을 만들어 살 수 있는 공간, 시간은 아예 존재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따로 이 세상에서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내 인생의 꽃을 피우면서 내 나름대로의 기쁨의 영역을 갖게 된다는 것은 내가 이 땅에 존재하게 되는 존재이유를 내 스스로 말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내가 내 사업하면서 기쁘고, 내 자식 키우면서 기쁘다는 이런 말들은 이제껏 같은 맥락의 말씀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마는 이 땅 위에서는 아예 성립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보세요, 상식적으로는 밭에 일하러 가고 사업하러 가고, 그럴 수 있어요.
그래서 결혼식에 참여하지 못할 수 있지요, 당연히.
그리고 이 사람들이 지금 오락하러 가고 도박하러 가고 빠찡고 하러 갔습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한가하게 뒹굴 거리면서 안 간 게 아니라, 밭에 일하러 가고 사업하러 갔다는 거예요.
지극히 정상적인 생활패턴이 유지되고 있는 거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한 이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반역이라는 겁니다.
용납할 수 없는 거예요,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내 나름대로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이미 성립된 기쁨, 이미 존재하고 발생한 그 기쁨에 참여하도록 만든 것이지, 내 기쁨을 발생시키도록 살라고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어요,
‘아니 그러면 사업하는 사람은 어찌 할 것이며, 밭에 나가 일을 해야 될 사람은 어찌 할 것이냐? 이 세상의 삶의 의미가 뭐냐? 가정은 왜 주신 것이며, 직장은 무엇이고, 이 인생살이가 다 뭐냐?’
그게 뭔 줄 아십니까? 결혼식 피로연의 코스요리예요.
오늘 본문에 나온 대로 우리는 사업하러 갈 때 직장에 갈 때 마음의 무장을 하고 갑니다.
‘내가 가서 이를 악물고 돈을 벌어야지’ ‘오늘 이 계약을 꼭 성사시켜야지’ 이런 의무감이나 책임감, 부담감, 걱정, 이런 걸 안고 갑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부터 내 기쁨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야 되니까, 내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성취를 이루어내야 되니까…
그런데 이렇게 해야만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다음 시간에 얘기를 하겠습니다마는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요한 호이징거가 말한 것 중에서 ‘호모 루덴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호모 루덴스’ ‘인간은 노는 존재다’라는 거예요.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탁월한 통찰력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인간은 노는 존재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치에 참여하도록 초청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잔치를 누리면 되는 거지요.
그러면 직장생활은 뭐냐? 이 질문에 대답을 안 하고 있지 않느냐?
그건 뭐냐 하면요, 일단 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아버지와 아들하나님 간의 기쁨에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에 대해 마음이 죽으면서 마음이 천국으로 올라가서 기쁨을 함께 공유하게 됩니다.
그 기쁨에 참여하게 될 때, 성령께서 그 기쁨을 내 기쁨으로 마음에 심어주십니다.
일단 이렇게 천국의 기쁨을 갖게 되잖아요?
결혼식에 참여하면서 그 아버지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정말 피로연의 코스요리가 나오는 것처럼 직장생활, 가정생활, 부부생활, 사회생활, 모든 것이 다 코스요리가 되는 거예요.
그냥 즐기면 되는 것으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하늘에서 이미 벌어진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는 자들에게는 직장생활이 의무요, 부담이요, 돈을 벌어야 되는 책임의 활동이 아닙니다.
그건 그냥 코스요리 중에 하나예요.
날마다 그것을 즐기고 만끽할 수 있도록 되어 진다 이겁니다.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해지면 이 세상 모든 일들이 코스요리를 즐기는 것처럼 즐길 수 있게끔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늘의 기쁨으로 내 마음을 채워보기 전까지는 말하지 마세요.
그렇게 해보지 않았으면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늘의 기쁨으로 채워지면 이상하게 설교하는 자는 설교가 부담이 아니고, 코스요리를 먹는 놀이가 되는 것이고, 자식을 키우는 것도 놀이가 되고, 아내와 남편이 만나도 놀이가 되고, 모든 게 호이징거가 말한 것처럼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미 하늘의 기쁨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이게 기가 막힌 거예요, 여러분!
그런데 자꾸 코스요리로 주어져서 즐기기만 하면 될 직장생활을 내가 따로 직장 안에서 기쁨을 내 나름대로 뽑아내겠다고 하다 보니까 직장이 부담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사업이 부담이 되어버리고, 자식이 부담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냥 자식으로 기뻐하려고 하지 말고 이미 하늘에서 생긴 기쁨으로 나를 채우고 나면, 그러면 자식은 코스요리예요, 자식과의 관계가 이 세상 기준으로 볼 때, 못난 자식이건 잘난 자식이건,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웃게 되는 겁니다.
세상 기준으로 못난 자식으로 보이는 자식을 보고 코스요리를 즐기고 있는 동안에 그 자식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을 그 자식을 통해서 해나가실 거예요.
왜 태어나셨어요?
잔치에 참여하라고 태어나신 거예요, 잔치에 참여하라고.
다른 이유가 없어요, 뭐 대단한 일을 내가 이루라고 태어난 게 아니에요.
그리고 그저 잔치에서 내가 맛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나가실 거예요, 내가 이루는 게 아니라.
그러므로 피바람 결혼잔치가 이제 다시는 없게 하십시다.
어떻게 없애요?
주님의 십자가가 관건입니다.
십자가로 이 세상에서 내가 따로 갖고 있는 모든 영역에서 죽고, 내 마음은 하늘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기쁨을 내 기쁨으로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미 내가 마음에 채워야 될 기쁨은 다 생산되어지고 있습니다.
그저 그 기쁨 자체를 십자가 붙잡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내 마음에 채우기만 하면 됩니다.
하늘의 기쁨을 일단 채우면 이 세상의 시간을 따라 내게 주어지는 상황과 사건은 코스요리일 뿐인 것을 알고 즐기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