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쌈
조창규
나는 쌈을 즐깁니다
재료에 대한 나만의 식견도 있죠
동굴 속의 어둠은 눅눅한 김 같아서 등불에 살짝 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낱장으로 싸먹는 것들은 싱겁죠
강된장, 과카몰리* 등 다양한 <쌈장 개발의 기원>
봄철, 입맛이 풀릴 때
나는 구멍이 송송, 뚫린 배춧잎을 새로운 쌈장에 찍어먹습니다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
어떤 배설물은 때로 훌륭한 식재료가 되죠
두꺼운 것들은 싸먹기 곤란합니다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에도 누명과 모함은 숨겨있죠
적에게 붙잡히면 품속의 기밀을 구겨 한입에 삼켜요
무덤까지 싸들고 가는 비밀도 있습니다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 난 방충망은 경계가 소홀합니다
누군가 달의 뒷장에 몰래 싸놓은 알들
나는 긴 혀로 나방을 돌돌 말아먹는 두꺼비를 증인으로 세웁니다
사각사각, 저 달을 갉아먹는 애벌레들
수줍은 달을 보쌈해간 개기월식
삼킬 수 없는 과욕은 역류되기도 하죠
보름달을 훔쳤다는 나의 누명이 시간의 부분식으로 벗겨지고 있습니다
* 아보카도를 으깬 것에 양파, 토마토, 고추 등을 섞어 만든 멕시코식 쌈장
[심사평] 자연의 변화와 삼투....파노라마처럼 전개… 시인의 탐구 돋보여
본심의 심사 대상이 된 작품들을 읽으면서, 이 시들을 쓸 때 이 응모자들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어떤 간절한 욕구가 있었는가, 아니면 어떤 경로로 시를 쓰는 과정에 입문하게 되어 습관처럼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질문해 보고 싶었다. 그만큼 장식과 조립에 치중한 시가 많았으며 재주나 재치에 기댄 시가 많았다. 응모작 전체가 고른 수준을 갖춘 예도 드물었다.
김태형의 ‘수상한 식인’ 외 3편은 일종의 은유 놀이로서 ‘노르웨이’라는 거처를 시에 등장시켜 자유자재로 그 거처의 경계를 입술이나 국경으로 늘려 잡으며 유희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집을 은유해서 ‘노르웨이’ 같은 이름으로 비유해 불러야만 할 것 같지 않은가. 시가 재미있는 지점들을 품고 있었지만 함께 응모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같은 시들에는 이 시를 쓴 시인의 역량을 의심케 만드는 거친 일면이 있었다.
김상도의 ‘졸립다가 마른’ 외 4편은 거미줄에 걸린 줄도 모르는 곤충처럼, 우리의 일요일 같은 휴식이나 평화, 그 뒤에 도사린 위태로움을 슬며시 혹은 경쾌하게 던지는 솜씨가 좋았다. 그런 상황을 ‘졸립다가 마르는’ 같은 형용 어귀로 눙쳐 버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뒤에 붙은 4편의 언어 실험적인 시들이나 나열, 조립의 시들이 이 시의 감동을 반감시켰다.
‘쌈’ 외 4편은 ‘쌈’을 ‘동굴 속의 어둠’,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난 방충망’, ‘달의 뒷장’, ‘긴 혀’, ‘보쌈’으로 비유하고, 이 비유에 어울리는 쌈장을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으로 만들고 난 다음 이 모든 사물과 자연 현상을 흡입하는 나를 내세워 자연의 아름다운 변화와 삼투, 세월과 일식을 파노라마처럼 전개하고 있었다. 유쾌한 유머가 있고, 축소와 확장이 화자의 입을 통해 전개되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시 속의 ‘나’는 쌈을 멋지게 비유해 낼 수 있지만, 과연 이러한 ‘쌈’의 현상들이 시적 화자의 감각들을 통과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응모작들이 각각 다른 경향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5편 모두가 그 나름의 탐구가 있는 점을 높이 사서 ‘쌈’을 당선작으로 선하는데 합의했다.
- 심사위원 황현산 문학평론가·김혜순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당선 소감>
나는 타인의 재능에 절망한 적 있다. 비교와 차이는 열등감을 낳기 쉬워서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무고한 남을 원망하거나 시기하기 쉽다. 어쩌면 나는 남보다 내 자신을 더 미워할까봐 두려웠는지 모른다.
10년 동안 나는 내 삶의 혁명을 꿈꿔왔다. 그러나 삶을 견디는 것은 힘들었고,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내게 재능은 물론이고 운도 따르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실패한 혁명가에게 시(詩)가 찾아왔다. 한 발짝만 뒤로 물러나면 벼랑인 것을…. 당선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쓴다면 내 양심을 속이는 것.
가난한 꿈으로 사치스러웠던 날들. 좌절로 괴로웠을 때,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고 느낀 순간은 당신을 만날 때였다. 여느 날과 똑같은 오늘, 온몸으로 맞는 눈이 참 따뜻하다.
저마다의 간절함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그래도 내 인생이 무모한 반란으로 끝나지 않아 다행이다.
종교와 예술 사이에서 갈등한 저를 잡아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박주택 선생님, 이원 선생님, 마경덕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시인이 되었습니다.
선규, 현준, 효주, 동기, 소중한 친구들…, 시인이 되는 걸 꼭 보고 싶다고 한 창호 형, 암이 빨리 낫기를 기도할게요. 멀리 떠나온 경희문예창작단에도 좋은 소식이 되기를….
황현산, 김혜순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리며 끝으로 하늘에 계신 친어머니와도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1980년 전남 여수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불안한 상속
조창규
초승달은 지구의 공전이 깎아 놓은 손톱
할아버지는 매해 굴속에서 자식들을 낳았다
그의 핏줄을 따라 가계의 불행은 대물림되었다
갑상선암이나 탈모 같은 불안한 의혹들이
쑥쑥, 나의 안쪽에서 자랐다
볼록한 허물은 누군가 잠시 머물다간 집
나는 긴 장화 속에 새알을 숨기고 입구를 나뭇가지로 덮어 놓는다
알 속에 구겨진 부리는 바깥을 여는 열쇠
아비의 출신은 자식에게 신분증이었다
지구에도 이상한 상속이 있다
붉은 사막에 내리는 하얀 폭설
대代가 끊기지 않는 지진, 전쟁
떠도는 계절의 종자들은 어느 기후의 혈통을 잇고 있다
아프리카의 겨울이 추울까, 시베리아의 여름이 더울까
나는 지구의 공전 방향과 반대로 도는 사람
죽은 할아버지는 내게 땅꾼인 아버지를 물려주었다
부어오른 목에서 부화한 새의 울음
1월에 낙엽이 지는 적도의 나무들
깨진 유리창을 X자 청테이프가 붙들고 있는데,
알 껍질만 버려져 있는 불안한 그늘
삐-익, 나는 손가락 휘파람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뱀들을 불러 모은다
*2014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던 작품 <불안한 상속>
첫댓글 조창규란 분은 2014년 조선일보 최종심에 올랐다가 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드디어 당선이 됐군요.
2014년에는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을까...
제 개인적인 생각엔 2014년 조선일보 최종심에 올랐던 <불안한 상속>이 오히려 '쌈'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