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調絃) /최부련
썩어 문드러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 황폐함의 속도는 재빠르다
속내를 드려내기엔 가면이 너무 무겁고
날기 위해선 상실해야 할 감각이 많다
조율 되지 않은 이성
분열된 것들은 표정부터 달라서
팽팽하지 못한 신경을 조장한다
알 수 없는 신앙이 자꾸 늘어나고
어슬픈 처방이 번식한다
교란되어 나오는 소리들
속내를 무시하고 터지는 것들은 전부 통감이다
와해된 언어들이 산산히 부서진다
깨어진 조각으로 흩어질 때
긴장은 오히려 좁혀질까
환청을 잠재우려면 어떤 것을 역류해야 할까
그만큼의 간격을 남겨둬야 할까
고통 속에 감춰진 환희는
비밀을 숨겨야할 곳을 찾아 헤맨다
환상은 이미 방향을 상실했다
어긋난 조각은 비틀어지기에
이탈하는 것은 스스로 정체되어 간다
드러내고 싶은 엉킴이었을까
그것은 구불구불 하고 얼룩졌다
내 자신이 가리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꿈을 꾼다면 그건 분열로 다가가는 것이고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망상이다
시간이 흐르면 시간 속의 잔여물은 줄어들게 될까
깨지고 흩어진 것은 언제나 기억뿐이다
비밀번호의 태도 /최부련
번호를 공개하고 비밀은 감출까
비밀은 공개하고 번호를 숨길까
드러낸 것들은 오히려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나지 않게 하지
감춰서 닫혀 버린 것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아
발버둥 치거나 조바심을 드러낼 필요가 없으니까
무엇을 감당해야 할 지 모를 때는 기척을 남기지 않아야 해
감기는 것과 잠기는 것의 간격은 폐쇄와 채움의 차이야
소환되지 않으면 진짜 비밀이 되는 거야
엉켜버린 번호가 망각을 발효시키는 거지
기록만이 잠기는 순간을 감싸줄 수 있을 거야
문이 잠긴 것인지 닫힌 것인지
경계의 이쪽인지 바깥인지 알 수 없을 땐
비밀은 비밀대로 번호는 번호끼리 나열해야 해
머뭇거림은 정체성을 강탈당하게 되고
비밀을 감싼 규제가 풀려도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거지
혹시 나이 탓을 하려거든
하늘로 들어가는 비밀번호를 찾아야 해
허공에 문을 만들고 수많은 얼굴들을 떠올리면
공기를 떠도는 외침들이 들려올 거야
그러니 분출하지 못한 세포들이 드러낸 것은 망각이 아니야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의 차이를 궁금해 할 필요는 없어
반동하는 궁금증이 결속을 응시할 때
압박을 벗어난 자유가 디아스포라*를 닮아가는 거지
비밀은 숨기고 번호를 드러낼까
번호를 숨기고 비밀은 공개할까
아니면 나를 닫고 나 아닌 것을 마침내 열어볼까
*씨앗을 뿌림, 흩어짐, 흩어져 사는 자, 흩어진 곳이란 뜻.
근시의 목적/최부련
가장 사적인 것이 먼저다
양면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지극히도 주관적이라
자동으로 촉각을 내세운다 기어코
좁혀져 오는 섬세함은 접촉을 차단한다
극심한 고립일까 세심한 섬망일까
망각의 조각은 항시 굴절되어 다가왔다
눈에서 멀다고 배제할 필요는 없다
가까운 곳의 정밀도는 차라리 탐닉이라
근원을 차단할 막이 필요하다
굴절되어 다가오는 것들은 늘 고개를 숙이고
혼란을 감당할 사연을 위장 한다
굴곡으로 맺어진 것의 분출은 막막하다
거리를 둔 예속이다
종적을 차단한 전율의 흐름이다
부풀어오는 환상은 항상 복합적으로 다가오고
선명하지 않은 확신을 불러온다
희미한 교착은 시야의 혼선을 불러올 뿐.
정밀함은 선명한 결정을 유도한다
망설임을 차단한 집중
강렬한 눈은 섬세하여 핵심을 두둔한다
오히려 절제가 필요한 반사이다
초점은 단순하게 사유하며 깊어진다
반사되어 나오는 빛의 모습은 팽팽히
굳이 한 갈래만 선호한다
가까운 곳에서 섭렵되는 안목의 리듬이
광채를 띠고 시각을 조절한다
관측을 통해 다가오는 것은 지극한 내공뿐
결정을 보류하는 현저한 발돋움이
먼 곳의 감각을 휴지하고
위안을 누적시킨다
야맹 /최부련
내 눈은 어둠을 좋아한다
붉은 어둠이 긴 터널을 통과한다
나에게 빠져드는 홀릭.
굴곡을 더욱 거칠게 하는 돋보기 속에서
눈부심은 색안경은 갈망한다
빛과 대립하는 어둠을 흡수하려 애쓴다
나를 바라보던 어둠의 시야는 적응을 위해 좁아지고
적응이 넘쳐나던 색깔들은
바닥으로 떨어져
사방을 분간하지 못한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안쪽인지 바깥쪽인지
불빛이 비쳐도 보이지 않은 적막은 어둠을 갈망한다
죽었으면 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보기 싫은 사람이 눈앞에 생생하게 와 있을 때
스스로 감아버리는 내 안구는 선천성이다
처음부터 빛은 중심을 당황하게 하고
중심은 어둠 앞에 와해되어 버린다
굴절을 유착시켜버리는 뻣뻣함이 속도를 지연시킨다
유혹을 하지 않는데도 휘청거리는 간극
순응하려던 갈증이 어둠의 뼈를 더듬는다
어둠만이 나를 위해 시각을 확장하는데
희뿌연 불빛으로 와 닿은 황백색 아래
식별 하지 못하는 안저는 밝은 곳을 다시 편애한다
굴복해 버린 적응
내가 유혹한 것은 변화였을까 안주였을까
고장 난 망막이 뿔뿔이 떨어져 나가려 할 때
분간이 안 되는 것은 불빛과 불편이다
당신 앞에만 있으면 하나도 안보여요
고상한 수식어를 모두 다 버리겠다
희미한 것은 나를 점점 흐리게 만들뿐
되감기는 빛과 색과 형태를 감지하기 위해
나의 중심은 계속 흔들리고만 있다
좁아진 시야에서 바라본 세상
그 속엔 내가 없다, 한 발짝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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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최부련
유아교육전공, 사회복지행정대학원 사회사엽전공.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 문화교양학 전공.
2017년 복숭아문학상 수필부문 최우수상 수상.
2022년 열린시학 봄호 시부문 신인상 수상.
2022년 시와편견, 포엠포엠(여름호 신작시) 시 발표.
2023년 월간문학바탕 ‘방지턱’ 지하선의 좋은 시 기재.
엄마를 닮은 복숭아 / 최부련 - 제12회 복숭아문학상 최우수
복사꽃이 환한 봄날 동구 밖 길에 엄마가 서 계신다. '엄마~'하고 부르며 달려가려는데 발이 꿈쩍 않는다. 엄마는 저 만치서 환한 얼굴로 웃기만 하신다. 그런 엄마의 미소가 꼭 복숭아를 닮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는 복숭아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복숭아 한 개를 깎으며 엄마 생각을 하고 또 한 개를 깎으며 눈물을 흘리며 그 달콤한 사랑을 씹는다.
어린 날 나는 복숭아 알레르기가 무척 심했다. 동네에서 유난히 똘똘한 아이로 불리던 나는 예민하여 병치레가 잦았다. 특히 세 살이 되던 해에는 입술과 목이 붓고 구토와 설사, 온 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오고 호흡곤란증세까지 왔다. 좋다는 민간요법은 듣지도 않고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축 쳐진 몸에 호흡 곤란 증세까지 왔다.
'유난히도 병약하더니 이렇게 죽는구나.' 한마디 내뱉고 문을 발로 차듯이 하고 나가버린 아버지는 그날 만취하여 돌아와 코를 골며 잠들었다. 엄마는 시체 같은 나를 안고 사방팔방 병원을 찾아다니며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논인지 밭인지, 진흙인지 강물인지도 분간 못하고 헤매셨다. 같은 자리를 뺑뺑 돌기도 하며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에 찔리기를 수십 번, 그렇게 헤매다 새벽녘에나 병원에 도착해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날 의사에게서 복숭아는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 어린것에게 복숭아 과즙을 먹여서 이렇게 됐다.'며 다 내 잘못이라며 엄마는 질책하며 한탄했다. 다들 내가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 육안으로 보면 분명 죽은 아이였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접한 복숭아를 아무 생각 없이 한 조각 목에 넘겼다. 그날 밤 엄마는 또, 흡사 미친 여인의 모습으로 논길인지 미나리 밭인지 분간도 못하고 오로지 나를 살리겠다는 일념하나로 달리셨다. 6남매나 되는 형제들 중에 엄마에게 나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복숭아 과수원을 하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돌아온 날, 온 몸이 가렵고 붉고 넓적넓적한 동전 크기의 두드러기가 온 몸에 올라왔다. 그 다음날까지 나는 학교도 가지 못하고 엄마 등에 업혀서 병원을 가야했다. 탱자 삶은 물이 좋다는 말을 듣고 어렵게 탱자를 구해 그 물에 목욕을 하게 했다. 신기하게도 탱자 물에 목욕을 하면 좋아졌다. 그로부터 우리 집 울타리는 탱자나무로 바뀌고, 이것저것 다양한 한약재와 음식에 대해 연구하시던 엄마는 어느새 나에 대해서는 명의가 되어 있었다.
집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친척들까지도 내가 있는 곳에서는 복숭아를 먹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복숭아 향이 너무 좋았고, 말랑말랑한 과육 한 조각 입 안 가득 채워 보는 게 소원이 되었다. 과일 가게에 진열이 된 복숭아를 먼발치에서 바라만 봐도 온몸이 근질근질 거렸고, 우연히 복숭아털을 만진 날은 입속부터 입 주면까지 온몸에 두드러기로 뒤 덮였다. 복숭아를 좋아하는 것과 달리 복숭아라는 과일과는 천적이라도 된 것처럼 살았다.
결혼 후, 어느 날 우연히 다른 이가 깎아주는 복숭아를 먹을 기회가 있었다. 복숭아를 보기만 해도 온몸이 가렵던 내가 복숭아를 먹었는데 아무런 증세가 나타나지 않아 너무나도 신기하여 고무장갑을 끼고 복숭아를 만져 보기도 했지만 그날 아무 일이 없었다. 체질이 변화되었을까 병원에서 수차례 알레르기 검사를 해봤지만 의사들도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환경과 상황에 의해 체질이 바뀔 수도 있다며 유발원인 물체를 멀리하라는 말만 강조했다. 어찌됐든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무엇보다 감사했다.
볼그레한 아이의 뺨 같은 사랑스런 빛깔의 복숭아를 엄마가 좋아한다는 것을 외가에서 처음 듣게 되었다. 복숭아를 너무 좋아해서 몇 군데 혼처 자리가 있었지만 엄마는 당당히 복숭아 과수원이 있는 아버지를 선택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때부터 넓은 평수의 복숭아밭을 가꿨고, 아버지가 친구에게 빚보증을 써준 대가로 지금은 남의 것이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 외가에서 나는 이전에 몰랐던 엄마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나 때문에 좋아하는 복숭아를 못 드시는 엄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건강하신 줄로만 알았던 엄마가 간암 말기로 병상에 누우셨다. 매일 복수를 빼는데도 엄마의 배는 더 볼록해져갔다. 아무것도 못 드시는데 그나마 복숭아 즙은 입에 대신다. 길어야 3개월이라는 의사의 말대로 엄마는 3개월 뒤에 우리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엄마는 나를 살렸지만, 나는 엄마를 살리지 못했다. 어떤 수를 쓸 재간이 없다. 엄마는 아픈 나를 업고 깜깜한 밤을 달려 나를 살렸는데, 나는 병상에 누운 엄마를 바라보며 우는 것이 전부였다. 빗물 같은 눈물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의사의 선전포고를 받은 날 엄마에게 '엄마 뭐 먹고 싶은 거 없어?'라는 말과 함께 내 눈에서는 눈물만 뚝뚝 떨어졌다. 내 눈물을 보시곤 '치료하면 낫는다.'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시던 엄마.
'복숭아 사 올게요.'하고 병실 문을 나설 때
"너 소싯적 복숭아 먹으면 안 된다고 할 때부터 엄마는 그 후로 복숭아는 입에도 안 댔어."
시장으로 달려가는 내내 나의 가슴은 먹먹했다. 복숭아를 한 아름 사가지고 왔지만, 엄마는 그 좋아하는 복숭아를 한조각도 삼키지 못했다. 입맛이 없다며 치료받고 나아지면 먹겠다며 고개를 돌리시는 모습이 엄마의 마지막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아직도 진흙의 늪에 빠진 줄도 모르고 가시덤불에 걸리고 찔리는 것도 모른 체 헤매던 엄마. 자식을 살리려는 그 마음하나로 그렇게 밤을 꼬박 세우신 강렬한 모정의 엄마가 남아 있다. 복숭아는 나에게 엄마의 젖 맛처럼 은은하고 포근한 맛이다. 당신이 가신 날 마지막 모습과도 무척이나 닮았던 황도를 나는 좋아한다. 그 단맛의 국물이 엄마가 흘린 눈물 같다.
좋아하는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무니 달콤한 과즙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앉은 자리에서 이제 서너 개쯤은 거뜬히 먹어도 내 몸에서 아무 증상이 나타나질 않는다. 돌아가신 엄마가 당신이 못 드시던 것까지 다 먹으라고 나에게 준 선물인 것 같아 눈물이 핑 돈다.
오늘따라 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