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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꽃과 산수유꼭이 활짝 핀 봄이다. 봄볕에 얼굴을 태우면 보던 님도 몰라보고 며느리도 나간다는 봄! 이른 새벽에 집을 나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동이 틀 무렵 길가에 피어 있는 개나리꽃을 보니, 어릴 적 시골집 울타리에 봄이면 어김없이 피던 꽃이 생각난다.
집을 나와 차를 운전하다 보면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자동차 경주대회를 하는 느낌이다. 사람의 목숨이란 세 푼은 하늘에 달려있고 칠 푼은 제 발걸음 옮기기 나름이라는데 왜들 저렇게 속력을 내는지,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다치고 차들도 여러 대가 파손된 모양인데 앞에서 가는 차나 뒤에서 오는 차나 속력을 내는 데는 무서울 정도이다. 아마 세 푼짜리 목숨만 믿고 운전들을 하는 것 같다.
규정 속도인 조심 운전을 하며 다섯 시간여를 달린 끝에 오늘의 목적지인 경남 합천군 율곡면[栗谷面]까지 왔다. 합천군은 우리 나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야산 국립공원이 있고 유명한 해인사[海印寺]와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보물인 반야사 원경왕사비, 월광사지. 삼층석탑 등, 우리 선조들의 얼이 서린 보물들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곳이다. 아울러 필자가 찾아가려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고향이며 그의 선친 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령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쌍림면을 지나 합천으로 들어가는 길에 너무 오랫동안 운전을 해 잠시 쉬려고 어느 마을 앞에 차을 세웠다. 양지바른 산 아래 어느 집 마당에서는 연세가 꽤 들어 보이는 노부부가 두꺼운 겨울옷 차림에 허리를 구부리고 큰 통에 볍씨를 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탐스런 복슬강아지 두어 마리가 어미젖을 빨며 놀고 있었다. 농어촌의 평화스런 모습이었고 참으로 행복해 보이는 노부부였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내면에는 말 못할 고민들이 있으리라. 요즘 시골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은 보이질 않고 거의 대부분이 노인들뿐이며, 지금 일을 하고 있는 노부부의 집도 그런 것처럼 보인다. 원칙으로 따진다면 벌써 일손을 놓고 손자들 재롱 속에 입으로나 거들어 주어야 될 나이인데 귀엽게 키워놓은 자식들은 저희들 살기 바빠 외지로 나갔고, 혹 있다해도 가정은 주객이 전도되었다.
주객전도란 무엇인가. 옛날에는 갓 시집온 며느리가 시어머니로부터 살림을 배울 때 장 담그고 빨래하는 것으로부터 조상님들 제삿상 차리는 법까지 배워 집안을 지켰다. 하지만 지금은 세월이 변해 큰소리 쳤던 시어머니들은 신식 며느리에게 장 담그고 살림하는 법 대신 냉장고며 밥솥이며 세탁기 등 전기제품을 다룰 줄 몰라 핀잔을 들으며 살고 있다. 또 이런저런 돈벌이로 아침 일찍 집을 나간 며느리들 대신 하루 종일 아이보며 집안 일까지 하고 있다. 며느리는 조금 낮은 곳에서 데려와야 한다는데 요즘은 너무 잘 배우고 많이 배워서 시어머니들이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다. 이래서 아침마다 며느리의 얼굴이 흐렸는지 맑았는지 표정을 살펴보는 일도 있을 지경이다.
지금 앞에 보이는 노부부도 도시로 산 아들 딸들을 찾아 같이 살려고 해도 며느리들의 냉랭한 눈꼴이 보기 싫어 일은 고되지만 농사를 지으며 차라리 마음 편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노인들이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 주린 배를 참아가며 살아왔으며 세월이 좋아진 지금도 농사 지을 자식들이 없어 끝까지 고생을 하고 있는 우리네 모든 부모들이 생각난다. 이대로 가다가는 농사 지을 사람이 없어 나라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세월이 좋아진 요즘, 노래를 잘 부르거나 바둑을 잘 두거나 무슨무슨 일 하나만 잘 해도 인간문화재니 또는 국가에 공을 세웠다느니 하며 훈장이 나오는데, 백성을 먹여 살리는 농민들은 훈장은 커녕 농산물 하나 제값 못 받고 있으니 누가 농사 일을 하겠는가.
=힘든 농사일과 고생이 많았던 우리네 조상님들=
우리네 부모들! 얼마나 고생이 많았던 분들인가, 세상에 태어나 나이 열서너 살이 되면 농사일을 배우기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일손을 놓지 못했던 우리 부모와 조상들.......! 농사란 어떤 일인가. 일을 해보지 않은 자들이나 양반의 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힘이 여간 드는 게 아니다. 봄에 못자리부터 시작하여 여름내 가꾸고 가을 추수까지 일을 하는데, 여름 일은 차마 입으로는 표현을 못 하는 것이다. 뜨거운 여름철 아침 동 트기 전에 일어나 이슬에 채이며 논에 나가 모를 심고 나면 이내 곧 보리 타작을 한다. 그것이 끝날 때면 두세 벌 논매기를 시작하매 힘줄 솟은 종아리는 거머리에 뜯기고 발자욱을 옮길 때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논바닥의 뜨거운 열기는 숨통을 콱콱 막는데다 흐르는 땀은 눈앞을 가린다. 벼끝에 눈을 찔리며 낫끝에 손 베이고 호미끝에 손 찍히며 독사에 물려가며 일을 한다. 불볕에 검게 탄 나머지 벌겋게 일어버린 얼굴과 목덜미 그리고 눈동자는 벌겋게 충혈된다. 게다가 저녁이면 모기와 싸우다 잠자리에 들고 다음날도 또다시 일어나 일터로 나가니, 억새풀에 종아리를 베어가며 풀독에 진무르고 무좀에 고생하고 밭일 논일을 하되 내일이면 늦을세라 저녁 해가 질 때까지 해도 무슨 일이 그리 많은지 손에서 떠나질 않고 끝없이 연속되는 일뿐이다. 땅거미가 진 뒤에야 꼴짐지고 돌아와 저녁이라야 죽 한그릇 떠먹고는 피곤한 몸으로 쓰러지듯 잠자리에 들면, 온 삭신이 쑤셔대어 앓는 소리 신음 소리를 끙끙거리다 곯아떨어진다.
다음날 아침이면 또다시 천근 같은 몸을 일으켜 급한 일부터 순서대로 찾아하며 이러다 절기가 바뀌어 팔월이 되면 처서와 백로 사이에 조상 묘 벌초하는 것을 잊지 않고 정성들여 낫질하니 그래도 믿는 것은 조상 묘 음덕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여름은 가고 가을걷이할 때가 되니 또다시 바빠져 온 식구 나서도 열 몸이 부족하고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하니 코피를 쏟는다. 이렇게 해서 가을 추수가 끝나면 지게질에 시퍼렇게 멍든 등허리와 낫질에 다쳤던 상처들을 긁적이며 겨울 땔나무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 일은 또 얼마나 힘든가. 삶에 지쳐 고달프고 고달펏던 우리 조상들은 두 다리가 쓰러질 때까지 일 만 계속하다가 죽어서야 일손을 놓았다. 죽고 나서 염[殮]을 하려고 보면 온몸은 장작개비 같고 전체가 흉터뿐이니,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일들을 하였던가. 우리 부모들과 조상님들!
그들은 옛날에 물이 많고 땅이 기름지며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곳에 모여들었다. 마을마다 각각의 성씨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터를 잡고 하늘이 내려주신 농사를 업으로 삼아 고달프나마 삼강오륜과 육례[六禮]를 존중하며 대대로 뿌리를 내려 살았던 것이다. 힘든 일을 하면서도 이웃간에 서로서로 도와가며 살았고, 보리개떡이나 수제비국을 끓여도 별미음식이라고 나눠 먹고 콩국을 해서 동네 잔치도 하며, 강아지가 나와도 앞뒷집 차례대로 나눠주고, 그러다가 어느 집에 초상이 나면 자기 집 일을 당한 것처럼 모든 일손을 놓고 모여들어 같이 슬퍼하며 젊은이들은 부고통문[訃告通文]을 돌리고 부인네들은 음식을 장만하고, 산 자는 위로하고 죽은 자는 염을 해주고, 서로 없는 살림이나마 장례에 보태 쓰라고 한지[韓紙]며 막걸리며 팥죽이며 양초도 가져오고 됫박쌀도 가져오고 상여꾼들 신으라고 짚새기도 삼아오고, 밤샘을 해주고 장례가 끝날 때까지 술 먹고 싸우거나 화투를 치거나 동네를 떠나지 않았으며 한 집안 일처럼 상부상조하였다. 이렇게 하여 동네 일이 끝나면 다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매 힘든 일은 품앗이로, 궂은 일은 도와가며 고달프나마 인정미 넘치게 살았던 우리 부모들이었다.
농사짓기란 힘든 일이지만 가진 자는 가진 자대로 없는 자는 없는 자대로 천역[天逆]을 않으면서도 열심히 일들을 하니 해마다 가을이면 수확하는 곡식은 대단해서 나라에 세금을 내고도 불평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 농민들을 위한 나라이던가, 지금의 부모 이전 그러니까 증조부 고조부 때의 시절에는 잘못된 사회제도 속에서 양반이란 자들과 돈으로 벼슬을 산 자들이 횡포를 부렸다. 눈에 티만 들어가도 백성들의 핑계를 대고 잡아다가 볼기 치고 묶어 놓아, 재물 긁어모으기에 혈안이 되고 농민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징수하고 먹을 식량까지 수탈해갔다. 삼정[三政]이 문란하여 이미 죽은 자와 뱃속에 든 아기에게까지 세금을 물리는 백골징포란 것도 생길 정도로 극에 달했고, 백성들의 얼굴은 핏기 없는 송장이나 다름없었으며 그나마 가뭄이라도 들면 먹을 양식이 떨어져 춘궁기를 못 넘기고 굶어 죽지 않으려면 살 곳을 찾아 이곳 저곳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먹는 것은 어떠한가, 있다고 하는 집들도 조반석죽이나 먹었지. 없는 집들은 죽만 먹고 살았다. 짠지죽, 시래기죽과 조당수[조를 넣어 멀겋게 끓인 죽]는 그래도 나은 편이고 봄이면 푸릇푸릇 나오는 보리순도 뜯어다가 쇠죽처럼 끓여 먹고 초근목피에다 송순[松荀]도 잘라 먹고 피죽도 끓여 먹고 그것도 못먹어 부황이 나서 생목숨을 끊어야 했다. 눈을 떳다 감았다 하기를 한 달여 만에 혀를 반쯤 내밀고 목을 외로 돌린 채 눈은 초점을 잃고 죽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부모가 죽으면 굶어 죽지만 않아도 복이라 했다.
농사짓는 백성들이 양반이란 자들의 희생물로 변해버린 후, 상놈들의 팔자는 개나 돼지의 팔자만도 못한 것이라 했으니, 오죽하면 점잖은 서당훈장인 전봉준이 들고 일어났을까, 조병갑의 횡포를 보다못한 전봉준이 악질 군수에게 덤벼들고 동시에 근처 군중들도 전봉준의 지휘 아래 한데 뭉쳐 싸웠다. 무기란 것이 없으니 죽창과 작대기, 도리깨 등을 들고 모여들었고 여인네들은 부지깽이 데모를 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이 아니고 어두운 시절의 일이었으니 계란으로 바위치기로 싸워도 백성들만 고달픈 것이다. 전봉준이 잡혀 죽고 우두머리가 없어지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송아지 뒷발에 채인 개미집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밟힌 자와 잡힌 자는 죽고, 스친 자는 다치고, 살기 위하여 야반도주를 한 자들은 멀리멀리 떠나갔다.
이렇게 해서 갑오농민전쟁은 끝이 났으나 그 후유증은 엄청났다. 오히려 농민들에 대한 핍박은 더욱 심해지고 양반, 상놈의 격차도 벌어졌으며 하늘도 노했는지 해걸이로 가뭄이 들었다. 개똥밭에 뒹굴어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데 오히려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할 지경이다.
오죽하면 이런 일도 있었다. 글줄이나 읽은 집안에서 딸을 하나 두었는데, 유교사상과 삼강오륜까지 가르치며 엄하고 곱게 키워 시집을 보냈다. 부잣집은 아니지만 시집을 온 새댁은 아이 셋을 낳으며 살림도 잘 하고 그럭저럭 살아왔는데 가뭄이 들던 해에 그만 남편이 죽고 말았다. 하늘처럼 여기던 남편이 죽자 졸지에 과부가 된 새댁은 먹고 살기가 막막했지만 있는 집 방앗품도 팔고 바느질 품도 팔고 조금이나마 있는 농토를 가꾸며 친정에서 조금씩 보태주는 덕분에 아이들 굶기느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 해 전후로 너무 가뭄이 들어 친정도 어려움에 처하자,꼼짝없이 온식구가 굶어죽게 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웃에 사는 밥술이나 먹는 영감 하나가 젊은 과부를 눈여겨보고 가끔씩 마추칠 때마다 추파를 던졌다. 그럴 때마다 과부는 눈을 아래로 내려깔고 흉물스러워 상대를 안 했는데 양식이 떨어져 1밥 구경한 지가 반 년이나 지나고 죽도 하루에 한끼밖에 못 먹어 뼈만 남은데다 자식들을 굶겨 죽이게 됐으니 생각이 달라졌다. 막상 배가 고파지자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진 것이다. 도둑질도 생각하고 혼자 몸으로 도망갈 생각아다 별 생각을 다했는데 결국 용기를 낸 과부는 영감에게서 쌀을 빌려 왔다.
그러자 차츰 마을에서는 영감이 과부집에 들락거린다는 소문이 나고 친정에까지 알게 됐다. 이러하자 친정 어머니가 찾아와 자초지종을 물었는데, 꾸지람을 듣고 이성을 되찾은 과부는 수치심에 몸둘 바를 몰라하였다. 다음날 이 과부는 뒷동산에 있는 고목나무 가지에 목이 매달린 채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됐다.
가뭄도 심하게 들면 이토록 사람을 죽이며, 여태까지는 양반이란 자들이 모두 빼앗아갔지만 그 다음에는 왜놈들까지 들어와 가을 추수가 끝나기 무섭게 수탈을 해갔다.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힘든 땅이고 민심이 더욱 흉흉해지자 너도 나도 먹고 살기 위해 남정네들은 있는 집의 머슴살이로 들어가고 그것도 없으면 또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났다.
이런 모든 것은 이제는 먼 옛날 이야기나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 얘기처럼 변해 버렸다. 짚신에서 검정고무신, 흰고무신으로 바뀌고 가죽신도 골라 신는 시대가 됐다. 벽에서 물이 나오는 데다 조상들의 소원이었던 잘 먹는 것이 이루어져 도리어 뚱뚱해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생겨났다. 말세가 온다고 그렇게 외치던 종교인들의 말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조선의 남자들은 상투를 틀고 다녔다는 말이 오히려 의심스러울 정도로 세상은 많이 변했다.
=지릿재에 있는 천하대룡세[天下大龍勢]=
이제는 가난이라는 말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고 농민들도 일한 만큼 소득을 올리고 재산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변한 세월 속에 1980년 여기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마을에서는 경사가 생겨 마을 축제가 벌어진 적이 있다. 바로 이 고장 출신인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마을에서 대통령이 나왔다고 축하했고 호사가들은 조상의 묘를 잘 쓴 덕분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개화기 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두 사람의 전직 대통령들이 역사 바로 세우기란 이름 아래 법정에 서서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얕은 물 속에 사는 피라미들이 하늘에 사는 용들의 생활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정치의 잘잘못을 떠나 그 용들이 태어나게 된 장소는 어딘가 다를 것 같다. 이제 그 추적을 해보자.
풍수에서 쓰이는 말에
"山川은 유령[有靈]이나 無主요.
시골[尸骨]은 유주[有主]나 무령[無靈]이다"
라는 말이 있다. 윤보선 편에서도 언급한 '소나 말 발자국에 괸 물에는 지렁이나 살지 용이 나지 않는다' 는 말처럼 한 나라를 다스리는 큰 인물은 아무데서나 태어나지 않고 또 큰인물이 태어나게 되는 자리는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
그래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조상 묘를 더듬어 본 결과, 대통령이 나게 되는 자리가 있었다. 그의 발복은 부친인 전상우[全相禹]의 묘로부터 온 것인데, 한마디로 제왕지지[帝王之地]에다 묘를 쓴 것이다.
전상우의 묘는 그의 고향인 합천군 율곡면 기리 '지릿재'에 있다. 필자가 오늘 찾아가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지릿재는 율곡면과 쌍림면의 경계 지점에 있으며 산세가 험하면서도 이만저만 잘생긴 것이 아니다. 우선 산으로 오르기 전 길가 옆 오른편에 있는 작은 매점 앞에 차를 세우고 잠시 사방 산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문 닫혀진 관리소를 지나 백여 미터쯤 올라가니 앞에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높이 406m의 거대한 산[시리봉]이 목금합형[木金合形]을 하고서 앞을 가로막을 듯 서 있는데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그림=투구봉: 옛날 장군들이 머리에 썼던 투구처럼 생겼다.
저러한 산의 모양을 풍수에서는 두무산[兜무山] 또는 투구봉[峰]이라 한다. 두무란 전쟁터에서 장군들만이 머리에 쓰는 투구를 말한다. 그리고 산중턱에 올라 다시 한 번 주위를 보니 사방 좌우에 있는 군산[群山]들이 모두 이곳에서 뿌리를 뻗고 나갔다. 산의 생김 자체가 투구봉이 천하를 호령하는 모습이고 잘생겼다.
예로부터 명산 끝이나 대지[大地]에는 대혈[大穴]이 있다고 하듯 여기 주변 산을 보니 가야산[伽倻山]에서 뻗은 산줄기가 천리를 달리다가 합천의 젖줄인 황강[黃江]을 앞으로 두고 웅장하게 산세를 멈췄는데, 마치 하나의 맹장이 출전을 위하여 좌우로 시위용호[侍衛龍虎]를 거느리고 천굴곡[千屈曲] 만주필[萬駐畢] 백기복[百起伏]을 하며 내리쳐 달리는 듯 하다. 천하대용세라 이런 곳에 가혈[假穴]이 있을 수 없고 제왕이 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투구산의 생김이 보통 큰 것이 아니고 아울러 그 산에서 내려온 산줄기 바로 아래에서 좌선[左旋]을 하며 맥이 떨어졌고 중간쯤에 묘가 있는데 청룡 줄기와 백호 줄기 사이에 작은 겸혈[鉗穴]을 찾아 묘를 쓴 것이다. 겸혈이란 풍수에서 말하는 와[窩], 겸[鉗], 유[乳], 돌[突]의 사상[四象] 중 하나를 말한다.
그리고 청룡이나 백호를 보면 그냥 아무렇게나 보아 넘기기에는 아까운 것이 있었다. 바로 좌우로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각종 귀사[貴砂]들인데, 묘 앞 백호 줄기 아래에 있는 오봉[五峰]의 산봉우리는 극귀[極貴]의 '천제[天梯]' 를 만들고 있었다. 이것을 대하는 순간, 필자는 거의 미칠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보면 볼수록 주위 산세의 위압감에 눌려 두려움은 물론, 살기마져 느껴지며 용광로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런 자리를 남사고[南師古]는 왜 찾지 못하고 구천통곡[九遷痛哭]을 했을까? 혼자만 알고 혼자만 보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것이었다.
=사진[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친 전상우의 묘 앞 백호 줄기 용이 뒤엉키듯[蟠龍 蛟龍 爭龍] 얽혀 있고 멀리 중중첩첩 둘러싼 안산이 기기형형의 귀사를 만들고 있다. 이것은 천계[天階] 또는 천제성[天梯星]이라 하는 것으로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 제왕지지가 된다]=
=그림[천제형]=묘 좌우 청룡 백호에 이런 봉우리가 있으면 능히 제왕지지이며 제왕이나 제호가 나온다.
필자는 산에 올라 이러한 것이나 대길지[大吉地] 빈 자리가 보이면 마치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흥분된 나머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리고선 옛날 풍수의 대가들이신 도선국사나 무학대사 그리고 필자의 스승인 우량[羽亮]과 월공[月空] 선생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게 된다.
=만산[萬山] 가운데 일혈[一穴]이 있을까 말까 한 천계성=
천제성[天梯星]과 관련하여서, 풍수서는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
"혈하용호견천제[穴下龍虎見天梯] 후손필출제후야[後孫必出帝侯也]."
'천제'의 뜻은 天子가 하늘로 올라갈 때 밟고 올라가는 사다리를 말하는 것이다. 천제봉[天帝峰]이라고도 하는데, 봉황[鳳凰]이나 용[龍], 자미성[紫微星], 자미원[紫微垣], 존제토성[尊帝土星]과 같이 천자가 출[出]하는 극귀[極貴]의 자리로 보아주고 너무나 귀하여 만산[萬山] 중에 一穴이 있을까 말까 한 자리이다.
그래서 묘를 쓸때 이러한 귀사[貴砂]를 보고 묘를 쓰면 후손들 중에 천하를 호령하는 절대 제왕이 나오고 집안은 재물까지 넘쳐 천하제처 유전장[天下諸處有田庄]에 금은타주작청당[金銀打柱作廳堂]이라 한다. 뜻은 독자들이 이해 하시기 바란다.
그런데 이 오봉산은 천제형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문무[文武]에서는 벼슬을 말하기도 한다. 즉 봉우리 하나에 감투가 하나씩이라 하여 형제들이나 부자지간에도 벼슬을 한다는 것인데 어찌 됐건 전 대통령 형제들이나 집안들 그리고 친척들이 모두 한자리씩은 하였다.
또 하나는 전 대통령의 계급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산을 볼 때 항상 중요시하는 것이지만 잘생긴 산봉우리는 하나의 정승을 낼 만큼 크게 보는 것이니 천제성 봉우리 하나에 별이 하나씩이면, 육군 대장이 결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 된다.
다시 왼편 청룡 줄기를 보니 여기에도 또 아주 보기 드믄 귀사가 있었다. 즉 토형[土形]의 일자문성[一字文星]이란 것인데, 일자문성은 자손들이 문관 출세와 부귀영달에 오른다는 것으로 풍수에서는 이와 같은 砂를 중요시 여긴다.
여기 풍수적 이치만 보더라도 그가 대통령이 되게 된 이유는 자명하리라. 주산은 장군이 쓰는 투구봉에 백호는 천자가 나온다는 천제성이 있고 청룡은 일자문성이 주위로 꽉 차 있으니 대통령은 물론 문중발복[門中發福]도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란 자리를 어떻게 얻느냐는 별개의 문제로 한다. 쿠테타를 일으키든 역모를 일으키든, 창업 즉 태조 이성계나 세조인 수양대군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전조[前朝]나 전왕들을 몰아내고 정권 찬탈을 하여 권좌에 올라 새 정권을 창출하는 것도 포함된다. 바로 이 자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전상우 묘의 좌[坐]가 건좌[乾坐]인데 五行으로 보면 乾은 金이고 금은 관[冠]이며[원래는 官이나 이때는 冠을 씀] 다시 건[乾], 곤[坤], 간[艮], 손[巽]의 사유[四維]와 천[天], 지[地], 인[人], 귀[鬼]의 사괘[四卦]를 보면 乾은 天이고 坤은 地이며 巽은 人이고 艮은 鬼이다.
즉 흔히들 '천지인' '천지인' 하고 말하는데, 여기 묘에는 제일 높은 天이라는 글자가 건좌[乾坐]와 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묘의 좌를 볼 때는 乾坐와 해좌[亥坐], 임좌[壬坐], 자좌[子坐], 계좌[癸坐]에다 곤좌[坤坐], 손좌[巽坐]를 제일로 쳐주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좌라고 하지 않고 龍이라고 불러 亥龍이니 巽龍이니 하고 부른다.
위의 문구는 우리의 대고현[大高賢]들이 금언으로 여기며 풍수책에 엄연히 남겨 놓은 것이다.
필자는 풍수책을 쓰기 위해 여러 문중의 사람들이나 족보를 다룬다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때 누군가 모 문중의 후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 명당이라는 것이 진짜 있는 것이냐며 따지는 사람을 보았는데 풍수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을 무어라 탓할 수도 없고 또 그런 사람이 자기 문중을 지킨다는 것이 딱해 보이기도 했다. 차라리 우리 안에 가둬 놓고 키우는 짐승들 앞에서 보석의 진가를 설명하는 편이 나을 것같아 입을 다물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명당에 숨겨진 결함=
이제 여기 산과 묘에 대해 다른 점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당이라면 끝까지 명당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천하미인이라도 보이지 않는 어느 한 곳에 흉터가 있게 마련이고 아무리 잘 구운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도 유일자[有一疵:흠집]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하듯 잘생긴 산에도 어딘가 한 군데는 허[虛]하고 결[缺]한 곳이 있으니 여기 묘에는 바로 뒷산과 앞[水口]이라 하겠다.
地家書 글을 인용하면
풍수최기혈후심갱곡[風水最忌穴後深坑谷]
우수구무회직출수[又水口無回直出水].
무슨 뜻이냐 하면, 무릇 묘를 쓰면 뒤로는 주산이나 후봉[後峰]이 있어 울타리[柵]처럼 항상 뒤를 감싸주고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여기처럼 후산이 없이 주산 역할을 하는 투구봉은 옆으로 있는데다 묘 뒤 바로 뒤로는 쌍림면으로 빠지는 골짜기가 너무 크고 골이 깊으며 그 길이는 앞으로 빠지는 수구 길이와 맞먹으면 꺼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 대통령은 설령 발복이 있다 해도 뒤가 너무 공허하기 때문에 뒤끝이 좋지 않은 것이다.
또한 앞으로 흐르는 물[水口]이 묘를 싸고 도는 과당[過堂]이 없이 묘 앞에서 곧장 나가는 직출수[直出水]로서 일명 '당문파[撞門破].라 하는 것이었는데, 이것 또한 풍수에서는 아주 꺼리는 것이다.
수구에 대해서는 다른 편에서도 썼지만, 나가는 물이나 들어오는 물은 좌우에서 회포하며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일품에 속한다.
묘 앞에서 나가는 물이 곧장 나가는 당문파나 묘 앞으로 들어오는 물이 곧장 들어는 박면수[撲面水]나 모두 극기[極忌]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럴 때는 기래불기거[忌來不忌去] 또는 기거불기래[忌去不忌來]란 말을 쓴다. 물론, 여기처럼 흉한 곳은 길하게 하는 방책[액막이 秘方 造形物]을 쓰고 묏자리를 쓰면 괜찮은 법도 있긴 하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필자는 가끔씩 묏자리를 부탁 받고 아는 지식에 조금이라도 풍수에 격을 갖춘 자리를 권할 때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묘 앞을 보아 안산이 있으면 막혔다느니 하며 그러 앞이 훤하고 시원하게 트인 것만 좋아들 하는데 이는 풍수 무지에서 오는 집안 망할 소리들을 하는 것이다.
물의 직래직거[直來直去]는 절대불용[絶對不用]이다.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득수[得水] 득파[得破]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니 물은 언제나 묘 주위를 감싸고 돌아 나가야 되고 또 그런 자리에 묘를 써야만 할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가계[家系]를 살펴보며=
다시 이야기를 바꾸어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전 대통령의 증조부 묘에 대해 설명을 해보자.
우선 전 대통령의 가계를 보지 않을 수 없다. 1980년 당시 항간에서는 전 대톨령의 출생지를 놓고 호남의 부안 출생이니 영남의 합천 출생이니 하고 설왕설래하던 때가 있었다. 서로 다 같은 합천군과 부안군의 주장인데 합천군은 이 문제 말고도 옛날 무학대사의 문제로도 고민에 빠져 있었다.
무슨 얘기냐 하면 무학대사의 출생지는 얼마 전까지도 합천군 대병면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틈엔가 충남 서천군으로 바뀌어 지금은 오히려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더구나 조계종의 어느 스님도 무학의 출생지를 합천이 아닌 서산군 인지면 애정리라고 하는 것을 보았는데 서로들 대사의 출생지와 고향을 놓고 다투는 것 같다. 그것은 왜냐 하면 합천의 대병면은 고향이라 주장하고 서산군은 출생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실록이나 무학왕사비에 보면 모두 합천 삼기현[三崎縣]에서 태어났다 했고, 서산군은 분명히 애정리에서 무학이 태어났다고 한다. 또 거기에는 모두들 그럴 만한 전설도 있지만 보지를 못했으니 알 수 없는 것이고 이러다간 지금 말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고향 문제도 그렇게 될 것 같다.
지금도 호남의 어느 한 곳에 가면 그의 출생지를 놓고 전라도 정읍 출생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부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본인들이 입을 꽉 다물고 있으니 어느 쪽이 확실한지는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나와 봐야 알 것이지만 이것을 알기 위하여 필자는 첫번째로 부안군청과 문화원에 들러서 알아보았다.
=사진[초가 대문과 담장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생가: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소재]
전 대통령 재임 시 당시 실제로 증조부의 묘를 찾으려고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지방의 풍수가들이 입으로 전하는 말을 조사해보니 안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좀더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부안군청 공보실에 근무했던 담당자들이나 문화원의 말에 의하면 전 대통령의 재임 당시 위에서 말한 대로 증조부의 묘가 부안에 있다고 해서 묘를 찾으려고 지관들까지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묘가 있으면 있는 것이지 찾는다는 것은 또 무엇이냐 하고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데, 그 점은 다음과 같다.
옛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어렸을 적에, 당시 어른들이 묘를 쓸 때 너무 위급한 상황에서 묘를 쓰느라고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장[平葬:봉분없는 묘]를 해버렸고, 너무 가난한 나머지 살기 위해 만주로 갔으며 가기 전에 가족들이 찾아와서 망배[望拜:멀리서 바라보고 절하는 것]를 드리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일 년 후에 다시 국내로 돌아와 합천에서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린 후, 군생활 관계로 몇십 년이 지난 후에 와서 할아버지와 같이 망배 올렸던 곳을 찾으려니 숲이 너무 우거지고 어디가 어딘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짐작으로 부안군 청호저수지 옆에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라 한다. 그리고 근처에 사는 지관 이모 씨 얘기에 의하면 묏자리를 잡은 사람은 문중의 한 사람인 전봉준이며 전봉준은 한학을 하면서도 풍수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다.
두번째로 조사한 것은 전씨 문중의 한 사람이며 전 대통령과 사촌간인 전맹환[全孟煥] 씨를 찾아서였다. 올해 84세가 된다는 전 옹에게 전화로 연락을 하고 대충 내용을 얘기했더니 자세한 것을 알려면 찾아오라 했다. 그래서 날을 정한 후에 찾아가 부안 지방에서의 일을 얘기하니 강한 어조로 한마디로 그렇지 않다고 했다.
전 대통령의 어릴 때 얘기는 모두가 알다시피 집안이 가난했던 것은 사실이고, 만주에서 돌아와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대구로 이사를 갔고 잠시 여기저기 돌아다닌 적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 사람들이 그런 소릴 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마을을 안내하며 전 대통령이 태어난 집과 지난번 서울로 압송될 때 하룻밤 묵었던 집, 그리고 앞산과 오른편 옆산의 증조부와 조부묘의 위치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나선 집으로 들어가더니 방안에서 족보를 가지고 나와 보여주며, "이것 보소, 여기 다 있소, 우째서 두환이가 절라동교" 하며 하나하나 설명을 하는데, 증조부 전석주[全錫注]의 묘와 조부 전영수[全永洙]의 묘는 모두 마을에서 가까운 곳 안천[安川] 야등산[冶嶝山]과 성지곡[聖智谷]에 곤좌[坤坐]와 건좌[乾坐]로 합장으로 있다 한다. 안천은 지금의 내천이나 같은 뜻이다.
그리고 전봉준이 전 대통령으로부터 몇 대조 할아버지인가 하는 의문이 들어, 족보를 확인해보니 계보도 이름도 전혀 족보상에 올라 있지 않았다....終
이런 곳이 명당이다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