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64.구마라집스님과 한국불교
한국서 애송되는 ‘금강경’ 역경한 구마라집 스님의 고향
|
<쿠차의 구마라집스님像> |
사진설명: 쿠차 키질석굴 앞에 있는 구마라집스님 동상. 쿠차석굴연구소가 1994년 9월1일 조성한 것으로 사색에 잠긴 수행자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
2002년 9월21일, 이날은 마침 추석날. ‘고선지 장군’과 ‘혜초스님’을 찾아 막상 쿠차에 왔지만,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에게 쿠차는 여전히 낯선 땅으로 보였다. 쿠차와 한국불교는 도대체 어떤 인연이 있을까. 그 때〈금강경〉을 한역한 구마라집스님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태어난 ‘구마라집’(344~413)이라는 한 위대한 역경승(譯經僧) 덕분에 한국인들은 지금〈금강반야바라밀경〉(약칭 금강경)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공(空)사상을 담고 있는〈금강경〉은 주지하다시피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 인도에서 2세기경 성립된〈금강경〉이 중국에 전래된 것은 3세기경. 이후〈금강경〉은 여러 사람에 의해 한역(漢譯)됐다. 요진(姚秦)의 구마라집스님, 북위(北魏)의 보리류지스님, 진(陳)나라의 진제스님, 당나라의 현장스님 등이 각각 한역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는 한역경전이 구마라집 스님의 〈금강경〉. 우리나라 불자들이 읽고 있는〈금강경〉첫 머리에 ‘요진 삼장법사 구마라집 역’이라고 적혀있다. 요장이 세운 후진(後秦. 384~417) 시절 구마라집스님이 한역했다는 뜻. 때문에 구마라집스님으로 대표되는 쿠차 불교는 한국불교에 지금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셈이다.
〈출삼장기집〉이나〈고승전〉에 의하면 위대한 역경승이자 서역 제일의 명승(名僧) 구마라집은 인도인 아버지와 구자국(쿠차에 있었던 나라)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를 낳은 어머니는 출가하고자 했으나, 아버지는 아들을 하나 더 낳을 때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구마라집은 어머니를 따라 7살 때 출가했다. 이후 캐시미르로 가 반두달다스님 밑에서 3년간 경전(주로 설일체유부 계통)을 배웠다. 당시 한 이교도가 나이 어린 그를 얕잡아보고 덤볐다 큰 망신을 당했다.
캐시미르에서 카슈가르로 간 모자는 그곳에서 1년을 머물렀다. 카슈가르에서 구마라집스님은 베다와 천문학, 비의과학 등 인도의 모든 학문분야에 정통할 정도로 공부했다. 물론 이 때 대승불교에 입문했다. 카슈가르에서 야르칸드(사차)로 옮긴 구마라집스님은 사차국 왕자 수리야소마를 만났고, 왕자에게 대승학설을 가르치는 스승이 됐다. 천성적인 자질과 총명함, 그리고 학습에 대한 성실성으로 일대에 큰 명성을 드날렸다. 야르칸드에서 다시 카슈가르로 가 1년을 머문 뒤, 고향 쿠차로 돌아간 구마라집스님은 20살 때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20년 동안 쿠차에 머물며 대승경전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대승으로 돌아선 그는 스승 반두달다를 설복시키고자, 캐시미르에 있던 스승을 쿠차로 초청, 여러 날 논쟁을 벌였으나 결국 스승을 설복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379년 쿠차를 방문했던 전진(前秦. 351~394)의 승순(僧純)스님에 의해 구마라집의 명성은 양자강 남북에 널리 퍼졌다. 구마라집스님의 명성을 들은 중국불교 개척자 도안스님(312~385)도 전진의 부견왕(符堅.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준 왕)에게 편지를 보내, 구마라집을 장안(현재의 서안)으로 초청하자고 건의할 정도였다. 이에 부견왕은 385년 장군 여광(呂光)으로 하여금 7만의 병력을 이끌고 쿠차를 공격하게 했다. 쿠차는 70만 대군으로 싸웠으나 참패당했고, 구마라집스님은 여광을 따라 양주(오늘날 감숙성)로 가게 됐다. 쿠차를 떠나 양주로 가던, 구마라집스님이 타고 가던 백마가 돈황 근방에서 과로로 죽고 말았는데, 스님은 백마를 위해 백마탑을 세웠다. 돈황에 있는 백마탑은 지금도 참배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타고가던 백마 돈황서 죽자 백마탑 세워
|
사진설명: 구마라집스님의 백마가 죽자 돈황에 세운 백마탑. |
그들이 양주에 도착할 즈음, 비수가에서 벌어진 비수회전(383년 8월)에서 동진(東晋)에 패배한 뒤 다시는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 전진이 385년 5월 요장에 의해 멸망당하고, 부견왕도 참살되고 말았다. 결국 구마라집스님은 여광이 하서회랑에 건국한 후량(後凉. 386~403)에 억류 아닌 억류를 당하게 됐다. 장안에 있던 후진의 2대왕 요흥(姚興)은 여러 번 사신을 보내 구마라집스님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여광은 구마라집스님을 보내면 후량이 망할까봐 17년 동안이나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격노한 요흥왕은 군대를 양주로 출동시켜 여광을 패퇴시키고, 구마라집스님을 장안으로 모셔갔다. 그때가 401년이었다.
당시 장안은 중국불교의 중심지였다. 후진왕조는 거국적으로 불교를 후원했고, 요흥은 구마라집스님과 제자들을 위해 소요원(逍遙園)을 건립했다. 이곳에서 구마라집스님은 매일 회합에 참석하는 1천여 명의 스님들과 경전 한역(漢譯)에 몰두했다. 요흥 자신이 친히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구마라집스님은 국사로 존경받았으며, 402년부터 생을 마칠 때인 413년까지 역경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때 역경된 경전이 〈무량수경〉,〈대품반야경〉,〈백론〉,〈중론〉,〈십이문론〉,〈대지도론〉,〈법화경〉,〈유마경〉, 〈십지경〉등 74부 384권이다. 실로 중국역경사의 신기원을 이룬 인물이 구마라집스님이었다. 구마라집스님 번역 이후를 ‘신역’(新譯), 그 이전을 ‘구역’(舊譯)으로 구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사진설명: 서안 초당사에 있는 구마라집스님의 사리탑. |
그러나 구마라집스님에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요흥의 ‘엉뚱한 발상’에 의해 심한 정신적 고뇌를 겪어야만 했다. 요흥은 “구마라집스님의 총명함과 이해력이 반드시 후손에게 물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요흥은 10여명의 여인을 구마라집스님과 강제로 살도록 했다. 말년에 구마라집스님은 자주 “진흙에서 연꽃이 피는데, 다만 연꽃만을 취할 것이요, 진흙은 취하지 말라”고 말했다 한다. 스스로에 대한 경책이었으리라. 구마라집스님의 자손에 대한 언급이 후대 문헌에 보이나, 요흥의 기대처럼 그렇게 뛰어나지는 못했다. 413년 입적한 구마라집스님을 기념해 세운 사리탑은 현재 서안 초당사에 있다.
상념(想念)을 정리하고 키질석굴을 보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올라가다 석굴 입구에 있는 거대한 동상을 만났다. 이름을 보니 쿠차석굴연구소가 94년 조성·봉안한 ‘구마라집스님 동상’이었다. 쿠차는 스님의 고향이고, 쿠차를 대표하는 키질석굴 앞에 스님의 동상이 있을 만하다고 생각됐다. 석굴로 올라가다 말고 동상을 살폈다. 준수한 얼굴,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체격, 사색에 잠긴 수행자의 얼굴을 한 동상이었다. 정면에서 합장 한 뒤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 돌았다. 존경의 예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키질석굴을 참배 한 뒤에 다시 구마라집스님의 동상 앞으로 갔다. 서쪽으로 지는 태양이 던지는 햇빛을 받으며 여전히 그곳에 앉아있었다. 다시 세 바퀴 돌았다. 얼굴을 응시했다. 사색에 빠진 위대한 역경승. 이 분이 중국불교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사실 구마라집스님의 한역 이후 중국불교는 진정한 도착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스님이 번역한 경전들을 읽은 후학들이 인도불교와는 다른 중국불교를 만들어갔다. 구체적으로 대승종파인 삼론종(三論宗)이 성립됐다.
“연꽃을 취하지, 진흙은 취하지말라”
삼론종의 소의경전은〈중론〉,〈백론〉,〈십이문론〉. 모두 구마라집스님이 한역한 것이다. 이 종파의 인도에서의 개조는 용수보살, 그는 〈중론송〉을 지은 제자 제바와 함께 학파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구마라집스님의 한역으로 중국에 소개된 삼론의 가르침은 제자인 승조(僧肇. 374~414)에 의해 더욱 발전됐다. 승조스님은 본래 노장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
사진설명: 키질석굴 앞 백양나무 길을 비질하고 있는 위구르인. |
그러나 우연히〈유마경〉을 읽고 출가했다. 20살에 장안 일대를 울리는 선지식으로 성장한 승조스님은 구마라집스님이 북서부 고장(姑藏)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그곳으로 가 제가가 됐다. 그리고 뒷날 스승을 따라 장안으로 들어왔다. 스승과 함께 소요원에 머물며, 경전을 설명하고 대조하는 일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구마라집스님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414년 28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구마라집스님에 이어 불세출의 천재였던 또 한 명의 명승(名僧)이 사라진 것. 승조스님이 남긴〈물불천론〉,〈부진공론〉,〈반야무지론〉 등은 스님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데 일조했다. “인도사상과 중국사상을 효과적으로 종합한 글”로 평가되는 이 논문들은〈조론〉이라는 책으로 시중에 번역·출간돼 있다.
추석을 맞아 속이 꽉 찬 달이 떠오른 2002년 9월21일 밤. 다시금 구마라집스님 동상 앞으로 올라갔다. 백양나무 우거진 숲길에 비치는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스님의 상 앞으로 나아갔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구마라집스님의 정신이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형상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중생인지라, 달빛에 비치는 스님의 동상이 보고 싶었다. 다시금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 돌았다. 정면에 서서 합창 한 채 한 참이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을 경모(敬慕)하는 교도(敎徒)가 먼 이국에서 찾아왔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만 얼굴에 띠고 있었다. 바로 그 사이로 “연꽃을 취하지, 진흙은 취하지 말라”는 스님의 말이 들리는 듯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 관련 사이트 :
[KBS다큐 실크로드 5편] 구마라습 - 동으로 간 푸른 눈의 승려 [바로가기]
[출처 : 불교신문]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