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봉집 제23권 / 잡저(雜著)
관찰사 안공 묘비명〔觀察使安公墓碑銘〕 안종도(安宗道)
공은 선군자(先君子)와 동년(同年)이란 교분이 있었는데, 수광(睟光)은 당시 아직 어려서 그저 늘 객차(客次)에서 공의 안색을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러다 이윽고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어 진사시에 합격하고는 비로소 직소(直所)에서 공에게 인사를 드렸고, 그 후 또 17, 8년이 지나 수광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어 사저(私邸)에서 재차 공을 배알하였는데 공이 살뜰하게 친구의 자제로 대우해주셨으니, 그 뜻이 매우 진정성이 있었다. 이에 삼가 장자(長者)의 풍모를 흠모하면서 마음속에 새기고 잊지 않았는데 이제 공의 손자 몽주(夢周)가 공의 묘비명을 써달라는 부탁을 하니, 슬프다.
삼가 공의 가장(家狀)을 살펴보건대, 휘(諱)는 종도(宗道)이고 자(字)는 관부(貫夫)이다.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고려조(高麗朝)에 휘 유(裕)라는 분이 계시니, 직위는 첨의 중찬(僉議中贊)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으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3대를 지나 휘 원(瑗)에 이르러 우리 조정에 들어와 개성 유후(開城留後)가 되었다. 전후로 자손들이 크게 현달하여 성대한 명문귀족이 되었으니, 보첩(譜牒)에 자세히 실려 있기에 생략한다.
고조는 휘가 의(檥)로 모관(某官)을 지냈다. 증조는 휘가 계송(繼宋)으로 돈녕부 주부(敦寧府主簿)를 지내고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가 광수(光睟)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가 경률(景嵂)로 익위사 익위(翊衛司翊衛)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모친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현감 자지(自知)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임오년(1522, 중종17)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때부터 장중(莊重)하여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식자(識者)들이 남다르게 여겼다. 조금 장성해서는 학문에 힘써 병오년(1546, 명종1) 사마시(司馬試)와 을묘년(1555)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처음에 승문원(承文院)에 제수되어 정자(正字)에 이르렀으며, 곧이어 사관(史館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봉교(奉敎)에 이르렀다.
정사년(1557)에 참판공(參判公)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고, 상기(喪期)를 마친 뒤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천직(遷職)하였다. 제조(諸曹)로는 형조ㆍ예조ㆍ병조ㆍ이조의 좌랑(佐郞)과 이조의 정랑(正郞)을, 대간(臺諫)에서는 정언(正言)과 장령(掌令)을, 옥당(玉堂)에서는 수찬(修撰)과 교리(校理)를, 사유(師儒 성균관(成均館))에서는 사예(司藝)와 사성(司成)을 지냈고, 또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과 사옹원(司饔院) 및 사재감(司宰監)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병인년(1566)에 모친 봉양의 편의를 위해 외직(外職)을 청해 배천 군수(白川郡守)가 되어 은혜로운 정사를 펴니, 군민(郡民)들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워 그리워하였다.
임신년(1572, 선조5)에 우통례(右通禮)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자급이 올랐고 길주 목사(吉州牧使)가 되었다.
갑술년(1574)에 모부인의 상을 당해 앞서 부친상 때와 마찬가지로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기를 마친 뒤 동지사(冬至使)로 차출되어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제수되었다.
경진년(1580)부터 기축년(1589)에 이르기까지 외직으로 나가 경주(慶州)ㆍ안동(安東)ㆍ양주(楊州) 세 고을을 다스렸고,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 참의가 되었다.
임진년(1592)에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있을 때 마침 왜적이 쳐들어오자 조정에서 논의하여 무신(武臣) 수령으로 바꾸고 공에게는 산질(散秩)을 주었다.
경자년(1600) 8월 계묘일에 감기에 걸려 생을 마치니, 향년 79세이다. 그해 11월 경신일에 양주(楊州) 모리(某里) 모원(某原)에 안장하니, 치명(治命)을 따른 것이다.
공은 위인이 자상하고 단정하며 강직하게 자신을 지켰다. 성품도 효성스럽고 우애로워 선조를 받드는 데 독실하였고, 이 마음을 동기간에까지 미루어 차별 없이 사랑하였다. 공손한 태도로 자신을 단속하고 신의로 남들을 대하였다. 가정에서는 장중하게 처신하여 내외의 구별을 엄격하게 하였고, 직임에 임해서는 오직 부지런히 하면서도 규정이 매우 분명했다. 거처하는 집은 초라하여 겨우 몸이나 들일 정도였지만 유유자적하게 한가로이 지내는 것이 한미한 선비와 마찬가지였으며, 공사(公事)가 아니면 문 밖을 나선 적이 없없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점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칭찬하여 마지않았고, 항상 남의 과실을 말하지 말라고 자제들에게 경계하였다.
공은 일찌감치 당대의 명성을 독차지하여 현달한 작질(爵秩)을 역임하였지만 전형(銓衡)하는 자리에 있을 때 언관(言官)의 탄핵을 받아 끝내 크게 쓰여지지 못했으니, 이 또한 운명이다. 그러나 공은 실직(失職)한 이후로 물러나 자신을 지키면서 더 이상 조정에 진출하여 벼슬을 거머쥐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외직에서 한가로이 지내다 생을 마쳤으니, 출세길에 혈안이 되어 멈출 줄 모른 채 백방으로 방법을 모색해서 반드시 자리를 차지할 것을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너무도 현격하지 않은가.
부인 이씨(李氏)는 종성(宗姓)인 익성부수(翼城副守) 규(珪)의 따님이다. 가내(家內)를 잘 다스리고 부도(婦道)를 극진히 구현하였다. 공보다 앞서 계사년(1593, 선조26)에 향년 71세로 졸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부장(祔葬)하였다.
모두 5남을 두었으니, 세진(世震)은 일찍 죽었고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세복(世復)은 풍저창 직장(豐儲倉直長)이고, 세희(世煕)는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이고, 세헌(世憲)은 군자시 판관(軍資寺判官)이고, 세걸(世傑)은 종성 부사(鍾城府使)이다. 딸 하나는 사인(士人) 한백온(韓伯溫)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게 2남을 두었으니, 세윤(世潤)은 관상감 정(觀象監正)이고, 세연(世演)은 무과(武科) 출신(出身)이다. 내외(內外) 증손과 현손이 또 남녀 40여 명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처음 나아갈 때는 예기롭더니 / 始進之銳
끝에 가서는 무뎌져버렸네 / 終也則鈍
그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랴 / 其誰怨尤
공은 결국 유유자적 지냈다오 / 公遂偃蹇
지위는 어찌하여 높지 못했고 / 位胡不崇
재능은 어찌하여 다 못 폈나 / 用胡不究
향년으로 기준을 둔다면 / 準之以年
그래도 장수를 누렸으니 / 亦克有壽
하늘은 실로 무슨 마음인가 / 天實何心
궁달이 오직 명운에 달렸도다 / 窮達惟命
당신은 복을 누리지 않고 / 于身不贏
후손의 경사를 배양하였네 / 以培後慶
봉긋하게 솟은 언덕 있으니 / 有丘睾如
공이 이곳에 안장되었네 / 公藏在是
내가 명을 지어 고하나니 / 我銘詔之
아마도 부끄럽지 않으리라 / 尙亦無愧
[주-D001] 공은 …… 있었는데 : 안종도(安宗道)와 지봉의 부친 이희검(李希儉)은 1546년(명종1) 사마시에 동방(同榜) 합격하였다.[주-D002] 객차(客次) : 빈객을 접대하는 처소이다.[주-D003] 치명(治命) : 죽기 전 맑은 정신으로 내린 유명(遺命)이다.[주-D004] 전형(銓衡)하는 …… 받아 : 안종도가 이조 정랑으로 있으면서, 도감 낭청(都監郞廳)으로서 자궁(資窮)되지 않은 자를 위하여 가자(加資)하여 직급을 더 올려주었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된 일을 가리킨다. 《국역 명종실록 20년 5월 13일》[주-D005] 아마도 부끄럽지 않으리라 : 지봉의 묘비명이 안종도의 삶을 과장한 것이 아니고 사실에 부합되기에 부끄럽지 않다는 말이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강여진 (역)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