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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이미지를 읽어내기
성경의 이미지 04.
죽음, 그걸로 끝인가?
https://youtu.be/p9opVbtl8xA?feature=shared
성경에는 이미지가 많습니다. 그 이미지들은 어떤 주제를 나타내며 성경 이야기 전체를 관통합니다. 우리는 이 이미지들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미지들이 전체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 지를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이야기에서 이미지를 읽어내야 합니다.
대부분의 서구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지난 수백 년 동안에 죽음에 대한 생각, 특히 육체의 죽음에 대하여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디딤돌로서 천국이나 그 어디든지 우리가 죽음 이후에 들어가는 계단으로 생각했습니다. 대개는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신약성경을 보면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로 하늘과 새 땅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란 단지 관문으로서 그 문을 통해서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전혀 염려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사람들은 가르쳤습니다. 돌아보니 제가 장례식에 처음 간 것은 어린 소년이었을 때였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매우 자제하면서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왜냐면 돌아가신 분은 훨씬 더 좋은 곳으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해 애도하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는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신약성경에서 죽음은 우리의 원수라는 사실입니다. 사망은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은 친절하고 다정한 친구처럼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창조의 모든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은 혼돈이며 부패되어 없어지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부패를 용인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부패가 세상에 들어온 것은 인간의 죄와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 인간이 스스로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하길,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요,’ 바울은 이어서 말하기를,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서 우리는 나중에 이 주제를 다룰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이런 상상을 합니다. ‘죽으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죽음이란 선한 창조물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는 것이며 그리고 몸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입니다. 그렇게 부활한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고 살 것입니다.
최초의 피조세계는 선한 것이지만 영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세상을 보시기에 심히 좋게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이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의 프로젝트로서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창조물에 상징과 표지를 넣어두심으로써 그것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만약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내가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었는데 그날 죽지 않았어요.’ 이것은 히브리어 관용어를 오해한 것입니다. ‘네가 그것을 먹는 그 날에’가 의미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후 24시간 안에 즉각적으로 죽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네가 그것을 먹으면 너는 죽음에 서명한 것과 같다'는 뜻이며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5장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마치 거대한 종이 울리듯이 그 5장 전체에 걸쳐서 아무개가 이런 일을 하고 아무개는 저런 일을 했으며 그리고 아무개도 죽고 아무개도 죽고 또 아무개도 죽었다고 들려줍니다. 성경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들려줍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죽음의 저주를 누그러뜨릴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저주이며 죽음은 선하게 창조된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이런 주장을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어떤 사람들은 죽음과 언약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 본문은 이사야 28장입니다. 이사야는 그 백성들을 책망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사망과 언약을 맺었고 스올과도 언약을 맺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28장 15절입니다. 넘치는 재앙이 우리에게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는 미치지 않으리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거짓말을 하여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고 속임수를 써서 몸을 감출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을 속이고 서로를 속임으로써 어떤 거래를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조금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옛 성공회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약 백 년 전에 말입니다.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옆방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실제로 문제의 그 신학자는 그 설교의 다음 문단에서 이어서 설명하기를, ‘여러분이 때때로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조금은 실제로 끔찍한 일이며 사람의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파멸이며 모든 선한 것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손쉬운 통과 의례가 아닙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죽음에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천국에 간다는 뜻이 아니라 시편 16편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점을 지목하여 시편 16편을 인용하였으며 예수님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예수께서 죽은 자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그 언약이 유효하기 때문에 언젠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것은 신약성경이 최종적인 목적으로 전혀 지지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도리어 신약성경은 새로운 세상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것은 사망이 멸망당하는 세상입니다. 그 점이 중요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분이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본문은 호세아 6장과 에스겔 37장 그리고 특별히 다니엘 12장입니다. 이 본문은 나중에 랍비들이 부활에 대하여 말할 때 가장 즐겨 인용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데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후에도 우리를 돌보실 것이지만 주님은 틀림없이 그렇게 하실 것이며 그것이 약속이기도 합니다만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은 정복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기초에 자리 잡은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분이시라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이 선하신 창조주시라는 생각을 붙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이 엉망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그저 우연히 생겨난 것이며 자연의 힘이 저절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은 전에는 좋았지만 이제는 어떤 좋은 것도 나올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바로잡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부활은 필요 없게 됩니다. 그리고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선하신 창조주시라면 그리고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심판주시라면, 그러면 부활은 반드시 있을 것이며 죽음은 패배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약성경에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친히 선구자가 되셔서 치료와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짧지만 강력한 공생애 기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말씀하신 방식으로서 생명에 대한 긍정이며 사망에 대한 부정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친구 나사로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11장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죽음이 잔인하고 추악하고 나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능히 다루실 수 있을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특히 자신을 죽음에서 일으키실 것도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죽음이 공동체와 가족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지를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새로운 일이 다가가고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누이가 예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했으리이다.’ 예수께서는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누이는 ‘마지막 날에 그가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 부활이 살아와서 여기서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부활은 죽음이 가져오는 파멸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용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죽음이 들어온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했기 때문입니다. 부활과 용서는 서로 함께 합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내가 만물을 바로잡으리라!’
또한 신약성경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경험하는 것으로도 사용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미 우리가 그리스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고 그는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여러분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약속으로서 예수께서도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메시아의 가족이 된다면 여러분은 심판을 받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죽음 이후의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며 그 기다림의 일정 기간이 지나면 완전한 부활의 생명을 마침내 누릴 것입니다.
물론 모든 목회자들이 알 듯이 여러분이 심하게 앓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기다리는 것이 육체적 죽음뿐 일 때 육체적 죽음은 다정한 친구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죽음이 우리를 비참함에서 건져 줄 수 있습니다. 정말 그것이 현실일 수 있습니다. 제가 임종을 앞둔 어떤 분 곁에 앉아 있었을 때 죽음은 복된 쉼이며 일종의 안도의 한숨이었습니다.
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다정한 친구가 아닙니다. 죽음은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죽음을 물리치셨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사야 28장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들은 사망과 언약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죽음은 별것 아니야!' 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망은 극복되어야 하며 우리는 사망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사망이 패배한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때문입니다. 사망은 마지막 날에 완전히 패배할 것인데, 그때는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실 때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목적은 현재 이미 시작된 생명의 백성이 되라는 뜻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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