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문학- 시인 백석 이야기 -
백석(白石, 본명 백기행)은 교과서에 가장 많은 시가 실린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그는 우리나라 시인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시인으로 조사되기도 했다.(2005년) 그는 이처럼 유명 문인이지만 그 전에는, 정확히는 1987년 이전에는 아는 사람만 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 글쟁이였다. 북한 작가인 탓이었다. 그러다 1987년 해금 후 아름아름 그의 시가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이후 그의 뛰어난 작품들은 문청(문학청년)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 백석의 고향은 평북 정주로 소월 김정식과 동향이다. 소월은 백석이 다닌 정주 오산보통학교 6년 선배이기도 하다. 백석은 소월이 자신의 선배라는 점에 큰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는데, 소월이 유명한 '진달래 꽃'에서 그저 영변 약산의 진달래 꽃만을 주목한 데 반해 백석은 관서대란(홍경래의 난)으로 스러져 간 이름 없는 민중의 넋까지 보듬었다는 점.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조선일보사와 함흥 영생고보에서 근무하던 백석은 1939년 돌연 만주로 떠났다. 이후 안동세관 세관원으로 일하며 개인적으로 러시아 문학과 러시아어를 공부하던 백석은 해방 후 고향 정주로 돌아와 정착했다. 그리고 남으로 가자는 동료들의 제안을 마다하고 정주 오산학교 당시의 스승인 조만식 선생 곁에 남아 시와 동시를 쓰며 러시아어를 번역했다. 그리고 북한정권 수립 후에도 정치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시인과 번역가로서만 활동했는데, 그가 북에서 번역한 러시아 문학작품은 실로 엄청났다고 한다.
백석의 흔적은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 그 편린이 남아 있다. 백석은 헌칠한 외모에 190cm에 가까운 우월한 기럭지, 그리고 고급양복만을 선호한 멋쟁이였던 까닭에 여성들에게 인기 짱이었는데, 뭇여성을 마다하고 의외로 함흥관 기생이던 진향(眞香, 본명 김영한)과 눈이 맞아 동거를 했다. 하지만 백석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에는 이르지 못하는데, 이에 백석은 만주로의 사랑의 도피를 꾀하나 기생 김영한은 따르지 않았다.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던, 잘 나가던 최고 기생으로서의 자존심일까,
하지만 끝내 나타샤 진향이는 나타나지 않았고 백석은 홀로 만주행 열차를 탔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이후 진향 김영한은 성북동에서 대원각(大苑閣)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하다가 말년에 법정스님에게 24,000㎡(약 7000평) 규모의 대원각 전체를 시주했다. 당시 돈으로 1천억 원이 넘는 거액의 시가였다.
이에 법정스님은 몇 번이고 고사했지만 결국 받아들여 대원각을 대한 조계종 산하 길상사(吉祥寺)로 개조했다. 당시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김영한은 법정스님의 책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1000억원이란 돈도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말로 백석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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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시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내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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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시 - '정주성'(定州城)은 '사슴'과 더불어 초기에 소개된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
[ 정주성 ]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졸던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하늘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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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얽힌 스토리 중 박헌영 이야기 -
박헌영의 최후가 다시 조명되었다. 일제시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박헌영은 해방 후 ‘조선의 레닌’으로 불리며 많은 좌파 젊은이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이와 같은 지지를 바탕으로 남로당을 구축하였으며, 대구 10월 폭동과 여순반란사건 등을 배후 조종하였고, 북한으로 넘어가서는 제1대 부수상 겸 외무상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6.25 전쟁 이후 미제 간첩’ 등의 혐의로 처형당했던 바,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비운의 정치가로서 생을 마감했다. 그 박헌영의 편린 역시 길상사에 남아 있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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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공개허용중 일부 참조 - https://kibaek.tistory.com/m/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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