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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차림으로 호텔을 나섰다.
술탄마호멧 광장은 아직 어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새벽에 집을 나서 트램을 타고 어디론가 가려는 사람들이 간간히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눈에 확 띄는것은 여전히 밤새 공원을 지키고 있는 중무장한 채로 순찰을 계속하고 있는 경찰들이었다.
트램이 가는 철길을 따라가면 갈라타 다리가 나온다는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골목을 택했다.
손에 지도를 펼쳐들고 목적지를 갈라타다리로 잡고 직접 찾아나선 것이다. 이렇게 유명관광지나 도시의 특정지역을 지명하고 직접 걸어가면서 주변을 둘러보면서 느껴보게되면....... 그것이 그 나라를 그 지역을 가장 빠르게 확인하고 깨닫게 되는 방법이라 나는 생각하기에 거의 주로 이렇게 하고 다닌다. 이렇게 한 곳을 직접 경험하게 되면, 여타의 다른 지역들은 저절로 모든것이 파악되어진다.
어느 도시의 어느 골목이든 나는 골목길을 참으로 좋아한다. 아니 세상의 모든 골목길을 나는 진정으로 사랑한다.
나를 앞선 사람들 누군가가 이 길을 걸어갔다........
그사람들 하나 하나의 인생의 향기가 어땠을지가 사뭇 궁금하다. 그들이 지나가던 시대의 살아가던 이야기가 궁금하다.
갈라타다리에서 보면 다리를 건너 제법 가파른 언덕 위로 갈라타 타워가 보인다. 이스탄불 도심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곳으로 너무도 유명한 명소이다. 그런데 나는 그 갈라타타워보다 그 인근의 골목길이 더 보고싶어서 지금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이런게 내 여행방식이다.
갈라타다리를 건너서 만나게 되는 지역을 카라쿄이 지역이라 부른다. 이 지역은 이스타불이 태동하는 시기에서 부터 번성해온 대단히 그 역사가 오래된 지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방으로 셀수없이 많은 골목들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카라쿄이에서 바다를 건너다 보면 왼편으로 보스포로스해협이고, 오른편으로 마르마라해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 바로 카드쿄이가 있다. 카라쿄이는 유럽이요 카드쿄이는 아시아다. 실크로드를 거쳐 캬드쿄이에 도착한 비단이며 온갖 귀한 물건들이 거룻배에 실려 바다를 건너 유럽땅인 카라쿄이로 몰려들었다. 13세기 4차 십자군 전쟁 이후 오스만의 통치하에 이곳에 처음으로 제노바상인들이 터전을 잡고 동서양의 교역을 번성시켜나갔다. 엄청난 부를 축적한 제노바상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려고 이곳에 거대한 성벽을 쌓고 감시탑을 세웠는데, 그 위대한 역사의 흔적 일부로 지금 갈라타타워가 남아있는 것이다.
제노바상인들의 성공소문이 퍼져나가자 이어서 베네치아상인들과 유대상인들이 이곳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해안을 따라 웅장한 창고들이 들어섰고 관세업무를 보는 관공서들이 들어섰다. 또한 이 거대한 상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해군창고들도 들어섰다. 항만주위로 늘어섰던 그리스식 선술집들은 아주 유명했다. 그에 발맞추어 각종 금융회사들과 각종 선박사고를 대비한 보험회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카라쿄이는 금융중심가이다.
어떤 골목에 들어서면 골동품 골목이고, 또 어떤곳은 미술품, 어떤 곳은 선술집이나 카페, 심지어는 여전히 성업중인 홍등가골목도 있다.
가급적 여성은 이곳을 다니지 말며, 남자도 가급 혼자 다니지 말며, 해가지고난 밤에는 웬만하지않으면 가지 말라는 지역이다.
그래도 나는 간다.
가파른 언덕의 골목을 오르노라면 이골목 저골목의 쬐끔 드러난 하늘위로 갈라타타워가 보인다.
터키는 창조주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은 나라이다.
지구상에서 이들보다 더 큰 축복을 받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개인적으로 터키를 부러워 한다.
또한 인류의 역사를 통털어 터키만큼 무한한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만약에 터키가 아틀란티스 처럼 하루 아침에 소멸되어 사라진다면....... 인류는 수천년에 걸친 인류의 역사 퍼즐을 다시는 꿰맞추지 못할것이다.
그리스에 가면 수많은 그리스 유적들과 역사를 볼 수 있다. 거기에 약간의 로마 유물과 역사가 더해져있다.
로마에 가면 거의 대부분이 로마시대의 유적과 유물과 역사가 놓여있다.
그러나 터키(이스탄불)는 다르다. 그곳엔 그리스도 있고 로마도 있고 오스만투르크도 있다. 찬란한 비잔티움의 그리스도교 문화와 이슬람의 문화가 공존하며 잘 남아있다. 지구상에 터키를 제외하곤 이런곳이 없다. 한마디로 지구의 보물창고라 하겠다.
기원전 660년경 고대 그리스의 메가라 사람들이 보스포로스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지역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이들이 자신들의 왕인 '비자스'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온이라 불렀다. 이것이 라틴어의 '비잔티움'이요 오늘날 이스탄불의 옛이름인 것이다.
로마시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었던 왕국을 콘스탄티누스대제는 재통일 시켰다. 황제는 이곳을 콘스탄티노플폴리스라는 이름의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 이후 재통일된 로마제국의 수도로 1000년을 넘게 번성하였던 도시가 바로 이스탄불인 것이다.
곧 이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으며, 수차례의 주교단 회의를 통해 칙령을 반포하여 억압받던 피지배계급의 한낯 떠돌이 유랑종교에서 체계화되고 질서를 갖춘 본격적인 기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 지하로 사막으로 숨어서 쫓겨다니며 명맥을 겨우 유지하던 신앙이, 어느날 황제라는 한 사람의 변심에 의해서 느닷없이 대제국 로마의 국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시한부 인생같은 피재배자의 믿음이 하루아침에 가진자 득세한자 억압하는자의 자리로 바뀐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에 대하여 인간들이 가졌던 고귀하고 순수한 신앙)이 적지않게 오도되고 왜곡되고 변질되었다는 것이 내가가진 신앙고백의 일부이다. 자생적으로 스스로 공경하고 찬미하던 신앙에서, 체계화된 질서란 미영하에서 어떤 기득권(?)을 가진자들이 요구하고 이끄는 대로 그것이 참신앙의 본질인양 무조건 따라하는 믿음이 요즈음의 대부분이 아닌가 하고, 또 그런 결과들이 누적되어서 결국엔 세속적인 사건으로 변질되어 횡령이니 재산상속이니 여신도 추행이니 아동 성학대니 등등 뉴스시간에 방송되는것을 아픈 시선으로 보고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본질과 그 당시 신앙인의 마음가짐과 소명의식은 지금의 우리와는 분명 달랐다. 그럼 왜 변했을까?
(종교와 신앙이 시대의 흐름과 적절히 타협하면서 발전해왔다)고 말했다가는 감히 나는 그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자면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인 또한 얼마나 될까?
이번 여행의 관점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생각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꼭 살펴보고 싶었다.
니케아 종교회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한 후인 325년에 터키의 니케아 지역에서 열린 제1차 종교회의 이다.
이 회의의 최고 중요한 점은 (삼위일체설)이 기독교이 본질임을 선언했다. 이전까지는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가 불분명했다. 하나님과 에수가 별개의 존재라 설파하던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쫓겨났다. 신약성경 또한 이 회의에서 승리한 파에 의해서 절반 이상이 삭제되고 현재 남아있는 것들로만 다시 묶여졌다. 그때부터 숱하게 벌어진 종교회의를 통해서 지금 이 순간의 제도화된 기독교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지난날에는 예수의 성화와 십자가 형상도 우상으로 질시하던 시기도 기독교 역사 안에서 분명히 있었다. 그 또한 종교회의를 통해 성화와 예수의 형상만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못을 박았던 것이다. 기독교인 스스로의 역사에도 이런 일이 실제 있었음에도 간혹 단군상을 훼손하거나 타 종교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열성파(?) 비상식적인 신앙인의 태도를 보면 개탄스럽기까지 하다.
따지고 보면 유일신을 부르짖는 기독교와 또 유일신을 부르짖는 이슬람이 같은 신을 받들고 있음에도 마치 (내 신은 진짜고 네 신은 가짜다)라는 모습으로 싸우는 것이 더 웃기는 일이 아니겠는가?
요한 바오로2세는 칙령을 통해서 분명 (기독교 안에서는 유일신 하나님이 계시고....... 세상에는 다른종교와 그들이 믿는 다른 신이 분명히 있다)고 칙령으로 발표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절대로 다른 종교 다른 신앙을 폄하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신들의 교리를 위반하는 것이다. 신의 가르침이 절대 그런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먼저 깨달아야 한다. 어느 종교 어느 신앙이든 더불어 함께 슬기롭개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 신의 가르침인 것이다.
아르메니아는 이 니케아 종교회의보다 훨씬 앞서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지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이다.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한 나라의 유일한 종교로 인정했다는 것은, 로마가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해서 하나하나 기준 원칙을 마련해 나갔듯이, 아르메니아의 경우도 이미 그 이전에 어떤 체계화 작업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 띠문이었다. 어쩌면 그 체계화는 기존의 기독교로 대변되는 로마(바티칸)와 다를 수도 있지않을까?
아르메니아 정교회나 여타의 기독교나 하나님 한 분을 모시고 그 분에 대한 신앙이라는 점에서는 분명 같다.
하지만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겠으나 무엇인가가 많이 다르다. 우리와는 너무도 다르다.
그들 정교회의 신자가 되어보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의 표정도 의식도 무언가가 다르다.
그리하여 (초기 기독교의 모습과 본질)을 논하자면....... 난 그들에게 우선 점수를 주고 싶다. 그들 신앙의 모습이 초기 기독교의 본질에 더 가까울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내용의 성경을 읽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진실을 그들은 알지도 므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진실은 바로 신에 대한 사랑이다.
신에 대한 얼마만의 사랑과, 얼마만의 공경이 있어야만 그들처럼 생활하고 그들처럼 신을 찬양하고 그들처럼 신이 거하실 웅장하고도 장엄한 교회와 기도원을 그렇게 무수히 많게 지을 수가 있을까?
번성하던 이스탄불은 대 재앙을 맞이한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원정대가 이스탄불을 점령해 버린 것이었다.
제1차 원정대에서 부터 십자군원정대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에루살렘 성지의 탈환이었다.
제1차 원정대는 잠시나마 성지를 탈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슬람에게 다시 빼앗겼고, 그 후로 원정대는 계속 이어졌지만 (십자군 원정대)의 본질이 점점 퇴색해 갔다. 그동안의 모든 원정대는 멀리 유럽에서 부터 오느라 쌓인 여독을 이곳 이스탄불에서 풀고, 물자를 다시 보출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는 교두보로서 찾아왔었다. 그런데 이번 제4차 원정대는 침략군으로 정복을 위해서 찾아왔다. (성지탈환 이라는 십자군의 목표)는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유대인을 찾아다니며 처참하게 살륙했고 심지어 기독교인마져도 잔인하게 죽였다.
제4차 십자군 원정대는 이곳 이스탄불에서 장장 57년간 약탈과 살륙을 감행했다.
기독교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에도 없었다.
57년 후, 기독교 하나님의 정의가 사라진 이곳에 이슬람 하나님의 정의가 찾아왔다.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모두 신의 이름하에 성전도 벌이고 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하니....... 당시의 그런 상황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마호멧 2세가 모시는 하나님(알라신)이 이스탄불을 점령하고 십자군이 모시는 기독교 하나님을 물리친 것이다.
이제 오스만 제국은 과거의 로마제국에 버금가는 이슬람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그러나 인류역사에 영원한 왕국은 지상에는 어디에도 없었다.
유럽에서 아시아대륙 까지를 호령하던 오스만제국은 17세기 후반 오스트리아왕국의 빈을 두 차례나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으며, 그 후 약 200여년에 걸쳐 점차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7세기 말에 헝가리를 상실하였고, 18세기에는 흑해 연안을 모두 러시아에게 잃었다. 흑해연안은 코카서스3국을 포함하여 이란의 영토에 걸치는 대단히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이었다. 또한 이 러시아에게의 피배는 한층 쇠락의 내리막길을 빠르게 했다. 하여 이때부터 터키와 러시아는 영원한 앙숙의 사이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각각 건너고 만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 그리스와의 전쟁에 패해 그리스가 독립국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어 벌어진 러시아와의 크림전쟁은 영국. 프랑스.프로이센의 도움으로 패망은 가까스로 면하였으나 제국이 입은 피해는 너무도 컸다. 이런 기울어진 국운을 그냥 넘길 러시아가 아니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은 거듭 거듭 이어졌다. 6차에 걸친 전쟁끝에 불가리아. 루마니아. 몬테니그로. 세르비아까지 내주고 말았다.
오스만제국은 지하자원에 대한 주권과 핵심산업까지도 서구열강에 내어주고 재정파탄의 위기에 직면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오스만제국 절대절명의 위기 순간에, '귀족이나 지휘층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아래로 부터의 혁명만이 살길이다'는 구호하에 비밀조직 (청년투르크당)이 결성되었다. 그 핵심멤버에 바로 케말파샤가 있었다.
케말은 청년투르크당의 정예요원들을 이끌고 오스만왕정의 해체를 주장하며 이스탄불 정령에 나섰다. 혁명은 성공했다.
왕정이 유명무실해지고 (터키 공화국)이 발족하였다. 길고 어두운 과도기 체제가 존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세계 제1차대전이 벌어졌다.
세르비아의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황태자 부부를 저격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그런데 정작 세계정세를 바꾼 사람은 프로이센(독일)이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함께 세르비아를 침공한 것이다. 이것이 1차 세계대전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러시아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군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에 합류했다.
초기에는 독일의 우세가 돋보였으나, 곧 전세를 뒤집는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점점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독일는 각 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대상에는 터키가 있었다.
혁명의 완성단계에서 케말파샤는 세계대전에의 참여를 결사 반대했다. 사이가 나빴던 당시 최고실권자 엔베르는 커말의 말을 무시하고 독일을 지원하는 전쟁에 참여를 결절지어 버렸다. 케말은 여러번의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처칠이 이끄는 연합군 함대에도 끝내 싸워서 물리쳤다.
그러나 독일의 항복과 함께 전쟁은 끝이났다. 연전연승을 이룩하긴 하였으나 케말파샤는 패전국의 장군으로 전락한 것이다.
터키는 전범자의 낙인을 국제사회로 부터 받았다. 엔베르와 다른 수뇌들은 외국으로 달아났다.
전범자의 배상처리 문제로 터키는 전 영토를 잃었다. 겨우 이스탄불과 주변의 아나톨리아 평원만을 차지한,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약소국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북쪽의 아르메니아가 서쪽의 그리스가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케말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그리스와의 전쟁을 치루었다. 그러면서 무능하고 부패한 왕조와 정부를 비난했다. 그러자 정부는 케말을 직위해제 파면시켜 버렸다. 케말은 군복을 벗었다. 비록 군복은 벗었지만 절대다수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그는 지지자들을 이끌고 앙카라로 달아났다. 그곳에서 민병대를 창설하고 군대교육을 시켰다. 아르메니아가 침공해 오자 민병대를 이끌고 가서 전쟁을 했다. 그리스가 처들어 오자 이번엔 민병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터키를 저들로부터 지켜냈다.
그는 이제 명실상부한 터키 제1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터키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케말 아타튀르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대대적인 개혁이 뒤따랐다. 국교를 이슬람으로 했으나 회교최고지도자가 여타의 나라에서 갖는 신정독점권에 제동을 걸어 칼리프제도를 페지해 버렸다. (이 부분은 많은 설명이 뒤따라야 하는 부분이어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 그래서 터키의 이슬람종교와 이슬람식 정치는 주변의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는 매우 다르다.
분명 터키는 전범국이다. 전쟁을 일으킨 바가 있는 범죄국가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 흉악한 죄목이 더해진다. '학살자'가 된 것이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그것이다.
아르메니아의 영토는 대단히 넓었다.
터키 남동부에 신의 축복을 받은 열강의 강대국들이 모두 탐을 내던 도시 반이 있다. 이 도시에 인접한 아주 커다란 호수 이름이 반호수 이다. 지금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 1시간 가량 떨어진 곳에 세반 호수가 있다. 여기에서 (세)는 '검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세반 호수는 검은 반호수 라는 뜻이다. 아르메니아는 남쪽으로 반 호수가 있고. 북족으로 세반 호수가 있는 아주 넓고 큰 나라였다. 여기 도시 반까지를 포함해 지금 영토의 4배정도 되는 크기였다. 그런 영토를 터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가 차지한 것이다. 흑해와 코카서스3국이 모두 러시아의 영토였다. 러시아가 유럽전선에서 독일과 전쟁을 치루던 중에 아르메니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터키를 침공했다. 터키는 즉각 반격했고 대승리를 쟁취했다. 독일과의 협정을 체결한 터키로서는 러시아와의 일전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터키는 아르메니아를 치고 올라갔다.
우리나라의 백두산처럼 아르메니아인들은 민족의 영산으로 아라라트산을 꼽는다. 노아의 방주 전설이 있는 이곳은 아르메니아의 시작이자 전부였다. 그러나 이 아라라트산의 북쪽 100km 지점까지를 터키가 차지해 버렸다.
터키는 이 풍요의 땅을 그냥 지배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들은 철저한 기독교인들이었다. 기독교인들의 독립궐기가 계속해서 뒤따랐다. 여기에 멀리 러시아의 지원설이 뒤따랐다. 보이지않는 미래의 사태가 터키로서는 두려울 수 밖에 없었다.
터키로서는 민족대이동을 생각해 냈다. 꺼지지 않는 불씨를 마냥 끌어안고 살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땅의 아르메니아인들을 모두 추방시켜버리고 터키인들을 이주시켜 정착시키면 되는 문제였다. 터키는 이주를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조상대대로 그 땅에 정착해 살아온 아르메니아인들의 저항이 거세어졌다. 터키는 강제 이주정책을 실시했다.
무력이 동원되었고 충돌이 생겨났고...... 마침내는 총성과 함게 군인들의 발포가 이루어졌다.
터키는 반란이라 규정짓고 250명의 주동자를 색출 검거하여 앙카라로 끌고간 후 모두 사형을 시켜 버렸다. 저항도 그만큼 거세어 졌다.
사후, 터키의 공식입장은 다음과 같다.
'아르메니아인의 이주 과정에서 소소한 불상사들이 발생하였으며 사상자는 15만명 정도이다'라고 정부가 발표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발표와 세계 언론기관의 취재 결과는 너무도 달랐다.
'최소 80만명에서 150만명 정도의 군중들이 학살되었고 실종되었다.' 라고 대서특필 했다.
이 터키의 학살을 피하여 불법으로 이란의 국경을 넘은 사람의 수가 1백만에 가가운 유랑민을 발생시켰다. 현대판 디아스포라인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고향 아르메니아로 돌아오지 못하였으며, 이란 국경에 정착해 살면서 또 많은 문제들을 발생시키게 되었다.
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하여 터키는 지금도 부정을 하고 있다.
케말 파샤가 이 학살에 개입하였다는 이야기도 간간히 나오곤 했다. 그러면 터키는 펄쩍펄쩍 뛰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오늘 터키에 있어서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인 셈이다.
세계 각지의 혹자들은 미렇게 터키인들의 가슴을 후벼팠다.
'히틀러가 유태인 학살을 게획하게 된것은 바로 이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길 위에서 사람을 총을 쏘아 죽여 놓고 그대로 방치한 것은 차라리 개스실만도 못한 처사라고.'
그러나 터키인들은 국제사회를 향해 오늘도 침묵으로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티비에서 자주보던 일본인의 모습이랑 너무도 닮아있다.
터키는 EU(유럽연합)의 발족과 동시에 너무도 간절하게 EU회원국 가입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순간까지도 터키는 유럽연합에 가입하지 못한 비회원국이다. 두 세차례 빠꾸당한 나라가 없는 처지이고 보면 터키는 아주 특별한 경우이고 찍혀도 단단히 찍힌 모습이다. 터키의 가입을 결사 반대하는 나라들은 대부분 서유럽의 강대국들이다. 그 중 독일의 강력한 반대가 가장 치명적이다.
'이유는 터키의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인정하고 국가차원의 진심어린 사과를 하라'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인류애에 대한 일말의 양심도 갖추지 못한 나라와는 한 테이블에 앉아서 밥 조차도 함께 먹을 수 없다'는 뜻이다.
터키는 주변국에 배하면 나름 잘사는 나라이다. 그러나 서유럽의 국가들에 비하면 빈곤을 조금 벗어난 상태라고 하겠다. 하다보니 유럽연합과의 관계개선이 절대로 필요한 나라이다. 유럽연합국 안에서 관세철페의 혜택만으로도 지금보다는 훨씬 유리한 수출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또한 서유럽의 자본이 절실하다. 자원은 있으나 자본이 절대 부족한 나라가 터키이다. 이런 필요가 유럽연합 가입을 열망하게 만들었고, 과거의 역사가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국가 차원의 인정과 진심어린 사과) 라는게 보기에 따라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어려울 수도, 또는 아주 쉬운 일일 수도 있겠다.
(사과를 하고 유럽연합에 가입한다고 치자.)
국가적 사과 뒤에는 당연히 배상이 뒤따른다.
사망자가 1백만명이 넘으니 배상 금액도 가히 상상이 안가고, 다음으로는 영토를 돌려줘야 하는데........ 남동부의 반은 못주더라도, 아르메니아인들이 염원하는 아라라트산 정도는 넘겨눠야만 하겠는데....... 지금 당장 아라라트산이 엄청난 관광수입의 보물단지가 되어있고, 극단의 터키 민족주의자들이 현재의 영토 그 이상을 신성한 터키의 영토라 단언하는 가운데....... 어느 정부 어느 정권이 목숨을 내 놓고 대 타협에 나설수가 있겠는가..........
이런 국제사회의 고립속에 터키에게 한줄기 서광이 비친것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전쟁범죄자에서 민족할살자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터키의 지도자들은 UN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젊은 청춘들을 보내서 피를 흘렸다.
태생부터 용맹했던 투르크의 용사들은 한국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린 우리의 우방국이 되었다.
한국에겐 영원한 형제의 나라가 된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도 그 감사함은 잊을 수없다. 여행내내 그런 만남과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라나..... 국제사회에서 터키는 아직도........ 지금도 그렇게 우호적인 나라가 아니다.
차이야 있겠지만...... 일본을 보는 시각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때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꿈꾸는 일본에게 서방의 신문사들이 일침을 놓은적이 있었다. '일본이 절대적 경제대국인것은 맞다. 그러나 일본은 절대로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선진국이란 돈만으로 될 수 있는 그런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내가 일본인이었다면 한동안 부끄러워 고개를 들고 나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터키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는 냉엄한 것이고 무서운 것이며....... 인류애에 헌신할 각오와 철저한 자기반성이 없다면 우리는 그를 친구로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터키가 스스로 택하고 걸어가야 할 길이다.
지금의 집권세력인 민족주의자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면........
자라는 세대가 역사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차차 준비해서 풀어나갈 문제인 것이다. 시간이 걸려 돌아갈 수는 있어도 가다 말거나 아니갈 수는 없는 길이 미래이니까 말이다.
갈라타브릿지를 반대편으로 해서 다시 건넌다.
오락가락하는 빗방울 때문인지 낚시하는 사람은 여럿인데 잡아올린 물고기는 그렇게 많지를 않다.
유명한 고등어케밥을 맛보았다.
흔들리는 배위에서 고등어를 굽는 분의 모습에서 장인의 포스가 풍겨온다.
터키에는 이슬람문화권이다 보니 고기를 식자재로 취급하는 식당에서도 술을 취급하지 않는 곳이 많다. 케밥이 생각보다 푸짐해서 캔맥주 하나만 보태면 한끼 식사가 제대로 해결될터인데 아깝게 맥주가 없다. 그냥 생수랑 먹어보는데........ 그래도 참 맛있다.
사르케지 지역을 돌아나서려니까 이래저래 감회가 남다르다.
바다를 앞마당 삼아 위치한 사르케지역은 지난날 오리엔탈 익스프레스가 출발하던 곳이다. 초창기의 007영화와 수없이 많은 영화에서 젊은이들의 로망을 꿈꾸게 했던 오리엔탈 특급열차.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남아있는 역사 건물도 대단위 수리가 진행되고 있고 엄청 큰 현수막들이 건물을 뒤덮고 있어서 촬영은 생략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트램이 지나가는 철길을 그대로 따라서 걸었다.
이 나라는 어디를 보나 유적이요 유물이다. 아무데고 땅을 파재끼면 유물이나 유적이 안나오는게 오히려 이상할것 같다.
고풍스런 유럽식 건축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골목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열차(트램)가 곡예하듯이 오고 간다. 그 사이로 사람들이 건너고...... 나 처럼 이렇게 트램의 뒤를 쫓아서 마냥 걷기도 한다.
정말 이색적인 경험이다.
모든것이 다 에쁘다.
여기 이하의 이야기나 기타 등등은 일단 여기쯤에서 생략하기로 해야겠다.
왜냐하면 조지아 아르메니아 여행을 마치면 하루정도는 다시 이고 이스탄불에 와서 쉬면서 여기 이길을 다시 걸어볼 생각이기 때문이다.
호텔로 돌아가 씻고 좀 쉬다가 늦은 아침을 먹고 체크아웃을 해야한다.
훗날 언제고 다시 또 찾을 이스탄불이기에 그냥 메트로와 지하철을 타고 좀 더 돌아볼 생각이다. 대형버스터미널인 오토가르를 방문해 터키의 버스교통편을 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보드룸이나 셀축. 예베소. 안틸랴 등등의 노선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리곤 여유있게 공항으로 가서 밤 배행기로 트라브존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다시금 기운을 차리고 저만치 골목을 돌아 올라오는 파란색 트램을 바라다 보았다.
현대 엘란트라 그림이 그려져 있다.
터키에선 지금도 엘란트라가 판매중인가?
못보았는데........
이스탄불은 참으로 에쁜 골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골목 저 너머로 아야 소피아가 눈에 들어온다.
--------- 다음으로 이어서.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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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차로 올려 주신글도
천천히 정독하며 잘읽었습니다
여행을 하며
관광지를 중심으로 크게 움직이는것도 나쁘진 않지만
시간에 자유로울수 있다면
이골목 저골목 직접 돌아다니며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며
즐기는것도 참"좋겠다...하는 생각
해보네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공격허면서
1차세계 대전이발발 했단것과 함께
터키의아르메니아 대학살 그런일이 있었었군요...
많은 부분 역사 공부를...
좋은글 감사 합니다
고등어 케밥은 무슨 맛일까??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