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언
근래 들어 불현듯 그것도 자주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사랑했던 여자도 동문수학한 친구도 아니고 더군다나 저명인사도 아니다. 단지 그의 올곧은 삶과 교육철학이 남달랐고 나보다 교육활동을 헌신적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와 나는 대략 40년 전 쯤 전라남도 무안종합고등학교에서 함께 근무했었다. 그가 나를 좋아했었는지? 또 나를 기억이나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립고 어떻게 나이 들어가고 있는지 궁금한 때가 더러 있다. 나도 지난 세월을 자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나이가 들었는가... 싶다.
당시에 나는 광주에서 무안까지 버스로 통근하는 처지였고 그는 객지에서 신접살림을 하는 중이라서 특별히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와는 가르치는 교과도 달랐고 삶의 스타일도 많이달랐다. 나는 어울리기를 좋아해서 퇴근하면 선생님들과 곧잘 酒店으로 갔으나 그는 객지여서인지 아니면 돈이 없어서인지 우리 축에 끼지를 아니했다.
그러던 어느날에는 酒구미에 따라왔었다. '어인 일인가?'하고 궁금해할 때 그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들 오늘은 제가 한턱 낼게요, 제 집사람이 곗돈을 탔데요"하면서 주인더러 '낙지랑 뭐 맛있는 거 많이 주세유'했다. 우리는 '사모님의 돈을 쓰면 되느냐?'고 만류했지만 '제가 번 돈으로 한 건 디유, 뭐!'하면서 장을 썼다.
생각해보면 '나하고는 동갑쟁이였지만' 매사에 어른스러웠던 것 같다. 그 때는 그의 허스런 옷차림이나 술자리에 잘 어울리지 아니하고 도시락을 싸와서 혼자 먹는 모습을 보면 꽁생원처럼 느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에게 잊지못할 그리움을 느끼는 것은 지금은 없어진 숙직근무를 함께 하면서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아직껏 고스란이 남아서이다.
그는 충청남도 논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객지인 전라남도 무안까지 와서 근무를 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 측량인가 토목을 전공하고 대학졸업 후 국가기술직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고속도로 건설현장 감독관으로 파견근무했었단다. 그런데 그가 첫 직장을 그만 둔 것은 어인 일인지 3개월이 멀다하고 감독구간이 바뀌어서 발령을 내더란다.
그래서 그는 '교직으로 가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으려나...'생각하고 대학시절 따두었던 교사자격증을 묵혀진 책갈피에서 간신히 찾았단다. 마침 그 무렵 전남교육청에서 기술교사 채용시험에 응시해서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었단다. 그렇게 해서 두번째 직업으로 교사가 되었고 두번째 직장으로 무안종고에 발령을 받아 근무를 하게 되었단다.
당시 무안종고는 기술과, 원예과, 상과, 보통과의 4개의 코스로 편성되어 있었고 그는 기술교과를 담당하고 나는 정치경제를 가르쳤다. 그는 2학년부장으로 보임을 받아 학년의 일을 추진해나갔는데 행정직경력이 있어서인지 젊은 나이에 사무처리를 능숙했다. 마침 동갑쟁이인데다가 숙직을 함께 하다보니 그의 젊은 날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외모상 키가 크고 눈이 맑은 사나이였다. 몸이 가늘어서 완력은 없어보였으나 학생들을 강단지게 지도했다. 그는 측량기사답게 매사에 치밀했으며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대학시절 어느 여름방학 때 그의 고향마을 입구에서 타지에서 놀러온 껄렁패들에게 따졌다가 되레 폭행을 당하여 갈비뼈가 부러지고 늑막이 손상되는 피해를 입었단다.
못된 놈들은 도망치고 결국자비로 치료를 해야했는데 몇 차레 병원을 다녔으나 잘 낫지 않았고 늑막염으로 악화되었더란다. 돈이 없어서 계속 병원치료를 받을 수 없어서 혼자서 셀프치료를 했었단다. 페니실린주사를 혼자서 엉덩이에 맞고나면 그 병을 문지방에 올려두었는데 나중에는 방 네귀퉁이를 빙두르게 되었단다.
그 뿐이 아니고 '지네를 고와서 먹으면 좋다'는 민간요법을 전해듣고는 그렇게 했었단다. 지네를 닥치는대로 잡아서 양파망에 넣어서 기둥에 걸어두고 수시로 고와서 먹었단다. 그런데 어느날 잠을 자는데 온몸이 스물거려서 불을 켜서 보니 산채로 양파망에 가두어둔 지네들이 빠져나와서 자기 몸은 물론이고 온방을 기어다니더란다.
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 자존심을 지키는데 특별한 방도가 있었는데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되면 상대방에게 '선의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학년부장으로서 수학여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안의 형식을 두고 교장선생님과 다툼이 있었는데 그도 성질이 있어서 태도가 불손했고 권위주의 교장선생님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었다.
그는 자기가 받은 모멸감을 되갚아주려고 절치부심했는데 그가 믿는 것은 자신의 실력과 의지 밖에 없었던 같다. 그래서 작업에 들어간 것이 자기가 담당한 농토과 학생들에게 측량기능사자격을 따게해서 학생들의 취업에 대비시키는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수업박탈'이라는 모멸감을 준 교장선생님께 자신의 존재를 실력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학생들을 지도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불철주야 담금질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밤9시까지 반복ㆍ반복학습을 시키는데 매수업마다 평가를 하고 추수지도를 반복했다. 도시락을 2개 싸오게 하고 저녁에는 별식으로 라면도 끓여 함께 먹었다. 실기시시험을 대비해서는 날이 궂은날을 대비해서 대나무와 비닐로 대형 막사를 짓고 그 안에서 측량연습을 시켰다.
그렇게 해서 자기반 기술과 학생들 전원을 시험에 응시케 했었고 단 한 명만 탈락히고 모두 합격했었다. 그래서 당시 중앙지 신문에서도 대서특필되었던 쾌거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골의 종합고등학교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전남도교육청에서 현장교육 최우수학교로 표창을 받았었다. 지역사회로부터 칭송이 드높았다.
모두다 좋아했는데 그 중에 제일로 spotlight를 받은 사람은 교장선생님이셨다. 그는 이제까지 J선생에 대해 추상같던 냉정함은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전교직원에게도 온후한 리더쉽을 드러냈다. 특히 그는 쇼맨쉽이 많아서 황금열쇠를 만들어서 전체학생조회석상에서 J에게 상장과 함께 시상했다. 모두가 박수치며 환호했다.
그런데 J선생은 부담스러워하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그 부담을 떨쳐버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또 전직을 생각하고는 자기 고향인 충남교육청행정직에 응시해서 이듬해에 그곳으로 전직해가고 나는 만기가 되어 광주 인근 고교로 전근해서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나중에 전해듣기로는 그가 한번인가 찾아와서 옛정을 나누고 갔다고 했다.
한번이라도 사람들 대어 찾고 싶지만 요새는 개인정보보호가 엄정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막연하게 그가 그리워지는 것은 그가 옳게 살았던 것 같았고 여러면에서 나의 先親의 삶을 많이 닮아서인 것 같다. 어디에 살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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