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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신명기 11장 - 15장
신명 11,1-7 모세가 주님의 위대함을 가르치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과 규정과 법규와 계명들을 늘 지켜야 한다”(1). 주님의 규정, 계명, 법규를 지키는 삶의 바탕에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아 한다. 그리기에 주님을 사랑하라는 권유가 먼저 나온다. 하느님의 명령, 규정, 법규와 계명이란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계명을”(8) 지키라는 것이다.
모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 탈출 때 광야에서의 그분의 위대함과 그분의 강함 손과 뻗은 팔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을 먹이고(탈출 16,11-20), 반석에서 물을 내며(탈출 17,1-7 ; 민수 20,1-13), 의복과 신발을 공급해 주신 것(8,4)등과 같은 일련의 보호 조처를 뜻한다. 한편, 모세가 이처럼 이집트 탈출와 광야 여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났던 하느님의 크고 놀라우신 역사를 거듭 회고하며 상기시키고 있는 이유는 그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느님의 크신 은혜와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발적인 순종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대한 참된 감사와 순종은 이처럼 과거에 받은 하느님의 크신 은혜를 생생히 기억하는 데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6그리고 르우벤의 손자이며 엘리압의 아들인 다탄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땅이 입을 벌려,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들과 그들의 집안과 천막과 그들을 따르던 모든 사람을 삼켜 버리게 하신 일을 기억해야 한다”(6). 다탄과 이비람이 한 일은 민수 16,1-35에 기록된 '코라 일당의 반역 사건'을 가리킨다. 즉 코라(Korah)를 중심한 다탄, 아비람, 온이 250인의 족장과 결탁하여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다, 하느님의 징계를 받아 그들의 전가족과 재산이 땅 속에 삼킨 무서운 심판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의 정확한 발생 시기와 장소에 대하여선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카데스 바르네아 정탐꾼 사건(민수 13,1-14,35)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분명히 보여준 사건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그리고 이 사건은 카데스 바르네아 사건 이후 하느님의 징계로 방랑하게 된 광야 38년 세월 동안 숱하게 일어났을 거역과 불순종의 사건 중 유일하게 전해진 사건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여기서 모세의 주된 목적이 과거 사실을 통해 백성들에게 불순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준엄성을 깨우쳐 주려는 데 있지, 결코 사건의 주동자가 누구였는지를 정확히 회고하는 데 있지 않음을 이해한다면, 코라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은 별로 큰 문제가 안 될 것이다.
“너희는 주님께서 하신 이 모든 위대한 업적을 두 눈으로 보았다”(7). 주님의 업적을 직접 확인한 백성은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게 된다. 신명기는 일상의 작은 체험일지라도 ‘위대한 업적’을 잊지 말라고 권유한다.
신명 11,8-25 주님께서 좋은 땅을 약속하신다
이 단락은 하느님의 율법을 준수하고 그분을 사랑하면, 그 결과로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넓고 좋은 땅을 주실 것임을 역설한다. 이런 주장을 ‘율법 준수의 대가는 물질적 보상’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명기는 율법준수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역설하고 있다.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예수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하였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또한 너희는 주님께서 너희 조상들과 그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9).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가나안 땅의 기름짐과 풍요로움을 나타낸 수사학적 표현으로 가나안 땅을 지칭할 때 종종 사용된 별칭이다. 하지만 이는 전혀 수사학적인 표현만은 아니다. 그 까닭은 여기서 '젖'은 소나 양과 같은 가축에게서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우유나 버터를 가리키며, '꿀'은 가나안의 토산품이 될 정도로 야산에서 많이 채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는 가나안 땅의 풍부한 자연조건만을 가리킨다고 볼 수는 또한 없다. 그 까닭은 일부 비옥한 지대를 제외하고는 가나안 땅의 전역이 물이 넉넉하지 못하고 기온차가 심하며 곳곳에 불모지가 산재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땅'이라는 약속적 의미(창세 17,8)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참으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면 그 어디든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축복의 땅으로 변하기 마련이다(창세 28,15; 아모 9,13-15). 이런 점에서 가나안은 훗날 신자들이 죽음을 통과하여 영원한 축복을 누릴 아름답고 풍요로운 '하늘 가나안'의 예표가 되는데, 실로 그곳은 하느님이 신자들과 함께 하시므로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 아픔 따위가 있지 않게 될 낙원이다(묵시 21,1-4).
그곳에서 너희가 ‘오래 살 것이다’라는 말은 즉 이스라엘 후손들이 대대 손손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계승받게 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구원사적으로 이는 영적 이스라엘 자손이 영원토록 하늘 가나안을 영적 유산으로 차지하게 될 것을 예표한다.
“그러나 너희가 차지하러 건너가는 땅은 언덕과 골짜기가 많은 땅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촉촉이 적셔 주는 곳이다”(11). 이집트에서는 나일 간의 정기적인 홍수에 기대어 물을 대는 힘든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평지인 이집트와는 달리 수 많은 산과 언덕 그리고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는 가나안의 지형(地形)은 자연적인 저수지와 수로(水路)를 형성해 주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는 그곳에 소위 '이른 비'와 '늦은 비'(14절)까지 적절히 내려 주어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와 같은 관개(灌漑)의 수고와 노력 없이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시며, 주 너희 하느님의 눈이 한 해가 시작할 때부터 한 해가 끝날 때까지 늘 살펴 주시는 땅이다”(12). 지금까지 이 단락에 나온 땅에 대한 표현들, “건너가 차지하려는 땅”(8),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한 땅”(9), “젓과 꿀이 흐르는 땅”(9), “이집트 땅과 다른 땅”(10), “언덕과 골짜기가 많은 땅”(11), “비가 촉촉이 적셔주는 곳”(11) 등의 의미하는 신학적 메시지를 총괄적으로 제시한다. 인간적 눈으로 볼 때, 실제 이집트 땅이 더 풍요로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땅은 하느님께서 “돌보아 부시며”, “늘 살펴주시는 땅”이다. 그 땅에서 주님이 앞으로 늘 보살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백성에게 복된 소식이다. “주 너희 하느님의 눈이 한 해가 시작할 때부터 한 해가 끝날 때까지 늘 살펴 주시는 땅”이란 의역(意譯)하면 '한 해의 첫날부터 끝날까지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지켜 주시고 보살펴 주신다'란 의미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님의 눈'이란 가나안 땅과 또한 그 땅위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항상 고정되어 있는 그분의 지극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보살핌 따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기 때문이다(1 열왕 9,3; 시편 34,15).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너희 정신에 새기고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18).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언제나 자녀에게 들려주고, 손과 이마에 지니고, 문설주와 대문에도 쓰라고 권고한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 계명과 떨어져서는 살 수 없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18절에서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순서로 나열한다. 우선 나의 내면, 곧 마음과 정신을 새기고, 그 다음에 내 몸에 묶고 붙이고, 그러고 나서 내 집의 자녀에게 가르치고, 집 안팎에서 일러주고(19),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넣고 놓는다(20). 다시 말해 내면과 사적인 영역에서 시작하여 점차 외면적이고 공적으로 확장한다. 이로써 하느님의 계명을 내면으로 깊이 받아들여 외면으로 드러나는 경지에 이르면, 하느님 백성은 큰 복을 오래오래 누릴 것이다(21).
“그러면 주님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땅 위에 있는 하늘처럼 오래오래 살 것이다”(21). “땅 위에 있는 하늘처럼”은 고대 근동 문헌에서 자주 사용되는 비유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곧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면, 하느님 백성은 주님께서 주시는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이스라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그 분의 계명과 규정들을 모두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이스라엘은 좋은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서 번성하며 오래 살 것이고,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을 거슬러 타오를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늘 하느님이 주신 계명을 기억하고,그것들을 자손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신명 11,26-32 축복과 저주
이 단락은 1-11장 전체 설교를 마무리하며, 12장부터 시작되는 신명기 법전을 준비한다.
“26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27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 그러나 28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가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면 저주가 내릴 것이다”(26-28). 여기서 '축복'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경우 임할 '하느님의 은혜'를 가리키며, '저주'는 불순종할 경우 임할 '징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가나안 정복 후 순종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축복을 계속 향유하느냐 아니면 불순종의 삶을 통해 저주를 초래하느냐는 선택의 문제를 백성들의 결단 앞에 둔다는 뜻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한 처사이다(창세 2,16). 즉 하느님은 인간의 순종을 원하시되 그 마음과 의지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시므로 축복과 저주에 대한 선택권을 전적으로 인간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신에게 선택의 문제가 제기될 경우 첫째, 하느님을 기쁘게 하며 둘째, 스스로에게 유익된 선택을 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1사무 15,22).
따라서 하느님 백성은 축복의 길 또는 저주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축복의 길을 택했다면 하느님의 계명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저주를 받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하느님의 계명을 듣지 않음”은 6,4 이하의 셰마를 거스른 것이다. 둘째는 “주님이 명령하신 길에서 벗어남”은 우상을 만든 죄를 의미한다. 셋째, “다른 신을 따라감”은 십계명의 첫째 계명을 어긴 가장 큰 죄를 지은 것이다.
신명 12,1-31 유일한 성소/ 제례 중앙화
이제부터 신명 12-26장에 걸친 방대한 신명기 법전을 5장에 제시된 십계명에 따라 열 대목으로 나누어 해설한다.
첫째 계명(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을 해설하는 세부적 법률은 단 두 개뿐이다. 첫째는 하느님을 모시는 유일한 성소에 대한 것이고(12장),둘째는 우상 숭배 금지에 대한 것이다(13장).
“1이것이 너희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언제나,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차지하라고 주신 땅에서 명심하여 실천해야 할 규정들과 법규들이다. 2너희는,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높은 산 위에서든, 언덕 위에서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든, 자기들의 신들을 섬기던 곳은 모조리 없애 버려야 한다”(1-2).
신명기 법전의 첫자리를 차지하는 규정으로서 신명기 전례 개혁의 핵심을 설명한다. 우선 이스라엘 전역에서 행하던 다른 신들을 향한 전례를 금지하고 이스라엘의 공간적 중심을 새롭게 정의한다. 유일한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다. 이스라엘이 제물을 올릴 곳도,순례를 해야 할 곳도 오직 한 곳 ‘주님께서 선택하신 곳’뿐이다. 이렇게 공간적이고 전례적으로 새로운 중심이 확립됨으로써 야훼 하느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은 더욱 심화하고 안정된다.
이 규정이 설명하는 예루살렘 성전 선학은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신학은 남북이 분단되었을 때, 남유다의 히즈키야와 요시야 임금 시절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두 임금 모두 다른 신들의 제단을 없애고 야훼 신앙의 중심을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히즈커야 임금은 다른 신의 산당들을 모두 없애고 오직 예루살렘의 제단 앞에서만 경배드리라고 하였고(2열왕 18,4-8.22), 요시야 임금은 파스카 축제를 대대적으로 열었고,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였을 뿐 아니라 남유다를 넘어서 북이스라엘에 위치한 베텔 성소와 사마리아 성읍들까지 정화하였다(2열왕 23,4-23). 유배에서 돌아온 백성이 처음으로 한 일도 하느님을 모시는 일이었다. 그들은 성전을 다시 짓기도 전에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 제단을 쌓
고 번제물을 올렸다(에즈 3,1-7). 그리고 모든 역경을 무릅쓰고 성전을 완성하였다(에즈 3,8-6,22). 두 번째 성전을 지을 때 이 신명기 규정은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이 만드신 교회도 이 전승을 잇는다. 예수님은 이 규정이 설명하는 시온 산과 예루살렘의 예배는 이제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심화되고 확장되었다고 가르치셨다(요한 4,19-26). 그러므로 주님 이름으로 두세 명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라는 가르침도(마태 18,19-20), 우리 자신이 성전이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가르침도(1코린 3,16-17) 그 뿌리는 이 규정에 두고 있다.
“1이것이 너희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언제나,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차지하라고 주신 땅에서 명심하여 실천해야 할 규정들과 법규들이다”(1). 신명기 법전의 서문으로서 법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를 설명한다. 첫째,하느님이 주시는 법은 항구적이다. ‘제상에서 사는 동안 언제나” 지켜야 한다. 곧 평생 동안 끊임없이 명심해야 한다. 둘째, ‘세상에서” 지켜야 할 이 법은,하느님께서 “차지하라고 주신 땅에서” 곧 이스라엘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이 법을 지키라고 땅을 주셨기 때문이다. 땅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이 의로워서도 아니고 믿음이 강해서도 아니다(9,4-6). 조상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고 그 대가로 백성에게 참된 삶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땅은 믿음의 보상이 아니라 순종의 전제다.
“높은 산에서든, 언덕 위에서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든”(2)이란 가나안 부족들은 대개 높은 산에 우상을 섬기는 처소를 설치하였다. 그 까닭은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 올라설수록 그들의 경배 대상인 하늘의 우상신에게 더욱 가까워 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울창한 나무 아래에서 우상 섬기기를 즐겨하였는데(1열왕 14,23), 그 까닭은 자연의 웅장함을 통해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의식에 더욱더 엄숙함과 신비감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하여야 할 사실은 거룩한 예배 처소를 마련하거나 예배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경배드리는 자의 '마음가짐'이란 점이다. 그 까닭은 하느님께서는 여느 우상과는 달리 무엇보다도 예배하는 자의 중심을 보살피시는 참 신이시기 때문이다(1사무 16,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하느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오직 '영과 진리'로 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요한 4,21-24).
따라서 신명기 법전에서 제일 먼저 가르치는 내용은 하느님만을 섬기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위한 제단과 기념기둥,목상과 신상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선택 하시는 곳에서만 하느님을 경배해야 한다. 언뜻 들으면 새로운 게
전혀 없는 것 같지만,사실 이것은 신명기 법전에서 가장 특징적인 규정이다. 신명기 이전에는 이스라엘 곳곳에 성소가 있었고,하느님을 위한 경배도 여러 곳에서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내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여 예배하게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너희에게 강복하겠다"(탈출 20,24) 하신 ‘계약의 책’ 규정은 성소가 여러 군데 있었고,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제물을 바치고 순례를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신명기 법전은 오직 하느님이 ‘선택하시는 곳’에서만 종교 예식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물론 하느님이 선택하시는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언급은 없다. 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그곳을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생각하고,유일한 성소를 이야기하는 이 규정이 다름 아닌 제례 중앙화를 명한 것으로 본다. 제례 중앙화는 히즈키야와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었고,그 이후로도 이스라엘 종교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제례 중앙화로 순례 축제와 지방 사제의 지위가 엄청나게 변화했고,그 여파가 종교뿐 아니라 사회 · 경제적 측면에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26너희가 바쳐야 할 거룩한 것과 너희의 서원 제물은, 주님께서 선택하시는 곳으로 들고 가야 한다. 27번제물의 고기와 피는 주 너희 하느님의 제단 위에서 바쳐야 한다. 희생 제물의 피는 주 너희 하느님의 제단에 쏟고, 고기는 너희가 먹어도 된다”(26-27).
신명 13,1-19 우상 숭배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2너희 가운데에서 예언자나 환몽가가 나타나 너희에게 표징이나 기적을 예고하고, 3그가 말한 표징이나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 그들을 섬기자.’ 하고 그가 말하거든, 4너희는 그 예언자나 환몽가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시는 것이다”(2-4).
만일 누군가 하느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을 어기자고 한다면,그런 이는 반드시 처형해야 한다. 그런 말을 하는 이가 예언자나 환몽가이고,그들이 표정이나 기적을 일으킨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이가 행하는 표징이나 기적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기 위해 허락하신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거짓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7너희의 동복형제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 품의 아내나 너희 목숨과도 같은 친구가 은근히 너희를 꾀면서, 너희도 너희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섬기러 가자.'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8그 신들은 땅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너희 주위에 있는 민족들의 신이다”(7-8). “너희 목숨과 같은 친구”를 직역하면 '네 자신의 영혼과 같은 친구'이다. 이는 곧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절친한 친구를 의미한다. 그 친구가 은근히 너희를 꾀한다는 것은 사탄의 간교한 계략이다. 왜냐하면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은밀히 찾아와서 무엇인가를 속삭일 때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사람의 요청을 거부했을 때 올지 모르는 절연(絶緣) 사태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사탄은 종종 우리 주위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가장 효과적인 유혹의 도구로 이용하곤 한다. 그들이 “너희도 너희 조상도 알지 못하던 다른 신을 섬기러 가자”고 한다. 즉 주님 하느님 이외의 모든 이방 우상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계시를 통해 알았고 또한 약속을 맺었던 신은 오직 주님 하느님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는 신도 역시 조상들와 맺은 약속을 따라 당신을 계시해 주시고(탈출 3,15),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내셨을 뿐 아니라 시나이산에서 계명을 수여해 주신 주님 하느님 뿐이었다.
“그 신들은 땅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란 이는 가나안과 근동 지역 뿐 아니라 천상 천하를 통하여온 천지간에 참된 신은 오직 주님 하느님 한분뿐이라는 사실을 명쾌히 서술한 부분이다. 물론 각 민족과 지역에는 그들 나름대로 섬기는 숱한 우상 신들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무능하고 헛된 나무나 돌덩이에 불과할 뿐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과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했고 또한 확신해야 했다. 그리할 때에만 모든 주위의 유혹들을 과감히 물리칠 뿐 아니라 분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이나 친구가 다른 신을 섬기자고 유혹해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이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말고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 만일 성읍 전체가 불량한 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된다면 그 주민들을 죽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가축까지 전멸시켜야 한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성읍을 전멸시키라는 명령이 가혹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성읍 전체가 다른 신을 섬기게 되었다는 것은 그 성읍이 하느님과의 계약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쫓아내신 가나안 민족들과 다름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런 이들을,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위해 전멸하게 하신 일곱 민족과 다름없이 대해야 한다(7,1-3).
“너희는 반드시 그 성읍 주민들을 칼로 쳐 죽이고,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가축까지 칼로 전멸시켜야 한다”(16). 신명기는 고대 근동에 흔하던 “전멸”이라는 전쟁 용어를 빌려서 신앙을 표현한다(20,17). 따라서 전멸이라는 단어는 ‘전쟁 모티브를 사용한 신학’으로 이해해야 한다. 곧 하느님을 따르느냐 그분을 등지느냐 하는 근본적 선택의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가축은 고대 사회의 귀한 재산이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데 재산 따위는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켜,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이다”(19). 13장의 결론으로 우상 숭배의 반대말이 나열된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계명을 지키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율법은 선의와 복된 약속의 말로 끝난다.
신명 14,1-2 거룩한 백성에게 금지된 장례 풍습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너희는 죽은 이를 위하여 제 몸에 상처를 내거나 앞머리를 밀어서는 안 된다”(1).
하느님 백성은 거룩하신 분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거룩한 백성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죽은 이를 위해 제 몸에 상처를 내거나 앞머리를 밀어서는 안 되는데(레위 19,27-28),이런 행위들은 다른 신들을 믿는 가나안 민족들의 장례 풍습이기 때문이다. 즉 이를 금지하는 이유는 죽은 이를 신격화하여 그들에게 예배를 드리는 관습을 없애려는 데에 있다.
신명 14,3-21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너희는 역겨운 것은 무엇이든지 먹어서는 안 된다”(3). 여기에 나열된 동물의 목록은 현대적 지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고대 이스라엘이 속한 고대 근동과의 종교적 문화적 거리를 낄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대인과 현대인이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다. 현대인은 과학적 지식에 의존하지만 고대인은 생물의 이름과 의미에 더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이 목록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짐승을 다루지 않고,일상생활에서 자주 마주치는 특징적인 짐승을 들어 그 종교적 의미를 강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신명기계는 이미 존재하던 동물의 목록을(레위 11,2-23) 계승하여 종교적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고 암기하기 좋게 다듬었을 것이다. 짐승은 우선 서식하는 곳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누었다. 땅에 사는 짐승(3-8절) 물에 사는 짐승(9-10절) 그라고 하늘에 사는 짐승(11-20절)이다. 이것들을 다시 저마다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순으로 다시 분류했다. 그리고 끝으로 저절로 죽은 것에 대해 다룬다(21절). 이런 분류는 결국 먹지 않아야 하는 짐승을 암기하기 좋게 만든 것이다.
이 단락은 무릇 하느님 백성은 부정한 것보다는 정결한 것만을 먹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살과 뼈가 되어 우리 몸을 이루므로,하느님 백성은 늘 일상을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사상이 그 배경을 이룬다. 우리 민족도 부정한 것을 제사에 쓰지 않고,집안이나 나라의 큰어른께 좋고 깨끗한 것만 바치는 마음이 있었다. 하느님 백성은 외부에서 들어올지 모를 부정함과 유혹을 늘 경계하고,언제나 일상을 거룩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14장은 정결함과 부정함을 가려서 부디 부정함에 물들지 말라고 권할 뿐,부정함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부정함은 예방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일단 부정하게 되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파괴된다. 물론 용서와 자비의 하느님은 다시 정결하게 되는 방법도 알려주셨지만,그래도 예방이 최선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편 예수님은 아예 이런 음식 목록을 거부하시고(마르 7,15.18-19),이 계명의 참뜻을 살려 마음의 정결함을 가르치셨다. 그분은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마르 7,19).
3-8절은 네 발 달린 짐승을 두고 첫째,굽이 갈라졌는지,둘째,되새김질하는지에 따라 나눈다. 아마도 고대 근동의 생물 분류학적 지식에 따랐을 것이다. 여기서 부정한 짐승으로 규정한 것 가운데 일부는 이방인들이 자기들 신에게 제물로 바치거나 거룩하다고 섬기던 것들이다. 땅에 사는 짐승만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체적으로 나열했고,물에 사는 것(9-10절)과 새(11-21절)는 먹을 수 없는 것만 구체적으로 나열했다.
구약성경에서 소는 ‘큰 짐승을,‘양과 염소’는 ‘작은 짐승을 대표하는 낱말로서 그래서 소와 양으로 ‘모든 짐승을 가리켰다(신명 22,1). 이 세 짐승은 개와 함께 가장 오래된 가축에 속했다. 이 세 짐승은 거룩한 것으로서 제물로 쓸 수 있었는데(민수 18,17),특히 양은 제물에 자주 쓰였다(탈출 29,38-41; 민수 6,14; 28,3-10). 때때로 양 대신 염소를 바칠 수 있었다(탈출 12,5). 그런데 양은 또한 약한 짐승의 상징이었다(예레 50,17). 그래서 ‘작은 양 한 마리’는 가난함과 초라함을 표현했다(2사무 12,3).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지켜주시는 하느님을 약한 양 떼를 지키는 목자의 이미지로 묘사하곤 하였다.
유목민들은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을 ‘정상적이고 깨끗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짐승은 유목에 적합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이 귀한 중동 지역에서 낙타는 지금도 중요한 짐승이다. 낙타의 쓰임새는 매우 다양하여,일상적 교역뿐 아니라 전쟁 등에도 두루 쓰였다. 또한 길들이기 어려운 성격 때문에,길들인 낙타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낙타는 고대 근동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가축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짐승이기도 했다. 실제로 여기서 열거한 짐승들 가운데 낙타가 가장 키가 크다.
토끼는 구약성경에서 이곳 14장과 레위 11장에만 거론된다. 실제로 토끼는 되새김질하지 않는다. 다만 토끼는 소화가 덜 된 똥(식변)을 먹는 ‘식분증’이라는 독특한 습성이 있다. 이런 특이한 섭생은 비록 되새김질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원리는 되새김질과 비슷하고,마치 되새김질하는 것같이 보인다. 또한 토끼는 이빨이 빨리 자라서 늘 감아먹고 오물거리는 습성이 있는데,이런 습성도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보인다.
“돼지는 굽은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도 안 되고, 그 주검에 몸이 닿아서도 안 된다”(8).
일반적으로 유목민들은 돼지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인도 돼지고기를 이방민족의 역겨운 특징으로 받아들였다(이사 65,4; 66,17). 특히 헬레니즘 시대에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자는 돼지고기를 억지로 먹였다. 그래서 돼지고기는 유다교 박해의 상징이 되었고 또한 돼지고기를 거부하는 것은 유다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 행위였다(1마카 1,47; 2마카 6,18-20). 돼지고기에 대한 이런 종교적 상징체계는 이슬람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중세와 근대 유럽에서 반유다주의자들은 유다인을 오히려 돼지로 묘사하여 탄압하였다. 이렇게 역사를 통해 돼지고기와 악연을 맺은 유다 민족이기에,지금도 경건한 유다인들은 돼지를 모욕감을 일으키는 음식으로 받아들여,면전에서 그 단어를 말하는 것조차 불쾌하게 받아들인다. 한편 교부도 이 구절에서 돼지가 탐욕과 타락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해석하였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이렇게 부정한 짐승은 잡아먹어서도 안 되고,설혹 그 죽은 시체를 우연히 마주쳤다 하더라도 요리해서도 안 된다. 오직 그냥 내다 버려야 한다.
“물에 사는 모든 것 가운데에서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수 있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9). 물에 사는 것은 분류의 기준만 제시했다. 그것은 첫째,지느러미와 둘째,비늘의 존재 유무에 따라 분류한다. 그런데 지상과 하늘의 짐승과 달리,오직 물고기만 구체적인 종류를 열거하지 않고 그저 “물에 사는 모든 것”이라고 뭉뚱그려 서술한다(레위 11,9-12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성경은 물고기의 자세한 종류를 거의 밝히지 않는다. 요나는 그저 ‘큰 물고기’ 배속으로 들어갔다(요나 2,1). 이런 태도는 신약성경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도 그저 ‘물고기’일 뿐,어떤 종류의 생선을 먹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마태 15,34). 또한 예수님의 명령으로 제자들이 그물을 던져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도, 그저 ‘큰 고기’를 잡았다고 할 뿐이다(요한 21,11).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생물에는 문어,오징어,낙지,쭈꾸미 등 두족류,게와 새우 등 갑각류,갯장어,붕장어,뱀장어 등 장어류,각종 조개류가 있다. 이스라엘인은 이상의 모든 것을 먹을 수 없다.
조류와 곤충을 모두 날개 달린 것으로 분류하여 함께 설명한다. 하늘에 사는 것은 전부 먹을 수 있고,여기에는 먹을 수 없는 종류만 따로 나열했다. 구체적인 종류를 제시하는 가운데 다시 하위범주를 설정 하여(“각종" 13.14.18절) 하늘에 사는 것을 가장 자세하게 분류했음을 알 수 있다.
서양 문화의 뿌리인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독수리는 하늘의 임금을 상징하는 매우 긍정적인 동물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에는 양면적인 모습이 공존한다. 우선 독수리는 하느님을 상징하고(32,11)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긍정적인 짐승이다(이사 40,31). 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의 적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신명 28,49; 예레 4,13; 48,40; 에제 17장). 이곳에서도 부정한 짐승에 포함되었다.
구약성경에서 까마귀는 폐허에 출몰하는 짐승으로서 부정적이다(이사 34,11). 하지만 바닷가 사람들은 뭍이 어디 있는지 방향을 알려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태초의 홍수 때에 까마귀를 내보내 물이 말랐는지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창세 8,7). 또한 독수리처럼 하느님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1열왕 174.6).
구약성경에서 타조도 불길한 새에 속했다. 타조는 승냥이와 들짐승 같은 부류였고(이사 43,20), 폐허에 출몰하는 불길한 짐승과 함께 거론되었다(이사 퍼21-22; 34,13; 예레 50,3키. 슬픈 탄식을 타조의 울음에 빗대었고(미카 I,8),‘사막의 타조’는 외롭고 쓸쓸한 존재였다(애가 4,3). 어리석고 교만한 자를 타조에 비유했다(욥 39,13-18).
까마귀(14절)와 타조(15절)와는 달리 황새는 구약성경에서 길조로 통했다. 황새는 철새로서 정확한 때와 경로를 아는 짐승으로 묘사되고 주님의 환시에 등장하는 새였다(즈카 5,9). 욥은 어리석고 교만한 자를 타조에,그 반대되는 자를 황새에 비유했다(욥 39,13). 이렇게 길조도 먹지 못하는 새에 분류하였다.
“너희는 저절로 죽은 것은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그것을 너희 성안에 있는 이방인에게 먹으라고 주거나, 외국인에게 팔아야 한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에 삶아서는 안 된다”(21).
21절은 탈출 22,30과 비슷한 구절이다. 하지만 신명기는 이 규정의 핵심이 ‘위생’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종교적 정결(“거룩한 백성")’임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며,이방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함을 설명한다. 탈출 22,30에서는 “들에서 맹수에게 찢긴 짐승의 고기”를 “개에게나 던져” 주라고 하였다. 한편 신명기는 “저절로 죽은 것은 아무것도(전부)" 먹지 말고,‘이방인이나 외국인에게 주거나 팔아야 한다’고 하였다. 탈출기는 우연히 발견한 짐승의 사체가 이미 상당히 파먹히고 부패하여서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정황을 암시한다. 그래서 사람이 아닌 개에게나 주라고 하였다. 하지만 신명기는 이런 정황을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이런 고기를 이방인이나 외국인에게 주거나 팔라는 것으로 보아, 이 고기는 사람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신선한 고기다. 곧 먹을 수 있는 신선한 고기라하더라도,하느님 백성은 이 고기가 어떻게 죽은 것인지,어떻게 보관되었는지 따져보아야 하고,만일 율법대로(15,23) 잡아 유통되지 않는 짐승의 고기라면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종교적 계명을 강조한다.
하지만 하느님 백성이 아닌 사람은 성안에 사는 이방인이든 외국에 사는 외국인이든 상관없다. 또한 그들에게 주든지 돈을 받고 팔든지 상관없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방식대로 고기를 소비하는 것을 상관하지 않는 듯 한 태도다. 고국을 떠나 타향살이하는 이방인과 외국인은 가난하고 차별당하는 사람이다. 신명기는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율법을 강요하지 않고,자신들의 방식대로 먹고살아갈 방법을 은연중에 제시한다. 그러므로 이 규정을 외국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여 그들에게 더러운 먹거리를 제공해도 된다는 식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오히려 하느님 백성은 일상생활에서 늘 거룩함을 지켜 다른 민족과 구별되어야 하는 선택된 백성임을 강조하려는 것이 이 규정의 참뜻이다.
“너희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에 삶아서는 안 된다” 이는 고대 근동 유목민의 정서를 짙게 반영한 규정으로서,후대 유다인들의 삶에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부분 자급자족 경제생활을 한 고대 근동의 유목민에게 가축은 단순한 짐승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축
을 치면서 그 가축과 친밀하게 생활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이런 유목민의 정서를 반영한 규정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양이나 염소의 젖으로 평소에 치즈나 버터 등을 만들어 두어 요리에 사용하였다. 그런데 새끼 염소를 잡아 요리를 할 때 마침 그 어미의 젖으로 만든 치즈 등으로 맛을 내는 것을 무척 거북하고 엽기적인 일로 받아들인 듯하다. 그래서 이런 규정이 생겨났고 오경은 거듭해서 이 규정을 거론한다.
훗날 이 규정은 삶을 경건하게 유지하는 기준인 ‘코셰르’ 규정에 포함되어 유다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고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탈무드에 따라 유다인의 부엌은 아예 유제품 구역과 육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단 한 방울의 우유 성분도 육류 성분과 섞지 않기 위해서 식기 등도 따로 쓴다.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정통파 유다인들은 육류 식사를 한 다음 서너 시간 동안은 우유가 들어간 커피도 사양한다. 또한 유제품 식사를 한 후에도 몇 시간 동안 육류를 섭취하지 않는다.
신명 14,22-29 십일조 규정
“너희는 해마다 밭에서 나는 모든 소출의 십분의 일을 떼어 놓아야 한다”(22). ‘십일조’느 말 그대로 소출의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세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어떤 시기에는 세율이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십일조가 성소에서 식사할 때 모두 소비되지 않고, 일부는 레위인들에게 돌아갔다(민수 18,21-32). 신명기의 새로운 점은, 이제부터는 십일조를 중앙 성소로 가져다가 거기에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십일조 규정’은 사회 정의와 하느님 섬김이라는 주제가 결국 하나임을 총괄적으로 드러낸다. 그러고 나서 사회적 평등을 이루는 규정을 전례규정보다 앞서 다룬다. 이로써 신명기계 신학자들이 사회적 실천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알 수 있다. 사회적 평등을 이루는 규정들은 독립된 듯 보이지만 사실 문학적으로 정교하게 짜여있다. 해마다 십일조를 걷고(14,22), 세 해마다 십일조를 지방의 가난한 이에게 풀고(14,28),일곱 해마다 빚을 탕감해야 한다(15,1). 이렇게 했음에도 빚 때문에 남의 종이 된 동족이 있다면,일곱 해마다 종살이에서 풀어주어야 한다(15,12).
“28너희는 세 해마다 끝에, 그해에 난 소출의 십분의 일을 모두 가져다가 너희 성안에 저장해 두어라. 29그러면 너희 성안에서, 너희와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는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배불리 먹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28-29).
시간을 알리는 표현은 “해마다”(14,22), “세 해마다”(14,28), “7년마다"(15,1.9.12)로 늘었다가 다시 “해마다’(15,20)로 돌아온다. 그럼으로써 사회적 평등을 이루는 노력은 일상에서 늘 이루어져야 하지만 특정한 계기를 통해서도 실현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 규정들은 형제애적 평등을 지향한다(15,7.11.12). 그 근거는 다름 아닌 주님이시다(15,2.15). 주님은 이웃을 위해 나누는 삶을 거듭 명령하신다(15,10.14) 결국 주님이 원하는 이상향이 실현된다면 이스라엘에 가난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15,4). 사회적 계급의 차이를 줄이는 주체는 ‘너희와 온 집안’(14,26; 15,16.20)이다. 곧 하느님 백성 전체다. 한편 사회적 약자는 ‘레위인, 외국인,고아, 과부’,‘가난한 동족’, ‘종이 된 동족’으로 자세히 언급되어,신명기계 신학자의 가난한 사람에 대한 갚은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십일조는 소출의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바치는 규정이자,십분의 일씩 모은 소출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규정이기도 하다. 곧 종교적 계명으로 정의 구현의 역할도 동시에 하였다(27-29절). 그래서 예수님은 십일조의 참뜻을 오해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꾸짖으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42). 십일조 규정의 참뜻은 종교적 열
망이 정의 구현과 떨어질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대 그레고리우스는 ‘주님의 것을 주님께 감사히 바치는’ 십일조의 정신을 성찰하였다(레위 27,30).
십일조에 대한 규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22-23절은 십계명에 대한 일반적 규정이다. 24-27절은 예루살렘에서 거리가 먼 경우를 다루고, 28-29절은 십일조의 사회정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규정이다.
왜 하필 “십분의 일”일까? 일찍이 고대 근동에서는 신전의 유지를 위해서 십일조를 걷는 관습이 널리 퍼져있었다. 이런 관습은 이스라엘의 성조들에게도 일찌감치 영향을 주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 멜키체텍에게 소유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창세 14,18.20). 야곱은 베텔에서 꿈을 꾸고 하느님을 체험한 다음, 주님이 주시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창세 28,22). 이런 고대의 관행은 베텔과 같은 지역 성소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 당시 지역 성소는 이런 십일조로 말미암아 유지되고, 관련자들이 생활할 수 있었다. 이미 12,17-18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십일조를 바쳐야 함을 언급했다. 한편 십일조는 종교적 성격과 함께 정치적 성격도 지녔다. 이스라엘의 임금들은 십일조를 마치 세금처럼 걷어 들인 것 같다(1사무 8,15.17).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자기 과수원과 밭에서 난 작물의 십분의 일을 따로 떼놓아야 한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져가 맏배와 함께 하느님께 바치고,함께 간 이들과 나눠 먹기 위해서다. 만일 집이 너무 멀어 그것을 예루살렘까지 가져오기 힘든 경우에는 돈으로 바꿔 간 후 성전에서 필요한 걸 살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족과 함께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기 위해서다. 다만 잔치를 벌일 때 레위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례 중앙화 이후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잔치에 초대해야 한다. 그리고 3년째 되는 해에는 십일조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지 않는 대신 레위인들과 이방인,고아 과부를 초대해 그것으로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일을 축복하신다.
신명 15,1-6 빚을 탕감해 주는 해에 대한 규정
“1너희는 일곱 해마다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한다. 2탕감에 관한 규정은 이러하다. 이웃에게 빚을 준 모든 사람은 자기가 꾸어 준 것을 탕감해 주어야 한다. 주님의 탕감령이 선포되었으므로, 자기 이웃이나 동족에게 독촉해서는 안 된다”(1-2).
15장은 하느님 백성 안에 구조적인 불평등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법률을 나열한다. 대표적인 것은 일곱 해마다 빚을 탕감해 주라는 것이다(1-6절: 농업적 탕감). 하지만 이렇게 해도 인간 사이에 가난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11절) 하느님 백성은 늘 가난한 사람에게 넉넉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7-11절). 그리고 빚 때문에 남의 종이 된 동족은 일곱째 해에 풀어주어야 한다(12-18절: 사회적 탕감). 하느님은 넉넉하고 부유한 자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여러 번 강조하시고(7-9절),가난한 사람의 권리를 옹호하신다(9.16절).
이런 규정은 인류애와 동포애,곧 인간적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느님께 바탕을 둔 것이다(14절). 주님이 직접 가난한 백성을 탈출시키셨으니(15절) 인간도 이렇게 사회적 격차를 줄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기를 원하신다(5-6절). 그래서 이런 사회적 규정 다음에 종교적 규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19-23절;16장).
해마다 십일조를 걷고, 셋째 해마다 가난한 이에게 주라고(14,28-29) 했으니,3년이 두 번 온 다음에 오는 일곱째 해를 말하는 것이다. 이 해의 초막절 축제에 율법을 읽었다(31,10). 일곱은 상징수로서 하느님은 칠 일 만에 세상을 창조하셨다(창세 1장). 이에 따라 일곱 해마다 오는 안식년에 빚이 탕감되고 노예가 풀려난다(12절). 이는 묵은 것이 완성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을 뜻한다. “선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작은 죄와 한계를 끊어버림으로써,벌과 악이 영원히 순환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대 바실리우스).
“탕감의 해”(셔밋타)는 오직 신명기에만 쓰이는 낱말로서(2.9절;31,10),이 단락 전체를 규정하는 단어다. 이 말의 어근에는 ‘(손으로 잡았던 것을) 풀다,느슨하게 하다’라는 뜻이 들어있다(2.3절). 이미 탈출기에서 하느님은 “일곱째 해에는 땅을 놀리고 묵혀서,너희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이 먹게 하고 거기에서 남는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너희 소와 나귀가 쉬고,너희 여종의 아들과 이방인이 숨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로 밝히셨다(탈출 23,11-12). 이처럼 일곱째 해에 땅을 놀리고 묵히는 것은 가난한 이외- 자연이 쉬고,그 소출을 함께 나누기 위한 것이다. 명령의 배경에는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이 땅의 주인이시라는 신학이 자리 잡고 있다(레위 25,23-24).
신명기는 이런 ‘농업적 규정’을 ‘경제 · 사회적 규정’으로 해석하였다(2-6절). 곧 농업적 경작을 멈추고 그 소출을 함께 나누라는 규정을,사회적 채무를 탕감해 주라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평등과 정의에 민감한 신명기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차지하라고 주시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므로, 너희 가운데에는 가난한 이가 없을 것이다”(4). 빚을 탕감하는 최종 목적이 드러나는 구절이다. 하느님의 목적은 백성 가운데에서 가난한 사람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다. 가난한 이를 없애는 방법은 과도한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는 다시 동등한 백성의 일원이 된다. 동등한 사회적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경제적 기초를 회복해야만 사회의 일원으로 ‘회복’될 수 있다. 이런 이상은 인류사에서 실현된 적이 있다(사도 4,32-35).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의 신앙 선조들이 박해 시대에 교우촌에서 이런 이상 사회를 실현한 적이 있다고 말하였다(2014년 8월 16일 124위 시복식 강론).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인간적 이상향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 백성은,각자가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며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일반 사회와는 다른 질서를 지닌 대조사회(對照社會counter-society)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백성이 전파하는 이런 이상과 정의는 온 민족에 전파되어 하느님 백성의 참된 명예와 권위를 드높일 것이다.
하느님 백성의 진정한 승리와 성취는 하느님이 주시는 복을 얻어 소외된 사람이 없이 모두 골고루 잘 사는 것이다. 이런 이상은 경제적 성공과 신앙의 성공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으로서,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인지 밝혀준다. 이런 이상이 실현된다면 감히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 백성을 넘겨다보지 못할 것이다(28,8).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을 다스린다는 언급은 신명기에서 6절에 유일하다. 이스라엘은 내부의 믿음과 평등을 실현한 다음에야 다른 민족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기에,그들이 다스리는 세상은 인간적 착취와 폭력이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세상은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세상과 같다. 주님은 하느님 백성에게 당신의 값진 보물창고를 열어주시어,당신 말씀의 비로 온 민족을 촉촉이 적셔 자라게 하신다(암브로시우스).
신명 15,7-11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규정
이 단락은 앞의 십일조 규정(14,22-29)과 빚을 탕감하는 해에 대한 규정(1-6절)을 현실적으로 보완한다. “7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 어느 성에서 너희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 가난한 그 동족에게 매정한 마음을 품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8오히려 너희 손을 활짝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한다”(7-8).
이런 보완책 때문에 신명기 법전은 이상적이고 공허한 종교법이 아니라 현실을 상당히 반영한 실질적 규정이 된다. 여기서는 안식년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과연 누가,곧 탕감될 빚을 주겠는가?”(9절) 하는 경우를 다룬다.
탕감의 해에 빚이 연장되거나 유예되는 일은 없다. 7년마다 한 번씩 빚은 완전히 탕감된다. 이런 엄격한 규정은 빚을 준 사람에게 큰 결단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 단락은 돈을 꿔준 사람의 내면적 태도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한다. 돈을 꿔준 사람은 매정하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도 안 되고(7절) 비열한 생각을 하거나 괄시해서도 안 된다(9절). 아까워하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된다(10절). 곧 이 규정은 하느님 백성의 자발적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규정의 바탕에는 본래 평등하게 창조된 인간 존엄성이 벚 때문에 위험에 처해서는 안 된다는 신학과 하느님 백성은 모든 물질적 한계를 넘어서 공동제의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신학이 자리 잡고 있다.
“너희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는 ‘네 형제들 가운데 하나라도 가난한 이가’로 직역할 수 있다. ‘동족’은 이 단락에서만 네 번 등장하는(7절 2회,9절,11절) 열쇳말이다. 본디 이 말은 ‘형제’를 뜻했는데,점차 직접적으로 피를 나누지 않은 이에게도 사용하게 되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동족’이나 ‘형제’는 사회적이거나 종교적인 지위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곧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더불어 사는 사람에게 모두 이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2절). 예수님도 이런 식으로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곧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마태 25,40)이라고 이 구절과 거의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다.
‘매정한 마음을 품지 마라’를 직역하면 ‘네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이다. 이 말은 주님을 거스르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신명기에서 단 두 번 쓰였다. 앞에서는 광야 시절에 이스라엘에게 매정하게 대한 헤스본 임금 시혼의 마음을 표현했다(2,30). 하느님 백성은 그런 매정한 임금들 때문에 숱한 고생을 했다. 이렇게 이 표현은 힘든 광야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하느님 백성은 그런 임금처럼 동족을 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이 표현은 훗날 예수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표현이 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고(마르 8,17) 신약성경은 백성의 완고한 마음을 거듭 언급한다(에페 19,8; 마르 3,5) 사도 바오로도 마찬가지다(로마2,5; 11,7.25).
‘인색하게 굴지 마라’를 직역하면 ‘네 손을 닫지 마라’이다. 그러므로 곧바로 이어지는 ‘네 손을 활짝 펴라’는 명령은 자연스럽다. 말하자면 ‘탕감의 해’는 ‘손을 펴는 해’다. 하느님 백성은 서로 손을 닫아서는 안 된다(1-3.11절).
“너희는 그에게 반드시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줄 때에 아까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이 일 때문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과 너희가 손대는 모든 것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10). ‘나눠주라’는 하느님의 직접 명령으로서 신학적으로 의미가 큰 말씀이다. 앞에서 하느님은 십일조를 통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려는 뜻을 드러내셨다(14,29). 하지만 여기서는 직접적인 명령으로써 당신의 뜻을 더욱 분명히 보여주신다. ‘아까워하는 마음을 갖지 마라’를 직역하면 ‘네 마음을 악하게 만들지 마라’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꿔주지 않는 인색한 마음을 거듭해서 ‘악하다’고 표현했다(9.14절).
신명기 법전은 뜨거운 종교적 이상을 가슴에 품지만(4절) 동시에 시린 현실을 차분하게 인식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한 이가 없어지지 않는 현실 때문에 스스로 죄책감에 빠지거나,하느님이 제시하신 이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런 냉정한 현실 앞에서 우리 신앙의 자세를 가다듬고 악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9.10절) 구체적 실천으로 응답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너희 손을 활짝 펴주라는 것은”(11) ‘반드시 주어야 한다’(10절)에 이은 주님의 두 번째 명령이다. 다른 한 편으로 이 두 명령은 당장 필요한 것을 주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곧 장기적 도움이나 더 근본적인 도움에 초점을 맞추어,지금 당장의 구체적인 도움을 미루거나 평가절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명 15,12-18 빚 때문에 종이 된 이를 놓아주는 규정
“12너희 동족인 히브리 남자나 여자가 너희에게 팔려 와서, 여섯 해 동안 너희의 종으로 일할 경우, 일곱째 해에는 그를 자유로이 놓아주어야 한다. 13너희가 그를 자유로이 놓아줄 때, 그를 빈손으로 놓아주어서는 안 된다. 14너희는 그에게 너희의 양 떼와 타작마당과 술틀에서 넉넉히 내주어야 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것을 그에게도 주어야 하는 것이다”(12-14). 고대 사회에서 종과 노예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런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이 규정은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종의 일반적 처우 개선이 아니라 아예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회복되는 방법을 성문화한 것이다. 탈출 21,1-11을 기본으로 하였지만,본문에는 신명기적 신학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종의 전인적 회복을 목표로 하고 주인의 절제와 덕을 강조한 신명기 법전의 태도는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너희 동족”을 직역하면 ‘너희 형제’다. 이 말은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직접적으로 피를 나누지 않은 이를 가리키기도 하였고,이 구절에서 보듯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칭하기도 했다(2.7절). 이렇게 여성과 남성을 똑같이 다루는 점이 탈출기의 규정(21,1-11)과 가장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여종에 대한 별다른 규정이 없다. 신명기는 자주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취급한다(17,2.5).
십일조에도 가난한 이를 위한 특별한 규정이 있었다(14,28-29). 7년에 한 번씩 모든 빚을 탕감해 주는 것뿐 아니라(1절) 평소에도 늘 넉넉히 꾸어주라고 권고하였다(7-11절). 하지만 이런 세심한 규정이 있는 데도 어쩔 수 없이 종이 되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신명기는 이런 사람의 게으름을 비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농업 생산력에 의존하는 고대 사회에서 늘 일어났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에서 농사와 목축은 자연변화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예측하기 어려웠다. 큰 흉년은 이따금 피할 수 없었고,그때마다 대량으로 기아가 발생했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당대의 불평등을 믿음과 사회적 실천을 통해 해결하려는 노력을 신명기 법전은 멈추지 않는다.
종을 다루는 첫째 조건문부터 종이 ‘주체’로 드러난다. 곧 ‘너희가 종으로 샀을 경우’(탈출 21,2)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고대 근동 법전이 대개 노예 소유주를 주체로 한 점과 대비된다. 원래 동족인 사람이 잠시 종의 신분으로 떨어졌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전제는 원래 하느님의 복을 받은 민족이(창세 15,5) 잠시 이집트 종살이하던 일을 연상시킨다(15절).
“넉넉히 내주어야 한다”를 직역하면 ‘(화환이나 목걸이처럼) 목에 넉넉히 둘러주어라’이다. 종살이를 끝냈다는 것은 종살이 6년을 마치고 7년째 되는 해에 다시 사회에 복귀하여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으로 살아감을 의미한다. 이런 진정한 ‘회복’을 이뤄 독립적으로 미래를 다시 계획해야 하는 동족에게 간신히 목숨을 연명할 최소한의 양식만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기(양 떼)와 곡식(타작 마당)과 술을 마치 화환처럼 목에 넉넉히 둘러주어 축하해야 마땅하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것을 그에게도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나누라고 명령하셨다(10절). 여기서는 그 신학적 이유를 밝힌다. 우리가 다른 이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이 주신 복을 나누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복을 얻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복이 그늘진 곳에도 골고루 미치도록 세심하게 보살필 의무가 있다. 이렇게 주님의 복을 나누는 자는 다시 주님의 복을 얻을 것이다.
하느님 백성의 윤리적 근원은 해방하고 구원하는 주님이시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하느님 백성을 구해주시어 땅을 주고 온전히 회복시켜 주셨다. 이런 큰 사랑을 입은 하느님 백성이 기억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바로 종의 신분이었다는 것(역사),둘째는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것(믿음)이다. 하느님의 구원은 내면적 차원과 역
사적 ·사회적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한편으로 해방과 구원의 하느님께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하고(6,5) 다른 한편으로 이집트 종살이 경험을 기억하여 가난한 이에게 매정하게 굴어서는 안 되고(7절) 그들과 복을 나누어야 한다(14절).
“16그러나 그 종이 너희와 너희 집안을 사랑하고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 너희에게 ‘저는 주인님에게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면, 17너희는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어라. 그러면 그는 평생 너희의 종이 될 것이다. 너희의 여종에게도 똑같이 하여라”(16-17). 16-17절은 12-14절을 보완하는 규정으로서,종이 주인의 집에 스스로 남을 경우를 다룬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를 위하여 세심한 규정을 마련해 주셨지만(12절), 인간적 현실은 언제나 복잡하고 다양하다. 고대 사회에서는 부유하고 인간적인 주인의 집에 남는 것이 스스로 독립해서 사는 것보다 윤택한 삶을 누리는 방법일 수 있었다. 부유하지만 믿음과 인격이 뛰어난 부자를 배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최종 결정권은 주인이 아니라 종에게 있다. 한편 이 구절은 탈출기와 퍽 다르다(특히 탈출 21,5이하). 신명기 법전은 종의 아내와 자식을 전혀 언급하지 않아 마치 그들이 종과 하나임을 전제하는 것 같다. 원래 동족이던 종도 가정을 꾸릴 수 있고,그의 사적 생활이 종의 신분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신명기의 사상이 엿보인다.
종은 주인의 집에 남겠다고 자청한다. 이렇게 주인이 아니라 종이 자기 처지를 결정할 권리의 근거는 그가 원래 하느님 백성으로서 ‘동족’이었다는 사실에(12절) 있다. 곧 하느님이 선택하선 백성의 자격은 근본적으로 변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런 규정의 배경에는,돈을 꾼 사람,자신을 종으로 판 사람 등은 그 부채에만 매여있을 뿐,그 사람의 인격까지 사고팔 수는 없다는 인본적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24,6-13.17). 종의 신분이지만, 남거나 떠날 결정을 하는 이는 그 사람이다. 이 점은 탈출기의 법전도 마찬가지여서,해방선언의 주체는 바로 종이다(탈출 21,5).
종이 주인의 집에 계속 남고자 하면 송곳으로 자신의 귀를 문에 대고 뚫는다. 종의 결정을 상징하는 이 행동이 일어나는 장소가 중요하다. 이 상징적 행위는 그가 사는 집에서 일어날 뿐 중앙성전(12장)도 그가 사는 성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중앙성전의 사제나 지방 성읍을 다스리는 관리의 허락 등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종과 주인이 있는 자리에서 종이 자기 거취를 스스로 결정하면 그만이다.
신명 15,19-23 가축의 맏배에 대한 규정
이미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제물 가운데 짐승의 맏배가 포함되었다(12,6.17). 또한 십일조를 다루는 규정에서 짐승의 맏배는 곡식의 십일조와 같은 의미로 취급되었다(14,23). 여기서는 짐승의 맏배에 대한 세부 규정을 다룬다.
“너희의 소와 양에게서 난 맏배의 수컷은 모두 주 너희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 너희는 소의 맏배를 부리거나 양의 맏배의 털을 깎아서는 안 된다”(19). 가축의 맏배 가운데 주님께 올릴 것은 소와 양으로 제한되고,그것들을 세속적인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19절). 또한 흠이 있는 것을 바쳐서도 안 되고(21) 그 피를 먹어서도 안 된다(23절). 흠이 있어 주님께 바칠 수 없는 짐승은 다른 용도로 사용해도 괜찮다(22절). 이런 규정은 지금은 지켜지지 않는다. 하지만 주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려고 섬세하게 골라 정성스레 준비하는 태도만큼은 영원히 귀감이 될 것이다.
맏배를 맨 처음 바친 사람은 아벨이다(창세 4,4).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이 맏배를 처음 요구한 것은 이집트 탈출 사건 때였다. 하느님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두 치셨다(탈출 11,5). 이 사건이 있고 나서 하느님은 첫아들과 맏배는 모두 당신 것이며 (민수 8,17) 훗날 땅에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되면 모든 짐승의 맏배를 바쳐야 하고,맏아들은 짐승으로 대속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탈출 13,11-16; 민수 18,15). 하지만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레위기와 신명기가 서로 다르다. 레위기는,맏배는 이미 하느님 것이므로 주님께 바칠 수 없다고 한 반면(레위 27,26) 신명기는 이스라엘인이 맏배를 바쳐야 한다고 하였다. 대체로 레위기가 원칙을 강조한 반면 신명기는 하느님 백성의 선택 폭을 넓혀주었다고 볼 수 있다.
주님께 드릴 봉헌물을 다루는 기본 태도는 다음과 같다. 맏배의 털을 미리 깎아 챙겨놓고 그 짐승을 바쳐서는 안 된다. 주님께 봉헌할 짐승을 경제적 목적으로 미리 사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은 순수한 것을 바쳐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종교적 목적보다 인간적 목적을 앞세우면 안 된다. 이런 태도는 신앙에도 적용된다. “주님께 바치기로 한 마음의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다른 교우에게 말함으로써 칭찬을 받으려는 유혹이 늘 있기 마련이며 이는 초심자의 경우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파테리우스).
“그렇지만 그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물처럼 땅에 쏟아야 한다”(23). 고대 근동인들은 피에 악령을 쫓고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피는 생명력을 상징했다. 그래서 남의 피를 흘린 사람은 아기 생명으로 갚아야 했고(창세 9,5), 살인자를 쫓아가 복수하는 사람을 “피의 보복자”’로 불렀다(19,6). 그래서 인간은 피를 직접 먹어서는 안 되고,땅으로 흘려보내야 한다. 그러면 그 피는 대지에 스며들어 풀과 나무를 키우고, 사람과 짐승은 그 곡식과 열매를 먹을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생명력의 순환이 창조질서를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과 계약을 맺을 때, 모세는 “계약의 피”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탈출 24,8). 곧 주님과의 계약은 가장 거룩한 일이요, 온 백성이 치유하고 정화는 생명과 같은 계약이라는 뜻이다. 구약성경에 정통한 예수님도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1코린 11,25)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치유되고 정화되었다고 거듭 고백했다(히브 10,22; 1베드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