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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죽음 제작>의 줄거리: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 갈 것을 예고 하셨고 상황은 그대로 전개 되었습니다. 죽을 지언정 주와 함께 하겠다던 결심과 맹세를 씻은듯이 뒤로하고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제자들의 비겁함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한 폄하는 대단히 부당합니다. 문제는 오히려 죽음을 제작하신 예수님편에 있었습니다.
죽음 제작(製作)
(막14:27-31)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죽음제작>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제작이라고 하는 것, 우리가 다 알지만, 사전을 찾아보니까 ‘재료를 가지고 기능과 내용을 가진 새로운 물건이나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 이렇게 쓰여 있더라고요.
어떤 재료를 가지고 특정하게 원하는 기능이나 내용을 담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제작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제목이 ‘죽음제작’이에요.
어떤 특정한 내용과 기능을 담고 있는 죽음을 제작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언제 대해도 마음이 참 좋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는 열두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마지막 지점을 앞두고 계시는 순간에 3년 동안을 동고동락하고 모든 걸 다 주며 사랑했던 그 열두 제자가, 하나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아버릴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다 흩어지며 예수님을 부인하며 도망갈 것을 예고하셔야 되는 이 예수님의 마음을 대하면, 이런 실패가 어디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능력과 그 희생과 그 지혜를 다 동원해서 하신 삶의 결론이 이런 실패로 끝나야 된다는 것과, 안 그래도 십자가에서 죽어야 된다는 사실도 마음이 감당할 수 없는 중압감인데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당신 입으로 예고하셔야 된다는 것이 사람으로 할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상황 자체가.
그런데 여러분, 이 본문을 우리가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 게 있어요.
예수님께서 예고하실 때 제자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특별히 베드로가 ‘다 버릴지라도 나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대로 돼갑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될 상황을 전혀 모르고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제자들도 그렇게 합니다,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면 제자들의 만용을 질책합니다.
‘자신들의 무력함과 연약함을 모른 채 하나님께 늘 도움을 구해야 되는 겸손한 마음을 가졌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만용을 부리다가 이렇게 넘어졌다, 그리고 신앙도 없고 의리도 없고 비겁한 자들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이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니까 이게 아닌 것 같아요.
이들이 비겁해서 도망간 게 아닙니다.
이들이 연약하고 무력해서 도망간 게 아닙니다.
도망간 이유가 따로 있더라는 얘기에요.
예수님께서 죽음을 제작하셨기 때문에 도망간 거라는 얘깁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분, 산악인 중에 박영석 대장님의 이야기를 아시죠?
아, 정말 안타깝지요.
작년 10월에 히말라야의 열네 개의 봉우리 중 하나인 8000미터가 넘는 안나푸르나에서 등반하시다가 실종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박영석 대장님이 대단하신 분이에요.
‘산악 그랜드슬램’이 있습니다.
히말라야에 있는 14좌를 완등하고 7대륙에 있는 최고봉을 등반하고 3극점, 에베레스트와 북극점과 남극점 원정을 성공하게 되면 그랜드슬램인데, 아직 그런 산악의 그랜드슬램이 없었는데 2005년 5월에 북극점 원정에 성공하면서 박영석 대장이 그랜드슬램을 이루어냅니다.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그리고 등산가들이 일반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그 봉우리를 향해 가는 여정 속에 나타나는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최정상 봉우리에 도달했을 때의 그 승리, 그 봉우리를 정복한 것이 인생에 있어서 이루어야 될 모든 성취의 상징이기 때문에 등반가들의 완등의 성공이야기는 감동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SBS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요.
거기서 박영석 대장이 한 얘기가 참 기억에 남습니다.
‘사실 실패가 두려운 게 아니다, 실패가 두려워서 도전하지 않는 게 두려운 것이다.’
아, 참 멋있는 말씀 아닙니까?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한번 돌아보게 하는 말이잖아요?
그리고 ‘1퍼센트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진짜 100프로 완벽하게 실패를 해야만 그 실패가 내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퍼센트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실패가 99프로 보장되어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도전해서 실패를 하라는 얘기에요.
완전한 실패에서 완전한 승리를 위한 준비를 배울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백 퍼센트 최선을 다한 실패라면 그것은 정말 즐거운 실패죠, 그건 정말 멋있는 실패입니다, 백 퍼센트 최선을 다한 뒤에 주어지는 실패, 이렇게 백 퍼센트의 실패라야지, 60 내지 70프로 실패라고 하면 3, 40 프로의 숨겨져 있는 실패의 원인을 모른 채 그 다음에 또 도전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백 퍼센트 최선을 다해서 이루어진 실패이기 때문에 이 실패는 완벽하게 배울 수 있는 실패라서 즐거운 실패지요, 멋있는 실패죠.”
훌륭한 분을 우리가 먼저 보냈어요.
자, 여러분, 제자들이 분명히 얘기합니다.
‘죽을지언정 주와 함께 하겠나이다!’
이 말이 이룰 수 없는 말을 한 겁니까?
인류역사에서 수천 번 일어난 모든 전쟁에서 보통사람들도 다 이렇게 했어요.
제자들이 특별히 비겁해서 이걸 못했겠습니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죽음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걸어가신 이 걸음에 문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어떤 문제가 있었느냐?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나 대적자들이 있을 경우에 실패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라는 게 비록 마지막 실패이지마는 언제나 이 실패는 이 실패에 앞서서 있어야 될 것이 있어야 되요.
그게 뭐냐 하면 결사항전입니다.
승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보는 항전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 뒤에 오는 죽음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 거예요, 최선을 다했다면.
제자들이 만약에 예수님께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신 이 걸음이 죽음을 맞이하시는 이 마음의 태도가 결사항전을 한 뒤에 주어진 것이었다면 그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에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서 함께 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너무 제자들을 폄하한 것이에요.
이 제자들만이 특별히 비겁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유대역사 속에서 메시아왕국을 위하여 다윗시대의 전성기를 재현하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전쟁들을 치러왔고, 그것이 아니라도 지파간의 전쟁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있었고, 남북왕국이 갈라진 뒤에도 전쟁이 끊임없이 있었고, 이방민족과의 전쟁이 계속 있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한 마카비 전쟁은 가장 대표적인 전쟁이지요.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제자집단도 그런 류의 싸움 중의 하나를 예수님께서 치러나가시면서 결사항전을 해나가셨다고 한다면 마땅히 이들이 선언하고 맹세한 것처럼, 죽을지언정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리에서 같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사항전이 없어요.
쟁취하기 위해서 내 삶을 보존하기 위해서 내 삶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최선이 없어요.
그냥 곧바로 죽음을 향해 가버리고 죽음을 받아들여버립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립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함께 하겠다는 이 말을 베드로는 실천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귀를 붙여주시면서 칼을 들고 싸우려는 제자들 앞에서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할 것이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제자들이 균형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제자들의 마음 자체가 무너져버려요, 예수님의 태도 때문에.
죽음은 대적자들이 있을 경우에 실패의 종착역입니다.
그러나 그 앞에 삶을 쟁취하고 나를 지키기 위한 결사항전이 있었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또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땅 위에서의 삶을 쟁취하기 위하여 승리를 얻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 전혀 없이 곧바로 죽음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여버리십니다.
죽음을 목표로 나가신다는 얘기에요.
삶과 승리와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서 싸우다가 죽을 수는 있지만 죽음을 목표로 해서 나가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살려고 애를 쓰고 승리하려고 애를 쓰다가 안 돼서 좌절하다가 자살할 수는 있지만, 아예 죽음 자체를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삶의 목표로 삼고, 죽음 자체를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초연했다는 성현들,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그 누구도 죽음을 향해 가지는 않았어요.
소신껏 살았고, 바르게 살기 위해 애썼고, 진리를 발견하며 살기 위해 애쓰다가, 그러다 죽음이 왔을 때 죽음을 처연하게 받아들인 것뿐이지, 죽음을 향해 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의도적으로 죽음을 향해 가버린 거예요.
이 죽음을 향해 가고, 죽음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 예수님의 발걸음에 제자들의 결심은 헛스윙이 돼버리고, 헛스윙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지요?
헛스윙이 크면 클수록, 결심이 크면 클수록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리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 때문에 헛스윙이 나오면서 제자들이 균형 감각을 잃고 도망 가버린 것이지, 비겁해서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아버지가 의도적으로 죽음을 제작하십니다.
제작이 뭐였지요?
재료를 가지고 의도하는 내용이나 기능을 담기 위한 물건을 새로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의도적으로 제작된 죽음입니다.
어떤 기능을 담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환약처럼 만드신 겁니다.
그래서 그 죽음을 마음속으로 먹는 자마다, 마음속의 성배가 되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승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죽어버립니다.
최선을 다해서 쟁취하려는 마음이 죽어버립니다.
실패할지언정 나머지 1퍼센트의 가능성을 보고서라도 도전하는 박영석 대장님의 이러한 멋진 결심이 죽어버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환약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을 먹는 자마다 자식의 문제, 사업의 문제, 건강의 문제, 인생의 모든 문제 앞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을 정복하려는 등반가들의 의지를 상실하게 되고 다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오히려 죽음을 향해 가게 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게 바로 예수 믿는 거예요.
멋진 삶을 위해 살도록 돕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가 아닙니다.
완벽한 삶을 위해 가도록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죽도록 가르칩니다.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죽으라고 가르치고, 죽는 방법으로 주님께서 죽음을 제작하셔서 주님을 먹는 자마다 같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죽음을 제작하셨을까요?
다른 사람의 이 세상 삶에 대한 죽음을 마음에서 이끌어내는, 그런 죽음의 환약을 만들어내신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 사랑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사랑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싶고, 정복하고 싶고, 이루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아무리 찾아도 하나님사랑은 불가능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밖에 없어요.
하나님사랑을 이루고 싶은 사람에게는 주님의 십자가가 복음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잘살아보고 싶은 사람, 사업에 성공하고 싶은 사람, 무병장수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십자가는 복음이 아닙니다.
삶을 위한 삶의 승리를 위한 쟁취를 위한, 그 어떤 최선의 노력도 주님은 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공생애의 목표는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의 공생애의 사명은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을 제작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제작하신 분이 메시아인 이유는 주님의 죽음을 먹는 자마다 같은 세상에 대한 죽음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분이 메시아입니다.
이 죽음이 역설적으로 세상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가 되고, 천국에 계신 하나님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십자가에서 제작된 죽음을 마음으로 먹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끝내겠다는 결심을 해야지 예수를 믿는 게 된다는 겁니다.
기독교 2천 년 역사 동안에 몇 번이나 어느 구간 동안에 기독교가 이렇게 이해되었을까요?
중세? 아니에요, 전혀 없었습니다.
곳곳에 순간순간 일어났던 부흥의 시기들, 어느 정도로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을 목표로 예수 이름을 부르며 살았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 부활해서 갈릴리로 먼저 가 있겠다’
이 말은 들리지도 않았어요.
부활이라는 말, 갈릴리로 가신다는 이런 말은 들리지도 않았어요.
왜 갈릴리로 갑니까?
정복하고 쟁취하려면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싸워서 이겨야지, 그 시골구석에 왜 다시 갑니까?
주님이 거기서 다시 시작하려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녔던 이유가 이 지상 위에서의 삶의 승리와 쟁취를 위해서였어요.
그러다 죽음을 제작하시는 예수님의 행보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다시 시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제자들의 마음에 세상이 없습니다.
세상이 없다는 것은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으로 이루고 싶어 하는 것, 얻고 싶어 하는 것, 아무것도 없는 죽은 자들이 되어버리고, 그들의 마음은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주님께로 올라가버리고 맙니다.
어떻게 보면 껍데기만 남은 그들의 육체를 성전 삼아서 하나님께서 살아가셨던 것이죠.
우리는 자꾸 착각합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그들이 역사하게 된 것을 교회의 부흥에 적용하려고 하고, 내가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성령을 받아야 된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죽는 거예요, 제작된 예수님의 죽음을 먹고 내 마음에서 이 세상에서는 나의 존재가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완전히 죽는 거예요, 그냥.
없어지는 겁니다.
그걸 결단해야 된다는 것이고, 예수 믿는 사람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교회는 이 결단의 과정을 제시해야 됩니다.
‘예수 믿으면 당신이 이제는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기쁠 일도 이루어야 할 일도 아무것도 없이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줘야 됩니다.
주님은 죽음을 목표로 이 세상을 사셨습니다.
죽음을 사명으로 이 세상을 사셨습니다.
그 누구도 그렇게 살아본 사람은 없습니다.
살다 살다 안 돼서 죽음을 택할 수는 있지만, 잘살아 보겠다고 죽음을 각오할 수는 있지만, 죽음 자체를 목표로 사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 세상은 죽음이 과제’라는 것이 기독교가 모든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첫 번째 진리의 단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어야 된다는 걸 각오하겠느냐, 더 이상 세상에서 잃을 것도 얻을 것도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는 그런 사람이 될 각오가 돼 있느냐?’ 이걸 확인해야 된다는 겁니다.
제자들이 도망간 것은 비겁해서가 아닙니다.
죽음을 제작하시는 하나님아버지와 예수님의 의도 앞에서 이들은 허겁지겁 당황해하며 패닉상태에 빠졌던 것뿐이에요.
이게 바로 기독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주님의 몸을 재료 삼아 제작되어진 특별한 죽음, 이 죽음을 환약처럼 우리가 마음으로 먹게 해주시고, 주님이 이 세상의 삶에 대해 죽음을 목표로 한 것처럼 우리도 그 죽음이 내 것이 되게 해주셔서, 우리 마음은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아버지 계신 천국으로 가게 해주시며, 마음이 빠져나간 이 몸을 주님께서 뜻대로 사용하시는 일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