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의 시인들 (4)
광활한 우주 속으로 침잠한
고독한 천재
박정만 시인
시인 박정만(1946 8. 26~1988 10. 2)은 전북 정읍시 산외면 상두리 동곡마을에서 가난한 농가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머리가 좋아 유년시절부터 천재라는 말을 듣고 자랐으며 전주고등학교 출신으로 강인한 이가림 시인의 2년 후배가 된다. 경희대학교 1학년 때인 1968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겨울 속의 봄 이야기」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1972년에는 문화공보부 문예작품 공모에 시와 동화가 당선되었다. 등단 이후 11년 만에 첫 시집 『잠자는 돌』을 펴냈고, 졸업 후에는 여러 출판사에서 편집자 생활을 하면서 시를 썼다. 소설가 이윤기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전설과 진실」을 쓰기도 했고, 2005년에는 그의 사망 17주기를 맞아 『박정만 시전집』이 출간되었다.
소설가 ‘한수산’의 고문 사건을 계기로 작가의 예리한 감수성과 존엄성을 짓밟는 신체적 정신적 테러를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술을 마시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군사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1987년에는 1달에 300여 편에 이르는 시를 지었으며 1988년 올림픽 폐막식 날 ‘종시’를 남기고 사망했다. 1992년 문단에서는 정지용 문학상을 수여했고, 1999년 문우와 지인들이 내장산 저수지 모퉁이에 시비를 세웠다.
세상과 이별하기 1년 전 단 20여일 동안에 신들린 듯 무려 300여 편의 시를 썼다고 한다. 시인의 불행한 삶은 도서출판 고려원 편집장으로 근무하던 1981년 소설가 한수산이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장편소설 <욕망의 거리> 필화사건으로 수사기관에 연행돼 억울한 고문을 당한 뒤 건강이 크게 나빠졌고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에 시달리며 술로 견디다 결국 88올림픽 폐막식 날인 1988년 10월2일 변기통에 앉아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시인은 죽은 뒤 현대문학상(1989)과 정지용문학상(1991)을 받았다. 시인은 죽음을 앞두고 ‘나는 사라져 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라는 종시를 남겼다.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시와 눈물과 고문으로 점철된 삶, 시인 박정만은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박정만 시인은 자신의 시 「종시(終詩)」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재정권의 가혹한 고문 때문에 일생을 고통스럽게 산 시인은 소멸하고 있었다. 우주 속으로! 김소월 이후 가장 한국적인 서정시의 맥을 잇고 있다고 평가되는 박정만은 노래를 좋아하고 눈물을 자주 흘렀다고 한다. 술만 마시면 동료 문인들 앞에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래서 그는 낭만주의자로 불렸고, 술 먹고 시 쓰는 일을 반복했다. 1981년 5월 29일 출판사 고려원으로 정체불명의 사나이들이 나타나 박정만을 끌고 갔다. 그가 간 곳은 빙고호텔, 일명 보안사 서빙고 분실이었다. 그때 중앙일보 간부 4명도 함께 끌려갔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한수산 필화사건’이다. 이 사건은 박정만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당시 한수산은 중앙일보에 소설 ‘욕망의 거리’를 1980년 5월부터 연재하고 있었는데, 군사정권을 비하하는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 불똥은 엉뚱하게도 박정만에게 튄 것이었다. 그는 한수산의 동료 문인으로서 그를 몇 차례 만났을 뿐이었다. 3일 동안 중앙정보부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낸 박정만은 약 2개월 동안 월악산에 칩거했다. 그 후 고문 후유증으로 병마에 시달렸다. 그는 죽기 위해, 고문의 후유증을 잊기 위해, 시를 쓰기 위해 매일 술을 들이켰다. 고통을 고통으로 이겨보려는 행위는 그를 점점 죽음의 문턱에 다가서게 했다. 하루 소주 두 병 이상을 마시며 시를 폭작(暴作)하기도 했는데, 그가 죽기 전 몇 달 동안 남긴 시가 300여 편으로 6권 분량의 시집이라고 한다. 술과 정신적 방황으로 전신이 황폐한 박정만은 결국 간경화로 화장실 변기 위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잠실운동장에서는 88서울올림픽 성화가 꺼져가고 있었다.
저 가을 속으로<박 정 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눈부신 꽃잎만 던져놓고
돌아서는 마음 속 벙어리같이
나는 오늘도
담 너머 먼발치로 꽃을 던지며
가랑잎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내사 짓밟히고 묻히기로
어차피 작정하고 떠나온 사람
외기러기 눈썹줄에 길을 놓아
평생 실낱같은 울음을 이어갈 것을
사랑의 높은 뜻은 비록 몰라도
어둠 속 눈썰미로 길을 짚어서
지나가는 길섶에다 한 방울 청옥 같은
눈물을 놓고 갈 것을
머나먼 서역 만 리
저 눈부신 실크로드의
가을이 가우뚱 기우는 저 어둠 속으로
<슬픈 일만 나에게>,평민사,1988